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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끄럽지만 난 병역 기피자였다.
그렇다고 국방의 의무를 다하지 않은 건 아니다.
고등학교 의무검정으로 따놓았던 자격증으로 운 좋게 부천에 있던 CCTV 회사에 취직하게 된다.
내가 입사할 당시(2002년)에는 직원 수 20명 정도 되는 중소기업에 열악한 환경을 가진 작은 회사였다.
허나 불과 5년 만에 그 회사는 국내 5위권, 세계 10위권의 내의 CCTV 제조업체로 발전하게 된다. 사장님은 당시 30대 중반이었던 걸로 기억하고 우리처럼 병역특례로 이 바닥에 뛰어 드셨다고 했다.
고졸출신의 병역 특례병이 세계적인 CCTV 제조업체를 만드셨다.
결과만 놓고 보면 존경받아 마땅할 분임은 틀림이 없다.
나는 그 회사를 햇수로 11년 동안 근무 했는데(결과적으로 가장 오래 근무한 특례병으로 남게 됐다) 그 분의 성공 신화를 처음부터 가까이서 목격한 몇 안 되는 사람 중 하나일 것이다.
오죽하면 내가 퇴사하기 직전 사장님이 내게 자신의 성공신화를 자서전으로 내고 싶으니 대필 작가가 되어 달라고 했었다.
여담으로 나는 훗날 술집(BAR)을 차리게 되는데 사장님이 오시면 늘 제일 비싼 위스키를 3병씩 드시고 결제도 칼같이 해주시고 옛날 그 열악한 회사에서 고생했던 일화들을 늘 말씀하시곤 했었다.
나는 내 사업을 하기 전까지는 사장님이 겪으신 고충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었고 늘 불만만 가졌었는데 입장이 뒤바뀌어 보니 그분의 말씀이 너무 와 닿았다.
도킨스의 말처럼 나도 인간인 이상 이기적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리라.
이 글을 쓰는 시점에는 연락을 하진 않지만 간접적으로 소식을 듣긴 한다.
훗날 다시 만나 뵙고 싶은 분 중 한분이시다.
각설하고 다시 2002년으로 돌아가 보면 당시 그 회사는 나를 포함한 특례병 8명 안팎과 8명의 라인 아주머니들과 4~6명의 관리자로 이루어진 회사였다.
주 업무는 라인 아주머니들은 생산 라인에서 CCTV 회로 모듈과 외관 케이스를 조립하고 우리 특례병들은 불량을 수리하거나 검사를 하거나 모듈에 프로그램을 입력하는 일이었고, 한 달에 두세 번 출하하는 날이면 개당 20킬로 가까이 나가는 제품 박스 수백 개를 택배 상차하듯 싣는 게 주 업무였다. (이때의 후유증으로 난 허리디스크를 갖게 된다.)
두 명씩 한 팀이 되어 하루 종일 앉아서 수백 개의 모듈에 프로그램을 입력하고 렌즈를 끼운 뒤 포커스를 맞춘다. 그야말로 졸음과의 전쟁이다. (이때의 후유증으로 난 치질수술을 하게 된다.)
수리 기사는 보통 자격증이 있거나 납땜을 잘하거나 고등학교를 전자과와 관련된 곳을 졸업한 특례병이 맡았는데 나도 그에 해당된다.
선배 특례병에게 배운 기술로, 사실 별로 기술이랄 것도 없었다. 불량의 90%는 아주머니들의 납땜 실수가 많았기에 거의 식은 죽 먹기였다.
허나 백 개 중에 한 개 정도는 모듈 자체 불량이나 부품 불량이었는데 이걸 잡아내는 게 가장 어려운 일이었고, 백 개 중 한 개라고는 하나 보통 나가는 물량이 3천개 단위라 그 수량도 무시 못했었다.
그러면 수리기사는 그걸 살려 내느라 매일같이 야근이었고 주말도 없었다.
수리기사 대부분은 기숙사 생활을 했었는데 주말에 숙소에서 쉬고 있으면 관리자들 중 한분이 우리를 잡으러 오곤 했고 특근수당이나 야근수당 따위는 당연히 없었다.
점심식사는 교도소 식단보다 못할 정도였고 툭하면 음식에서 엄지 손가락만한 바퀴벌레가 등장하곤 했다. 우리는 불만을 품지도 못했다. 우리는 요즘 외노자들 보다 더 못한 취급을 받던 병역특례병들이었다.
우리는 출신지역도 다 달랐다. 강원도, 전라도, 경상도, 충청도, 전국 팔도에서 다 모였다. 허나 의외로 단합은 잘돼서 밤새 나누어도 다하지 못할 추억들을 그때 다 만들었다.
