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허핑턴포스트(←20180920) 에서 실례
요 몇일 '백두산'이 한반도의 화두랄까요
두 정상이 백두산 천지를 배경으로 같이 찍은 사진이
가슴을 뛰게 합니다
' 백두에서 한라까지'
중국을 통해 백두산을 여행하는 분들이 얼마나되는지 정확하게 통계를 알수없지만
일년에 수십만명은 들릴테니
인당 100만원정도, 그 이하로도 충분히 가능하지만요, 경비가 들어간다고 치고
수십만 곱하기 백만원 = 수천억
황당한 금액이라고 생각하실지 몰라도
2016년 기준으로
중국여행객인 유커들이 우리나라와서 쓴돈이 대충 15조~16조였습니다.
당시 우리나라 1년 GDP가 1500조정도라 1%를 차지한 수준..
인당 200만원전후(쇼핑비용이 많아서 특히)
연 806만명(그중 300만명이 제주도)
이 부분에 대해 할 얘기가 많지만 다음기회에
오늘은 백두산 얘기좀 할까합니다.
▲ 경남매일(←20180920) 에서 실례
제가 인터넷하다가 피로감에 빠지면
기분전환을 위해 가끔 때론 종종 들리는
'오늘의 유머'란 베스트(오브 베스트)에 올라온 글의 원본기사입니다.
출처 세줄 요약.
봉금령이 폐지된건 1881년
청나라가 조선에게 간도를 인정해줬다는 황당한 주장이 나오는 이유가 궁금할뿐입니다.
왜??
조선초기라면 몰라도 (이때는 청나라가 존재하지도 않았고)
17세기이후 청나라가 간도를 인정해줄 이유가 일도 없는 상황에서 왜?
(물론 간도라는 지명이 좀 불특정하다는 것도 문제지만요)
백두산은 우리 한겨레의 성산이기도 하지만
만주족의 성산이기도 합니다.
아시아에서 지금 미국정도의 위상였던게 청나라..
당시 청나라와 조선의 역학관계를 생각한다면
절로 답이 나오기도 하고요.
조선에서 청에게 뭔가를 요구할 외교력이나 국방력이 있었다고 생각하실수는 있지만
그런건 없었습니다.
(물론 20세기초 잠깐 행사하긴 했습니다
청나라가 그야말로 이빨하고 발톱빠진 호랑이가 된터라)
청나라 후반기(아편전쟁이후)에 스스로의 내부모순과 열강들에 시달리면서
만주지역에 대한 통치력 통제력을 시나브로 잃어갈때
농사지을 땅 부족했던 한족들이 풍족한 농지넘치는 사람도 적은 만주로 유입되기 시작했고
역시 같은 이유로 당시 조선인들도 만주로 들어가기 시작합니다
그 당시 조선인들이 있었으니 우리땅이다 라는 주장은
지금 또는 예전에 하와이에 일본인들 많이 살았거나 살고있으니 하와이는 일본땅이다는 어느 일본인의 주장과 비슷할듯 싶습니다.
간도가 우리땅이였으면 하는 심정은 백번 이해하지만
우리땅였다고 할만한 때는 조선초정도뿐입니다.
1712년(역시 강희제때) 조선 청나라 국경협약인
'백두산정계비'의 위치도 중요합니다
백두산 천지는 청나라 영토였다는 게 포인트
당시 영토기준였던 토문강과 두만강 착각과 혼동으로
이후에 (특히 청나라가 이빨빠진후에)
토문강(조선주장)
두만강(청주장)
이
한국에서 나오는 간도영유권 주장의 이유가 되기도 합니다.
당시에도 말이 많았던 터라 지금 주장하기는 더더욱..
이후로도 교착상태였던 이 경계문제는
일본등장으로
청나라가 무너진게 1912년 (뭐 잠깐의 왕정복고땜시 1924년으로 잡기도 하지만 비주류의견)
일본이 청나라 삥뜯기위해 간도문제를 들고나옵니다.
1909년 일본이 거의 숨통끊어지기전인 청나라랑 협약(협박)해 간도를 포기(무슨 권리로)
우리나라(조선)의 외교권은 1905년 일본이 강탈..
쉽게 말하면 일본은 지들 이익을 챙기기위해 일본과 아무 연관도 없고 일본과 아무 권리도 없던 간도를 포기한겁니다.
근데 왜 백두산얘기하는데 늘 간도얘기가 나오는지는 저도 잘..
이제 본론(?)입니다.
이제 현대로 넘어왔습니다 ㅎㅎ
이건 제가 중국국가지리(中国国家地理)라는 중국인문지리잡지사이트 지도게시판에서 구한 지도(중 일부)입니다
제목이 '간도부근지세도' 입니다.
