옆방 총각이 맛 좀 보라며 호떡을 가져왔다.
총각의 여자친구는 오늘도 집에서 자고 가는 듯 하다.
요즘 젊은 사람들이란…에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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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옆방 총각과 그의 여자친구가 홍시를 가져왔다.
둘이 나에게 살갑게 대하는 것이 조금은 부담스럽다.
그래서 밖에 나가서 모르는 사람에게 너무 친한 척하지 말라고 말해주었다.
어디가서 사기 당하기 딱 좋은 사람들이다.
생긴 것도 둘 다 순둥순둥하게 생겨서는… 쯧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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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옆방 총각의 여자친구가 나에게 함께 나가자고 해서 산책을 나왔다.
하루 하루가 새롭다.
벌써 봄이라니…
봄바람에 머리 속이 무척 맑아지는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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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방 총각의 여자친구가 새로운 약이 나왔다는 이야기를 해주었다.
뜬금없이 약 이야기라니…
이야기를 마치고 내 방을 나가려는 그녀를 불러세웠다.
“그거 약장수들이 다 사기 치는 거에요. 색시가 남 같지 않아서 해주는 말인데, 그렇게 사람들에게 우습게 보이면 코 베어가는 세상이야.”
그녀는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고는 말없이 방문을 닫고 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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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답해서 외출을 하려는데 옆방 총각의 여자친구가 나를 막아선다.
지금은 너무 더워서 나가면 안된단다.
언제 봤다고 나에게 그렇게 살갑게 대하는지 조금 불편하다.
저녁에 같이 나가자며 방긋 웃는 그녀.
문득 젊은 시절 어머니를 닮았다는 생각이 든다.
어머니…
너무나 고우셨던 어머니…
어머니, 저도 몸이 늙고 약해졌어요.
이제 어머니 만날 날이 머지 않았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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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방 총각과 방금 뭔가 심각한 이야기를 나눈 것 같은데 기억이 나지 않는다.
별 시답잖은 이야기였겠지.
요즘들어 정신이 종종 깜빡깜빡하는 것 같다.
잠시 후 옆방 총각의 여자친구가 노크도 없이 방문을 벌컥 열고 들어왔다.
그리고는 나에게 갑자기 따지듯 묻는다.
그녀의 행동에 당황했지만 정신을 가다듬었다.
이럴 때일 수록 우습게 보이면 안된다.
“이봐요!! 아가씨!!”
나의 호통소리에 그녀는 잡고 있던 나의 두 팔목을 슬그머니 내려놓는다.
“이게 뭐하는 짓이에요!! 내가 남편 없이 혼자 산다고, 이렇게 함부로 남의 방에 들어와서 지금 뭐하는 거에요? 젊은 사람이 딸 같아서 좀 편하게 해줬더니 사람 우습게 보는거야? 사람이 그러면 안되지!”
그녀는 말없이 고개를 숙인다.
옆방 총각이 그녀를 부축해 데리고 나간다.
그런데… 나에게 딸이 있었던가….?
그러게… 나에게 딸이 하나 있었는데…
우리 아가 이름이 뭐였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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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기 자반의 가시를 발라내다가 문득 혼잣말이 튀어 나왔다.
“우리 지원이가 조기 자반을 참 좋았었는데…”
그런데… 지원이가 누구지…?
나의 상태가 많이 심각해졌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손에 들고 있던 젓가락을 작은 밥상에 도로 내려 놓았다.
한참 동안 생각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지원이가 누구인지 생각이 나지 않았다.
누군가 밖에서 방문을 두드렸다.
“들어와요.”
방문이 열리고 옆방 총각이 들어왔다.
“아니 왜 식사를 하나도 안하셨어요?”
나는 옆방 총각을 바라봤다.
“이봐요, 총각.”
“네...”
“내가 요즘 자꾸 뭘 잊어버려서 그러는데… 머리 속에 지원이라는 이름이 자꾸 맴돌아.”
나의 말에 그의 눈이 휘둥그래졌다.
