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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를 가져오지 못하여 제가 다시 올립니다, 미스릴워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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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두번째 편. 유비입니다.
많은 분들이 유비하면 선량하고 덕망스러운 영웅으로 보고 있습니다.
역사를 되짚어볼 때 유비만큼 후대의 평가가 후한 인물도 드물다고 생각합니다.
그만큼 인덕이 있는 영웅호걸이라는 점에는 틀림없는 것 같습니다.
유비(劉備, 161년 ~ 223년)
자는 현덕(玄德). 중국 삼국 시대 촉한(蜀漢)의 개국 황제. 전한(前漢) 경제(景帝)의 아들인 중산정왕(中山靖王) 유승(劉勝)의 후손이다.
황족의 후예임에도 삶이 어려워 어려서부터 짚신, 돗자리 등을 만들어 팔았다고 전해진다. 또한 삼국지에 등장하는 여러 군웅들과 달리 아무런 기반도 없이 결의 형제들과 함께 거병하였다.
원소, 원술과의 동맹에도 참여하고 황건적을 토벌하는 등 여러 차례 전투에 참가하였으나 뚜렷한 업적을 이루지는 못했고 도겸, 유표, 조조에게 의탁하는 등 자리를 잡지 못하고 떠돌았다. 하지만 제갈량, 조자룡 등 인재를 등용하면서 서서히 자기 세력을 확보하였고 손권과 손잡고 적벽에서 조조를 대패시켜 천하 삼분지계를 완성한다. 그 후 스스로 한의 정통을 계승한다는 명분으로 촉한의 황제가 됐으나 결의 형제인 관우와 장비가 잇따라 사망하자 그 복수를 위해 무리하게 대군을 일으켰고 결국 이릉에서 대패하여 제갈량에게 나라를 맡기고 세상을 뜬다.
출생
유비는 탁군 탁현(지금의 허베이 성 바오딩 시 줘저우 시) 출신으로, '한나라의 황손'으로 기록되었으며, 팔이 길어 그대로 뻗어 무릎까지 닿고, 귀도 남달리 커서 거울을 사용하지 않고도 자신의 귀를 볼 수 있었다고 한다. 어려서 아버지 유홍을 여의고 어머니와 함께 짚신과 멍석을 만들어 생계를 꾸려나갔다. 집안 동남쪽에 높이 5길이 넘는 뽕나무가 있어 가마 덮개처럼 보였기 때문에 “이 집에서 귀한 인물이 날 것이다”라고 예언한 사람이 있었다고 한다. 어린 시절 유비도 이 나무에 올라가 놀면서 “나도 이러한 덮개가 달린 가마(황제의 가마)를 탈 것이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이 말을 들은 숙부 유자경은 "함부로 말하지 마라. 구족이 멸한다." 고 주의를 시켰다고 한다.[1]
15살 때 유학길에 올라 노식(盧植)의 문하에서 수학한다. 이때 공손찬(公孫瓚)도 유비와 함께 공부했다. 그러나 유비는 독서를 그다지 즐겨하지 않았고 개나 말 같은 동물들을 좋아하며 화려한 의복을 걸치거나 음악을 듣는 데에 몰두했다. 소싯적부터 명마(名馬)를 감별할 줄 알았으며 항상 말수가 적고, 늘 남을 공손히 대하고, 감정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았다. 황건의 난 때 장각(張角)은 청주, 유주, 서주, 기주, 양주, 연주, 예주, 형주 등으로 세력을 점점 확장해 나가고 있었다. 혼란한 시기에 유비는 기꺼이 천하호걸과 교류했으므로 젊은이들이 앞다투어 그의 밑으로 모여들었다. 그 가운데 관우와 장비도 있었는데, 세 사람의 깊은 관계가 '도원결의(桃園結義)' 의 전설을 낳게 되지만, 실제 '도원결의' 는 삼국지연의만의 허구이다.
황건적의 난에서 형주 웅거까지
영제 말, 황건의 난이 일어나자 유비는 관우, 장비와 함께 주군(州郡)에서 모집한 의병들을 이끌고 교위인 추정의 군대에 가담해 황건적들을 토벌하여 그 공적으로 안희현위(安喜縣尉)에 임명되었다. 독우가 공무 때문에 안희로 왔을 때 유비가 독우에게 만나기를 청했지만 거절당하고 이에 곧바로 독우가 거처하고 있는 곳으로 들어가 곤장을 들고 200대를 때렸다. 그리고 인수를 풀어 독우의 목에 걸고 그를 말뚝에 묶은 다음 관직을 버리고 달아났다.
얼마 후 유비는 단양에서 병사를 모집하는 임무를 맡은 도위(都尉) 관구의(毌丘毅)와 행동을 같이하다가 하비에서 적을 무찌른 공로로 하밀승(청주 북해국 하밀현의 현승)에 제수되었지만 다시 관직을 버리고 만다. 그 뒤 유비는 고당위(청주 평원국 고당현의 현위)에 임명되어 현령으로 승진 하지만, 적에게 격파되어 공손찬에게로 달아난다.
공손찬의 부하시절
공손찬은 유비의 동문으로 유비에게는 거의 친형이나 다름없을 정도로 친밀한 존재였다. 공손찬은 유비를 별부사마(別部司馬)에 임명하고 청주자사 전해(田楷)와 함께 기주목 원소 (袁紹)와 싸웠는데, 그가 자주 전공을 세웠으므로 그를 평원의 상(相)으로 임명했다. 이윽고 조조가 서주를 정벌하자 서주목 도겸(陶謙)이 전해에게 구원을 요청해 왔으므로 유비는 전해와 함께 도겸을 돕는다. 이때부터 전해 밑을 떠나 도겸에게 몸을 의지하여, 예주자사에 임명된 후 소패에 주둔하였으며, 도겸이 죽은 후에는 주위의 권유를 받아 서주를 지배하게 된다.
공손찬 사후
196년(건안(建安) 원년) 유비는 조조로부터 진동장군에 임명되어 원술(袁術)과 대치하게 되는데, 그 사이에 하비의 수장인 조표가 배신하여 여포(呂布)를 불러들였고, 여포는 하비를 기습하여 유비의 처자를 사로잡는다.
유비가 여포에게 화친을 구하자 여포는 유비의 처자를 유비에게 되돌려보내고 유비는 소패로 돌아온다. 그러나 소패로 돌아온 유비가 1만여 명의 병사를 모집하자 여포는 이를 꺼림칙하게 생각하여 유비에게 공격을 감행하였다. 유비는 패주하여 조조에게 귀부 하였는데, 조조는 유비를 후대하여 예주목으로 삼았고 유비가 소패에서 군사를 모아 여포를 견제하는 것을 지원하였다. 이에 여포는 고순을 보내 소패를 공격하였고 조조는 하후돈(夏侯惇)을 지원군으로 보냈으나 결국 유비와 하후돈은 고순에게 패배하여 다시 유비의 처자는 사로잡혀 여포에게 보내진다.
10월, 이에 조조는 친히 여포를 정벌하여 유비와 함께 여포를 하비에서 포위하여 사로잡고 여포를 참형에 처한다. 여포가 자신을 살려 쓰도록 조조에게 말하여 조조가 의심을 품자, 유비는 여포가 행한 패악을 조조에게 말했고 조조도 이에 동의했다.[2]
조조의 부하시절
유비는 조조와 함께 허도(許都)로 귀환해 좌장군에 임명되고 조조에게 후한 대우를 받았다. 유비가 왔을 때 조조의 참모 정욱(程昱) 등은 “유비는 영웅의 자질이 있고 민심을 얻고 있으므로 남을 섬길 인간이 아니다”라고 말하여 죽일 것을 권하지만 조조는 받아들이지 않았다.[3] 그 무렵 헌제의 국구인 거기장군 동승(董承)이 조조를 주살하라는 밀칙을 받고, 유비도 은밀히 이 계획에 가담했다. 어느 날 조조는 유비를 식사에 초대해 “지금 천하에 영웅이 있다면 그대와 나뿐이다.”라고 말했다. 유비는 이 말을 듣고 놀라 젓가락을 떨어뜨렸다. 《화양국지(華陽國志)》에 따르면, 이때 천둥이 쳤기 때문에 유비는 그 탓으로 돌렸는데, 이것은 《삼국지연의》에서도 똑같이 기술된다. 그래서 유비는 조조 주살 계획이 탄로나기 전에 원술 토벌을 빙자해 서둘러 조조 밑을 떠난다. 그리고 원술을 멸한 후 유비는 하비를 점거하고 서주자사 차주(車胄)를 죽인 후 관우를 남겨 하비를 수비하게 한 뒤 소패로 돌아온다. 이때 군현들 다수가 조조를 배반하여 유비의 군세는 수만 명에 이르렀다. 유비는 세력을 키움과 함께 손건을 원소에게 사신으로 보내 조조에 대항하는 밀접한 관계를 맺는다.[1]
원소의 부하시절
이때 조조는 왕충(王忠)과 유대(劉岱)를 보내 유비를 공격하나 패배하게 된다. 200년 조조는 유비를 토벌하고, 유비는 또 다시 패배하여 청주로 달아났다. 당시 청주자사 원담은 유비가 예전에 무재로 천거한 적이 있어 군사를 보내 유비를 맞아보내고 원소에게 이를 알렸다. 원소는 장수를 보내 유비를 영접하고 업(鄴)에서 2백 리(80km) 떨어진 곳까지 가 유비를 만나는 등 유비를 대단히 환영했다. 전투에서 승리한 조조는 유비의 처자를 붙잡고 관우를 사로잡아 돌아온다. 이 때, 원소와 조조가 관도에서 대치하게 되는데, 여남의 황건적 유벽 등이 조조에게 반기를 들고 원소에게 호응하자 원소에게 파견되어 유벽 등과 함께 허 아래를 약탈하였고, 이때 조조에게서 달아난 관우가 돌아왔다. 조조가 조인을 보내 유비를 공격하자 유비는 원소에게 돌아갔다.
