5살 때 만난 여자 아이가 있습니다. 생일이 저보다 딱 일주일 늦은 그 친구와는 같은 유치원, 같은 초등학교를 다녔고 비슷한 시기에 둘 다 미국으로 유학을 가게되었습니다. 미국에선 멀리 떨어져 살았지만 서로 종종 연락도 했고 방학에 한국으로 같이 나가게되면 항상 어울려 놀았습니다. 나이가 들어 대학교에 가면서 서서히 연락은 뜸해졌지만 서로에게 힘든 일이 있을 때는 늘상 서로를 찾았습니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 저희가 24이던 그 해에 그녀가 저녁 늦게 전화를 걸어왔습니다. 그녀가 사는 곳은 이미 자정을 훌쩍 넘긴 시간이었기에 무슨 일인가 의아해하며 전화를 받으니 그녀가 너무나 슬프게 울고 있었습니다. 꽤 오랜시간 사귄 남자친구와 헤어진 그녀는 그렇게 한 시간이 넘게 울기만 했고 떨어져 있기에 딱히 해줄수 있던 것이 없던 저는 그저 전화기를 붙잡고 조용히 기다려줬습니다. 그렇게 한동안 울던 그녀가 진정하고나서 서로 얘기를 시작했고, 처음 만났던 유치원 얘기부터 20년 가까이 같이 지내온 얘기를 하면서 밤을 꼬박 지새웠습니다. 그렇게 7시간에 가까운 전화 끝에 저는 이제 그 남자친구는 잊고 새로운 남자나 찾으러 나가라고 말했고 그녀가
'그런 남자 또 못 만나면 어쩌지?'
라고 물었습니다.
'너는 걔보다 훨씬 나은 애 만날 수 있다, 만약 30살때까지 못 만나면 나랑 살자, 내가 걔보단 훨씬 낫지 않냐'
라는 저의 대답에 그녀는 즐겁게 웃으며 징그럽다라고 하고 전화를 마무리 지었습니다. 곧 박사 학위를 마무리하고 직업을 얻은 저와 마찬가지로 레지던트를 시작한 그녀는 서로의 일에 치여서 예전보다 더욱 연락이 뜸해졌습니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 28살이 된 저는 결혼까지 생각했던 여자친구와 헤어지게 되면서 그녀와 오랜만에 연락을 했고
'난 이제 연애 안 하려고, 평생 혼자 살래'
라는 저의 말에 그녀는
'나 30살까지 남자 못 만나면 나랑 같이 산다며?'
라고 무심하게 대답했습니다. 딱히 할 말이 없었던 저는 어색하게 웃었고 그 뒤로 오랜만에 이런저런 얘기를 했습니다. 그 전화를 한 다음 날부터 저희는 다시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일상으로 돌아갔고 연락도 다시 뜸해졌습니다.
다시 시간이 흘러 저의 30번째 생일에 그녀에게서 언제나처럼 전화가 걸려왔습니다. 생일 축하한다라는 말과 어떻게 지내냐는 등의 간단한 말만 하고 전화를 끝마친 그녀에게서 잠시 뒤에 문자가 왔습니다.
'너 요새 연애 해?'
연애 안한다, 너는 누구 만나냐 라는 저의 말에 그녀는 요새 너무 바빠서 누굴 만날 시간도 없다 라고 말했습니다. 연락을 끝마치고 나서 한동안 생각하던 저는 일주일 뒤에 그녀가 있는 도시로 가는 비행기표를 구매했습니다. 일주일 뒤, 아무 말 없이 그녀가 사는 곳으로 간 저는 그녀의 집주소를 몰랐기에 전화를 걸어서 '나 공항에 있으니 데리러 와라' 라고 말을 했고 한동안 당황하던 그녀는 미쳤냐며 지금 떠나니 잠시 기다려라 라고 말했습니다. 때마침 공항에 꽃을 파는 곳이 있었기에 저는 꽃을 사들었고 공항에 도착해서 저를 찾은 그녀에게 꽃을 건네주며 결혼하자 라고 했습니다. 그녀는 공항 한가운데서 미친 듯이 웃었고 제가 다른 사람들의 눈치가 보여 민망해질 때 즈음 그녀가 핸드폰을 꺼내들었습니다. 아무런 대답없이 핸드폰을 만지던 그녀가 카톡을 확인해보라고 했고 친구들과 같이 만든 단톡방에 그녀의 한 마디가 적혀 있었습니다.
'나 결혼한다'
그렇게 한달 뒤 저는 평생을 알고 지낸 절친과 남은 평생을 약속하게 되었고 제 집 주변으로 직장을 옮긴 그녀와 함께 결혼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그녀와의 결혼 생활은 솔직히 이전과 크게 다를 것이 없었습니다. 이미 서로를 너무 잘 알았기에 특별할 것이 없었지만 그래도 그녀 때문에 매일매일이 즐거웠고 행복했습니다. 아침에 일어날 때 저의 옆에서 느껴지는 그녀의 온기가 그렇게 좋았습니다.
그리고 오늘 아침에 일어나서 여느때와 같이 그녀의 온기를 찾던 저는 옆에 아무도 없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네, 어제 그녀가 아주 먼 길을 떠났습니다. 정말 오랜만에 혼자 일어난 저는 그녀의 빈 자리에 쓸쓸함을 느꼈습니다. 결혼하기 전에는 느껴본 적 없던 쓸쓸함에 저는 카톡을 열어 그녀에게 사랑해 라는 카톡을 보냈습니다. 몇 시간이 지나도 지워지지 않는 1을 보면서 그녀가 정말 멀리 떠났구나라고 다시 한번 생각했습니다. 시간을 조금만 되돌릴 수 있으면 이란 생각이 머리를 떠나지 않습니다.
그녀가 떠난 저의 하루는 조금 달랐습니다. 아침 늦게까지 침대에서 게으르게 시간을 보내다 점심으로 피자를 시켰습니다. 그녀가 있었다면 점심부터 무슨 피자냐며 사이드킥을 날렸을 겁니다. 그렇게 피자와 맥주를 먹고나서 오랜만에 제 취미생활인 클라이밍을 아무런 걱정 없이 저녁시간 때까지 즐길 수 있었습니다. 그녀가 있었다면 4시간이 넘어간 시점에 클라이밍 짐에 취직했냐며 문자가 왔을 겁니다. 돌아오는 길에 저녁 거리로 치킨과 맥주, 와인 그리고 야식거리를 몇개 사왔습니다. 그녀가 집에 있었다면 이걸 발견하는 순간 저에게 트라이앵글 초크를 걸었겠지만 더 이상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저녁을 맛있게 먹고 저는 좋아하지만 그녀가 끔찍히 싫어해서 보지 못했던 공포영화를 세 편 보면서 사온 맥주와 와인을 다 마신 저는 지금 위스키를 홀짝 거리고 있습니다.
그녀가 한국으로 머나먼 길을 떠난 오늘 저는 너무나도 외로운 하루를 지냈습니다. 정말 그 어느 때보다도 긴 하루였습니다. 그녀가 오려면 벌써 6일이나 남았습니다. 오늘처럼 하루만 시간을 되돌릴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란 적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하루를 되돌린다면 공항에서 그녀를 떠나보내면서 조금 더 사랑스럽게 키스를 해줬을 텐데 말입니다. 그나저나 6일 동안 볼 공포 영화 추천 해주실 분 계십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