그는 방 밖을 향해 외쳤다.
“여보, 여보! 빨리 와 봐!”
그리고 나를 보고 말했다.
“아주머니, 아니… 장모님! 기억이 좀 나세요?”
어느새 옆방 총각의 여자친구가 내 방에 들어와 있었다.
“장모님, 이 사람! 이 사람이 지원이에요. 기억나세요?”
나는 그녀와 눈이 마주쳤다.
“어..엄마…”
혼란스러웠다.
머리가 지끈거렸다.
“다들 나한테 왜.. 왜 그래요? 나 머리가 너무 아파서….. 좀 나가 줄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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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상태에 대해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하루하루 일어나는 일을 기억하려고 노력했다.
노력한 덕분인지 최근 기억들이 머리 속에서 조금씩 살아났다.
나는 몇 달 전부터 옆방 총각과 그의 여자친구와 이 집에서 함께 살고 있다.
그런데, 1년 전 나는 어디에 있었지?
무엇을 하고 살았을까?
그 이전에는?
어린 시절은 드문드문 기억이 나는데… 어린 시절 이후는 기억이 흐릿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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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을 꿨다.
꿈에 나는 딸을 낳았다고 불평하는 시어머니에게 삿대질을 하며 따지고 있었다.
나에게 뭐라하는 것은 참아도 내 딸에게 그런 식으로 말하는 것은 참을 수 없다고 대들었다.
남편은 내가 시어머니와 싸운 사실을 듣고 나에게 집을 나가라 했다.
나는 그러면 못나갈 줄 알았냐며 남편 앞에서 콧방귀를 뀌었다.
그리고 그길로 아기를 엎고 집을 나왔다.
며칠 후 남편이 친정을 찾아와 잘못했다고 무릎을 꿇고 빌었다.
잠이 깨고 몸을 일으켜 자리에 바로 앉았다.
자리에 앉아 꿈 속에 보았던 일을 곱씹었다.
그리고 친정에서 남편과 함께 시댁으로 돌아온 이후의 기억들이 하나씩 생각나기 시작했다.
그래… 우리 딸… 지원이가 독감에 걸려 응급실로 달려갔던 일…
지원이의 국민학교 입학식…
딸이 상업 고등학교에 입학했던 날, 밤새 울었던 일…
딸의 결혼 날짜를 받아놓고 사고로 세상을 뜬 남편…
그리고 결혼식 내내 울기만 했던 딸…
노크 소리와 함께 옆방 총각이 들어왔다.
“아주머니, 편히 주무셨어요? 식사하셔야죠?”
나는 한참 동안 말없이 그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입을 열었다.
“김서방… 이제 그렇게 안불러도 되네. 지원이는 집에 있나?”
“자..장모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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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년 전, 나의 치매 증상이 시작되었다고 했다.
그리고 2년 전부터는 증상이 심해서 딸과 사위를 못 알아봤다고…
나는 사위의 손을 잡았다.
“내가 자네 볼 면목이 없네. 내가 빨리 죽었어야 했는데, 자네까지 생고생을 시키고, 미안해서 어쩌나… 앞으로 내가 자네 얼굴을 어떻게 보고 살아야 할지 모르겠네.”
“장모님, 그런 말씀 마세요. 장모님 성품이 워낙 온화하셔서 저희들 그렇게 고생하지 않았아요. 너무 마음에 담아두지 마세요.”
아침식사를 마치자 사위가 하얀 알약 하나를 내밀었다.
나는 무슨 약인지 물었다.
사위는 딸을 바라보았고, 딸은 머뭇거리다 입을 열었다.
“엄마… 그게 머리 속 신경 세포를 살려주는 치매 약이야. 그런데… 아직 임상 시험 중인 약이라서… 부작용 때문에… 그래서 아직은 안전한 약인지는 모른데…”
딸은 고개를 떨구고 말을 계속했다.
