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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 초기 대칸 계승2
게시물ID : history_14623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겨울왕궁
추천 : 5
조회수 : 1304회
댓글수 : 45개
등록시간 : 2014/03/12 20:24:57

우구데이 사후 계승

칭기즈칸은 권력의 공유를 극도로 싫어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자신의 친족들보다 신뢰하는 수하들에게 더 많은 토지와 병사를 맡겼다고 합니다.(철별 사부!) 칭기즈칸의 생전에 아들들이 받은 울루스는 4,000여 호 정도로, 큰 규모가 아니었습니다만, 우구데이 시절을 거치며 크게 확장됩니다. 특히 본국과 관계를 끊고 있어 가장 세력이 약했던 조치(칭기즈칸한테 죽을 뻔)의 울루스는 우구데이의 지원을 받은 바투의 정복으로 거대한 킵차크 칸국으로 발전하게 됩니다. 차가타이 칸국도 있었고, 우구데이의 울루스(우구데이가 대칸인데 이때의 울루스는 칸국인가요?)도 있었습니다. 막내인 톨루이는 말자 상속 원칙에 따라 몽골 중앙부와 (대칸하고 소유 관계는 어떻게..?) 칭기즈칸의 친위병 대부분을 상속받아 강력한 세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우구데이 사망 후, 위에 말씀드린 원칙에 따라 왕위 계승을 주장할 수 있었던 사람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1. 우구데이의 지명자 = 우구데이의 셋째 아들 쿠추의 아들 (, 손자) 시레문

쿠추는 칭기즈칸이 살아있을 때 대칸의 재목라면서 칭찬했기 때문에, 잠정적으로 '칭기즈칸의 지명을 받은 3대 칸'으로 인정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 연장선에서 우구데이도 쿠추를 후계자로 지목하게 됩니다. 그런데 쿠추가 젊어서 죽었기 때문에 우구데이는 쿠추의 아들인 시레문을 후계자로 지명하게 됩니다. (그러나 시레문 할머니 = 구육 엄마 = 우구데이 부인이 구육을 세우기로 했으므로, 일족의 힘도 빌릴 수 없는 처지여서 비빌 언덕도 없이 제껴집니다. (죽는 건 아님))

 

2. 직계 장자 상속 원칙 = 우구데이의 장자 = 구육

선대 칸의 적장자이니 당연히 칸위 상속을 주장할 권리가 있습니다. (어찌보면 방계 원칙에 따라 쿠추가 죽었으니 쿠추의 형제 중 연장자라는 점에서도 권리가 있습니다. 아무리 선대 칸의 지명이 있다고 해도 손자로 칸위가 바로 넘어가는 것은 좀 어려운 듯 합니다.)

 

2-1 직계 장자 상속 원칙2 = 진짜 직계(라고 스스로 주장하는) 중 최연장자인 차가타이의 아들.

차가타이 칸국은 몽골과 근접한 지역이라 독립성이 좀 부족했다고 보입니다. 실제로는 별다른 행동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3. 방계+직계 상속 원칙 = 칭기즈칸의 손자 중 최 연장자 = 바투(조치의 아들)

칭기즈칸이 우구데이를 차기 칸으로 지명한 것은 우구데이 개인에 한한 것이지, 우구데이 가계를 왕가로 선정한 것은 아닙니다. 방계계승 원칙에 따라 우구데이의 형제들이 왕이를 이어야 할 것이나 우구데이 항렬이 모두 죽었으므로, 그 아래 항렬 즉, 칭기즈칸의 손자들 중 가장 연장자인 바투는 원칙적으로 왕위 계승권을 주장할 수 있습니다. 다만 조치의 출생의 비밀을 언급하는 공격은 여전히 큰 부담입니다.

 

4. 방계계승 원칙 = 칭기즈칸의 동생 테무게 옷치긴

실제로 테무게 옷치긴은 우구데이 사후 군대를 이끌고 카라코룸으로 진군했습니다.

그러나 구육이 잽싸게 카라코룸에 도착하자 물러났습니다.