대충 기억나는 에피소드 몇 가지를 열거하자면 당시 한창 세이클럽 채팅 붐이 일었던 때였는데 나는 숙소에 있던 고물 PC로 늘 채팅을 하곤 했다.
당연히 이성과의 채팅이 대다수였고, 당시 차를 가진 형이 한명 있었는데 그 형 차를 이용해 밖을 돌며 내가 채팅으로 엮은 여자들의 전화번호를 받아 멀리서 보고 비주얼이 좀 괜찮으면 만나고 아니다 싶으면 도망 다니곤 했다.
난 번호를 공급해주며 작전을 짜던 책사였고 다른 이들은 현장 요원들이었다.
이성을 외모로만 판단했던 그때 우린 모두 어린 조무래기들이었다.
그리고 영원히 잊지 못 할 2002년 월드컵이 찾아 왔다.
우리는 우리나라 경기가 있는 날이면 차 있는 형을 꼬셔서 거리응원을 했고 부천역을 비롯해 부천지역 모든 역전을 돌고 그길로 영등포까지 퍼레이드를 하며 태극기를 흔들었고 창문에 걸터앉아 목이 터져라 함성을 질렀다.
지금 생각하면 정말 위험한 짓이었지만 거리의 사람들마다 호응을 해주었고 차량 진행조차 어려울 정도로 사람들에 둘러싸여 함께 외치고 그 기쁨과 감동을 나누었다.
앞으로도 그러할 것이고 대한민국 수많은 이들이 그러하듯 몇 안 되는 생에 최고의 순간으로 기억될 2002년 월드컵을 난 운 좋게 전국에서 모인 동기들과 함께 했다.
그리고 그 작은 회사에서 우리는 축구부를 만들었다.
가장 고참 특례병 중 한명이 주장을 맡았고 나는 총무를 맡아서 관리자 몇 명을 끼워 일 년 간 운영을 했다.
가끔 쉬는 주말이면 오정구 내동 초등학교에서 축구를 했고 경기 후엔 늘 막걸리를 마시곤 했다. 내 생에 가장 체력이 좋을 그때는 90분 내내 달려도 지치지 않았고 몸도 60킬로 초반대로 늘 가벼웠다. 지금은 배나온 돼지가 되었지만 체력만큼은 그때의 내가 부러운 건 사실이다. 처했던 상황에 비해서 말이다.
당시 MP3가 유행했었는데 음악을 하고 싶었던 나는 가장 고용량 MP3를 구입해 수 천 곡을 다운받아서 듣곤 했다. 힙합, 락, OST, R&B, 클래식, 트로트, 재즈, 이지리스닝, 제3세계 음악, 장르 불문으로 닥치는 대로 다 들었다.
대략 5천곡 정도를 다운받아 병역특례가 끝날 때까지 들었다. 물론 프루나에서 불법으로 다운 받았다. 이미 불법 도박까지 했던 내가 음원 다운이 뭔 대수랴 생각했다.
당연히 현재는 멜론에서 정식으로 음원을 구입해서 듣는다. 심지어 자동결제를 해놔서 다운받지 않아도 돈은 늘 빠져 나간다. 창작자와 예술가들에 대한 그때의 잘못을 갚기 위해서라도 현재의 나는 울산의 많은 예술인들에게 힘이 되어 주는 일들을 할 생각이다.
기숙사 맞은편 건물 지하에는 동네 아주머니가 운영하시던 노래방이 있었다.
나는 못해도 일주일에 하루쯤 퇴근 후 3시간씩 노래 연습을 했고 녹음테이프를 만들었다. 잦은 이사로 이젠 다 사라졌지만 정말 다시 찾고 싶은 내 물건 중 1순위가 바로 그 테이프이다. 정말 못 불렀던 걸로 기억한다. 그래서 더 찾고 싶고 더 듣고 싶다.
과거의 물건은 타임머신과도 같다. 과거의 물건을 접하면 그날 밤 꿈에 그 곳을 방문하여 그때의 힘들고 철없던 나를 마주하게 된다. 그 속에서 난 어린 나를 격려하고 충고하고 안아준다. 그러면 그 녀석은 도리어 현재의 나를 충고하고 위로한다.
꿈을 깨면 녀석의 위로가 나를 힐링하며 하루의 시작에 힘을 보탠다.
좋은 사람들과 좋은 곳에 가서 좋은 음식을 먹는다고 꼭 힐링은 아니라고 본다.
힐링은 멀리 있는 게 아니라 자신들 속에 혹은 내 작은 서랍장에 혹은 침대 밑 보물 상자 속에 있는데 우린 그것을 잊고 지내는 것이라 늘 멀리서만 찾으려 하는 것 같다.
우리에게도 토이스토리의 우디와 버즈가 있었다는 걸 기억했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