“엄마한테 물어봤을 때, 엄마가 약장사들 믿지 말라 그랬는데…….내가 사인했어… 임상 시험에 참여하겠다고… 미안해, 엄마…”
“아니야. 미안하긴. 잘했어! 정말 잘했어. 그래서 이렇게 정신이 돌아왔잖니?”
나는 약을 받아 입에 넣고 물을 한모금 들이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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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후 나는 딸과 함께 담당의사를 만났다.
그녀는 내가 지난 1년간 먹어온 약에 대해 알기 쉬운 말로 설명해주었다.
그 하얀 알약은 두뇌에서 오래된 기억을 담당하는 곳인 해마체의 재생을 돕는다 했다.
정확히 말하면 약의 성분이 세포 내 특정 단백질을 만드는 DNA를 활성화시키고,
만들어진 단백질이 해마체의 신경세포 사이의 끊어진 연결 고리를 만들어 준다 했다.
어떻게 끊어진 연결 고리가 다시 생성되는지에 대해서는 아직 알려지지 않았다 했다.
문제는 이 단백질이 백혈구와 세포 구성이 비슷하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이 단백질이 뇌에서 생성되면 해마체의 재생을 돕지만,
골수에서 만들어지면 변형 백혈구가 된다 했다.
그래서 높은 확률로 자가면역 질환이나 혈액암, 즉 백혈병에 걸릴 수 있다 했다.
약을 복용하기 시작하면서 나의 백혈구 수치가 약간 올라갔단다.
하지만 백혈구 수치는 늘 정상 범위 안에 있었고,
자가면역 질환의 뚜렷한 예후 역시 보이지 않았다고 했다.
그리고 의사는 계속해서 약을 복용하는 것을 추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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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이 돌아오고 6개월 후.
나는 꾸준히 약을 복용했고, 기억들을 천천히 되찼아갔다.
가족 앨범이 나의 잃어버린 기억들을 되찼는데 많은 도움이 되었다.
사진 찍을 당시의 상황이 생각났고, 거기에서 실타래가 풀리듯 기억이 되돌아왔다.
그렇게 기억이 돌아오면 그 당시 내가 느꼈던 감각과 감정들까지 구체적으로 되살아났다.
예를 들면, 어린 딸과 함께 놀이동산으로 소풍을 가서 찍은 사진을 보고 있노라면...
그때 하늘에 떠있는 구름의 형태와 나의 손을 잡고 있던 딸의 손에서 느껴지던 체온,
주변 사람들의 웃음소리, 그리고 솜사탕 기계가 만들어내는 달콤한 냄새까지 생생하게 떠올랐다.
그리고 그때 우리를 스쳐 지가갔던 사람들이 나눈 이야기까지 생각났다.
그들은 조카도 같이 왔으면 더 좋았겠다는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기억이 떠오를 때마다 딸과 이야기를 나누며 되살아난 기억이 맞는지 확인했다.
어느날 이야기를 나두던 딸이 조금은 걱정어린 표정으로 말했다.
사람들은 보통 과거의 일을 그렇게 세세한 것까지 구체적으로 기억하지는 않는다고...
딸의 말에 나는 당황했다.
원래 이렇게 기억하는 것이 아닌가?
치매가 오기 전... 나는 어떻게 과거의 일을 기억했었지?
알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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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는 저녁 식사를 위해 돼기고기 수육을 준비하고 있었다.
삶아진 돼지고기 두 덩어리를 끓는 육수에서 건져 도마 위에 올려놓았다.
주방 안이 구수하면서도 노릿한 돼지고기 냄새로 가득했다.
가스레인지 후드의 환풍기를 켰다.
돼지고기가 식는 동안 상추를 씻기로 했다.
바가지에 상추 뜯어 놓고 싱크대의 물을 틀었다.
흐르는 물에 상추를 씻은 후 돼지고기를 썰기 위해 나는 칼을 꺼냈다.
칼날을 물에 닦는 사이 시큼한 김치찌개 냄새가 느껴졌다.
고개를 갸우뚱했다.
