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접한 글에 관심가져주시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별 내용도 아닌지라 이어서 중편까지만 마저 이어서 써볼까 합니다.
上편에서 말씀드렸듯이, 왕도를 필두로 한 낭야 왕씨 가문은 사마예를 적극 지지하며 냉담한 반응을 보이는 강남의 유력호족 가문을 설득하고 포섭하려 했습니다. 하지만 上편 말미에서도 짧게 암시하였듯이 역시 세상엔 공짜란 없는 법이지요. 강남호족들의 지지를 이끌어 내기 위해서는 마땅히 그에 상응하는 대가가 뒤따라야 했을 겁니다.
사실 뭐 대가라 해서 특별히 대단하거나 거창했던건 아닙니다. 강남호족들이 바라던 것은 소박(?)하게도 관직으로의 출사였습니다.
여기서 잠시 이 무렵 배경을 살펴보고 넘어갈 필요가 있겠습니다. 명색이 강남을 주름잡는 호족 나으리들이신데 벼슬살이는 진작에 하고 있었던거 아니냐고 갸우뚱 하실지 모르겠습니다만, 물론 과거 오나라 시절만 해도 삼공(三公 : 승상을 제외한 태위, 사도, 사공 등의 고위직을 말합니다)을 비롯한 여러 고위직을 역임하던 양반들이었습니다만, 통일 진(晉)나라 시절부터는 슬슬 뒷전으로 밀려나기 시작합니다.
이유를 말하자면 한마디로 알게 모르게 존재했던 지방차별 때문이었습니다.
실제로 진나라 시대 수도 낙양, 즉 중앙이나 소위 말하는 중원에서의 관료들이나 주자사, 장군직 등 굵직굵직한 고위직을 역임한 이들의 출신명단를 살펴보자면 강남출신의 인사는 거의 없습니다. 대다수가 중원의 호족가문 출신들입니다. 게다가 그 무렵 강남호족 인물들 개개인의 기록이나 열전을 뒤져봐도 특별히 요직을 맡아 진 왕조 치하에서 벼슬을 살았다는 기록도 거의 없는 것으로 봐서는 분명 차별이 존재했음을 시사하고 있지요.
차별의 이유에 대해서는 정확히 밝혀진 바가 없습니다. 엄밀히 말하자면 어느 누구도 차별이 존재했다 카더라 이런식으로 글을 남긴 바가 없어 다만 우리는 이러한 근거를 토대로 아마 그렇지 않았을까 하고 추측할 뿐입니다. 하지만 제가 봐도 분명 어느정도 차별은 있었던 것 같아보입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그래도 강남에서 먹어주는 호족가문들인데 중앙정계로 진출한 인물들이 거의 없었을 리가 없지요. 밑에서도 부연설명하겠지만 이건 진 왕조 국정을 틀어잡고 있는 중원호족들이 강남호족을 경시하고 배척한 부분도 있지만 강남호족들이 자존심 상한 나머지 출사를 거부한 감도 없잖아 있었습니다.
지방경시 풍조나 거기서 클라스를 나누는 모습은 예나 지금이나 똑같이 찾아볼 수 있는 현상일겁니다. 이 시대도 똑같았습니다. 소위 말하는 중원출신 호족들과 강남출신 호족들 간에는 알게 모르게 갈등이 싹트기 시작했던 거죠. 중원의 호족들은 강남 호족들을 무슨 남쪽촌놈 취급했을 것이고 강남호족들 역시 자신들을 업신여기는 중원호족들에게 반감을 품었을 겁니다. 특히나 앞서 말씀드렸듯 삼국시대에는 오나라에서 나름 고위직을 역임하고 명문가 소리 듣던 양반들이었으니 그 자존심이 팍 상했겠죠. 더구나 은연중에 중원의 호족들과 대등한 의식을 가지고 있던 강남호족들이었으니 오죽했을까요.
하 쉬팍 우리 강남사람들 무시하나요? 강남스타일 몰라요?
참고로 짤은 게임 <삼국지12>에서 장소 일러스트입니다.
거기다 망국의 서러움까지 더해져 강남호족들은 대다수가 진 왕조로의 출사를 거부하게 되었던 것이죠. 이는 강남은 물론이요 당대 최고의 석학들이자 육손의 손자이며 육항의 아들들인 육기, 육운 형제들이 오(吳)가 멸망하자 진나라의 출사권유에도 거부하고 낙향하여 학문연구에만 몰두했던 일로 알 수 있습니다.
육기.
위에서 밝혔듯 육손의 손자이자 육항의 아들로서 동생 육운과 더불어 당대 최고의 석학이었습니다.
다만 진나라에서 벼슬살기는 거부했는데 머지않아 관직에 나아갑니다. 이는 밑에서 보도록 하죠.
이렇듯 자존심에 진 왕조에서의 벼슬살이는 거부했던 강남호족들이었으나, 차마 권력욕은 떨치기 힘들었는 듯 합니다. 진나라 무제(武帝) 시절(~서기 290년) 때까지는 강남출신 인사들이 중앙정계에 보이지 않았는데 그 다음 대인 혜제(惠帝)의 대부터는 몇몇 인물이 기록에 등장하기 시작합니다. 위에서 말한 육기도 그렇고 오나라 초대 승상을 지낸 고옹의 손자인 고영(顧榮)이나 역시 오나라의 무장, 하제의 증손자인 하순(賀循) 등앞서 上편에서 언급한 오군 4성 or 회계 4성 호족들이 진나라에 출사하기 시작했던 거죠.