 

5. 말자계승 원칙 = 칭기즈칸의 막내 톨루이의 아들 = 뭉케

3과 같은 전제에서 - 2세대가 모두 죽고, 칭기즈칸의 우구데이 지명이 일회적인 것이라면 - 원래의 정상적인 왕위 계승 경로는 막내아들인 톨루이를 거쳐 톨루이의 아들에게 계승권이 있다고 주장할 수 있습니다. 칭기즈칸의 유산(칸위는 우구데이에게 갔지만 상당수의 직속 병력과 몽골 중심부의 울루스는 톨루이에게 상속)에 의해 톨루이계의 세력이 강대했기도 합니다. 대칸 후보로 나서도 그리 딸리지 않는 실력+명분이었으나 톨루이 가문은 톨루이의 부인 소르칵타니 베키의 주도로 구육에게 표면적으로 지지를 보내며 친한 척을 합니다.

 

 

아이러니한 것이 우구데이의 생존 중에 구육은 바투의 원정을 지원하러 나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바투와 구육은 사이가 좋지 않아 끊임없이 분쟁이 발생했고, 바투는 우구데이에게 이 분쟁을 일러바칩니다. 이에 우구데이는 구육을 소환했고, 카라코룸으로 돌아가던 도중 우구데이가 죽어버립니다. 그래서 구육이 옷치긴보다 빨리 수도에 입성할 수 있었고, 바투는 아예 수도 선점을 생각할 수도 없는 입장이 되었던 것입니다.

각자에게 서로 다른 원칙에 따른 명분이 있는 상황에서 수도를 선점하는 것은 대단한 정치적 이득이었고, 구육은 '이후 대칸의 지위는 구육(또는 우구데이)의 가계에 속한다.'는 조건까지 내걸고 쿠릴타이를 열어 대칸에 오르게 됩니다.

 

하지만 이 쿠릴타이에 바투는 참석하지 않습니다. 쿠릴타이는 흔히 대칸 '선출' 회의라고도 알려져 있지만 실제로는 정해진 대칸의 권위를 추인 또는 충성을 맹세하는 자리에 가깝습니다. , 바투의 불참은 찬반이 가능한 선거의 보이콧이 아니라, 불참함으로써 강력한 반대의사를 보인 것입니다. 비록 바투가 직접 자신의 계승권을 주장하진 않았지만, 구육의 계승 역시 인정하지 않겠다는 의사를 표시한 것에 다름 없습니다.

 

참고로 군사를 동원해 실제로 칸위를 먹으려는 액션까지 취했던 테무게 옷치긴은 쿠릴타이에 참석해서 구육의 칸위를 인정합니다. (봐달라는 말이겠죠)

 

구육 칸

구육은 애초부터 우구데이 가계의 계승권을 내걸고 대칸이 된 만큼 권력 강화에 힘을 씁니다.

우선 테무게 옷치긴을 반역죄로 몰아 끔살 ...

차가타이 칸국의 계승 문제에 개입하기도 하고 톨루이 가문의 세력을 깎으려고 애쓰기도 합니다. 급기야 군대를 모아 눈엣가시인 바투를 향해 진군하게 되는데 ... 즉위 2년 만에 진군 도중 사망합니다.

 

** 차가타이는 장자의 아들(, 손자)인 카라 훌레구(일 칸국의 훌레구와 다른 인물)를 후계자로 지명했는데, 대칸 구육이 "아들이 있는데 왜 손자?"라고 하면서 셋째 아들인 이수 뭉케(톨루이 아들 뭉케와 다른 인물)를 칸으로 세웁니다. 구육으로서는 이로서 차가타이 칸국(=이수 뭉케)의 지지를 얻을 수 있었고, 아들 형제를 건너뛰고 손자가 후계자로 지명되는 게 적합하지 않다는 사례를 보일 필요도 있었습니다. (본인이 그랬으니..) 그래서 분쟁이 벌어지는데 대칸의 지원을 받으면서도 이수 뭉케가 무능했기 때문에 카라 훌레구를 완전히 제끼지 못하고 구육이 죽고난 뒤 카라 훌레구가 다시 칸에 오릅니다. **

** 톨루이 가문은 앞에 설명했듯이, 칭기즈칸의 직속 병사를 상속받아 상당한 군대를 거느리고 있었는데, 구육은 이를 견제하기 위해 톨루이 가문의 군사를 감축했습니다. 그리고 톨루이 가문은 이를 묵묵히 수용하고 구육에 대한 지지를 표명했지만, 속으로는 바투 등 구육의 적들과 관계를 돈독히 하고 있었습니다. 구육이 바투를 향해 진군할 때 미리 바투에게 이 사실을 알려주기도 합니다. **

 

구육이 달랑 2년만에 죽으면서 다시 계승 문제가 불거져 나옵니다. 이 시점에서 대칸 계승권을 주장할 수 있는 사람은 다음과 같습니다.