코를 킁킁거렸다.
분명 김치찌개 냄새였다.
혼자말로 중얼거렸다.
"흠... 언제 김치찌개 맛있게 먹은 기억이 나려나?"
그리고 칼을 들어 돼지고기 덩어리에 찔러 넣는 순간...
끔찍한 기억이 떠올랐다.
기억 속 나는 큼지막한 주방용 칼을 시어머니의 배에 찔러 넣은 채 그녀를 노려보고 있었다.
시어머니는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잘못했다며 나에게 빌며 애원하고 있었다.
시어머니의 뒤편.
뚜껑이 열린 냄비에는 김치찌개가 보글보글 끓고 있었다.
온몸이 덜덜 떨려왔다.
손에 쥐고 있는 칼을 놓칠 뻔 했다.
나는 간신히 칼을 도마 위에 내려놓고, 그대로 자리에 주저앉았다.
한참 동안 넋을 놓고 주방 바닥에 앉아있던 나는 엉금엉금 기어서 내 방으로 돌아왔다.
하루 종일 이불 속에 누워 생각했다.
시어머니를 칼로 찌른 것이 언제였는지,
왜 그런 일을 저질렀는지,
그리고 그 일이 있고 어떤 일이 있었는지 기억하려 애썼다.
하지만 시어머니를 칼로 찌른 그 장면과 김치찌개 냄새 이외에는 아무 기억이 나지 않았다.
설마... 시어머니가 그때 죽은 것일까?
그럼 나는 감옥에 있어야지 이렇게 따뜻한 밥을 먹으며 편하게 살고 있으면 안되는데...
사람을... 그것도 가족을 칼로 찔렀는데... 당연히 벌을 받아야 하는데...
그래서 딸이 그랬던 것일까?
생각해보니 앨범 속 가족 사진들을 보면서...
할머니 사진이 나오면 딸의 표정이 좋지 않았던 것 같다.
딸은 나에게 가족들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해주었다.
남편의 이야기, 딸의 외삼촌이었던 오빠 이야기,
그리고 심지어는 나와 가깝게 지냈다는 이웃 사람들 이야기까지 해주었는데...
딸은 자신의 할머니에 대한 이야기는 한마디도 해주지 않았다.
며칠이 지났다.
불안한 마음은 어느 정도 진정이 되었지만,
시어머니를 칼로 찔렀다는 죄책감에 시달렸다.
무엇보다 그 때 그 일로 시어머니가 죽은 것은 아닌지 걱정이 되었다.
시어머니가 어떻게 돌아가셨는지 기억하려 애썼지만 기억이 쉽게 돌아오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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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마음이 불안한 와중에도 다른 기억들은 꾸준히 되살아나 머리 속에 채워졌다.
항상 그런 것은 아니지만 주로 가까운 과거의 기억들이 돌아오고 있었다.
치매 증상이 시작되고 기억을 잃어가던 시기에 있었던 일들이 주로 떠올랐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나는 치매 증세가 심해져 기억이 사라질수록 정신은 맑아진다고 느끼고 있었다.
그리고 치매로 대부분의 기억이 사라졌을 때,
나는 근심도 걱정도 없이 하루 하루를 있는 그대로 느끼며 즐기고 있었다.
그 때 나는 하루 중 많은 시간을 창밖을 구경하며 보냈드랬다.
창밖 거리의 풍경과 하늘의 구름들,
창문을 열면 방안으로 들어오는 바람이 나의 피부에 부딛치며 느껴지는 감각들,
바람에 실린 먼지 냄새,
맑은 날은 따뜻한 햇살의 눈부심,
그리고 비오는 날은 빗방울이 창틀을 두드리는 소리까지...
그 때 느꼈던 감각들이 하나 하나 기억 속에 되살아났다.
나는 몸을 일으켜 내 방 창문 앞에 섰다.
창밖 풍경은 어제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창문을 열어 바깥 공기를 느껴보려 했다.