유비는 원소 밑을 벗어나려고 원소에게 형주의 유표(劉表)와 협공하도록 진언하였다. 이리하여 원소는 유비를 여남에 파견하여 황건적 공도의 무리와 합쳐 수천 명의 병사를 이끌어 여남에 진을 치고, 조조는 채양(蔡陽)을 시켜 공격하지만 채양은 패배하고 전사한다. 조조는 원소를 격파한 후 몸소 남하해 유비를 격파하였다.
유표의 빈객
이 후 유비는 유표 밑에 몸을 의지한다. 유표 역시 교외에서 직접 유비를 영접하는 등 유비는 상빈으로서 대우받았고, 유표는 유비에게 군사를 주어 신야에 주둔하게 한다. 그러나 이 후 형주의 호걸 중에 선주에게 귀부하는 자가 날로 더욱 많아지자, 유표는 그의 마음을 의심하여 은밀히 제어하였다.
배송지가 《삼국지》에 주석으로 인용한 두 가지 이야기가 있다. 유비가 주연 석상에서, 변소에 가서 허벅지에 살이 찐 것을 보고 눈물을 흘렸다. 눈물 자국을 본 유표가 그 이유를 묻자 “나는 항상 말안장에서 떠나본 일이 없기 때문에 허벅지에 살이 찌지 않는다. 그런데 지금은 말에 오르지 않아 벌써 허벅지에 살이 붙고, 세월이 흘러 노년에 가까운데 아무런 공적도 세우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한탄한 것이다”라고 대답한다. [4] 이것이 유명한 ‘비육지탄(脾肉之嘆)’이란 고사다. 또한 유표의 부하 괴월(蒯越), 채모(蔡瑁) 등이 연회를 이용해 유비를 살해하려고 하자 유비는 적로를 타고 힘을 내라며 다그치자 놀랍게도 3길이나 뛰어올라 무사히 빠져나올 수 있었다고 한다.[5] 배송지는 또 이 일이 실제로는 없었을 것이라는 손성의 비판을 뒤에 덧붙였다.[6]
삼고초려
군기를 잡고 계책을 세워 전군을 통솔할 군사(軍師: 군대의 우두머리)가 없어 늘 조조군에게 고전을 면치 못했다. 어느 날 유비가 은사인 사마 휘에게 군사를 천거(薦擧)해 달라고 청하자 그는 이렇게 말했다. "복룡이나 봉추 중 한 사람만 얻으시오." "대체 복룡은 누구고, 봉추는 누구입니까?" 그러나 사마휘는 말을 흐린 채 대답(對答)하지 않았다. 그 후 제갈 량의 별명이 복룡이란 것을 안 유비는 즉시 수레에 예물을 싣고 양양 땅에 있는 제갈량의 초가집을 찾아 갔다. 그러나 제갈량은 집에 없었다. 며칠 후 또 찾아갔으나 역시 출타하고 없었다. "전번에 다시 오겠다고 했는데. 이거, 너무 무례하지 않습니까? 듣자니 그 자는 아직 나이도 젊다던데..." "그까짓 제갈 공명이 뭔데. 형님, 이젠 다시 찾아오지 마십시오." 마침내 동행했던 관우와 장비의 불평이 터지고 말았다. "다음엔 너희들은 따라오지 말아라." 관우와 장비가 극구 만류하는데도 유비는 단념하지 않고 세 번째 방문길에 나섰다. 그 열의에 감동한 제갈량은 마침내 유비의 군사가 되어 적벽대전에서 조조의 100만 대군을 격파하는 등 많은 전공을 세웠다.
적벽의 싸움에서 삼국성립까지
조조는 하후돈과 우금(于禁)에게 유표를 공격하라 명을 내렸는데, 유비가 박망 지역에서 이를 막아낸다. 유비는 자기 진영을 불태우고 도망가는 것처럼 꾸미고 복병을 써서 그들을 완전히 격파했다. 208년 유표가 죽자 채모는 조조에게 항복하고, 이에 따라 유종도 항복하고 만다. 제갈량은 “채모와 유종을 없애고 형주를 지배해야 한다”라고 진언했지만 유비는 듣지 않았다. 이때 형주 주민의 상당수가 유비를 따라나서 하루에 겨우 10리(4km) 정도밖에 행군하지 못했다. 그래서 유비에게 “먼저 행군하여 강릉을 지켜야 한다”라고 진언하는 자도 있었다. 그러나 유비는 “지금 사람들이 나만 의지하고 있는데, 어찌 이들을 버리고 갈 수 있겠는가?”라고 말했다.
조조가 기병 5천 명을 급파했기 때문에 유비는 당양의 장판교에서 추격당해 크게 패하고 만다. 유비는 유표의 큰아들 유기(劉琦)가 있는 하구로 도망쳤다. 그 후 유비는 손권(孫權)과 동맹을 맺어 적벽에서 조조의 대군을 격파했다. 그리고 유기를 형주 자사로 천거하는 한편, 무릉, 장사, 계양, 영릉 등 4군을 평정하였다. 그 후 유기가 죽자 군신들은 유비를 형주자사로 추대했으므로 손권은 유비를 두려워해 자기 여동생인 손부인(孫夫人)과 결혼시켜 유비와의 관계를 돈독히 하려 애 썼다.
211년 익주자사 유장(劉璋)이 조조의 침공을 두려워하자 유장의 별가종사였던 장송(張松)은 유비로 하여금 장로(張魯)를 토벌하게 하자고 진언했다. 이를 받아들인 유장은 법정(法正)을 유비에게 파견했다. 그러나 실은 장송이나 법정 모두 유비를 익주의 새 주인으로 맞으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는데 이는 촉의 지형, 병기, 인마의 적고 많음 등의 정보와 지도를 제공한 장송의 행동에서 추측할 수 있다. 드디어 유비는 부군사 중랑장 방통(龐統)과 함께 익주로 들어서고, 유장은 몸소 마중나와 맞이했다. 유장은 유비를 행대사마 겸 사례교위로 천거하고 병사를 증강시켜 백수의 주둔군을 지휘하도록 했다. 유비는 곧바로 장로를 토벌하지 않고 은혜를 베풀어 인심 장악에 힘을 썼다.
211년 조조가 손권을 토벌하자 손권은 유비에게 구원을 요청했으므로 유비는 유장에게 1만 명의 병사와 군수 물자를 요청했다. 그러나 유장은 늙은 병사 4천 명과 요구한 군수 물자를 절반 밖에 보내지 않아, 이에 유비는 격노했다. 때 마침 장송은 “지금 촉 공략을 앞에 두고 어찌해서 떠나려는 것인가?”라는 내용의 편지를 유비에게 보내려고 하는데, 형 장숙(張肅)이 이 사실을 유장에게 알려 장송이 처형된다. 이때부터 유비와 유장의 사이는 매우 악화되었다. 유비는 백수관을 지키는 양회(楊懷), 고패(高沛)를 참살한다. 유비는 지름길로 관중에 이르러서, 여러 장수들과 군사와 처자들을 인질로 잡고, 병사를 이끌고 황충(黃忠), 탁응 등과 함께 진격해 부성(涪城)에 도착하여 그 성을 점거했다. 유장이 유괴(劉璝)·냉포(冷苞)·장임(張任)·등현(鄧賢) 등을 보내 부성에서 유비를 막게 했지만 모두 격파되어 패하여, 퇴각하여 면죽(緜竹)을 보전했다.
유장이 다시 이엄(李嚴)을 보내 면죽의 여러 군대를 감독하게 했지만, 이엄은 부하들을 통솔하여 유비에게 항복했다. 유비의 군대는 더욱 강해지니, 여러 장수들을 나누어 파견해 군 아래의 현들을 항복시켰고, 제갈량, 장비, 조운(趙雲) 등이 병사를 거느리고 강을 거슬러 올라 백제(百帝)성과 강주, 강양을 평정하였으며, 오직 관우만이 남아 형주를 진수했다. 그리고 유비가 진군하여 낙성을 포위하는데 이때 유장의 아들 유순(劉循)이 성을 지키고 있었고, 공격 당한지 1년이 되었다.
214년 낙성이 격파되자 유비는 제갈량, 장비, 조운을 이끌고 성도를 포위하고 유장의 항복을 받아냈다. 유비는 익주 자사를 겸하게 되고, 유장의 옛 신료도 그대로 고관으로 취임시켜 촉한의 기반을 구축했다.
215년 유비는 형주를 둘러싸고 손권과 대립하였으며, 결국 형주 동부의 강하, 장사, 계양을 오나라에 양보하는 것으로 매듭지었다. 218년 유비는 마초(馬超)와 장비를 시켜 무도의 하변을 취하게 하고 그 곳 이민족들과 연계하여 무도를 혼란스럽게 만든다. 조조가 조홍(曹洪)에게 군사를 주어 마초를 물러나게 한다. 유비는 양평관에 주둔하고, 219년 봄 군대를 이끌고 정군산에 진지를 구축해 하후연(夏侯淵)과 치열한 쟁탈전을 벌였다. 유비는 황충에게 명해 높은 곳에 올라 북을 크게 치게 하고 적군이 혼란에 빠진 틈을 이용해 공격, 하후연을 무찔러 죽였다. 이에 조조가 대군을 이끌고 한중으로 나섰지만, 유비는 한중을 끝까지 사수하며 상용까지 공략했다. 그리고 같은해 7월 위왕 조조에 맞서 한중왕에 오른다. 한편 형주에 있던 관우는 위의 조인(曹仁)이 지키는 번성을 공격하다가 손권에게 배후를 찔려 전사했다. 결국 오나라에게 형주를 빼앗기고 만다. ..
