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 10시가 다 돼가는 야자 3교시의 끝자락. 어둠은 새까맣게 드리웠고, 학생 하나, 선생 하나만이 고요한 자습실에 남아 무미건조한 야간 자율학습이 이어졌다. 선생의 손가락은 자판을 두드리느라 분주히 움직이고 학생은 문제를 풀다가도 푸는 둥 마는 둥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더니 머리에 해드셋을 끼고 음악을 들으면서 코팅 종이의 문제집에 샤프심의 흑연가루로 둥근 숫자 위에 총총 뛰어 V자의 발자국을 수놓는다. 날파리 하나가 그 적막을 방해할 뿐이었다.
그러다 들릴 듯 말 듯한 “띠링” 소리와 함께 선생의 컴퓨터 작업표시줄로부터 말풍선이 올라온다. 그것은 교육용 컴퓨터에 설치된 메신저 프로그램의 송신알림이었다. 메신저가 어떤 내용으로 쓰였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선생은 양심의 흔들림을 나타내는 찝찝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이내 ‘별 일 있겠어’라는 생각으로 눈을 질끈 감았다 뜸으로써 그 표정을 지우고는 혼자 자습실을 차지하며 공부를 하는 학생을 불렀다.
“성일아.”
“아, 네.”
학생은 헤드셋을 재빨리 벗어서 책상에 올려두고 예의바르고 싹싹한 어투로 선생에게 대답했다.
“쌤이 프린트 뽑아야하는 게 생겨서 그러는데 잠시 위층에 갔다 올 테니까 조금만 기다려.”
“예. 다녀오세요.”
말은 했지만 선생은 다시금 찝찝한 표정을 짓고 노트북과 본인의 핸드백을 들고 문을 드르륵 열고 나갔다. 학생은 개의치 않고 다시 헤드셋으로 음악을 들으며 공부에 열중했다. 한 십여 분 듣더니, 학생은 어느 샌가 모르게 본인이 듣고 있던 노래를 입으로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Is... this... the real... life... Is this just... fantasy...”
그러다 학생은 중얼거림을 그만 두고 귀가 답답해졌는지 헤드셋을 벗고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혼잣말로 다시금 중얼거렸다.
“이 양반은 왜 이렇게 안 와... 금방 온다더니만...”
학생은 잠시 문제집을 접어두고 핸드폰을 켜려고 했지만 핸드폰의 배터리는 음악을 듣느라 어느새 다 방전된 뒤였다. 어쩔 수 없다는 생각으로 다시 문제집을 펴려 한 그 때, 학생은 공기 끝자락에서부터 전해져오는 분위기가 사뭇 달라짐을 느꼈다.
아직 중간고사 직전의 4월 말인데도 마치 열대식물원에 온 것 마냥 공기가 축축했으며, 달큰하면서도 시큼한 풀내음이 강하게 나기 시작했다. 결정적으로, 날파리가 날던 소리가 들리지 않기 시작했다.
결정적으로, 저 구석의 천장에서 물방울이 톡하고 떨어지는 게 보였다. 떨어진 물방울은 “치이익...”하고 미세하고도 불쾌한 소리를 냈다. 스산함은 갈수록 더해졌으며 깔끔하던 자습실은 연옥과도 같이 느껴졌다.
“톡”하고 떨어지는 소리와 “쉬이익”하고 무언가가 녹는 소리가 두어 번 더 들렸을 무렵, 학생은 나가기로 결심했다. 비록 자습실을 맡기고 간 선생님께는 미안했지만, 본능이 더 우선이었다. 의자 뒤에 걸어둔 가방에 필통을 넣고, 헤드셋을 넣고, 문제집을 넣기 위해 잡으려는 그 순간, 천장에서 눈깔사탕만 한 물방울이 문제집 위로 떨어지며 책상과 문제집을 꿰뚫는 직경 5cm의 커다란 구멍이 생겨났다. 그랬다. 떨어지던 이 물방울은 강산(强酸)이었고, 학생은 여기가 어디인지 어느 정도 가늠이 갔다.
그렇다. 여기는 식충식물의 안. 그는 운 없이 걸려버린 한 마리 벌레.
학생의 머리에는 탈출해야한다는 생각으로 가득 찼고 복도와 이어진 자습실의 유일한 문을 쳐다봤으나 문고리는 이미 녹아내린 후였다. 학생은 ‘염병’ 하고 마음속으로 나지막이 외친 뒤, 창문가로 뛰어갔다. 철봉이 막지 않는 위쪽 창문을 황급히 열어 재끼고 그걸 타넘고 나가려 낑낑댔다. 두어 번의 시행착오 끝에, 이제는 천장이 서서히 내려와 위쪽 창문으론 나갈 수 없게 돼버린 현실과 마주했다.
바닥엔 어느 새 찰박찰박 소화액이 고이기 시작해 신발 밑창이 서서히 녹아내리고 발바닥이 따끔거렸다. 학생은 내려오는 천장을 막기 위해 청소도구함의 대걸레를 빼들어 지탱시키고는, 비상탈출이 가능하게 만들어진 철봉을 빼려고 시도했다.
원래 열쇠로 빼는 물건인데다가 녹이 슬어 잘 열리지 않았기 때문에 학생은 안간힘을 썼다. 그러길 수 십 초, 손톱이 부러지도록 열다보니 위쪽이 분리되긴 했으나 더 녹이 슬고 뻑뻑한 아래쪽 난간 연결부위의 난관이 학생을 가로막았다. 학생은 방전된 핸드폰으로 망치질을 하듯 아래쪽을 부숴서 철봉과 창문틀을 분리시키고는 뛰어내리기로 결심했다.
가슴께가 창틀을 빠져나갈 무렵, 나무로 된 대걸레자루는 서서히 금이 가더니 부러졌고 “끼이익”하는 소리가 들릴 정도로 천장은 빠르게 내려왔다. 간신히 전신을 창문 밖으로 빼냈지만, 왼 발의 반 정도가 그러지 못 해 잘려나가고 말았다. 학생은 추락했다. 저 아래로... 저 아래로... 안식이 기다리는 저 대지로...
“끄으윽...”
고통 반, 안도 반. 핸드폰은 부서지고 배터리도 없어 전화를 할 수도 없었다. 갈비뼈도 부러진 것 같았다. 고통이 채 가시지도 않을 무렵, 막막함이 몰려왔지만 이맘때 특유의 찬 밤공기가 학생의 마음을 어루만져주었다.
학생은 비틀비틀 일어났다. 그리고 교문 밖으로, 끔찍한 교문 밖으로 다리를 절며 빛나는 구원의 전광판 불빛을 향해 어기적어기적 걸어갔다.
그 순간, 땅이 울렸다. 그리곤 운동장이 직각으로 일어서며 학교를 삼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