하지만 기억을 잃었을 때 느꼈던 새로움은 느껴지지 않았다.
아쉬운 마음에 창문을 조금 더 열었다.
한낮의 뜨거운 공기가 방안으로 밀려 들어왔고,
벽걸이 에어컨이 작동하기 시작했다.
전기요금 걱정에 나는 급히 창문을 닫아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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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는 집에서 텔레비전을 보고 있었다.
실화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단편 드라마.
아내의 불륜을 의심하는 남편으로 인해 갈등을 겪는 부부의 이야기였다.
이야기 속 남편이 아내를 의심하는 정도가 심하긴 했지만,
아내의 행동에도 분명이 문제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순간 은은한 남성 스킨 냄새가 느껴졌다.
가슴이 두근거리고, 혈액이 빠르게 흐르기 시작했다.
아- 남편과의 신혼 시절 기억이 돌아오는 것 같았다.
텔레비전을 끄고 소파에 몸을 편하게 기댔다.
남편과의 신혼 시절이나 딸의 어린 시절의 기억과 감정이 되살아날 때면,
나는 마치 그 때 그 시간으로 돌아간 것처럼 행복했다.
그래서 남성 스킨 냄새를 느꼈을 때, 신혼시절 남편과 달달했던 기억임을 직감했다.
눈을 감았지만 스킨 냄새 말고는 다른 기억이 떠오르지 않았다.
한참을 기다리다가 아쉬운 마음을 접고 텔레비젼을 다시 켰다.
이야기 속 부부는 파국으로 치닿고 있었다.
아내의 불륜을 의심하는 남편은 맞바람을 피운다며 이웃집 여자와 함께 모텔을 드나들었다.
나도 모르게 눈쌀이 찌푸려졌다.
"저런... 나쁜 놈 같으니라고..."
순간 다시 스킨 냄새가 느껴졌다.
그리고 오랜 기억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기억 속 나는 출근하는 남편을 배웅하고 있었다.
남편이 출근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이웃집 남자가 집으로 들어왔다.
그는 나를 끌어안았고, 나의 몸을 더듬기 시작했다.
그의 목덜미에서 스킨 냄새가 느껴졌다.
나는 그를 거부하지 않고 그를 침실로 이끌었다.
기억이 되살아나는 동안 나는 수치스러움에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기가 막혔다.
시어머니를 칼로 찌른 것도 모자라,
다른 남자와 불륜이라니...
그것도 버젓히 내 집 안방에서...
집에서 지내는 사위가 서재에서 나와 나에게 말을 걸었다.
나는 부끄러운 마음에 대답도 하지 못하고 도망치듯 내 방으로 들어왔다.
사위가 방문을 두드렸다.
"장모님, 어디 편찮으세요?"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몸이 불편해서 좀 쉬고 싶은데, 나 신경쓰지 말고 점심은 알아서 먹게나."
나는 방바닥에 이불을 깔고 몸을 뉘었다.
눈물이 흐르기 시작했다.
도대체 나는 어떤 사람이었던 것일까?
두려웠다.
기억 저편 천천히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나를 마주하기가 너무도 두려웠다.
==
하루는 딸과 대화 중 나는 조심스럽게 시어머니 이야기를 꺼냈다.
"지원아......너희 할머니와 말싸움 한 기억이 떠올랐는데..."
딸이 놀란 표정으로 물었다.
"엄마가? 할머니랑?"
딸은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시어머니를 칼로 찌른 일을 딸이 알고 있는 것 같아 가슴이 두근거렸다.
마른 침을 삼켰다.
딸의 눈치를 살폈다.
딸은 무심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엄마가 무슨 할머니랑 말싸움을 해? 엄마가 상상했던 게 진짜 있었던 일처럼 떠오른 거 아니야?"
나는 물었다.
"무.. 무슨 말이니?"
딸은 짜증난 듯 말했다.
"엄마 할머니 앞에서 말 한마디 못했잖아."
딸은 다시 한숨을 내쉬고 말했다.