촉한 성립과 유비의 죽음
유비
220년(위나라 황초 원년) 위왕 겸 대장군 대 승상조비(曹丕)가 한 헌제에게 강제로 선양 받아 황제가 되었는데, 이 때 삼국지연의에는 헌제가 살해되었다고 전해진다. 물론 실제론 헌제 살해 소식은 물론 그릇된 소문이었지만, 삼국지연의에선 상당히 와전되었다. 그리고, 제갈량은 유비에게 황제로 즉위하도록 권했고, 221년 4월 마침내 유비는 황제로 즉위했다. 연호를 장무(章武)로 하고, 유선(劉禪)을 황태자로 세웠다.
대부분의 신하들이 칭제를 권했지만, 전부사마 비시는 상소를 올려 “강대한 적을 아직도 이기지 못하고 있는데, 즉위하는 것은 오히려 사람들의 의심을 사기 쉽지 않습니까? 옛날 한 고조께서는 초와 약정을 맺어, 진나라를 격파시킨 사람을 왕으로 칭했습니다. 그런데 어찌 전하께서는 문 밖에 나가지도 않고 황제에 오르려 하십니까?”라고 하였다(삼국지 촉서 비시전). 이에 유비는 비시를 좌천한다.
유비는 손권이 관우를 해한 것에 분노하여 오나라를 정벌하려고 했었고, 황제에 오른 이후 직접 오나라 정벌에 나섰다. 위나라를 강하게 의식한 조운이 간했으나 유비는 이를 따르지 않았다. 222년(장무 2년) 2월, 유비는 친히 제장들을 이끌고 자귀에서 진군하여 무릉에 다다른다. 유비는 시중 마량(馬良)을 보내여 오계 소수민족을 회유하고, 진북장군 황권(黃權)에게 장강 북쪽의 제군을 통솔하게 하여, 이릉에서 오군과 맞선다. 연의에서 유비는 75만 대군을 일으켰다고 기록되지만, 실제 정사의 기록으로 추정하여 볼 때, 당시 유비가 이끌었던 촉한의 군세는 4만 ~ 8만 명 규모의 익주 본대와 형주 유랑군, 이민족의 연합군(총합 10~12만 가량)으로 추정된다.
6월, 육손은 병사들에게 띠풀을 가지게 하여 화공을 통해 유비군을 공격하고, 형세를 갖추어 동시에 공격하여 장남(張南), 풍습 등의 촉장의 머리를 베고 40여 곳의 진영을 격파한 후, 마인산에 포진된 유비의 군대를 포위, 공격해 유비군의 진영을 붕괴시키는데 촉군은 이 전투에서 대패하여 죽은 군사가 8만이 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정벌에 실패한 유비는 겨우 달아나 백제성으로 들어간다. 육손은 군사들을 이끌고 촉군을 계속 추격하였지만, 조비가 이를 알아채고, 오나라 강동 땅이 비어있는 틈을 타 오나라 본국을 공격하였기에 육손은 군사를 돌릴 수 밖에 없었다.
8월, 유비는 군사를 거두어 무현으로 돌아온다. 10월, 223년 4월 관우, 장비의 사망과 이릉전쟁으로 인한 화병이 심해진 유비는 제갈량에게 후사를 부탁하고, 이엄을 보좌로 삼고 영안궁에서 63살의 나이에 붕어(崩御)하였고, 8월에 혜릉(惠陵)으로 이장되었다.
그 후 유비의 후손들은?
263년 촉한은 멸망했다. 그와 함께 유선과 그의 일곱 후손들은 모두 위나라 내지(內地)로 옯겨졌다. 그 후, 유선의 6남인 유순(劉恂)이 안락공직을 이었으나 영가의 난에 휘말려들어 유비의 적자손들은 절멸당하였다. 그러나 유선의 동생인 유영(劉永)의 손자 유현(劉玄)은 살아남아 성한(成漢)으로 도망가 황제 이수(李壽)에게 안락공의 칭호를 받는다. 그 후, 동진(東晉)의 장수 환온(桓溫)은 성한을 공략, 멸망시켰는데 도중에 환온을 따라온 역사가 손성은 유비의 증손자이자 마지막 후예인 유현을 만났다고 한다. 그 후 유현의 소식은 불분명하지만 그의 후손은 중국 각지에 퍼져 촉한 소열황제 유비의 혈통을 잇고 있다고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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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어볼 거리]
유비와 조조
0) 서론
삼국지에는 수많은 인물이 나오는데, 그 각 인물들에 대한 사람들의 호불호가 극명하게 갈린다. 조조를 좋아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조조를 싫어하는 사람도 있고, 유비를 좋아하는 사람이 많음 만큼 싫어하는 사람도 많을 수밖에 없다.
위촉오에서 가장 사람들의 중점에 있는 것은 바로 조위와 유촉일 것이다. 이런 말하긴 그렇지만, 손오는 사람들의 인지도가 몹시 낮은 편이다. 굳이 마니아들 사이에서뿐만이 아니다. 나관중이 저술한 삼국지연의에서도 손오는 주연에서 비켜선 조연 같은 포지션이고, 삼국지 정사에서는 한술 더 떠서 손권을 황제가 아닌 일개 제후 정도로 취급하고 있다. 조조, 유비에 비하면 그 취급이 심히 열악한 것이다.
두 국가의 주체인 조조와 유비를 두고는 대단한 라이벌로 대하면서도, 손권은 그들과 격이 다르듯이 취급하는 것 역시 어느 정도는 사실이다.
이번 글에서는 조조와 유비에 대한 내용을 전개할 예정이다.
1) 조조와 유비의 이중 잣대
여기서 미리 밝혀두지만, 필자는 조조를 '매우' 좋아하는 사람이지만 유비를 '그 이상으로' 좋아한다. 그러므로, 되도록 냉정하게 중립적인 입장에서 글을 쓰려 노력했으나, 이 글에는 유비에 대한 필자의 개인적인 호의가 어느 정도는 첨가되었을 수도 있다.
본격적으로 글을 전개하기 전에 먼저 한 가지 여기서 짚고 넘어갈 점이 있다. 삼국지 매니아들 사이에는 조조와 유비를 좋아하는 사람이 매우 많은데, 그들의 특성은 여러 갈례로 갈려진다.
-유비를 좋아하는 사람
-조조를 좋아하는 사람
-둘 다 좋아하는 사람
-조조를 좋아하는 만큼 유비를 싫어하는 사람
-유비를 좋아하는 만큼 조조를 싫어하는 사람
그런데 문제는 조조를 좋아하는 사람과 유비를 좋아하는 사람의 차이다. 유비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대다수 조조의 능력 또한 인정하고 있다. 조조를 싫어하던 좋아하던, 그런 개인적인 호불호는 논외로 두고, 유비를 조조보다 윗선으로 보지 않는다.
한껏 높이 쳐도 '유비가 인덕이 더 좋았다.' 정도의 일부적인 우월함만을 인정할 뿐이다. '유비가 조조보다 능력이 뛰어났다.' '군재가 뛰어났다.' '군주로서의 역량 자체가 우월했다.'는 논리는 전개하지 않는다. 도리어 유비팬들 대다수는 '유비도 뛰어나지만 능력적인 면에서는 조조에게 반 수 정도의 쳐짐이 있다.'는 식으로 인정하고 있다.
그러나 조조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다르다. 그들은 왠지 유비의 능력을 인정하지 않는다. 그들은 거의 유비 안티에 가까울 만큼 유비에게 적대적이다. 일반화를 할 수는 없겠지만, 조조를 좋아하는 사람들의 절반 정도는 유비를 싫어하는 안티다.
그러므로 여기서 논하고자 하는 것은 '조조를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라, '조조를 좋아하는 만큼 유비를 싫어하는 사람'이며, 그런 사람들의 이중잣대이다.
- 서주를 여포에게 빼앗기다.
유비의 인용술을 폄하할 때 흔히 드는 것이 서주의 전례이다. 유비가 원술의 요격에 맞서 출전했을 때, 불안요소인 여포와 조표 등을 고려하지 않고 장비에게 서주성을 맡긴 것은 유비의 불찰이 아니냐, 하는 논리이며, 더 나아가 유비의 가장 큰 장점인 인용술 자체가 조조보다 못하다는 결론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그러나 문제는 조조 역시도 유비만큼, 아니 어떤 의미에서는 유비보다 훨씬 큰 인선 실패를 경험한 바가 있다. 바로 연주를 여포에게 빼앗긴 일이다. 이때 조조가 신뢰했던 장막, 진궁 등이 자발적으로 나서서 여포를 받아들이고, 그와 동시에 조조의 본거지인 연주는 여포에게 순식간에 넘어가고 만다. 유비가 여포에게 서주를 빼앗겻듯이, 조조 역시 여포에게 연주를 빼앗긴 전례가 있는 것이다.
물론 여기서 유비와 조조의 차이가 나온다. 유비는 여포에게서 서주를 탈환하지 못했고, 조조는 여포에게서 연주를 탈환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므로 군사적인 재능에 있어서는 조조 쪽이 당연 앞선다고 봐도 무방하리라 본다.
