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개의 거리가 정사각형으로 늘어선 도시. 그리고 그 외곽의 이 거리는 우범지역으로 유명한 ‘마의 13번가’이다.
이 거리는 겉으로 보기에는 깔끔하고 웅장한 저택이 늘어서 있는 평범한 주택가이지만, 10번가, 아니 11번가만 가도 즐비한 노숙자들이 하나도 없었고 다닥다닥 붙어있는 대저택들의 처마와 가고일 상 때문에 한낮에도 어두컴컴한 마귀들의 소굴을 연상시켰다. 아니, 마귀들의 소굴이나 다름없었다.
도시의 모든 기현상은 언제나 이 거리에서 시작된다. 화창한 날에도 보랏빛 뇌운이 여우비와 천둥번개를 내리고 보름달이 아름다운 밤이면 밤마다 야수의 울부짖음과 함께 핏빛으로 물든다. 인근 강에서 끌려오는 상수도와 인근 강으로 흘러가는 하수도가 이 거리 지하에서 한 번에 모이기에 아무도 빠져나올 수 없는 복잡한 지하수로가 이 거리 지하에 잠들어 있고 그 어딘가에 명계와 통한다는 지하수로보다 배로 복잡한 지하묘지가 있다는 흉흉한 괴담은 애어른 할 것 없이 알고 있다.
겉만 깔끔한 대저택 속에는 이교도나 살인마, 미치광이와 범죄자가 몰래 숨어산다는 풍문이 온 도시를 맴돌았지만 태반이 빈집. 다만, 멋들어졌으나 찝찝한 엔틱 가구는 몇 정 건질 수 있는 곳이었다.
여기 길을 걷고 있는 이 사내를 보라. 사내는 붉은 색에 가까운 적갈색 머리와 고급 양장을 입고 있었고 왼 손의 녹색 색유리 병에는 자주색의 값비싼 고급 와인이 출렁거리고 있었다. 붉은 머리의 사내는 12번가의 스테인드글라스가 빛나는 성당에서 주변을 두리번거리더니 두 블록 너머 13번가로 뛰어 들어갔다.
13번가임을 알리는 문 없는 대문. 그리고 그 기둥을 받치고 있는 두 마리의 케르베로스 석상의 도합 12개의 눈이 번뜩이고 있었다. 사내는 그 두 번견들을 지나쳐 서른 걸음 정도 걸어 어둠에 숨어들고는 남의 눈에 띄지 않는 맨홀 위에 올라섰다. 그리고는 주머니 안의 쇳조각들을 마치 장난감을 조립하듯 몇 초 만에 이어 붙여 정체를 알 수 없는 기이한 모양의 쇠막대기를 만들어 냈다. 그리고는 은촛대 문장이 양각으로 새겨진 맨홀 뚜껑 가운데 구멍에 쇠막대의 뾰족하고도 가느다란 끄트머리를 끼워 넣고 T자 모양의 손잡이를 시계방향으로 뱅뱅 돌렸다.
“뽁”하는 소리와 함께 맨홀 뚜껑이 빠졌다. 사내는 다시 쇠막대를 분해해 다시 안주머니에 넣었다. 그리고는 맨홀 아래로 들어가서 사다리에 가죽구두를 걸친 뒤, 맨홀 뚜껑 하단에 있는 작은 범선의 키 모양 핸들을 잡고 맨홀 뚜껑을 닫았다. 그리고는 그 키를 본인이 쇠막대기를 돌린 방향과 같은 방향으로 뱅뱅 돌려 잠갔다. 그리곤, 어둠에 휩싸였다.
사다리를 타고 조심조심 내려왔다. 정확히 열 세 걸음. 더 이상 닿을 발판이 없자 사내는 안심하고 가볍게 뛰어 내렸다.
발이 바닥에 닿자마자 시야가 트였다. 주변이 거짓말처럼 환해진 것이다. 상수도 인근이었기에 부드러운 물살이 도시 전역으로 흘러들어가는 모습이 선명하게 보였고 콘크리트로 이루어진 벽과 바닥은 깔끔한 흰 색을 띄고 있었다.
이것은 마법이다. 마법이었다. 마법이 있던 모험과 환상의 시대의 유물이요, 유적, ‘던전dungeon’이었다.
하지만 사내에게는 운이 없었다. 시대의 잔당들도 그 유적에서 간신히 명줄을 이어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갓 물에서 나와 몸과 바닥을 흥건히 적시는 붉은 어인魚人이 그 예였다.
‘제... 젠장...! 2층에나 가끔 보이는 어인이 왜 여기에...?!’