"엄마 기억 돌아오는 거, 나 너무 좋은데... 할머니 이야기는 꺼내지 않았으면 좋겠어. 나 할머니 이야기 하기 싫어."
==
얼마 지나지 않아 시어머니의 장례식 기억이 떠올랐다.
장례식장 한 쪽 구석.
남편은 화난 표정으로 딸의 뺨을 때렸고,
나는 남편을 말리고 있었다.
시어머니의 죽음 이틑날.
입관이 끝나고 빈소가 마련되고 나서야 딸이 장례식장에 나타났다.
빈소에서 절을 하고 나온 딸은 자신의 자취방으로 돌아가겠다 했다.
싫더라도 발인까지는 장례식장에 있어달라는 남편에게 딸은 말했다.
자신은 할머니가 죽어서 너무 기쁜 사람이라고...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해야하는 딸이었다.
그러고 보면 딸은 시어머니를 닮았다.
시어머니는 숨을 거두는 순간까지 나를 원망했다.
나 때문에 집안의 대가 끊어졌다고...
며느리를 잘못 들인 죄인인 자신이 죽어서 조상님들을 볼 면목이 없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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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산의 기억이 돌아온 날.
나는 밤새 이불 속에 누워 고통에 신음했다.
난산이었다.
시어머니의 반대를 무시하고 남편은 제왕절개를 결정했다.
잠시 후 고통이 사그라들며 나도 모르게 스르르 잠이 들었다.
꿈을 꾸듯 기억이 이어졌다.
정신을 차리고 나는 아기부터 찾았다.
품에 안겨 나를 바라보던 갓난쟁이 지원.
내 삶의 가장 인상깊은 순간이었다.
나는 어떻게 지원이를 처음 품에 안았던 순간을 잊을 수 있었을까..?
의사는 내가 출산 중 의식을 잃어 위험한 순간까지 갔었다며,
당분간 회복할 때까지 병원에 입원해 있으라 했다.
그리고 그는 내가 앞으로 아기를 낳기 어려울 것이라 말했다.
둘째를 가질 수 없다는 소식에 시어머니는 며칠간 식음을 전폐했다.
시어머니 입에서 이혼이라는 말이 나왔고,
남편은 그 길로 병원으로 가서 정관 수술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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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을 되찾는데 도움이 될 것 같아 예전 살던 동네를 찾기로 했다.
지원이가 태어나서 중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우리 가족은 천안에서 살았다.
지원이가 고등학교에 진학하면서 우리는 서울 신설동으로 이사했고,
지원이가 대학을 졸업하는 해 경기도 용인으로 자리를 옮겼다.
나는 사위와 함께 천안의 예전 살던 동네를 찾았다.
동네를 둘러보는 중 사위가 문득 말을 꺼냈다.
"장모님, 저도 어릴 때 이 동네에서 살았어요."
"아- 맞다. 지원이가 그런 이야기를 했었어."
나는 잠시 생각하다 말을 이었다.
"그런데... 지원이 말로는 천안이 아니라 신설동이었던 것 같은데..."
"하하. 장모님, 둘 다입니다."
사돈네 가족과 우리 가족은 비슷한 시기에 천안에서 서울 신설동으로 이사를 했다고 한다.
게다가 천안과 신설동 두 곳 모두 서로의 집이 매우 가까운 거리에 있었다고.
하지만 사위와 지원은 어린 시절, 서로를 알지 못했다고 한다.
사위는 두 번이나 같은 동네에 살았던 사실이 지원이와 사귀기 시작할 때 많은 도움이 되었다고 말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사위는 타고난 성격이 무척 내성적이고, 사람 만나는 것을 힘들어 하는 스타일이다.
지원이가 사귀는 사람이라며 사위를 처음 소개시켜준 날이 기억에 떠올랐다.
세상 잘난 우리 딸이 좋은 남자들 다 제쳐두고 어디서 저런 놈을 주워왔나 했드랬다.
웃음이 피식 나왔다.