그러나 이 논쟁의 중점은 '인용술'에 있다. 조표 등 서주 호족들의 호응으로 서주를 잃은 유비와 장막, 진궁 등 연주 인사들의 호응으로 연주를 잃은 조조 중에서 과연 어느 쪽이 더 우월하거나 부족하다고 할 수 있다는 말인가. 이것은 다만 '유비나 조조 같은 인용술의 천재들도 대형사고를 칠 수 있다.' 정도의 이의를 제기할 뿐, 그 이상으로 논리가 전개되어 조조나 유비의 우월론이 될 수는 없다.
그런 논리 대로 간다면 배신으로 근거지를 잃어본 적이 없는 삼국지의 여타 제후들이 모두 조조나 유비보다 인용술에서 한발 앞서는 것이 되는 걸까? 그렇지 않다. 조조나 유비가 인용술의 귀재로 찬양받는 것은 실패를 만회할 수 있는 압도적인 무언가를 보여줬기 때문이다.
따지고 보면 조조나 유비만큼 인선 문제로 큰 실책을 경험한 군주들은 극히 드물다. 물론 유장도 내부에서 적과 호응 당하여 결국 익주를 빼앗겼고 마초도 동지들과 반목하여 패전하긴 했지만, 단 한 번의 배반으로 근거지 자체가 순식간에 적에게 넘어간 전례는 없기 때문이다.
- 이릉에서 육손에게 대패하다.
유비의 군재를 한없이 낮추면서 드는 예가 이릉대전이다. 이릉에서 거의 무명소졸이나 다름없는 육손에게 유비는 평생 지울 수 없는 대패를 경험함과 동시에 결과적으로 그 자신의 수명마저 단축되고 만다.
이릉대전이 유비 인생의 오점이며, 촉한 쇠락의 큰 원인이라는 데는 대부분 이견이 없다. 그러나 단 한 번의 패배가 한 사람의 군재 자체를 폄하하는 기준이 될 수는 없다. 병가에서 승패는 항상 있는 일이라는 격언은 거짓말이 아니다.
유비의 비교대상이 되는 조조는 어떠한가. 조조는 적벽에서 크게 패퇴한 전적이 있다. 기실 적벽대전은 이릉대전만큼이나 어마어마한 패배였다. 물론 결과적으로 이어지는 국력 소모 자체는 이릉만 못하더라도, 사실상 조조의 천하통일을 불가케 만들었다는 점에서 그 이의는 더욱 크다.
완성에서는 장수에게 패했고, 한중에서는 유비에게 패한 치욕이 조조의 인생에도 역시 남아 있다. 그런데 조조의 패배에 대해서는 관대하면서도 유비의 단 한 번의 패배를 두고는 마치 어마어마한 흠집이라도 되는 양 물어뜯으려 한다면, 그것은 이중잣대가 아닐까?
물론 조조가 유비보다 군재에서 밀린다는 말을 하려는 것은 아니다. 유비를 좋아하는 사람들도 군재에서는 조조가 앞서고 있다는 것을 부정하지 않는다. 다만, 필자가 말해두고 싶은 것은 한두 번의 대패가 한 사람의 군재 자체를 평가하는 기준이 될 수는 없다는 것이다. 만약 이런 논리 대로라면 삼국지에는 명장이 없다. 단 한 번도 위기를 맞은 적이 없는 인물로 평가되는 제갈량조차도 1차 북벌 때 가정에서 뼈아픈 인선 실수를 저지른 적이 있지 않은가.
조조가 적벽대전을 만회할 만한 전공을 각지에서 세웠듯이, 유비 역시 이릉대전을 만회할 수 있는 전공을 입촉, 한중 등에서 여실히 보여줬다.
그러므로 유비의 군재가 조조만큼은 안 될지언정, 여타 다른 인물들 사이에서는 특출나다고 보는 편이 타당하지 않을는지.
- 유비는 다만 인재의 덕을 봤을 뿐이다.
유비를 비하하는 수식어 중에서 가장 어이 없는 것이 바로 '유비 인재빨' 혹은 '유비 족보빨'이다. 즉 유비 자신은 별것도 아닌데 황실의 핏줄이라는 족보와 그로 인해 몰려드는 인재들 덕에 그만큼 성공했다는 논리이다.
그러나 이런 사람들의 착각과 다르게 유비와 조조 중에서 족보가 더 좋은 쪽은 당연 조조라 할 수 있다. 유비는 황제의 핏줄이라고 하지만 방계이며 그마저도 확실치 않은 정도이고, 현실은 평민이나 다름없는 신세였다. 반면 조조는 탁류 출신이긴 하지만, 그 할아버지 조등은 십상시 다음 가는 힘을 지닌 환관이었다.
특히 연의에서는 황실의 후손이라고 하자 관우, 장비가 알아서 복종하는 등 기연이 있었지만, 정사에서는 그런 사실이 전혀 없다. 관우, 장비, 조운, 제갈량 등이 유비에게 이끌린 것은 '유비의 가문이 좋아서'가 아니라 '유비 그 자체가 좋았기 때문'인 것이다.
다음으로 유비가 '인재의 덕을 봤다.'는 부분에 대해서 한마디 하자면, 그것은 절대로 흠이 될 수 없다. 군주가 인재의 덕을 봐서 국가를 키워나가는 것은 당연한 일일 따름이지 흠잡힐 일이 아니다. 세종대왕이 집현전 학자들 덕에 한글을 창제했다 해서 한글에 대한 세종대왕의 공덕을 부정할 수 없는 일 아니겠는가?
삼국지 군주들 중에서 가장 다재다능했던 조조조차도 휘하에 모인 인재들의 덕으로 그만큼 성공할 수 있었다는 당연한 진리를 사람들은 간혹 잊는 듯하다. 제갈량이 없으면 유비가 촉한을 건국하지 못했을 거라는 논리를 그대로 돌려서 조조에게 하자면, 조조 역시 순욱이 없었으면 그만큼 성공할 수 있었는지 자체가 의문스럽다.
그런데 조조를 좋아하며 유비를 싫어하는 사람들의 논리는 이렇다. '조조가 인재를 얻은 것은 자신의 힘이지만, 유비가 인재를 얻은 것은 가문의 힘이다.' 이미 이 부분은 위에서 반박했지만, 굉장한 이중잣대다.
조조가 자신의 힘으로 인재들을 끌어모앗듯 유비 역시도 자신이 타고난 힘으로 인재들을 끌어모은 것이다.
마니아들 사이에서 유비측과 조조측의 가장 큰 입장 차이가 바로 그것이다.
유비측 : 조조와 유비는 대등하거나, 조조가 낫다고 하더라도 미세한 차이뿐이다.(조조 = 유비)
조조측 : 점령한 영토의 차이만 보더라도 유비와 조조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조조 > 유비)
2) 서로 다른 재능
유비와 조조는 무척 비슷할 뿐만 아니라, 한편으로는 몹시 다른 능력과 행보를 보였다.
인선 실수로 근거지를 빼앗긴 아픈 경험이 둘 모두에게 있다. 공교롭게도 근거지를 빼앗은 인물이 여포라는 점과 그 원인이 내부에 있었다는 사실마저 일치한다. 조조는 여포와 호응한 내부 인사들 때문에 연주를 잃었고, 유비는 여포와 호응한 내부 인사들에 의해 서주를 잃게 된다. 그러나 그 이후의 결과는 사뭇 다르다. 결국 여포를 밀어내고 연주를 재탈환한 조조와 달리 유비는 끝내 서주를 되찾지 못했다.
무엇보다 이 두 사람은 근본이 전혀 다르다고 할 수 있다. 조조는 비록 대단한 가문을 뒀지만 환관의 피가 섞인 탁류 쪽이었고, 유비는 비록 비천한 신분이었으나 황실의 피가 섞여 있었다. 즉 나고자란 환경이 전혀 달랐다.
그래서인지 이 두 사람은 다르다. 조조 같은 경우 그 세력의 체제 자체가 체계적이다. 인사 배치 등에서도 능력과 실적, 그리고 신분과 성품 등을 모두 고려하여 체계적으로 배치하는 모습을 보인다. 조조는 스스로 구현령을 발표하며 오로지 능력으로만 인재를 기용한다고 말했지만, 사실 구현령은 반쯤 유명무실한 인선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또 손자병법에 주를 달았을 정도로 병법에 이해도가 높은 만큼, 그의 군사적 재능은 어느 정도 병법에 의지하고 있는 듯하다.
반대로 유비의 세력은 체계가 없다. 최소한 제갈량이 그 나라의 체계를 잡아주기 전까지는 하나의 국가라기보다는 유랑집단에 더 가까운 성질이 있었다. 흔히 조조의 인사 정책이 파격적이라고 하지만, 오히려 인사의 파격성은 유비를 따라갈 사람이 드물다. 유비만큼 신분이나 평판을 가리지 않고 두루 기용하는 인재관을 지닌 사람은 찾아보기 어렵다. 또 인재의 관직배치도 그만큼 파격적인데, 정서장군인 하후연을 잡자 황충에게 정서장군 작위를 내리는 것은 언뜻 상식의 궤에서 벗어난 인선이다. 특히 체계적인 조조의 관직과 달리 유비의 촉한은 그 관직배열이 종잡을 수 없을 만큼 파격적이다. 이런 점은 유비의 군사적 재능에서도 드러나는데, 병법에 기인한 조조의 군재와 달리, 유비는 일평생 전장에서 갈고닦은 노련함으로 그만한 능력을 얻게 된 듯하다. 즉 조조가 제대로 배운 천재라면, 유비는 제대로 배우지는 않았지만 천부적인 재능과 경험으로 마지막에는 마침내 한중에서 조조를 꺾을 만큼 성장한 것이 아니었나 싶다.
