ㆍ② 지표로 본 위기론
김동연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지난 9일 국회 예산결산특별위원회에서 “우리 경제가 위기라는 말에 동의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김 부총리의 발언은 경제운용 책임자로서 면피성 발언일까, 아니면 경기를 냉정하게 진단할 것일까. 다양한 경기지표를 들여다보면 고용, 투자에 빨간 불이 켜진 건 사실이나 지난해보다 나아진 지표들도 많다.한국 경제가 ‘경기 하강국면’에 빠져들고 있다는 진단은 설득력이 있지만 ‘경제위기’로 단정짓기엔 아직 무리라는 분석이 나온다.
◆소비지표 나쁘지 않다
민간소비 2.7% 증가, 7년 만에 가장 높아
이달 온라인몰 할인행사는 잇따라 ‘완판’
한국은행이 최근 내놓은 경제전망을 보면 올해 민간소비는 지난해보다 2.7% 증가할 것으로 예측됐다. 2011년(2.9%) 이후 7년 만에 가장 높다.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 직후인 1998년(-11.9%)과 글로벌 금융위기 직후인 2009년(0.2%)에는 민간소비가 급락하거나 제자리를 맴돌았다. 올해 민간소비 증가율을 분기별로 보면 1분기 3.5%, 2분기 2.8%, 3분기 2.6% 등으로 낮아졌다. 하반기로 갈수록 상대적으로 경기위축이 피부에 와닿을 수 있다는 얘기다.
그럼에도 2015년 2.2%, 2016년 2.5%, 2017년 2.6% 등 최근 몇년간의 흐름과 비교해보면 올해 소비가 위축됐다고 보긴 힘들다. 한은은 내년 민간소비 증가율도 올해와 같은 2.7%를 전망했다.
다른 소비지표인 국내 카드승인 금액을 보자. 민간소비 지출은 대략 70%가 신용카드로 이뤄진다. 여신금융협회 통계를 보면 올 3분기 카드승인 금액은 전년동기대비 6.7% 증가했다. 이는 지난해 3분기(4.4%)보다 높은 증가율이다. 올 3분기 업종별 카드승인 금액을 보면 소비자의 소비생활과 관련이 깊은 ‘도매 및 소매업’은 7.6%, ‘숙박 및 음식점업’은 7.3% 각각 증가했다. 누군가는 불황을 겪었지만 누군가는 호황을 누렸다는 얘기다. 4분기 첫달인 지난 10월 카드승인 금액은 1년 전보다 13.2% 증가했다.
소매업태별로 봐도 소비 증가가 감지된다. 통계청 자료를 보면 올 3분기 소매업체의 매출액은 전년동기대비 5.8% 증가했다. 2016년(연 3.9%), 2017년(연 3.7%)의 연간 증가율을 웃돈다.
올 3분기 면세점 매출액은 전년동기대비 27.2% 성장했다. 중국인 관광객이 증가하면서 면세점 매출액은 1분기 25.9%, 2분기 51.6% 등 폭발적으로 늘었다. 올 3분기 백화점(4.6%), 슈퍼마켓 및 잡화점(3.6%), 편의점(9.0%) 매출액도 전년동기대비 증가했다. 대형마트의 경우 0.3% 증가하는 데 그쳤지만 1인 가구 증가와 온라인매출 증가 등 소비 트렌트 변화의 영향을 받고 있다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
‘한국판 블랙프라이데이’를 내세운 국내 온라인몰들의 이달 할인행사는 잇따라 완판 기록을 세웠다. G마켓과 옥션을 운영하는 이베이코리아는 11일간 진행된 ‘빅스마일데이’ 행사에서 하루 290만개씩, 누적 3200만개의 상품을 팔았다. 11번가가 진행한 ‘십일절(11월11일)’은 최초로 하루거래액 1020억원을 돌파했다. ‘갤럭시 노트9’의 경우 5분 만에 완판됐다. 위메프가 11일간 진행한 ‘블랙1111데이’는 누적거래액이 지난해 대비 77% 증가했다.
업계에서는 이달 온라인쇼핑몰 거래액이 사상 처음 월 10조원을 돌파할 것으로 보고 있다.
통계청 온라인쇼핑동향조사를 보면 올 3분기 온라인쇼핑몰 거래액은 전년동기대비 21.0% 증가했다. 특히 의복(15.5%), 신발(8.9%), 스포츠레저용품(15.5%), 화장품(26.4%), 가전전자통신기기(24.6%), 음식료품(25.9%), 생활용품(13.6%), 아동유아용품(6.9%) 등 대표적인 오프라인 매장 업종에서 온라인쇼핑몰 거래액이 큰 폭으로 늘었다. 한은 관계자는 “소비지표로만 보면 아주 큰 불황이 닥쳤다고 보기 어렵다”며 “양극화가 뚜렷하고 온라인거래량이 증가하는 트렌드를 읽지 못한 채 단순 부양책만 편다면 자영업자들이 느끼는 체감경기 개선은 나타나기 어려울 수 있다”고 말했다.
