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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는 좌익경력활동을 한 적이 없다
게시물ID : open_1456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55美
추천 : 2
조회수 : 125회
댓글수 : 1개
등록시간 : 2011/12/25 00:13:19
박정희의 남로당 사건은 훗날 5대 대선에 출마한 윤보선(尹潽善) 후보가 사상 논쟁을 일으키면서 일반에 널리 알려지게 된 것이다. 당초 이 사건은 1948년 10월 15일 제주도의 ‘공비토벌 작전’에 투입하기 위해 대기 중이던 여수 주둔 육군 제14연대에서 일부 세력이 반란을 일으켜 20여 명의 장교를 사살하고 여수를 점령한 데서 비롯되었다.

그러자 순천에 파견되었던 2개 중대도 동조반란을 일으켜 순천을 점령했다. 이어 반란세력과 회복세력 사이에 교전이 일어나 여수에서 1700명의 사상자와 9800명의 이재민이 발생했고, 순천에서도 400여 명의 인명 피해가 났다.

이에 크게 놀란 군 당국은 여수·순천지구의 군인 3000여 명을 수사, 군 내부에 침투해 있던 남로당 계열의 적색분자 150여 명을 색출해냈다. 여기에서 군 수사당국은 육군사관학교로까지 범위를 넓혀 수사를 전개해나가는 과정에서 박정희 소령이 남로당 군사부의 고위 간부임을 밝혀냈다. 

그 해 11월 11일은 육사 7기의 졸업식 날이었다. 여순사건 관련자 토벌 때문에 광주로 따라 내려갔다가 졸업식에 참가하기 위해 귀경한 박정희는 바로 그날 수사당국에 연행되었다. 1000여 명에 달하는 숙군(肅軍) 피의자들과 함께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된 박정희는 몇 차례 전기고문을 받기도 했으나 어떤 시점부터는 순순히 자술서를 써 내려가기 시작했다.

수사를 총괄했던 육군본부 정보국 특무과의 김안일(金安一) 소령은 당시 박정희가 남로당에 가입하게 된 동기에 대해 형 박상희가 “대구폭동 때 경찰 총에 맞아 죽었는데 집에 내려가 보니 그 유족을 남로당 군사부 책임자인 이재복(李在福)이 잘 보살펴주었기 때문”이었다고 자술서에 쓰여 있다

남로당 조직도상으로는 상당히 중요한 자리에 있었으나 활동한 흔적은 전혀 없었다. 다만 동료들과 함께 술을 자주 먹었을 뿐이다. 그는 순전히 인간관계에 얽혀 남로당이 되어 있었다. 자술서를 읽어보니 그는 분명 이념적 공산주의자는 아니라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정재경)고 증언했다.

김안일은 이 문제를 당시 육군본부 정보국장 백선엽(白善燁) 대령에게 가지고 가 “국장님에게 꼭 할 말이 있다고 간청하니 박정희 소령을 한 번 면담해주십시오”라고 청했다. 이후 김안일은 박정희를 정보국장실로 데려왔는데 이때의 일을 백선엽은 이렇게 적었다.
“박 소령은 묵묵히 앉아 있다가 입을 열었다. 

‘나를 한 번 도와주실 수 없겠습니까?’ 작업복 차림의 그는 측은한 모습이었다. 그러나 면담 도중 전혀 비굴하지 않고 시종 의연한 자세를 잃지 않았다. 평소 그의 인품에 대해서는 약간 알고 있었으나 어려운 처지에도 침착한 그의 태도가 일순 나를 감동시켰다. ‘도와드리지요.’ 참으로 무심결에 이러한 대답이 나의 입에서 흘러나왔다.”(백선엽, <군과 나>, 1989)

이후 백선엽·정일권·원용덕·김일환·김백일 등 만군(滿軍) 인맥의 구명운동에 힘입어 박정희는 그 해 12월 10일 구속수사 한 달 만에 풀려나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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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로당 조직도상으로는 상당히 중요한 자리에 있었으나 활동한 흔적은 전혀 없었다. 다만 동료들과 함께 술을 자주 먹었을 뿐이다. 그는 순전히 인간관계에 얽혀 남로당이 되어 있었다. 자술서를 읽어보니 그는 분명 이념적 공산주의자는 아니라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정재경)고 증언했다.

: 전혀 활동한 내역이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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