특히 군주에게 가장 중요한 용인술 부분에서 조조와 유비의 차이는 더더욱 두두러진다. 둘 모두 삼국지에서 제일가는 용인술을 지녔지만, 그 스타일은 전혀 다르다. 조조도 능력 위주로 인재를 기용하는 편이지만, 그보다 우선적으로 자신의 혈육을 챙긴다. 특히 그 혈육의 필두격인 조인, 하후연, 조홍, 하후돈 등은 다른 무관들과는 아예 그 격이 다른 대우를 받았다고 볼 수 있다. 그들이 능력면에서 오대장보다 윗선인가 아닌가는 미지수지만, 적어도 그 권력과 지위, 그리고 맡은 임무의 중요성 부분에서는 비교조차 되지 않는다.
또 조조는 '패륜아라도 능력만 있으면 기용하겠다.'는 그 구호와 달리, 능력이 아무리 뛰어난 인재라도 건방지게 굴거나 마음이 맞지 않으면 절대로 기용하지 않았다. 예를 들어 유비의 막하에서 간옹은 온갖 저질스러운 말과 무례한 짓거리를 유비 앞에서 아무렇지 않게 했는데, 이런 말하긴 그렇지만 간옹이 조조 앞에서 그런 행동을 했다면 진작 파문당하지 않았을까? 공융, 양수, 순욱 등의 예에서 보여지듯이 아무리 능력이 있는 인물이더라도 조조의 비위에 거슬리는 인물은 쉽게 살아남기 어려웠다. 그나마 예외가 있다면 곽가 정도였을까.
그러나 유비는 다르다. 유비는 인재를 배치할 때 자신의 혈육을 별로 기용하지 않았다. 그나마 있다면 상용에 배치한 유봉 정도뿐이다. 그 외에는 유비의 혈육 자체가 정사에는 별로 등장하지 않기 때문에, 유비의 인재들은 모두 유비와 다른 가문의 인물들이다. 그러나 그들을 대하는 유비의 태도는 조조와 사뭇 다르다. 유비는 관우, 장비, 조운 등과 한침상을 쓸 만큼 각별했고, 제갈량을 대할 때는 정겹기 그지 없었으며, 간옹의 무례함도 아무렇지 않게 웃어넘겨줄 만큼 융통성 있는 성격이었다.
조조도 인재를 아낀 편이고 하후돈에게 각별한 애정을 쏟았지만, 자신의 혈육이 아닌 다른 인물을 그렇게까지 총애했다는 기록은 찾아볼 수 없다. 오히려 조조와 다른 막하 장수들 사이에는 철저하게 공적인 분위기만 감돌 뿐이다.
유비 세력이 끈끈한 정으로 이어진 가족적인 분위기였다면, 조조의 세력은 철저히 능력과 실적으로 평가하는 조금 냉정한 분위기였던 것이다.
그리고 이들의 결정적인 차이는 바로 민심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 시대의 민초들이 선택한 사람은 가장 강했던 조조가 아니라 가장 약했던 유비였다. 조조가 남하한다는 소식을 듣자 수많은 백성들이 집도 절도 없는 유비를 쫓아 힘겨운 피난길에 올랐다는 사실만 봐도, 유비와 조조의 차이를 알 수 있다.
이 부분은 드라마 신삼국에서 재미있게 묘사했는데, 조조가 '내가 세상을 버릴지언정 세상에 버림받지는 않겠다.' 말한 것과 달리 유비는 '내가 세상에 버림받을지언정 나는 세상을 버리지 않겠다.'고 말했다.
사실 조조는 백성들에게 몹시 혹독한 편이었다. 서주에서 수많은 백성들을 잔인하게 학살한 것을 필두로, 자신의 백성들에게 어마어마한 짐을 떠안겼으니, 위나라의 강력한 국력 뒤 숨은 장막에는 그 시대를 살던 민초들의 피눈물이 어려 있던 셈이다. 조조의 실제 생각이야 어떻든, 정사에 기록된 조조를 보면 생명을 몹시 경시하는 듯하는 사상이 엿보인다.
이와 달리 유비는 백성을 위한 군주였다고 봐도 무방하다. 그것이 유비의 위선인지 아닌지는 알 수도 없고 알고 싶지도 않지만, 최소한 백성들이 유비를 마치 구세주처럼 따랐던 것만은 분명한 사실이다. 손권이나 조조는 몇 번 저지른 학살이나 약탈의 기록을 유비에게서는 찾아볼 수 없다.
또 수많은 인재를 숱하게 죽인 조조나 손권과 달리, 유비가 자신의 슬하 인재를 무고하게 죽인 기록은 단 하나, 자신의 수염을 놀린 장유를 처형했다는 정도뿐이다. 물론 장유를 처형한 일화는 유비 인생의 지워질 수 없는 오명으로 남겠지만, 유비만큼 생명을 존중한 사람이 당시에는 몹시 드물었다는 것은 부정하기 어렵다.
즉 조조가 생명을 경시하는 사람이었다면, 유비는 생명을 존중하는 사람이었고, 이 차이로 말미암아 백성들은 조조가 아닌 유비를 선택한 것이나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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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비는 영웅인 이유]
1.처음부터 끝까지 자신의 야망을 버리지 않았고, 그것을 실현시키기 위해 노력하였다.
유비의 가장 큰 장점이면서, 이건 시대를 막론해서 현대인들도 꽤나 본받을만한 점이 있지 않나 한번 생각해봅니다.
분명 개인이 가진 능력으로 꿈을 쫓아가다가도 한계점에 맞이할 때가 있습니다.
거기서 대부분은 절망하거나, 아니면 순응해서 상황을 받아들입니다. 아주일부만이 계속 밀고나가고, 거기서 더욱 망가지는 사람도 많습니다.
그리고 아주 정말 일부만이 자기 야망을 잃지 않고 실현합니다.
유비는 정말 아무것도 없는 상황에서 자기가 한실을 부흥하고 싶다/황제가 되고 싶다(이 두가지가 공존할 수 없을 수 있는데 일단 유비는 공존시켰습니다.)는 꿈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고 이루어 냈습니다.
일단 어린 시절부터 은암중에 황제가 되고 싶다는 꿈을 비춥니다.(황제의 수레에 타고 싶다는 표현으로)
꿈도 다른 사람이랑 스케일이 다르게 황제입니다. 삼국지에서 왕도 아니라 황제를 노렸던 인물이라면 딱 2명 생각납니다. 유비와 원술. 후자 쪽의 결과물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본다면 184년 황건의 난에 뛰어 들었을 때부터, 유비가 천하를 향해서 첫 발자국을 내딛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위의 시점이 유비 나이가 23일 때죠.
그리고 221년 스스로 칭제 할 때 까지 37년. 23살 혈기 짱짱한 나이 부터 시작해서 환갑의 나이까지 노력해서 자기 꿈을 이루어 냈습니다.
과연 삼국지 인물 중에서 중간에 뜻을 이루지 못하고 사라졌거나, 끝까지 남았지만 자기 처음 뜻을 변하지 않은 인물이 있었나를 생각해보면 유비는 고평가 받을만 합니다.
2.기반이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성장하였다.
유비는 엄밀히 말해서 동내 깡패 수준의 협객집단에서 시작해서, 황제에 자리에 까지 올라갔습니다.
황족이라는 브랜드가 있지 않았느냐! 고 말할 수도 있지만 사실상 어디 남남이라고 해도 될 수 있을만한 계보입니다.
아마 당시 한나라에 수백의 유비와 같은 상황의 황족이 있었지만 그 들은 역사서에 이름도 남기지 못하고 죽어갔습니다.
유비와 더불어 이름을 남긴 황족들인 유언,유장,유표,유우 등을 살펴보면 그들 모두는 황족이라는 것에 보태서 일대 주자사에 임명된 사람이란 공통점이 있죠.(이게 한나라에서 주목이나 주자사는 황족만 할 수 있다는 무슨 정책 때문으로 압니다.)
유비는 근데 그들과는 다르게 시작점에서 아무것도 가지지 않고 시작했기에 사실상 황족이라는 브랜드 가치에서 조차 저들 보다 딸린다고 할 수 있습니다.
황족이 아닌 다른 군벌 세력과 비교해 봅시다.
대형 군벌 세력으로 등장한 공손찬이나 동탁은 유비와 시작 점이 비교 대상이 되지 못 합니다.
사세삼공이란 가문 브랜드에 그 명망덕에 벼슬가 영지까지 받고 시작했던 원씨 형제랑도 비교 대상이 못 됩니다.
조조 역시도 그 "원소"에 비교해서 딸리는 정도지 삼국지 전체로 보면 아주 시작점이 좋은 편이죠. 당대 1% 계층이니.
조숭의 양자가 된 덕에, 아버지는 큰 부자에 지역의 실력자. 거기에 조씨와 하후씨 일가가 조조 첫 출병시 주축 세력들이 되어주었죠.
일단 적어도 '고향'이라는 거점은 있었고, 적어도 조정에 줄을 될 수 있을 정도로는 연줄이 있었습니다.
고향에서 패거리들과 함께 뛰쳐나와 거점없이 떠돌아 다닌 유비에 비하면 훌륭하죠.
유비와 같은 협객 집단에서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는 인물이 손견인데.
이 손견조차도 손씨의 후손으로 유명해서 강동에서 상당히 명성이 있었던걸 비교하면 유비는 빈털털이로 시작해 성공한 유일한 인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3.자신 스스로를 브랜드로 만들다.
지지 기반도 없는 상태에서 꿈만 큰 유비가 행할 수 있는건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유비는 잘난 군웅들 사이에서 살아 남기 위해서 자기 스스로를 브랜드로 만들었다고 평가 할 수 있습니다.
조조가 도겸에 쳐들어 올 때, 계란에 바위치는 식으로 조조에게 덤벼 들면서 첫번째 브랜드를 만듭니다.