◆역대 최다 해외출국자, 낮은 연체율
출국자수 2156만명…작년보다 9.8% 증가
제조업 어렵지만 평균 가동률 전년 수준
울산에 거주하는 ㄱ씨는 지난 여름휴가 때 일본을 다녀왔다. 같은 기간 처갓집 식구들은 사이판으로 여행을 갔다. 그는 “지난해까지만 해도 여름휴가 때는 가족끼리 제주를 다녀왔는데 올해는 제각기 해외로 떠나느라 함께 가지 못했다”며 “해외여행경비와 국내여행경비 차이가 크지 않아 내년에는 몽골 초원여행을 생각하고 있다”고 말했다.
불황의 선행지표는 관광과 여행이다. 경기가 어려우면 소비자들이 가장 먼저 지갑을 닫는 항목이다. 실제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당시 해외출국자는 전년보다 10.0%, 2009년에는 전년보다 20.9% 줄었다. 하지만 올해 국민 해외여행객수는 사상 최대를 경신했다. 한국관광공사 자료를 보면 올 들어 9월까지 출국자수는 2156만명으로 전년동기대비 9.8% 증가했다.
출국자수는 금융위기 충격에서 벗어나기 시작한 2012년 1월 이후 매달 증가하고 있다. 지난 9월 출국자수는 80개월 만에 전년동월대비 0.5% 감소했지만 이는 태풍과 지진의 영향 때문에 일본으로 나가는 관광객이 감소한 데 따른 일시적인 현상일 뿐이다. 일본은 올해 한국 관광객이 찾은 방문지의 25%를 차지한다. ‘일본쇼크’가 약해진 지난달에는 출국자수가 다시 증가세로 반전됐다.
올 들어 지난 9월까지 여행지급액은 전년동기대비 9.6% 증가한 243억달러로 역대 최고를 기록했다. 이는 그대로 여행수지 적자로 이어져 9월까지 여행수지 적자는 126억5000만달러로 역대 최대였다.
경기가 나쁘면 국내관광과 물류도 위축된다. 또 장거리여행을 자제해 교통량이 줄어든다. 하지만 한국도로공사에 따르면 고속도로 통행량은 매달 늘고 있다. 단풍철을 맞은 지난 10월 고속도로 통행량은 2억6972만대로 역대 최고를 기록했다. 지난 5월 봄 향락철(2억5776만대) 기록을 넘어섰다. 경기는 불황이라는데 도로는 여전히 꽉꽉 막히는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는 얘기다.
경기의 동행지표이면서 후행지표인 연체율은 아직 큰 변화가 없다. 경기가 얼어붙었던 글로벌 금융위기 직후나 기업구조조정이 많았던 2012~2014년과 비교하면 절반 수준이다. 금융감독원 자료를 보면 1개월 이상 원리금이 연체된 기업의 원화대출 연체율은 지난 9월 기준 0.79%로 지난 10년 중 두번째(9월 기준)로 낮았다. 연체율이 가장 낮았던 해는 지난해로 0.58%였다. 가계대출 연체율 역시 지난해를 제외하고 10년 내 가장 낮은 수준이 유지되고 있다. 금감원 관계자는 “글로벌 수요가 위축되면서 공장가동률이 떨어지고 매출액도 떨어져 연체율이 높아지지 않을까 긴장했지만 아주 평이했다”며 “아직까지는 기업의 어려움이 은행권까지는 파급되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
지난 9월 전국 부도율은 0.09%였다. 2013년 9월과 2015년 9월(각각 0.22%)에 비하면 안정적이다. 부도율은 외환위기를 앞두고 있던 1997년 9월의 경우 0.56%에 달했다.
최근 제조업 상황이 어렵지만 올해 유난히 악화됐다고 보기 힘들다. 9월 기준으로 볼 때 올해 제조업 평균가동률은 73.9%로 2016년(72.3%) 저점을 찍은 뒤 지난해(72.7%)에 이어 소폭 개선됐다.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의 영향권 안에 있었던 1998년 9월(68.5%)과는 꽤 거리가 있다. 올 1~9월 평균으로 봐도 제조업평균가동률(72.8%)은 지난해(72.8%)와 같은 수준이다. 전통산업 구조조정 속에 산업경쟁력이 좀처럼 회복되지 못하고 있다는 지적은 가능해도 최저임금 인상, 주52시간 근무제 실시 등으로 체력이 더 약화됐다고 보기 어렵다는 얘기다.