 

1. 구육의 아들들

아직 어려서 별로 힘이 없음

 

2. 시레문 - 우구데이가 지정한 원래의 후계자

구육 아들이나 비슷비슷

 

3. 바투 - 앞서와 동일, 칭기스칸 3세대 중 최연장자

원칙적으로 가장 합당한 명분을 가졌으나, 여전히 조치의 출생의 비밀이 발목

 

4. 뭉케 - 앞서와 동일, 톨루이의 아들

적당한 세력, 적당한 경력, 적당한 인기, 적당한 수도 영향력

 

5. 기타등등 = 차가타이계

친구육파 이수 뭉케와 반구육파 카라 훌레구의 대립 중으로 대칸에 도전하기 힘듬

 

 

구육이 2년만에 단명했기 때문에 다음 세대로 권위를 넘기기 위한 준비는 거의 되어 있지 않았고, 실력으로 보나 명분으로 보나 가장 강력한 후보는 바투, 그 다음은 뭉케였습니다.

처음에는 킵착칸국의 바투가 적극적으로 나섭니다. 그는 제국의 서쪽(=바투의 영지)에서 쿠릴타이를 열자고 제안했는데, 이는 자신을 대칸으로 추대하라는 의미였을 겁니다. 이에 구육을 비롯한 우구데이 일족 전체와, 차가타이 일족의 일부(= 친구육파인 이수 뭉케파)가 반대합니다. 이 시점에서 그동안 숨죽여왔던 톨루이 가문이 활동을 시작합니다. 명분과 실력에 있어서 제2 후보자인 톨루이 아들 뭉케가 바투의 쿠릴타이 소환에 응해 서쪽으로 출발한 것입니다. 그러나 바투의 영지에서 열린 쿠릴타이에서 대칸으로 승인된 것은 바투가 아니라 뭉케였습니다.

 

바투가 서쪽에 치우친 광대한 킵착 칸국을 완전히 독립적으로 다스리는 조건으로 뭉케를 지지한 것입니다. 아마도 킵차크 칸국에 있으면서 대칸을 겸임할 수 있다면 몰라도, 멀고먼 카라코룸의 대칸과 킵차크 칸국의 운영을 동시에 할 수 없거나 큰 매리트가 없다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아마 조치의 출생의 비밀에 얽힌 약점이 전면적으로 대칸에 도전하는 것을 주저하게 했을지 모릅니다.)

 

 

뭉케 칸

강력한 킵착 칸국의 주인이며 명분상 가장 대칸의 계승권이 강했던 바투가 역시 강력한 명분과 실력을 지니고 있던 뭉케를 지지함으로써 뭉케의 대칸 확정..인 것 같았습니다 ..... , 반대파들은 몽골 초원에서 열리지 않은 쿠릴타이는 무효라면서 반발합니다. (반구육파인 카라 훌레구를 위시한 차가타이의 일부는 뭉케를 지지)

이에, 바투는 대거 군대를 보내 톨루이계와 함께 몽골 초원에서 쿠릴타이를 열기로 합니다...만 우구데이 일가의 유력자들은 이에 대거 불참합니다. 과거 바투가 쿠릴타이에 불참한 적이 있지만, 당시 바투는 본인만 불참했을 뿐 나머지 조치 일족은 쿠릴타이에 참여하도록 했습니다. 하지만 이번에는 우구데이 일족 전체(와 차가타이의 이수 뭉케 계파)가 참석하지 않음으로써 쿠릴타이의 성립 자체가 불분명해집니다.

 

결국 바투의 군사적인 위협을 가했고, 우구데이의 후손들은 쿠릴타이에 참석을 하기로 했지만, 이번에는 사보타주를 전개합니다. 이들은 카라코룸까지 걸어가기라도 하듯 느릿느릿 이동해서, 무려 2년이 넘도록 쿠릴타이 회장에 도착하지 못합니다. -_- 참다못한 바투는 "그를 보좌에 앉히라! 누구든 야삭(몽골법)을 거역하는 자는 목을 베어라!'고 하면서 찬성파만으로 날치기 쿠릴타이를 성립시킵니다. 이로써 1251년 톨루이 아들 뭉케가 명실상부한 대칸으로 선포된 것입니다.

