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선 글에서 말씀드린 것은 초원 유목 국가들의 왕위계승 원칙에 대한 것입니다.
중국이나 한국에서는 일찌감치 유교적 예법에 따른 적장자 계승 원칙이 세워졌습니다.
물론 원칙은 원칙인 만큼 예외적인 사례도 있었고, 조선 같은 경우는 오히려 예외가 더 흔한 .. 나라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이 유일 원칙은 매우 강력해서 적장자 계승이 지켜지지 않았을 때도 큰 정치적 영향을 미쳤지요.
조카로부터 왕위를 뺏은 세조의 찬탈이 사화로 이어졌다거나,
광해군이 영창대군을 살해하기도 하고, 효종의 적장자 자격을 놓고 예송논쟁이라는 대형 이벤트가 벌어지기도 했었습니다.
선조가 그 많은 삽질을 한 이유로 적장자 콤플렉스를 꼽기도 합니다.
세조가 단종의 왕위를 뺏은 것은 당시 유교적 가치관에서 볼 때
적어도 왕위 계승권을 뒷받침하는 논리로서는 '명분이 전무'했습니다.
이런 경우에 '어린 왕이 국정을 담당하지 못하니 능력있는 종친이 나서야' 한다는 명분을 억지로 끌어내기도 하지만
어린 주 성왕을 끝까지 보좌한 주공 단의 아름다운 선례가 있는 한, (순수하게 논리적으로만 볼 때) 저 명분이 합리화되기는 힘듭니다.
그런데 세조는 왕위에 올랐습니다. 힘으로요. 그리고 힘이 있었기 때문에 합리화되었습니다.
이후 세조 가계의 후손들이 왕위를 계승하면서 점점 더 세조의 선택은 구국의 결단으로 칭송받았지요.
그래도 세조 가계의 왕권이 반석에 오른 뒤에는 사육신을 복권시켜줍니다.
정몽주의 복권과 마찬가지로 이것 또한 순수하게 논리적으로는 말이 안되는 처사이지만, 이미 대세가 굳어져서 상관 없었습니다.
조선의 사례를 말씀드리는 것은 '유교적 적장자 계승 원칙'이 유일무이한 왕위 계승 원칙으로 자리잡은 상황에서도
힘이 있고 야심이 있는 왕가의 사람들은 왕위를 '실제로 노리기도' 했다는 걸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유목 국가는 대개 농경 정착 왕조보다 정치적 안정성이 떨어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 이유 중 하나는 여러 가지의 왕위 계승 원칙이 혼재해 있었다는 것입니다.
유목 사회의 대표적인 왕위 계승 원칙으로 방계계승과 직계계승을 들 수 있습니다.
방계계승 원칙에 따르면 동항의 남자들이 왕위 계승권을 주장할 수 있습니다. (물론 안해도 됩니다.)
직계계승 원칙에 따르면 직계 아들이 왕위 계승권을 주장할 수 있습니다.
현재 칸의 형제 또는 자식, 넓게는 형제들의 자식들 모두
그 자신이 무슨 짓을 하건 심지어 '칸위에 도전하지 않겠다고 포기를 하더라도' 잠재적 왕위 계승권자라는 것은 변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원칙에 따라 자동으로 부여되는, 사회학의 표현으로는 귀속지위인 셈이죠. 물론 시효가 있는 것도 아닙니다.
물론 "권리를 보유했다."라는 것과 "실제로 행사할 수 있다."는 것은 조금 다른 차원의 내용이 될 것입니다.
소비자는 지불한 만큼 정당한 서비스를 받고, 폭리에 대해 항의할 권리가 있습니다.
제가 술집에 갔는데, 주인이 깎두기이고 부하 깍두기가 득실득실합니다. 그리고 서비스가 불만이고 술값이 비싸게 나왔습니다.
여기서 제가 소비자의 권리를 행사하기에는 어려운 점이 많을 겁니다. (오래 살아야죠 ㄷㄷㄷ)
하지만 이 상황은 '여러 가지 현실적 조건 때문에 실행되지 않을 뿐' 제가 가진 소비자로서의 권리가 사라진 것은 아닙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 아마 술이 떡이 된 나머지 - 깍두기들한테 소리를 지르며 항의할 수도 있겠죠. (다음날 어느 산속에 ㄷㄷㄷ)
테무게 옷치긴의 경우로 가보겠습니다.
테무게 옷치긴에게 유목민의 전통인 방계계승의 원칙에 따라 형의 왕위를 계승할 권리가 있습니다.
게다가 이것은 귀속지위이기 때문에 시효가 없지요.
물론 '여러 가지 현실적 조건' 때문에 스스로 그 권리를 행사하기 어렵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칭기즈칸은 친족들과의 권력 공유를 극도로 꺼렸기 때문에 칭기즈칸 직속 부하들로 이루어진 강대한 세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게다가 칭기즈칸은 현재까지도 위대한 영웅(또는 위대한 파괴자)라고 칭송되는 만큼, 당대에 그가 가진 권위는 절대적이었을 겁니다.
