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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하들이 짱짱맨이었던 나라 동진(東晉) - 中上
게시물ID : history_14624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Belisarius
추천 : 18
조회수 : 1103회
댓글수 : 3개
등록시간 : 2014/03/12 20:44:33
신하들이 짱짱맨이었던 나라 동진(東晉) - 上 : http://todayhumor.com/?humorbest_851993
신하들이 짱짱맨이었던 나라 동진(東晉) - 中 : http://todayhumor.com/?humorbest_852126
 
 
 
짐작하셨겠지만 북방호족들의 대거 남하는 화북에서의 5호 16국 시대라는 헬게이트를 피해 이루어진 대규모 이주였습니다. 진(晉) 왕조가 무너지자 화북의 한(漢)족들은 이민족 치하에서 살기를 거부하고 전란의 피해가 거의 없다시피한 강남으로 피난해 갔던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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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왕의 난-영가의 난 무렵 피난민의 이주노선도.
 
보시다시피 사방팔방으로 흩어졌지만 주로 양주나 형주, 즉 남으로 대규모 이주가 이루어졌음을 알 수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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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晉) 왕조 몰락 이후 중원의 형세도.
 
진나라가 망한 이후에도 화북은 이민족 간의 전란으로 시끄러운 건 여전했습니다. 
 
 
여기서 얼핏보면 화북에서는 이민족들이 한족을 대거 살육하고 지옥 실사판을 구현한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꼭 그렇지만은 않았습니다. 특히나 중원의 유력호족들이나 명문호족들에 대한 처우는 오히려 살가웠죠. 이는 중화를 정복한 이민족 자신들도 중국대륙을 통치하기엔 자신들의 하드웨어가 역부족인 것도 그렇고 그 많은 한족들을 통치하기 위해서는 마땅히 한족호족들의 도움이 필요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진(晉)을 멸한 장본인인 흉노의 한(漢)나라 군주 유연이나 역시 16국 중 하나인 후조(後趙)의 창건자 석륵 등과 같이 중원의 한족문물은 깨나 익히고 있었던 군주들은 앞다투어 한족호족들을 적극 등용하고 도움을 청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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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연.
 
어린 시절 삼국시대의 위(魏)-진(晉)나라에서 볼모 생활을 겪었던지라 반 한족 수준에 가까운 인물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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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륵.
 
출신은 일자무식 진나라의 노예출신이었으나 유연 밑에서 커리어를 쌓으며 나중에는 후조를 창건한 인물이지요.
일자무식한 천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정치수완만은 좋아 유능한 이들, 특히 한족신하들을 대거 등용하여 나라의 기반을 닦습니다.
 
 
한편 이 무렵 한족호족들은 저마다 '자위대' 라고 표현할 수 밖에 없는 방어조직을 구성하여 곳곳마다 자리잡고 있었는데요. 이들은 기존에 소유하고 있던 재산을 털어 유민들을 긁어모아 하나의 집단을 조직한 후, 병력으로 개편하여 일정구역 내에서 '웅거' 했고 이러한 조직들을 '오벽(塢壁)' 이라 불렀지요. 이민족 치하를 거부한 한족 유민집단이라 보시면 되겠습니다.
 
이 오벽의 장(長)인 '오주(塢主)'들, 즉 한족호족들 중에는 석륵마냥 이민족 군주의 회유를 받아 이민족 국가에 임관한 이들도 여럿 있었습니다만 '낙양의 사대부 가문들 중 6~7할이 강남으로 이주하였다.' 라는 당시의 기록이 말하듯 대다수가 강남의 동진(東晉)으로 귀순했습니다. 그리고 이들 중에는 훗날 동진 중기~말기에 정국을 장악했던 명문호족 집안들인 양하 사씨나 언릉 유씨를 비롯한 여러 가문들도 있었고요.

그리고 이들은 동진정권에서 아주아주 큰 환영을 받게 됩니다.
 
 
이유인즉 이렇습니다. 앞서 사마예가 왕도를 통하여 강남호족들에게서의 지지를 이끌어내고 정통성을 인정받아 황제로 추대받았음은 밝힌 바 있지요. 하지만 여전히 강남호족들의 입김은 강했던 모양입니다. 과거 삼국시대 오(吳)나라에서 황제와 더불어 권력을 휘두르던 시절에 대한 향수가 남아있기라도 한건지 사마예에게 머리 숙였다고는 하나 동진정권에서 저들만의 색깔을 극명하게 드러내고 있었던 거죠.
 
