故 노무현 전 대통령과 검찰의 악연은 1981년 ‘부림사건’ 변호를 맡으면서 시작된 듯 싶다. ‘부림사건’은 대학생 20여 명이 사회과학 서적을 읽었다는 이유로 좌익사범으로 기소된 사건이다. 당시 노 전 대통령은 문재인 전 청와대 비서실장과 함께 이 사건의 변호를 맡으면서 인권변호사의 길로 들어섰다. 참여정부 시절 노무현 전 대통령은 취임 직후인 지난 2003년 3월 ‘전국 검사들과의 대화’를 갖고 40여 명의 검사들과 토론을 벌인적도 있다. 특히 지난시간을 돌이켜 보면, 지난 1987년 최루탄에 맞아 사망한 대우조선 노동자 이석규씨 추모집회에 나섰다가 ‘제3자 개입금지’ 조항을 어긴 혐의로 구속됐다. 당시 검사들이 구속영장을 발부받기 위해 밤새 영장판사와 수석부장판사, 법원장 집까지 찾아간 것으로 밝혀지기도 했다. 노 전 대통령이 공안검찰에 심각한 문제의식을 갖게 된 계기가 됐다. 지난 2003년 대통령 취임 후 악연의 골은 더욱 깊어졌다. 노 전 대통령은 서열위주의 인사관행을 무시하고 강금실 변호사를 법무부 장관에 기용했다. 검찰에서 반발이 일자 ‘평검사와의 대화’ 자리를 마련해 직접 토론에 나섰다. 이 자리에서 노 전 대통령은 “검찰 수뇌부를 신뢰하지 않는다” “이쯤되면 막 하자는 거지요?”라는 말로 검찰에 불편한 심경을 숨기지 않았다. 결국 김각영 당시 검찰총장이 사표를 냈다. 그 해 하반기부터 시작된 대선자금 수사에서는 측근인 최도술씨와 안희정씨가 불법 정치자금을 받은 혐의로 구속됐다. 2004년에는 친형 노건평씨가 남상국 전 대우건설 사장으로부터 인사청탁 대가로 3000만원을 받은 혐의로 기소되기도 했다. 노 전 대통령은 사법개혁추진위원회 등을 통해 검찰의 기소독점주의를 견제하고 공판중심주의를 도입하기도 했다. 청와대 민정라인에서 검사들을 철수시키고 경찰에 검찰의 수사권 일부를 이양하는 방안을 추진한 점도 검찰의 반발을 불러왔다. 퇴임 5개월 후인 지난해 검찰이 청와대 기록물 유출혐의로 조사방침을 밝히자 노 전 대통령은 “문제가 있다면 자진출석하겠다”며 정면대응에 나서기도 했다. 또 지난해 12월 건평씨가 구속되고 ‘박연차 게이트’가 터지면서 마지막 비극이 시작됐다. 노 전 대통령은 직접 홈페이지에 글을 올려 권양숙 여사가 박 회장으로부터 돈을 받은 사실을 시인했고, 그는 얼마 전인 4월30일 대검 중수부에 소환돼 조사를 받았다. 노 전 대통령은 억울함을 주장했다. 그리고 봉하마을 뒷산 '부엉이 바위'에 올라 스스로 몸을 던져 길고 긴 악연에 마침표를 찍었다.
————————————————————————— 노무현대통령님을 서거하게 한 원흉들은 아직도 잘 살아있다. 그러니 내부총질 그만하고 적폐를 물리쳐야 할 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