여기서 주목할 점은 다른 이들은 제쳐두고, 육기가 중앙정계에 발을 들였다는 점입니다. 망국의 유신이자 강남을 대표하는 최고의 브레인이요, 자존심으로서 무려 수년 동안 진나라의 출사권유도 거부하고 동생 육운과 학문이나 파던 양반이 그토록 섬기기를 거부하던 진나라에 임관했다는 것은 결국엔 강남호족이 중원호족들에게 종속했음을 의미하는 사건이었습니다.
과한 비약이 아니냐고 생각하실지 모르겠습니다만, 육기를 비롯한 위에서 언급한 고영이나 하순 등과 같이 강남을 대표하는 명문가 출신 인물들이 머리 숙이고 중앙정계로 진출하고자 애썼다는 사실 자체가 이미 그동안 버텨오던 강남호족들의 자존심이 무너졌음을 의미합니다. 주류호족들이 그러하니 다른 가문들이야 말할 것도 없었겠지요. 특히 육기는 당시 수도 낙양의 문학모임이라 할 수 있는 24우(24友 : 당대의 뛰어난 문인 스물 네명이 모여 만든 모임입니다)의 우두머리이자 조정대신인 장화(張華)의 초청을 받아 수년간의 은둔생활을 정리하고 정계로 나온 것이었죠.
역시 게임 <삼국지11>에서의 장화 일러스트.
이 장화도 당대 최고의 석학이자 문학가로서 중원을 대표한다고 할 수 있었습니다.
장화의 초청에 역시 강남을 대표하는 문인이기도 한 육기가 응하여 중원문인들의 모임인 24우(友)에 가입했다는 것은
문학과 같은 문화적 측면에서도 강남이 중원의 빠워 앞에 종속했음을 의미했습니다.
이들이 왜 갑자기 그동안 고집해오던 자존심을 버리고 진나라로의 임관을 희망했는지는 알 길이 없습니다만, 제 생각엔 세대의 인식차이가 아닐까 싶습니다. 위에서 말한 고영, 하순, 육기와 같은 인물들의 당시 나이는 비교적 젊은 30대였습니다. 아직 한창 팔팔할 때죠. 그리고 따로 밝히지는 않았습니다만 다년간 진을 섬기기를 거부하며 초야에 묻혀있던 육기의 나이는 그때 고작 20대였습니다. 그 피끓는 나이에 초야에만 묻혀서 글만 파기가 영 답답하기도 했을 겁니다. 한편으로는 이미 망한 놈의 나라 뭣하러 붙들고 있나 하는 생각도 들 법도 했을 겁니다. 그러다 도중에 생각이 바뀌어서 장화의 부름에 응하지 않았나 싶은데요. 이는 이들의 아버지 세대이자 오랜세월 오나라의 중신으로서 살아오던 구세대들이 끝까지 진 왕조 섬기기를 거부했던 모습과 확연히 차이가 난다 하겠습니다.
아무튼 이러한 일들이 있었다는 것이고 결국은 강남의 호족들은 은근한 열등의식을 느끼면서도 중앙정계로의 진출에 목말라 있었고 어떤 측면에서는 반드시 정계에 나아가야 한다는 강박관념까지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여기서 강박관념이라 표현한 이유는 강남호족들이 중앙으로 나아가려고 별 생쇼를 다해서 그리 쓴겁니다.
본론으로 돌아오자면, 강남호족들의 정계로의 진출욕구에 응하여 왕도는 그들에게 사마예를 지지하면 그에 상응하는 고위직을 부여하겠다는 약속을 합니다. 물론 여기서 정계로의 진출이란게 예전 때처럼 중앙인 낙양으로의 임관을 말하는 것이 아님은 아시죠? 그 시점에서 낙양갔다간 이민족 칼에 맞아 죽습니다.
왕도의 설득에 넘어간 권력욕 충만한 강남호족들은 한 두명씩 사마예를 지지하는 입장을 표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머지않아 강남호족 대다수가 사마예를 지지하게 되고요. 그리고 이 호족들의 든든한 지지는 동진을 세우는 원동력이 되었음은 글 서두에서 밝혔지요.
여기까지는 강남호족들 입장에서는 참 좋았을텐데 웃기게도 이들은 약속받은대로 대가를 받지는 못합니다. 이것 역시 시대배경과 연관지어 볼 필요가 있는데요, 중원에서 영가의 난을 피해 중원호족들이 대거 남하해왔기 때문이었습니다. 밥줄 도둑들 약속 브레이커들
이는 다음편에서 쓰겠습니다.
여기서 미리 한가지 말씀드리자면 다음은 下편이 아닌 中中편으로 쓸 생각입니다;;
틈틈이 짬내서 끄적이는 건지라 생각해둔 분량에 맞춰서 쓰기도 벅찬 탓에 분량조절 실패했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