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해 전, 핀란드 국회의원 10여 명이 한국을 찾았다. 보좌관 없이 국회의원들이 국회공무원 한 명과 함께 서울의 몇 개 부처를 방문했는데, 스스로 회의 자료를 준비하고 여행 경비 영수증을 챙겼다. 점심 식사는 테이크아웃 샌드위치와 생수를 사서 이동하는 차량에서 먹었다. 핀란드 최초의 여성 대통령으로서 12년 간 장기 집권했던 할로넨 대통령은 방한 시, 비공식 점심 식사 한 끼를 불고기 식당에서 주문하고 음식 값을 직접 계산했다. 한국에 국빈방문 했던 니니스뙤 대통령은 숙박했던 호텔 룸에 깜빡 잊고 두고 간 안경과 머리빗을 개인 경비로 우편 배송 받았다.
핀란드 공무원 조직 내에 공금으로 지원되는 회식 문화는 존재하지 않는다. 주한핀란드대사관은 대사와 직원들이 함께 외부에서 식사를 하면, 인원수대로 각자 음식 값을 지불한다. 대사관에는 직원들이 마실 그 흔한 커피믹스나 녹차티백도 없다. 예산 항목 내역에 포함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국제투명성기구에서 발표하는 부패인식지수를 살펴보면 핀란드가 매년 최상위 그룹에 올라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그 비결은 여러 가지 객관적인 요소로 설명될 수 있다. 모든 것을 문서로 기록하는 투명한 행정, 폭넓게 적용되는 공공성의 원칙,민주적인 지방자치, 임무가 명확히 정의된 경찰과 사법기관의 구성, 그리고 권력이 어떻게 행사되는지를 감시하는 언론표현의 자유 등이 그에 해당한다. 하지만 필자는 핀란드의 국가 청렴도를 핀란드인의 ‘융통성’ 없는 기질로서 설명하고 싶다.
사실 더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법과 규칙 앞에서 융통성 없는’이라고 하겠다.
핀란드에서 파견 나온 외교관에게 우수한 공직자의 롤 모델로 회자되는 사례가 있는지 물었다. 대답은 ‘핀란드 공무원 사회에 히어로란 존재하지 않고, 존재해서도 안 된다’였다. 공무원은 철저하게 법규에 따라 모든 국민이 공정하고 평등하며 편리하게 삶을 영위할 수 있도록 돕는 역할을 하는 것이지, 부당한 법을 바꾸고 국민을 선동하고 사회를 개혁하는 영웅의 역할이 요구되는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핀란드 공무원 사회에서는 구두 상 협의를 인정하지 않으며, 문서화된 기록에 따라서만 업무를 처리한다. 물론 이런 원칙 때문에 더 나은 아이디어가 있더라도 규정에 밀리기도 하지만, 그렇다고 ‘융통성’을 발휘하여 타협의 여지를 제공하지는 못한다.
핀란드 공무원은 사소한 민원 업무부터 중대한 외교 사안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을 법 규정에 근거해서 실행한다. 규정을 나름대로 재해석한다거나 직권 재량을 발휘해서 특혜를 제공하는 식의 ‘융통성’은 결코 없다. 너무나 당연하게 들릴 수도 있지만, 공무원의 부정부패는 법 규정의 재해석이나 담당자의 재량 남용에 기인해서 발생할 확률이 높은 것이 사실임을 고려할 때 이것이 얼마나 철두철미하게 지켜지는지는 상당히 중요하다. 또한 사법권 안에서 ‘특별법’이란 것도 흔치 않다. 보편적인 공공성을 해치지 않기 위함이다. 핀란드인의 ‘법에 대한 복종’ 원칙은 예외가 없다.
핀란드의 한 갑부가 과속 범칙금으로 한화 약 2억 원을 낸 유명한 일화가 BBC 방송을 통해 소개된 적이 있는데, 핀란드에서는 벌금도 소득에 따라 누진적으로 적용되며 경찰이 현장에서 휴대폰을 통해 국세청에 운전자의 납세기록을 확인할 수 있는 정보공개 및 전자적 접근 정책이 있기 때문에 가능하다. 이 제도는 투명하고 청렴한 핀란드 사회를 뒷받침해주는 열쇠 역할을 한다. 핀란드에서는 정재계 인사나 연예인들뿐만 아니라 개개인의 세금기록이 공개된다. 옆집에 사는 이웃이 작년에 얼마를 벌었고, 총 얼마의 재산을 보유하고 있으며, 얼마의 세금을 냈는지 궁금하면 국세청에 전화 등으로 자신이 알고 싶은 사람의 소득과 재산, 납세 내역 정보 공개를 청구할 수 있다. 핀란드 사람들은 세금을 많이 내는 데다 탈세와 부패가 생길 경우, 고스란히 자신의 세 부담 증가로 이어질 수 있다는 인식이 널리 퍼져있기 때문에, 타인의 세금기록에 대해 관심이 많고, 정보접근권이 헌법으로 규정, 보장되어 있다.
핀란드는 별도의 공무원연금제도가 존재하지 않는다. 공무원을 포함한 전 국민이 통합된 하나의 연금제도에 가입되어 있다. 국가공무원법이 별도로 존재하지 않고 공무원을 포함한 모든 임금 근로자에게 동일한 근로기준법이 적용되고, 동일하게 세금을 낸다. 따라서 핀란드 공무원이 부정부패를 저지를 경우, 일반 국민에게만 손해를 끼치는 것이 아니라, 공무원 스스로의 안위에도 영향을 끼치는 것이 명백하다. 일례로, 공무원이기 전에 납세자의 한명이기 때문에 자신이 낸 세금이 공무원들의 부서 회식비나 잡비로 유용되는 것을 원치 않는 마음가짐이 기본이 되어, 공무원 스스로가 납세자로서 공금의 부정한 사용을 냉정하게 감시한다.
서로 먼저 차지하려고 새치기를 한다거나 특혜를 노리고 ‘꼼수’를 부리는 핀란드인의 모습을 만나기란 흔치 않다. 핀란드인은 기다리면 누구든지 자기 차례가 온다는 것을 믿으며, 자기 몫을 챙길 뿐 남의 몫까지 탐내거나 하지 않는다. 이 것은 태어날 때부터 평등한 보육과 교육의 기회를 누리는 경험으로부터 터득한 자세이다. 그리고 그런 공정하고 평등한 기회를 잃지 않기 위해서 국민으로서 의무와 책임감을 다해야한다는 점을 의심하지 않는다. 물론 핀란드 사람들이 법을 잘 따르고 준법정신이 강한 데는 역사적인 이유가 있다. 1809년부터 1917년까지 핀란드가 제정러시아의 지배를 받는 자치 대공국이었을 때, 러시아의 지나친 간섭과 압제에도 불구하고 자국의 사법제도를 잘 수호했기 때문에 법에 대한 복종 원칙은 지나치리만큼 강력하다.
최근 한국을 공식 방문한 스툽 핀란드 총리는 여러 차례의 연설에서 한국과 핀란드가 많은 점에서 유사함을 강조했다. 고난의 역사, 급속한 경제 성장, 높은 교육열을 그 예로 들었다. 우리는 핀란드인 못지않게 민족 자긍심이 높고, 불의를 용납하지 않으며, 교육의 힘을 믿는 국민들이다. 부정부패 척결을 통해 한국 공무원들의 경쟁력을 높이고 한국의 국가브랜드를 끌어올릴 수 있는 무한한 가능성을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