지금 국경과 비교해보겠습니다
자격도 권리도 없던 일본과 당시 청나라(망하기 몇년전)가 저지른 삽질을 해결하고자
북한과 중국이 국경협약을 맺습니다 (1962년 조중변계조약)
자세한건 해당링크를 참고하시고요
다시 위에서 잠깐 언급한 중국인문지리에 관한한 내쇼널지오그래픽보다 몇배 전문적인,
'중국국가지리' 사이트 지도게시판에서
저 지도 포스트 밑에 달린 중국네티즌들 댓글들을
한줄로 요약하자면
'중국이 (아주 많이 너무) 손해봤다'
입니다
기사에 인과관계가 빠진터라..
중국공산당초창기였던 20세기초부터
가슴뜨거웠던 조선인(지금 한국(남한+북한)인)들중 일부는
일본과 싸우기 위해
또는
신념을 지키기 위해
무정부주의 사회주의 공산주의 (뭐 해석하기 나름이지만요)
중국 공산혁명에 그야말로 목숨을 바칩니다.
2차세계대전당시 중일전쟁에서는 '팔로군'에 가입해서
일제와 싸우기도 했고요.
중국 소수민족중에서 재중동포(조선족)들이 나름의 대우를 받은건
중국현대사, 중국공산당사에서 피로 얻은 결과이기도 합니다.
하여간
중일전쟁당시에는 중국공산당 원로들과 일본과 같이 싸운 동지들였고(당시 조선인들이)
모택동이 국민당과 싸운 국공내전(1946~1949)당시 김일성이 소련으로 받은 군사물자로
중국공산당을 지원했다고 합니다 모택동이 겁나 고마워했다고
(어디서 본글인데 원본을 기억못합니다. 이 글은 카더라 일수도 있습니다)
중국이 미국견제에도 불구하고
6.25에 참전한 이유중 하나가 됩니다.(비공식적으로
국가개입이 아닌 지원병형태로..)
하여간 북한과 중국관계는 순망치한이랄까
역설적으로 남한과 미국관계랑 흡사합니다.
20세기 중후반까지
중국 공산당 원로와 북한 (김일성)과의 관계는 끈적끈적했다는 얘기입니다.
(김일성의 친중파 숙청은 권력문제였기에 별개의 문제고요)
그 원로중에 넘버 2 였던 주은래가 북한중국간 국경협상의 중국측 대표였고요.
이 주은래라는 정치가는 긍정적인 면에서는 공과가 섞혀있는 모택동보다도
훨씬 더 많은 존경을 중국인민들에게 받고있는 사람입니다
(물론 이 협상으로 욕을 겁나게 많이 먹었다는 건 팩트고요)
이분의 1963년 '조선관계 대화'라는 글을 읽어보시면,
공식문건,
왜 저런 통큰 양보(?)를 했는지 알수있습니다
(왜 양보라고했냐면 북한의 협상력 외교력보다는
정치적 부담을 감당한 주은래의 결심이 협상결과로 나온터라..
영토국경문제는 일방적인 관계가 아니라면 어느쪽이건 자국에서의 정치적 부담때문에 질질끌수밖에 없는 터라서요 )
중국여행하면서 '동북공정'스러운 얘기를 꺼내는 중국인들에게 윗 글을 보여주면
백이면 백
꼬리말고 깨깽합니다
꼭 읽어보시길 바랍니다.
물론 넘버2가 넘버1엿던 모택동 허락없이 자의적으로 결정했을지는 의문이지만
그 당시는 대약진운동(1958~1961,1962) 실패로 모택동 이빨 빠진 때라
드물게 주은래 다운 결정을 한것일수도 있습니다.
세줄요약하자면
① 백두산천지는 과거에는 청나라땅였다
(백두산전체말고요 물론 백두산에서 천지빼면...)
② 우리땅이라고 주장할만한 여지가 있는 건 지금 도문강과 두만강사이다.
그 주장이 현실적으로 먹힐지와 별개로..
③ 누구덕이건 왜건 지금 백두산 천지 절반은 우리땅이다
이게 대충의 (제가아는) 인과관계 사실관계 입니다
원래 제 중국여행계획은 10년였는데(일년에 두세달씩)
20년 다 되가는데 아직도 중국 한바퀴 다 못돌았군요
처음 10년 계획였을때 마지막해가 북한을 통해 백두산가는 거였습니다.
(물론 2008년 중국쪽에서 가보긴 했지만요)
북한에서 중국을 바라보겠다는게 제 여행의 화룡정점이랄까요.
그 당시에는 가능성이 매우 높았기도 하고요.
금방이라도 육로가 열릴것 같은 분위기였고
잃어버린 10년 아니 9년 때문에 하염없이 길어졌네요
두정상이 백두산 천지에서 손을 잡은 모습을 보니
다시 한번 희망이 보입니다
제 희망보다도
한겨레의 희망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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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머글은 절대 아닌것같지만
제가 참고한 글이 베오베(유머) 글이라
관리자분께서 바쁘시고 수고스러우시겠지만,
성격에 맞는 게시판으로 이동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출처 | https://blog.naver.com/jati99/22136323206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