(이게 상당히 유비 커리어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집니다. 유비가 먼 훗날까지 내다 본거지는 알 수 없지만 이게 단기에 얻은 효과도 컸지만 그 못지 않게 두고두고 도움이 됩니다, 여러모로 조조는 유비에게 없어서는 안 될 존재였다고 봅니다.)
●첫번째 브랜드란 인의를 위하는 유비라는 이미지 입니다.
이 이미지는 서주에서 학살을 자행한 조조와 극명하게 대비되면서 더욱 더 그 효과를 보게 됩니다.
(이 후 이 효과는 조조가 성장하면서 더 커지죠. 위에도 말했지만 정말 여러모로 조조는 유비의 성장에 도움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두번째 브랜드란 한실의 수호자라는 이미지죠.
다른 황족과 달리 천박스럽게 보일지라도 자기가 황족이란 사실을 뽐내기에 주저함이 없죠.
(어차피 유비는 다른 주목,주자사들과 달리 자기가 직접 내세우지 않으면 누가 알아줄수도 없습니다.)
거기에 황제와 친목을 쌓고, 동승의 모반사건에 가담하면서 한실의 수호자라는 이미지를 확고히 합니다.
(이 때가 조조의 휘하에 있었을 때인데 겁도 없이 가담합니다. 이걸보면 유비는 상당히 큰그림을 그릴줄 압니다. 지금 목에 칼이 들어 올 수 있는 상태라도 향후에 자기에 이득이 된다면 거침없이 뛰어들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 역시 동승의 모반사건이 걸려 동승일파가 잔인하게 처형당하고 한 황실의 권위가 실추 됨에 따라 더욱 가치가 빛나게 됩니다. (거듭 말하지만 정말 유비는 상대가 조조가 아니라 원소였다면 어쩌면 성장하지 못했을지도 모릅니다.)
이것을, 자신이 만든 브랜드가 아니라 원래 가지고 있던 브랜드가 아니었냐고 따질 수도 있습니다.
다른 더 잘나고 더 권위 높은 황족들이 못 세운 브랜드를 촌구석에서 돗자리 짜던 유비가 날름 먹게 되었다는건 유비가 대단하다고 평가 할 수 있습니다.
●세번째 브랜드이자, 가장 중요한 브랜드입니다. 조조의 유일한 대항마란 이미지입니다.
이 점이 정말 칭찬할만한게 유비는 꾸준히 조조와 대조되는 행보를 의도적으로 걸으면서 조조가 커지면 커질수도 아무것도 가지지 않은 유비에 대한 천하에서의 평판이 올라가는 효과를 보게 됩니다.
이것이 단지 유비 자신만이 스스로 그렇게 평가한게 아니라, 천하의 여러 명사들이 유비를 그렇게 평가했다는 것에 의미가 있습니다.
유비는 마치 조조가 앞으로 천하의 주도권을 잡을 사람이란걸 예측한듯이 큰그림을 짰습니다.
우연인지,필연인지는 모르겠지만 우연이라면 억새게 운이 좋은거고, 정말 조조가 앞으로 천하를 잡을 사람이란걸 예상했다면 놀라울 정도의 혜안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 부분에 관해서는 밑에 따로 조조와 엮어서 쓰도록 하겠습니다.
조조는 유비 일생에서 빼 놓을 수 없을 정도로 많이 엮인 인물이라서...
(여담이지만, 정사 유비편에서 가장 많이 이름이 등장하는 사람은 관우도 장비도 제갈량도 아닌 바로 조조랍니다.)
4.큰 그림을 그릴 줄 알았고, 그것을 위해서 피하기 힘든 유혹도 뿌리쳤다.
눈 앞에 큰 파이가 있는데, 그것을 거부할 수 있는 사람은 얼마 없습니다.
거기에 고생 고생한 사람이라면 큰 목표를 세웠더라도 누가 눈 앞에 당근을 던져주면 그것에 홀릴 사람이 많죠.
그런데 유비는 처음에 정한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 철저하게 전략적인 행보를 보입니다.
조금 과장하면 유비의 모든 행동에 큰그림을 잡고 행동했다고 봐도 과언은 아닙니다.
●일단 첫번째 행동은 위에서 언급한 도겸을 구원하러 서주로 간 것입니다.
유비는 천하에 나를 알아주는 인물이 있다는것에 고마워하면서 세간의 눈을 의식해서 행동하죠.
언뜻 충동적인 행동이고 무리한 행동 같지만 유비는 개인으로서는 장기적 관점에서 결국 최선의 행동을 했습니다.
과연 그 타이밍이 아니었다면 유비가 공손찬 밑에서 나올 적기가 있었을지 의문입니다.
조금만 늦었어도 중앙 무대로 진출할 시기를 놓칠 수 있었죠. 유비는 이 위험한 기회를 덮석 받아들이고 운이 좋았는지 피해 없이 서주까지 먹는 결과를 얻습니다.
그리고 위에서 말했던 천하에 어진 인물이라는 브랜드를 확립시키는데 성공합니다.
●서주를 거절하다.(너무 유명하니 설명 생략)
●헌제와 친분을 쌓고 동승에 모반사건에도 가담한다.
위에도 말했듯이, 이것으로 인해서 한실의 수호자라는 브랜드 가치를 얻게 되죠.
더욱 대단하다고 평가 받을 수 있는 부분이 이 당시 조조의 휘하에 있던 유비는 언제든 조조에 의해 목이 달아날 수 있는 위험에 처해 있으면서도 이러한일을 대담하게 벌이죠.
정욱은 그 당시 조조에게 유비를 죽이라고 간언까지 했을 정도인데, 이런 위태로운 상태에서 유비는 아슬아슬 줄타기를 하면서 조조 밑에서 조조를 대담하게 속이는 일을 합니다.
그리고 이 한실의 수호자라는 브랜드 가치는 향후에 아까 맨 처음부터 말한 한실의 수호자 이미지와 황제가 되고싶다는 상반된 꿈을 동시에 실현시켜줍니다.
나중에 위나라가 건국됨에 따라서 유비는 한실의 수호자 이미지에 맞게 "한 황실의 후손인 "내"가 "황제"가 되어서 한실의 명맥을 잇는다"는 아주 그럴듯한 이유로 두개의 공존을 실천시키죠.
●조조를 속이고 달아난 점.
천자를 조조가 능욕하는 장면을 목격하고도 유비는 자신을 컨트롤하고 분노한 관우까지 어느정도 제어를 가합니다.
그리고 조조 밑에 있으면 위험하다는 사실을 판단하고 자신을 철저히 위장합니다.
진수 평에도 있죠. 조조의 도량이 자신을 받아들이지 못할것이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2번의 위장을 통해 그 조조를 속이기에 성공하고 달아나는데 성공합니다.
사실 동승건도 그렇고 조조 밑에 있었으면 위험한 상태였죠.,..
●형주를 받지 않은 점.
이 부분은 제갈량도 후에 볼멘소리를 했을 정도의 일이죠.
여기서 유비는 두가지중 하나를 선택합니다. 천하의 평가냐 형주냐.
유비는 과감하게 천하의 평가를 선택했고, 또한 형주의 백성들 따라오는걸 허락합니다.
여기서 또 다시 조조는 형주에서 민간인 학살 사건이 나오고 유비는 자신과 조조의 차별화에 다시 한번 성공합니다.
●간사하게 유장의 익주를 먹은 점.
약간 간사하다시피하게 유장의 익주를 먹습니다.
여기서 한가지 짚고 가야할건, 유비는 또 다시 자기의 평판은 지키면서 익주는 삼키는 일에 성공합니다.
정말 어쩔 수 없이 익주를 먹는걸로 보이게 만들어서 명분과 실리를 동시에 얻습니다.
원소가 기주를 날름 삼켜서 자신의 친구에게 마저 비난 받게 되었다는 것과 대비할 때, 유비가 짠 큰그림은 좋았다고 생각이 듭니다.
이렇듯 유비는 아슬아슬하게 명분과 실리 사이에서 줄타기 하는데 성공합니다.
*그리고 덤으로 이건 그냥 개인적인 의견인데 유비의 행보는 마치 조조를 자기의 라이벌로 설정하고, 조조가 천하의 대세를 잡을 인물이란걸 미리 알고 있었다는 기분이 듭니다. 위에도 말했지만 조조가 아닌 다른 군웅이 패권을 잡았다면 유비가 설 자리가 없지 않았을까 싶네요.
5.미칠듯한 인간자석.
게임에서는 흔히 "매력"으로 표현되는 능력치에 대해서 유비는 지 조상인 유방을 꼭 빼다 닮았습니다.
장비,관우 같은 사람이 평생에 걸쳐 유비를 따라 다닌 것.
특히나 관우는 모든 영화를 내려놓고 다시 유비를 쫓아서 천리행까지 벌입니다.
주인에 만족 못하던 조운이 유비에게 꽂히죠
간옹이 고향에서부터 죽을 때까지 따라녔죠.
미축,미방이 전 재산을 받치면서 유비를 후원했죠. 거기에 조조가 벼슬까지 내려서 태수에 삼았지만 그것마저 거절하면 유비를 따라갔죠.
원소의 부하인 진진이 그 거대 세력에서 나와서 떠돌이 유비를 따라나선 점.
유표 밑의 천하의 명사들이 유비와 교제하길 좋아해서 유표가 불안해 했을 정도인 점.
그래서 사마휘의 마음에 들고 그 제자인 서서가 유비에 임관하죠.
서서는 어머니 때문에 자기 의지로 조조에게 가게 되지만, 유비가 죽었을 때 위군 진영중 홀로 슬퍼했다고 말합니다.