◆거시경제 흐름 탄탄해
주가폭락에도 원·달러 환율 변동폭 적어
외환보유액 세계 8위…경상수지 흑자 덕
지난 1년간 코스피 변동폭은 31.2%에 달한다. 올해 2600포인트를 넘었던 코스피는 한때 1980선까지 밀렸다. 하지만 원·달러 환율 변동폭은 3.2%에 불과하다. 주가폭락에도 원·달러 환율 변동폭이 적은 것은 과거 외환위기·금융위기와 비교해보면 이례적이다. 정미영 삼성선물 리서치센터장은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원·달러 환율 변동폭은 연간 100~150원을 벗어난 적이 없다”며 “한국 외환시장의 민감성은 여전하지만 대외건전성이 좋아지고 수급이 개선되면서 지난 10년간 변동폭은 상당히 축소되고 있다”고 말했다.
한국 경제의 위기는 언제나 거시경제에서 찾아왔다. 실물경제가 튼튼해도 대외방어막이 뚫리면 속수무책이었다. 주식이 폭락하고 환율이 급등락하는 등 금융이 혼란에 빠지면서 한국 경제는 위기로 치닫곤 했다. 하지만 거시경제 지표로 본 한국 경제의 펀더멘털은 나쁘지 않다. 지난달 말 기준 외환보유액은 4040억달러로 세계 8위 수준이다. 외환보유액 증가의 1등 공신은 경상수지다. 경상수지는 2012년 3월 이후 79개월 연속 흑자를 기록하고 있다. 내년 반도체 경기가 정점에서 꺾이더라도 단기간 경상수지 흑자가 적자로 전환될 가능성은 낮아보인다.
대외 신용도는 최상급을 유지하고 있다. 외평채 5년물의 CDS프리미엄은 지난 8일 40bp(100bp=1%)를 기록했다. 지난해 연간평균(57bp)과 2016년(55bp)과 비교해 15bp가량 하락했다. 한국의 CDS프리미엄은 중국(8일 기준 64bp)보다 낮다. CDS프리미엄이 낮다는 것은 해외에서 한국을 그만큼 안정적으로 본다는 뜻이며 정부와 기업이 저금리로 대외자금을 조달할 수 있다는 의미다.
경제성장률도 예상보다는 낮지만 잠재성장률(물가 등에 부담을 주지 않고 성장할 수 있는 수준)을 벗어났다고 보기 어렵다. 한은이 추정하는 한국의 잠재성장률은 2.8~2.9%이다. 올해 성장률의 한은 예측치는 2.7%다. 주목할 점은 올해 성장률에는 건설업 투자축소가 내포돼 있다는 점이다. 지난 3분기 성장률은 전분기 대비 0.6%였으며 건설업의 성장기여도는 마이너스 0.3%포인트였다. 건설업이 전분기 수준만 유지됐더라면 성장률은 0.9%에 달할 수 있었다. 분기 성장률이 전기대비 0.9%면 연간 성장률로 따질 경우 3% 중반의 성장률이 나올 수 있다.
만약 문재인 정부가 과거 정부처럼 부동산을 이용한 경기부양에 나선다면 성장률을 상당부분 인위적으로 끌어올릴 수 있다. 다만 집값 폭등에 따른 고통과 위험은 경제주체들이 감내해야 한다. 한은 관계자는 “3분기 건설투자와 설비투자가 나쁘기는 하지만 지난해 부동산과 반도체에서 많은 투자가 이뤄진 것을 감안하면 조정에 들어갔다고 볼 수 있다”며 “잠재성장률을 감안하면 분기별 0% 후반대 성장률은 부진하다고 보기 힘들다”고 말했다.
시중자금 흐름도 아직은 나쁘지 않다. 올 들어 10월까지 은행의 기업대출은 전년동기보다 44조6000억원 늘어났다. 2016년 연간 증가액(19억3000억원)은 물론 2017년(38조1000억원)도 넘어섰다.
국내에서 제기되는 위기론과 달리 해외신용평가사들은 아직까지 한국을 긍정 평가하고 있다. 남북 긴장완화가 가시적으로 이뤄질 경우는 국가신용등급이 추가 상승할 수도 있다. 국제신용평가사인 스탠더드앤드푸어스(S&P)는 지난달 한국의 신용등급을 기존과 동일한 ‘AA’로 유지하면서 “한국의 성장세는 다른 선진국에 비해 견조하며 특정 산업이나 수출시장에 의존하지 않고 다각화돼 있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만약 북한이 상당한 수준의 경제 자유화를 진전시킬 경우 지정학적 위험도 감소할 수 있다”고 전망했다. S&P가 부여한 ‘AA’는 일본·중국(A+)보다 두 등급이 높고 미국(AA+)에 비해서는 한 등급이 낮다. 영국, 벨기에, 프랑스 등과 같은 등급이다.
류덕현 중앙대 교수는 “경기는 상승과 하강을 반복하는데 하강국면에서 주력산업의 경쟁력 약화까지 겹치다보니 불안감이 증폭된 측면이 있다”며 “과거 오일쇼크, 외환위기, 금융위기와 비교해봤을 때 현 상태를 ‘위기’나 ‘침체’로 진단하기에는 무리가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