그렇다고 이들을 내칠 수는 없는 노릇이었습니다. 당연한 얘기죠. 문벌귀족이나 호족들의 지지를 잃으면 그냥 어디서 굴러먹던 개뼈다구만도 못해지는게 그 시대 황제의 현실이었니 말입니다. 더구나 동진이란 나라가 어떻게 성립된 나라인지 잘 생각해보면 답은 절로 나옵니다. 터줏대감(?) 행세하는 강남호족들을 어떻게든 견제하고팠던 사마예는 여기서 좋은(?) 아이디어를 떠올립니다.
 
 
바로 북방에서 남하해온 호족들, 즉 북래귀족들을 등용하여 강남호족들을 찍어누르고 견제하는 수단으로 삼았던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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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도 내놓은 해결책이 굿아이디어라며 탁!하고 무릎쳤을 사마예.
 
하지만 먼 훗날 이것이 동진의 멸망을 초래한 희대의 병크였음은 몰랐을겁니다.
 
 
 
사마예는 동진 초기 수백 수천 규모로 이주해온 유민집단을 거두어들여 토지를 내어주고 미개척지를 개간하여 농사 짓고 살 수있게 살아갈 터전도 마련해주는 등 정성을 쏟아붓습니다. 얼핏보면 동진이 과거 서진(西晉)을 계승한 국가이니만큼 당연히 서진의 유민들을 거두어들이는게 인도적으로나 명분상으로나 합당하다 생각할 수 있겠습니다만(물론 이도 맞긴 합니다), 사마예가 노렸던 효과는 다른데에 있었습니다.
 
 
강남의 호족들은 대대로 강남에서 생활하며 그곳을 기반으로 하여 문화, 정치, 사상, 군사 등 다방면에서 뿌리내리고 살아온 토박이들입니다. 그러했기에 강남에 지대한 영향을 미칠 수준의 짬밥(?)이나 세력이 되었던 것이고요. 사마예가 막상 이들 강남호족들을 견제하려고 보니 당장 그들이 거느린 무력이 위협적이었다는게 하나의 걸림돌이었습니다. 
 
 
과거 삼국시대 오나라에서 거느린 사병만으로 오나라의 병력을 편성한 '세병제(世兵制 : 삼국시대부터 시행된 군사제도이나 유독 오나라에서는 사병이 호족의 소유라는 개념이 강했고 이는 대대로 세습되었으니 군벌수준이지요.)'의 장본인들입니다. 거듭 말씀드리는 것이지만 사마예가 서진 말기부터 강남에 자리잡았다고는 하나 가진 힘은 극히 미약했습니다. 당연히 강남호족들의 무력을 마냥 무시할 수만은 없었던 거죠.
 
 
 때마침 북래귀족들이 대거 남하해왔고 사마예는 이 북래귀족들이 거느린 유민집단에 주목합니다. 북방에서 오벽생활을 하며 그들을 이끌던 오주, 즉 북방호족들에 의해 훌륭한 사병집단으로 거듭나있던 이 유민집단은 안그래도 북방호족들을 기용하여 강남호족들을 찍어누르고 힘으로도 어쩔 도리가 없어 난감해하던 사마예의 뜻에 실로 부합하는 천군만마와도 같은 군사들이었던겁니다.
 
 
그래서 이들에게 살 터전도 마련해주고 둔전(사실 둔전이란 말부터가 이미 군사집단 취급했단 얘깁니다)할 땅도 내어주고 그랬던 것도 다 북래귀족들은 물론 거느린 사병집단을 키워주기 위해 그리했던 겁니다.
 
 
이건 나중에 나올내용입니다만, 이때 유민집단이 정착했던 곳은 크게 두곳으로 나뉘는데요. 하나는 수도 건강(建康 : 오늘날의 난징)을 수비하면서 동진은 물론 과거 오(吳)나라에서도 주로 북에서의 침입을 막곤 했던 경구(京口)란 곳이었고, 다른 한곳은 형주(荊州)입니다. 아래 지도에 동그라미 두개로 표시된 곳이 그 곳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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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 북방의 국경쪽에 위치해있는 것이 보입니다.
 
 
이는 동진정권에서 유민집단으로 하여금 그곳에 정착해 살면서 내친 김에 북방에서의 방어도 맡겼던 것인데, 이들은 시간이 흐르면서 그대로 부대화 되어 이후에는 수도 건강을 방어하고 경구를 지키는 부대는 '북부군' 으로, 형주를 지키는 부대는 '서부군' 으로 불리우며 동진의 요충지를 지키는 중요 군단으로 성장하여 주력군으로서의 역할까지도 충실히 수행하게 됩니다.
 