"사실 자네 처음 봤을 때, 자네가 너무 조용해서 내가 사실 많이 놀랐어."
"놀라시다니요?"
"나는 지원이가 좋아하는 사람이라길래, 말도 잘하고, 유머감각도 있고, 그럴 줄 알았거든. 자네도 지원이 성격 알잖아."
사위는 웃으며 말했다.
"하하. 저도 사실 지원이와 이렇게 결혼까지 한 게 조금 신기하긴 합니다."
"그러고 보면 다 자기 짝이 정해져 있는 건가봐."
우리는 예전 살던 집 근처를 배회했다.
사위는 마을의 모습이 많이 변했다 말했다.
골목길 모퉁이 빵집에서 흘러나오는 고소한 빵 냄새를 맡았고,
갇혀있던 기억이 물꼬 터지듯 머리 속에 쏟아져 나왔다.
지원이가 좋아하던 야채 고로케.
지원이가 다녔던 학교.
지원이와 함께 장을 보던 기억.
"저쪽으로 재래 시장이 있었지?"
사위가 웃으며 답했다.
"장모님, 이제 기억하시네요."
"자네도 ㅁㅁ국민학교를 다녔어?"
"네, 맞습니다."
"지원이는 거기 졸업하고 ㅁㅁ여중을 다녔는데..."
"저는 마을 반대쪽 ㅁㅁ남중을 다녔어요."
"그럼... 저-쪽 길 따라서 집에 왔겠네?"
"잘 아시네요."
나는 사위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자네......... 예나 지금이나 얼굴이 그대로야. 그런데 사내 녀석이 왜 빨간 가방을 메고 다녔어?"
사위는 놀란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
기억이 점차 온전해지면서 많은 기억의 조각들이 나의 상상이었음을 알 수 있었다.
끔찍한 기억들이 실제 있었던 일이 아니라는 안도감과 함께,
그동안 마음으로 얼마나 많은 죄를 지었는지 부끄러웠다.
한가지 의아한 점도 있었다.
나는 왜 이웃집 남자와 잠자리를 함께하는 상상을 했던 것일까?
그를 어렴풋이 기억한다.
나는 그에게 특별한 감정을 느낀 적이 없다.
가끔씩 집 근처에서 지나가다 마주쳤고, 우리는 서로 인사 조차 하지 않았다.
==
기억은 점차 어린 시절까지 그 범위를 넓혀갔다.
어머니와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
내 삶의 가장 행복했던 시간들.
그 때의 기억들이 생생하게 돌아왔다.
나의 어머니는 오빠와 내가 잠이 들기 전 이런 저런 이야기를 들려주셨다.
그러면 나는 잠자리에 누워 어둠 속에서 어머니의 이야기를 들으며 잠이 들곤 했다.
어느날 어머니는 내가 아기일 때 말을 배우기 시작하며 있었던 일을 말해주고 있었다.
나의 기억이 닿지 않는 아주 어린 시절.
내가 말문이 트이고 재잘재잘 말이 많아지자,
어머니는 장난으로 나에게 태어나기 전 어디서 왔느냐고 물었다고 했다.
어머니의 물음에 어린 나는 자세를 고쳐 앉아 나즈막한 목소리로 답했단다.
내가 본디 경기도 가평에서 작은 집을 짓고 살던 노인이었다고.
어머니는 나에게 가평에서 남해안의 작은 섬마을까지 무슨 일로 왔느냐고 물었고,
어머니의 물음에 나는 말하기 부끄럽다며 웃더란다.
그리고는 나에게 아들이 하나 있었는데 생긴 것과는 다르게 무척 사랑꾼이었다고.
그래서 아들이 제 짝을 제대로 만나게 해주려고 멀리서 왔다고 대답하드랜다.
어머니의 이야기에 나는 잠이 쏟아지는 중에도 사랑꾼이 뭐냐고 물었고,
어머니의 대답이 채 끝나기 전에 잠이 들어버렸다.
(다음편에 이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