그 중 이적 역시 죽을 때까지 유비를 따라다닌 것.
한 성깔 하는 법정,장송등이 유비에 껌뻑 죽어다는것등.,.,.
그리고 결정적으로 손권의 도량은 사람을 받아들일 정도는 되나, 능력을 만개 시킬 정도는 못된다고 평한 제갈량이 떠돌이 유비에게 임관한 점.
외려 정말 집도 절도 없는 유비에게 이렇게 붙은것이기에 새삼 유비라는 사람이 얼마나 매력이 넘쳤다는걸 알수 있습니다.
●그 중 인상 깊은 일화가 있습니다.
원환이라는 유비 밑에 있다가 여포 밑으로 옮긴 사람이 있습니다.
유비 조조와 여포가 전쟁할시 여표는 원환에게 유비를 욕하라고 지시하지만 거절 당합니다.
세차례에 걸쳐 거절하자 화난 여포가 원환을 죽이려 하지만 그럼에도 하지 못하겠다고 당당히 말하고 여포는 그를 죽이지 못합니다.
이 원환이 서서,황권 둘과 더불어 조비 진영에서 유비가 죽었을때 슬퍼한 사람들이라고 합니다.
잠시라도 유비 밑에 있던 인물들이 유비를 항상 그리워 할 정도로 매력이 있던 인물입니다.
*제가 아는 선에서 유비가 부하하라고 해도 싫다고 욕하면서 진짜 떨어져 나갈려는 사람이 딱 한명 있었는데, 이름이 잘 기억이 안나네요.
6.대인배적 기질과 의협 기질 있었다.
유비는 청년시절 자신이 직접 황제의 칙사인 독우가 자신을 만나주지 않는다는 이유로 독우를 매질했죠.
뇌물을 받치기는 커녕 독우를 패고 달아날 정도로 대담한 인물이었습니다. - 이 장면은 건석의 아저씨를 매질한 조조와 오버랩 되더군요.
그리고 관우,장비가 서생이나 꼼생이를 과연 평생 따라다녔을까 생각해보면서 처음에 협객집단에서 시작한 유비 패거리의 우두머리인 유비는 의협기질이 강한 인물이 아니었을까 하는 추측을 해봅니다.
그리고 동승의 모반사건 가담,유표에게 조조의 침공을 주장하는 장면,조조를 속이는 장면 등 여러가지 장면에서 대담성이 나타납니다.
그리고 연의에서는 눈물이 흘리면서 나온 유종을 못 치겠다고 말하는거나 백성들을 못 버리겠다고 말하는 장면들이
실제론 "차마 그렇게는 하지 못하겠다." "차마 버리지는 못 하겠다." 같은 식의 장면이었는데, 사뭇 느낌이 다른 점이 차마 ~하겠다는 표현이 어려운걸 알지만 돌아가겠다는 유비의 대인배적인 성질이 확실히 들어나는 부분이라서 좋았습니다.
그 외에도 황권의 가족들을 계속 대우한 것이나 제갈량에게 황제가 되도 좋다고 말한것에 대담함 그리고 자기가 신뢰를 준 사람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이 들어납니다.
(후에 황권의 아들은 등애에 맞서 끝까지 싸우는데 유비의 선택이 틀리지 않았다고 생각 됩니다.)
7.높았던 천하의 평가와 그에 걸맞은 능력.
당대에 높은 평가를 받은 인물이었죠. 한가지는 인의에 대해서 두가지는 그 자체의 영웅적 기질에 대해서
특히, 유비는 조조와 엮여서 같이 언급된 경우가 많은데 그 부분은 따로 쓰겠습니다.
일단 유비 개인이 받았던 평가만 보면.
별칭중 하나가 난세의 효웅이었죠. 노숙은 유비를 평가하면서 효웅(길들여지지 않는 영웅)이라는 평가를 씁니다.
거기에 위에 언급했던 정욱이 유비를 죽이라 할때 유비가 천하의 영웅이라고 조조에게 위험하다고 간언하면서 였습니다.
그리고 역시 위에서 언급되었던 유표가 유비가 천하의 명사와 사귀는걸 불안해 한 이유는 자기 그릇에 담을 수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죠.(는 노숙의 예측입니다.)
손권도 또한 유비의 능력에 대해 두려워 했으며, 나중에 촉오 전쟁시 육손 역시 유비에 대해 거듭 칭찬합니다.
오나라와 전쟁시 형주 남부가 유비가 온다는 소식에 유비에 가담한 점이나 유비가 있을땐 잠잠하던 이민족이 반란을 일으킨 점을 봤을때 유비가 가진 위압감이 상당한 인물이었다고 평가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삼국지 연의에서 조조가 제갈량의 능력에 경계하는 부분이 제갈량이 아니라 유비였을거라고 추측해 봅니다.
제갈량이 아닌 유비가 군 총 사령관이었으며, 제갈량은 유비 사후에 군권을 얻었을거라고 생각됩니다.
그 이유는 가후가 유비와 제갈량을 언급하면서 유비는 천하의 영웅이고 제갈량은 명재상이다 라고 평가합니다.
즉,제갈량의 역활은 소하와 같은 재상으로 제한했고, 유비를 영웅으로 언급합니다.
비슷하게 제갈량이 북벌 당시 위나라가 촉에는 유비만 있는 줄 알았는데 공격이 들어와서 놀랐다는 말이 있죠.
즉, 조조와 위나라가 경계했던건 제갈량이 아닌 유비였을걸로 추측이 됩니다.
조조가 이거 직접 언급하는 부분도 있는데 역시 조조는 따로 설명하겠습니다.
8.그리고 그 모든걸 의리 때문에 한 순간에 버릴 만큼 어리석었다.
때는 난세, 수많은 군웅이 등장했다 사라졌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마지막까지 살아남은 세 사람 중 한명이 되었고, 수많은 굴욕과 인내를 하면서 결국 자기의 꿈을 이룹니다.
개인적으로 일의 성과를 상중하로 구별해 보겠습니다.
下는 참지 못해서 일을 그르치게 되는 것입니다. - 개인적인 감정이 앞서서 일을 그르친 원소의 경우 下에 해당하는 짓을 했다고 봅니다.
中은 참았는데도 원하는 것을 이루지 못한겁니다. - 대다수 평범한 사람들이 여기에 해당합니다.
上은 참아서 원하는 것을 이루는 사람입니다. - 성공한 사람들이 그렇죠. 자식을 죽인 장수와도 손 잡은 조조는 上에 해당한다고 봅니다.
그런데 유비는 참고 또 참아서 자기가 원하는 것을 얻었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것을 개인의 감정에 치우쳐서 모두 다 잃어 버렸습니다.
上에 해당했다가 스스로 下로 가버렸지요.
하지만 유비를 어리석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감히 어리석다고 말하기엔,참지 못해서 일을 그르쳤다고 평가하기엔, 그는 범인은 감히 할 수 없을 만큼 평생에 거쳐 인내해왔죠.
유비는 무엇이 어리석고 무엇이 현명한지를 누구보다 잘 알면서 평생을 명분과 실리 사이에서 줄타기해온 사람입니다.
그런 유비가 어리석은 길을 택합니다.
거기에 원소의 경우는 몰라서 그랬지만(나는 그래도 성공할거라고 생각했고) 유비의 경우는 결과를 뻔히 알고도 자기가 스스로의 길을 택했으니, 더 바보같죠.
순전히 자신의 형제(도원결의는 구라라고 반박이 될 수도 있겠지만)와의 의리를 지키기 위해서 평생 참고 또 참았음에도 자신이 이룩한 모든게 허사로 될걸 각오하고 이릉전투를 감행한 유비의 선택을 어리석지만 정말로 대단했다고 평하고 싶네요.
가진게 많을수록 잃는걸 두려워하기 마련인데, 그런 위치에 올랐으면서도 형제와의 의리를 선택한건 정말 힘들죠. 거기에 그 자리가 정말 고생고생해서 올라간 것일수록 더욱.
*그리고 개인적으론 유비-관우-장비가 의형제일 가능성이 크다고 봅니다.
도원결의는 소설 속 일이지만, 정사에도 나오는 유비,관우,장비가 형제와 같았다는 여러 번의 언급.
그리고 장비에 대해서 유비의 의제라고 칭하는 부분이 나오죠. 그런데 관우와 장비가 의형제였다는 표현도 있습니다.
유비-장비가 형제,관우-장비가 형제라면 결과적으로 유비-관우-장비 의형제였다고 봐도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당시 시대가 의형제 맺는게 흔했다는걸 생각하면 더욱더요.
이상으로 사람 보는 안목이라던지,군략, 무력, 정치력 이런 부수적인거 한 번 배제해 보고 '어떤 삶을 살았는가?'를 되돌아 보는 형식으로 글을 써보았습니다.
그리고 유비의 생애는 충분히 영웅적 풍모가 풍겼다고 평가하고 싶습니다.
계백,로버트리,한니발,나폴레옹,게르트 롬멜 등등. 사람들은 실패한 영웅에서 카타르시스를 느끼죠.
무언가 부족한듯한 2%를 채워주고 싶은 욕망도 들면서.
이런걸 고려했을때, 뭔가 아쉬운듯한 유비의 생애는 독자들한테 감동을 줄만하고 본 받을만한 점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 생애는 비록 불완전한 것이었지만 영웅적인 삶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완벽하고 능력있는 영웅도 멋지지만, 바닥에서 시작해서 한 평범한(물론 다른 사람에 비하면 비범한) 인물이 포기하지 않고 계속해서 앞으로 나가가서 정상에 자리가 갈려고 노력하는 소시민적 영웅도 멋있습니다.,..