어인은 아무래도 길을 잃은 개체인 듯 했다. 일반적인 어인에 비해 상당히 야윈 몸뚱이를 가지고 있었으며 무엇보다 제정신이 아닌 듯 침을 질질 흘리고 있었다. 사내와 어인은 고작 1m 남짓한 수로를 사이에 두고 대치하고 있었다.
“그와으!”
어인이 먼저 덤벼들었다. 마땅한 무기도 없던 사내는 마침 끼고 있던 와인 병을 줄 달린 상자에서 꺼내 주둥이를 손에 쥐더니 어인이 자신과 약 60cm 거리에 아가리를 들이민 순간에 냅다 볼을 후려쳤다. 와인병과 내용물은 깨지어 붉게 빛나며 흩날려 떨어졌고 어인은 수로에 처박혔다.
“빌어먹을... 비싼 술인데...”
사내가 안심하고 집을 향해 가려던 찰나, 물속에서 두개골에 금이 간 어인이 튀어 올라 사내의 목을 물고자 달려들었다. 하지만 사내 쪽이 조금 더 빨랐다. 예리하게 깨진 와인 병은 사내의 손에서 어인의 몸뚱이를 꿰뚫었다. 내장이 찢어진 어인은 피를 토했고, 사내는 병을 내던져 어인을 콘크리트 바닥에 떨어트렸다.
“하아... 젠장... 술이 없어지니까 안주가 생기네... 하하...”
그러던 순간, 콘크리트 길 사이를 흐르는 물에서 낯선 조류가 사내의 눈에 잡혔다. 망가진 부채 같은 등지느러미가 둘... 또 어인이었다. 둘은 물 위로 고개를 빼꼼 내밀더니 사내의 방향을 응시했다. 사내는 직감적으로 자신과 붉은 어인의 시체를 번갈아 보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노랗고 푸른 두 어인들은 방향을 약 35도 정도 틀더니 피에 물들어 죽어있는 싸늘한 어인을 향해 헤엄치고는 그 사체를 들고 물속으로 사라졌다.
정황상 붉은 어인은 도망자 신세에 길을 이리저리 해매다 지하 1층으로 가는 수로를 발견해 이리로 온 듯 했다. 몹시 굶주린 어인은 물 말고는 아무것도 없는 수로를 돌아다니며 헤엄을 치다 체력이 떨어져 뭍에 올라온 순간 사내를 발견했고 습격했으나 보기 좋게 저지당하고 목숨마저 잃게 된 것이었다.
마의 13번가. 그곳이 금역인 이유는 이 지하의 던전 때문이었다. 1층은 괴상한 물고기들이 몇몇 있는 크게 볼 것 없는 수로지만 지하 2층부터는 인간과는 다른 종족인 ‘어인’과 지하묘지의 ‘스켈레톤’이 공존하고 있었고, 망령들이 묵어가는 공간인 명계와 이어져 있었다. 지하 3층부터는 어인들의 나라, 지하 4층은 그 나라의 수도. 그 밑에는 더욱 어마어마한 것이 봉인돼있는 듯 했으나 사내는 발 한번 대 보지도 못한 곳이었다.
사내는 목숨을 위협받았지만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시크하게 자신의 집을 향해 거닐었다. 북쪽으로 세 블록, 서쪽으로 네 블록. 다시 남쪽으로 한 블록을 점프해서 넘어 자신의 집으로 들어왔다. 방은 얼추 열 평정도 됐는데, 아무래도 수로의 설계상 드문드문 생기는 빈 공간에 사내가 문짝, 가구, 수도설비를 지상의 저택에서 도둑질해 인테리어한 나름의 집이었다. 집 안에는 물이 튀어도 영향이 없는 대리석 바닥재와 저택에서 쓰이던 은제 식기와 2인용 식탁, 먼지가 좀 많았던 매트리스가 있는 마호가니 침대와 작은 책상이 있었고 사교계에 출몰할 때나 작업을 할 때마다 갈아입는 옷들이 즐비한 옷장도 있었다. 화장실 또한 갖추고 있었는데, 그저 물을 끌어 올리는 단순한 수도꼭지와 세면대, 샤워기와 유리 칸막이, 물을 내리지 않고 용변 본 것들이 그대로 수로로 떨어지는 좌식 변기가 있었다. 지하수로의 물은 마수정으로 정화하는 장치가 수로 어딘가에 있었으므로 말하자면 중수도였다.
사내는 책상 위에 놓인 몇 권의 책 중 자신의 일기장을 꺼내며 방금 있었던 일을 쓰고 잠시 잠을 잤다.
딱딱한 재질의 일기장 겉표지의 검은 글씨가 빛났다.
‘파비앙 피닉스Fabien Phoeni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