 

뭉케가 대칸으로 선포된 후에도 우구데이의 후손들은 느릿느릿 수도를 향해 가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원래 '쿠릴타이에 참석하여 뭉케를 추대'하기 위한 일행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신임 대칸이 된 뭉케를 향해 떼지어 진격하는 반대파들'이 되어버린 겁니다. -_- 아울러 우구데이계는 내분(시레문과 구육계)을 극복하고 뭉케 제거를 위해 손을 합쳤지만 발각됩니다. 그 결과는 피의 숙청 ....

이 숙청으로 우구데이 일가가 쫄딱 망해버리고 이후 대칸의 위는 영원히 톨루이 가문에게 돌아가게 됩니다.

(하지만 우구데이 칸국이 망한 것은 아니고, 후일 뭉케가 죽고 쿠빌라이가 원을 세운 뒤 우구데이 칸국의 카이두가 쿠빌라이에게 여러 차례 도전합니다.)

 

대칸에 오른 뭉케에게는 3명의 형제가 있었습니다. 뭉케가 톨루이의 맏이였고, 쿠빌라이, 훌레구(차가타이 훌레구 아님),아릭 부케가 그의 동생들입니다. 뭉케는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는 한편 영토 확장 전쟁을 다시 시작하게 됩니다. 서북쪽 유럽-러시아 평원 방면의 킵착 칸국은 완전한 자치를 행사하고 있었고, 신장 중앙아시아는 차카타이 칸국이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뭉케는 서남아시아와 중국으로 진격하게 됩니다.

이때 뭉케는 쿠빌라이를 대동한 채 중국방면군을 자신이 직접 통솔하고 훌레구에게 서남아시아 방면군을 맡깁니다. 막내인 아릭 부케는 몽골 초원에 남아 본거지를 지키는 역할을 맡았습니다.

훌레구는 전쟁을 개시한지 2년도 안되어 바그다드를 파괴하고 압바스 왕조를 멸망시킨 뒤 일 칸국을 수립합니다.

중국방면군의 진격은 그만큼 빠르지는 않았지만 (사람은 더 많이 죽였을 듯) 서남아시아보다 훨신 풍요로운 농경 지역을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풍요로운 농경 지역의 확보는 초원의 세력 균형까지 바꿔놓게 됩니다.

 

1259년 뭉케가 중원 정복 중 사망하자, 아릭 부케와 쿠빌라이는 쿠릴타이 없이 각자 자신을 대칸으로 선포합니다.

이전까지 유목민의 역사에서 이런 식의 선우/대칸 경쟁이 벌어질 때 초원의 중심지 - 유목민의 마음의 고향을 장악하고 있는 세력이 훨씬 유리했었습니다. 수도에서는 이를 통해 연결되는 초원 엘리트들의 지지를 얻어내기 쉬웠고, 초원 엘리트의 지지를 받는 자는 경쟁자를 쉽게 압도할 수 있었습니다. 지금 아릭 부케는 수도를 장악하고 초원 엘리트의 지지를 등에 업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중원 방면군의 총 지휘자이자 자신이 정복한, 풍요로운 농경지역의 지배자이던 쿠빌라이는 자신이 더 유리하다고 판단하고 있었습니다. 대대로 유목 세력을 유지할 수 있게 해 준 부는 농경지역으로부터 약탈해온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그 부는 쿠빌라이가 손쉽게 가질 수 있는 반면, 아릭 부케가 약탈해야 하는 남쪽 농경지역에는 최소한 자신들과 대등한 몽골 기마병이 지키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도 명분은 많을 수록 좋으니까 고려의 항복도 기쁘게 받아주고 대인배스럽게 자치도 허용해 줍니다.)

중원으로부터 초원으로 물자 공급이 봉쇄되자 아릭부케는 결국 패배할 수밖에 없었고, 쿠빌라이는 카라코룸이 아닌 베이징에 수도를 둔 왕조를 개창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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