저 같은 경우는 삼국지 읽으면서 처음부터 끝까지 가장 좋아하는 인물을 고르라면 유비였습니다.
완벽한 사람이 없듯, 완벽한 삶도 없죠. 유비는 실수도 많고 잘못도 많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웅이라고 단언하는 것은 위와 같은 이유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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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비는 과연 영웅일까?]
유비는 영웅인가?
아마 지금으로부터 약 100여년 전에 이런 질문을 던졌더라면 '멍청이'라는 말을 들었을 것이다.
그가 영웅이라는 것은 당연했으므로,
그러나 지금은, 우리는 그 '당연한 것'을 의심하고 있다.
다수의 독자와 학자들은 유비를 대개 2가지 관점에서 이해하는데,
그것은
1) 사기꾼
2) 범부이다.
전자의 경우라면 유비는 조조에게나 어울릴법한 간웅의 범주에 포함되어 버린 것이며, 후자의 경우라면 그는 무능력하고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는 인물일 뿐이다. 그래서 그를 옹호하든 아니든 그렇게도 할 말이 많은지 모른다.
그래서 나 역시 그를 논할 때 '영웅과 범부 사이'라는 표현을 쓴다.
도무지 갈피를 잡기 어려운 인물, 그가 바로 유비이다.
1. 승리보다 패배가 잦은 인물 - 왜 그는 영웅이라 말하는가
유비과 촉한을 예찬했다는 < 연의 >에서도 유비의 패배는 감출 수 없는 최대 약점이다. 그의 기록은 승리보다 패배가 더 많다. 물론 나관중은 이것을 < 맹자 >의 다음 구절과 같은 논리로 적당히 덮어버리고는 한다.
"하늘이 대저 대장부를 들어 쓰고자 할 때에는 그 근육을 고단하게 하고 그 마음을 고통스럽게 한다"
즉, 유비의 환란은 유비 스스로의 책임이 아니요, 인간의 노력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운명적인 것이 있다는 말이다.
물론 그렇게 설명할 수 있는 부분이 유비에게 있기는 하다. 그렇지만 인간은 과정보다 결과를 놓고 말하기를 좋아하는 법이니, 유비는 그런 측면의 접근법에 있어서는 철저하게 약점이 많은 인물이다.
유비는 이 점에서 논리적 결함을 가지게 된다.
그렇다면 이에 대한 반론은 '과정'에 대한 접근의 정당성으로부터 찾아가야 함이 마땅하다. 왜 그러한 결과가 도출되었는가를 밝혀 그 정당함을 인정받을 수 있다면, 유비에 대한 일반적인 비판과 조조에 대한 상대적인 약점을 충분히 만회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이것을 대개 2가지에서 찾는다.
1) 유비는 여타 군웅과 출발점부터 다르다.
유비에 대한 일반적인 접근에 있어서, 결과론으로 감정하는데 이의를 제기할 수 있는 첫 번째 근거는 '여타 군웅과 유비의 차이'이다. 예컨대 원소와 조조 등과 같은 일반 군웅들은 보통 주목 이상의 지위를 가지고 있어 군사/경제적인 측면에 있어 강점이 많다. 다만, 그들의 실패는 가지고 있는 정치적 자산을 어떻게 운용하는가에서 결정된다. 그러므로 동등한 관점에서 비교론을 세우기 용이하다. 그러나 유비는 그 출발점에 있어서 엄격히 차이를 두어야 한다. 그것은 유비가 장세평과 소쌍 등 유주의 대상인들로부터 지원을 받았다고는 해도, 의군의 성격을 탈피하지 못했다는 점에서 차이를 두어야 한다는 것이다.
즉, 군웅으로 조기에 성장하는데 한계가 있었다는 것이다.
원소와 조조는 일찌감치 주목 등 고위 관직에 등용됨으로써 군사/경제적인 자산을 어느 정도 확보할 수 있었고, 설령 의군이라고 해도 손견은 태수 이상이었으므로 여유있는 기반을 가지고 출발할 수 있었다. 반면 유비는 첫 관직이 현위 그쳤고, 평원상으로 자신의 기반을 닦기까지 상당 기간을 걸렸다는 것이다. 그동안 여타 군웅은 이미 스스로의 세력을 정립했을 뿐더러, 유비가 위치하던 중원은 이러한 군웅의 틈바구니 속이었다. 그러므로 세력이 미약한 유비는 강력한 군웅들의 사이에서 성장에 제한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이 점을 간과한 채 유비를 논한다는 것은 문제가 있다. 그의 실패는 어쩌면, 그의 출발점이 여타 군웅에 비해 늦었다는 점에서 보면 어쩔 수 없는 부분이었다.
2) 유비의 성공은 과정상으로 보면 매우 주목할만한 성장이다.
유비를 과정론에서 접근해야 하는 또 다른 이유는 이러한 어려움 속에서 그가 3강으로 성장했다는 점이다. 위, 촉, 오 3국으로 대표되는 삼국시대는 익주 기반의 유비, 형주, 양주의 오, 그리고 북방의 패자 위의 각축전으로 우리에게 널리 알려져 있다. 그 와중에 유비는 빈약한 자본으로 어려움을 극복하고 3강으로 성장하지 않았던가. 그렇다면 그의 성공은 여타 군웅, 특히 조조나 손권에 비해 높게 평가할만한 부분이 있다. 또한 조조나 손권이 매우 탁월한 지략이나 정치적 감각을 갖춘 인물이라는 점을 감안해보면 더욱 그렇다. 스스로 그러한 어려움을 극복하고 대등하게 성장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그렇게 본다면, 유비의 성공은 그가 사람을 얻고 그들을 이끌어 하나의 산물 - 촉 - 을 만들었다는 점에 나름대로 가치를 인정해줄 필요가 있다.
2. 유비에게 쏟아지는 비난은 주로 조조와의 비교론의 산물
그럼에도 유비가 오늘날 비난을 받게 되는 것은 순전히 조조와의 비교론에서 나온 것이다. 즉, 조조는 이런데 유비는 아니라는 식의 관점에서 비교론이 만들어지고, 주로 그것은 유비를 격하하거나 그의 성과를 깎아내리는데 집중된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비판도 다양성의 관점 위에서 세워져야 하는 만큼, 조조와 유비를 일률적으로 비교하는 것은 그 시작부터 잘못된 것이다.
오히려 조조와 유비 두 사람을 서로 장점을 살려 비교해가는 '상생적 비교'를 하는 것이 역사를 보는 우리의 입장에서 도움이 되는 접근이라 할 것이다. 잘못은 버려야 하고 장점은 배워야 하는 것이라면, 굳이 잘못까지 밝혀내기 보다는 장점만 추려내는 것도 지혜로운 방법이라 할 것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어떤 측면에서 보면, 손권은 스스로의 힘도 없이 손견과 손책의 기업 위에서 출발했다는 점도 약점이 될 수 있고, 조조는 도덕적 결함에서 비판을 받을만한 점도 약점이 될 수 있다. 즉, 누구에게나 약점을 잡자면 한도 끝도 없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장점을 발견하고 배워가는 것이 더 중요하다. 내가 보건대, 유비는 황족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몰락했고 거의 평민과 다를 바 없는 가운데에서도 거병하여 일국의 주인이 되었다. 그 와중에 그의 정치적 이념이나 판단, 성과에 대해 다양한 견해가 존재할 수 있다. 그러므로 < 정사 >의 저자 진수의 평가조차도 반드시 정답이라고만 할 수는 없다. 다만, < 정사 >이기 때문에 그 의미를 높게 인정할 뿐이라는 것이다.
오늘날에 있어서 사람과 사람의 장점과 단점을 동시에 놓고 비교한다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오히려 각각의 장점을 발견하고 오늘날에 적용해가는 자세가 더 중요한 것 - 그렇기에 유비라는 인물의 장점을 나름대로 찾아가는 자세가 더 중요한 것이 아니겠는가.
내가 보기에는 오히려, 조조, 유비, 손권은 모두 최고의 영웅으로 손꼽을만한 인물들이다.
이 혼란한 난세에서 스스로의 힘으로 살아남았다는 것에서 더 그렇다. 손권은 수성, 조조와 유비는 창업에서 - 그래서 일찍이 당태종도 방현령과 위징의 논쟁에서 '창업과 수성은 그 나름의 어려움이 있다'고 말한 것이 아니겠는가.
우리는 이 점을 염두에 두고 과거의 역사를 바라봐야 하는 것이다.
유비 현덕 - 조조나 손권보다 못한 것처럼 보여도, 사실 유비 현덕이 이뤄놓은 결과만 놓고 본다면 그의 성과가 결코 작은 것은 아니다. 만일 내가 그 자리에 있었다면 그만큼을 이루기가 쉬웠노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 그런 점에서 유비라는 인물은 유비로서 가치평가를 받아야 한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누구 누구와의 비교론은 오히려 장점과 단점을 일률적으로 비교할 것이라면 아무런 의미가 없다. 장점은 장점대로, 단점은 단점대로 바라보는 것, 그것이 바로 역사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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첨부파일 11_용들의_싸움.swf
유비의 능력을 보면 그다지 뛰어난 점이 없었는데도 불구하고,
당대 최고의 호걸과 책략가들을 자기 편으로 끌여들였고, 그의 인덕정치와 사람을 끌어당기는 힘은
높이 평가해야할 것 같습니다. 그리고 유비가 만약 삼국 통일을 했으면
중국의 역사가 상당히 많이 달라졌을 것 같은데..
여러분들은 유비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그리고 다음 편은 누구로 해볼까요?? 이종님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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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이종격투기 원문보기▶ 글쓴이 : 너이새끼화이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