하지만 동진 말기에 이르러서는 이들의 힘이 워낙 강해져 북부군을 이끄는 북부군단장이나 서부의 서부군단장과 같은 장군들은 죄다 군벌화되어 나중에는 저들끼리 치고박는 병크를 터뜨리는 등 동진 멸망의 주요요인으로 흑화되어버립니다. 물론 이건 망쪼가 보이던 말기의 일이고 이때만 하더라도 이 두개의 군단은 동진의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주었고 특히 중국 3대 대전 중 하나로도 불리우는 동진 중기에 터진 '비수대전' 과 같이 나라가 국가 존망의 위기에 처했을 때에는 이를 막아내는 주역이 되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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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수대전을 그린 그림.
 
오른편의 병력이 동진군이고 왼편에 쫓겨가는 쪽이 이 당시 실제로 백만에 가까운 숫자를 동원하여 동진을 침공해온 전진(前秦)의 군대입니다. 이때 전진군을 격파한 군단은 바로 북부군단이었고요.
 
 
아무튼, 이러한 이유로 사마예는 북래귀족은 물론이고 그들이 휘하에 거느리고 있던 유민집단(유민집단이라 쓰고 사병집단이라 읽습니다)도 적극 지원해주어 나중에는 강남호족들을 힘으로도 짓누를 수준의 규모로까지 키워줍니다.
 
 
특히 북래귀족들은 대다수를 동진 중앙정계의 요직에 앉혔는데요, 이건 왕도가 사전에 강남호족들에게 사마예를 지지해주면 요직에 앉혀주겠다는 약속과 어긋나는 조치라 할 수 있을겁니다.
 
 
근데 이 부분은 이 시대의 관직명이나 체계에 대해 어느정도 이해를 요구하는 부분인지라, 자세하게까지는 못적겠습니다만 이렇게 이해해주시면 되겠습니다. 북래귀족들이 주로 중앙직에 임명되었고 강남호족들은 주로 지방직에 임명되었던 구도로 말이지요. 이것만 봐도 강남호족들을 지방에다 박아둠으로서 은연중에 사마예가 견제하고 있다는게 뻔히 보입니다. 하지만 꼭 이렇게만 해석하기엔 왕도가 강태공처럼 보이고 사마예가 너무 찌질하고 속좁게만 비춰지지 않을까 싶습니다.
 
 
잘 생각해보면 어느정도 이해가 가는 부분입니다. 강남호족은 말그대로 강남 땅에 대대로 살아온 토박이 호족으로, 누구보다 강남에 대해서 잘 알고 빠삭한 사람들이었지요. 해당지방에 관해서 아는건 쥐뿔도 없는 북래귀족 출신 관리를 데려다 앉혀놓는 것 보다 차라리 강남출신 호족을 기용하는게 훨 낫다 이겁니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북래귀족 출신 인사들이 중앙에서 지방의 강남호족들을 좌지우지 하려는 속셈도 없잖아 있었을 겁니다. 아닌게 아니라 주로 지방직에 종사한 강남호족들의 관직에서의 위치는 대다수가 중앙직에 임명된 북래귀족들의 관직보다 최소 2등급 아래였을 뿐더러 지방직 자체도 지휘체제 상으로는 중앙의 지시를 받고 따르는 입장이었으니 알만합니다.
 
 
일이 이리되면 왕도 이 새끼가 우릴 낚았어 이러면서 불만의 목소리가 터져나올법도 하건만 실상은 꼭 그렇지만은 않았던 듯 합니다. 무엇보다 강남호족들의 반란이나 역모는 없었다는 사실이 이를 증명하거니와 어쨌거나 강남호족들도 서진시대부터 염원해왔던 정계로의 진출 꿈을 이루었으니 그럭저럭 만족했던 모양입니다. 사실 지방직이라 해도 엄연히 해당 지방의 군권을 거머쥐고 행사하는 지체높은 자리인데 꼭 중앙직에만 목맬 필요는 없어보이기도 합니다.
 
 
 
다음에는 동진 중기~말기에 관한 이바구를 털어볼까 합니다
 
제목을 신하들이 짱짱맨이었다고 써놓긴 했는데 그 짱짱맨이라는 신하가 일체 언급안되니 좀 의아해하시는 분들이 계실 것 같은데요. 좀 넓은 의미에서 말씀드리자면 신하 한사람 한사람 골라다가 쓰면 열전이 되는지라 그냥 전체적으로 신권이 강해지던 현상을 다루기로 했습니다. 동진의 건국자 사마예조차 강남호족들의 눈치를 살피고 지지를 갈구했다는 그 자체도 동진이 황권보다는 신권이 강했음을 증명하는 것이니 짱짱맨이었다고 볼 수도 있을 듯 합니다.  
 
아무튼 다음편부터는 본격적으로 동진의 중기~말기 때를 다루면서 신권관련해서 글을 써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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