그런 칭기즈칸이 우구데이를 지명했을 때, 우구데이와 동등하게 왕위계승권이 있었던 어느 누구도 감히 토를 달지 못하고 칸의 지명을 받들어야 했을 겁니다. 그것에 저항한다는 것은 단순후 우구데이와 왕권 경쟁을 하는 것이 아니라, 칭기즈칸의 권위에 도전하는 것이었을테니까요.
하지만 이 상황에서도 당연히 우구데이를 제외한 나머지의 왕위 계승권 자체가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들은 비록 칸의 권위 때문에 실현할 수 는 없었지만 여전히 법적으로 왕위 계승권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구데이가 죽자 여러 명의 칸위 계승권자들이 행동에 들어갑니다.
테무게 옷치긴은 군사를 이끌고 쳐들어와, 당시 섭정을 맡고 있던 투르게네 카툰을 포위합니다.
구육 칸은 우구데이가 지명했었던 '자신의 조카'로부터 칸위를 찬탈한 결과 대칸에 오를 수 있었죠.
바투는 쿠릴타이의 불참을 통해 구육 칸을 인정하지 않겠다는 (적법한 후계자는 자신이라는) 의사를 표시합니다.
이 정도는 얌전한 편으로 .. 몽골 왕가(유목 제국 전체)를 살펴보면 훨씬 더 피튀기는 칸위 계승 전쟁이 일어납니다.
정치가 안정되고 칸의 군사적, 정치적 기반이 탄탄할 때, 다른 계승권자는 '당시의 정치적, 군사적 조건' 때문에 제대로 주장할 수 없었을 뿐
기회가 오면 힘이 있다고 판단하면 여전히 자신의 계승권을 명분으로 삼아 군사를 일으킬 수 있습니다.
(대체로 이것이 가장 극심하게 일어난 것은 방계-형제상속이 끝나고 다음 세대로 넘어갈 때입니다.)
물론, 칸위 계승 분쟁이 잦았던 만큼 계승분쟁의 패배자도 많았습니다.
패배한 사람들 역시 군사를 일으켰고, 자신의 군사들에게 이렇게 말했을 겁니다.
'나는 칭기즈칸과 이렇게 저렇게 피가 섞인 누구의 아들이다. 내가 대칸이 되겠다.'
(다시 말하지만 조선 세조는 원칙적으로 이렇게 말할 권리가 없었습니다. 조선의 왕위 계승 원칙은 세조의 방계상속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유목 국가에서 칸의 숙백부, 형제, 혹은 사촌형제들은 초원의 전통에 따라 저렇게 주장할 권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물론 이 패배자들은 상황을 잘못 판단했습니다.
후세의 우리가 보기에 이 패배자들은 계승권은 있으되 그 계승권을 실현할 정치적, 군사적 조건이 충분하지 않았는데도,
그 자신은 할 수 있다고 믿고 일을 일으켰다가 패배하고 죽게된 것이지요.
테무게 옷치긴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칭기즈칸의 동생이자 황금씨족의 최연장자로서 대칸의 계승권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후세의 우리가 보기에 그 계승권을 실현할 정치적, 군사적 조건이 충분하지 않았는데도,
옷치긴은 할 수 있다고 믿고 군사를 일으켰다가 후퇴하고 결국 죽게된 것입니다.
이 시점에서 우리는 테무게 옷치긴이 '어떤 이유에서 대칸 경쟁에 실패했는가?'를 논할 수 있습니다만 테무게 옷치긴은 '대칸에 도전할 명분이 없었다.'라고 주장하는 것은 넌센스입니다.
ps' 명분이라고 하는 것은 성공이나 실패의 이유로 제시하기는 대단히 애매한 말입니다.
역사상 전혀 명분이 없었는데 우격다짐으로 승리한 세조 같은 사람들이나, 다른 이들에 비해 우월한 명분을 가지고도 패배한 사람들은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습니다.
아니, 애초에 '거병의 명분'은 없을 수가 없습니다.
노비였던 만적조차도 '내가 왕후장상이 되겠다'는 [명분을 내걸고] 일을 꾸몄습니다. (그것이 얼마나 비현실적인가는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테무게 옷치긴은 만적에 비해 천배나 만배쯤 칸위에 더 가까운 사람이었지요.
이 사람이 '내가 대칸이 되겠다'는 명분을 내세워 자신의 군사를 진격시켰으면, 그것이 그냥 그의 명분인 것입니다.
(이 시점에서 그것이 얼마나 다른 이들에 비해 우월한 혹은 열등한 명분인지, 또는 실현이 가능한지 아닌지는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 명분은 여러 차례 설명했다시피 법적인 근거가 있는 명분이었고요.
어느 분과의 논쟁을 정리한 글이라 다른 분들이 보시기에는 조금 불편할 수도 있겠습니다만 ..
끗