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번주 토요일의 일이다.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지상으로 올라가는데 뜻밖에 기분 좋은 소나기가 내리고 있었다. 비릿하게 전해져 오는 도시의 냄새, 달아오른 아스팔트 바닥이 만들어낸 훈김이 끈적하게 맨살에 달라붙었다. 지하도 입구에는 발이 묶여버린 사람들이 드문드문 보였다. 체념한 표정으로 시원하게 쏟아붇는 풍경을 바라보는 두명의 여자도 있었다. 지나오는 길에 네이쳐 리퍼블릭 8800원 '고급형' 우산이라는 푯말을 본 기억이 났다. 나는 무슨 생각이 들었던건지 지하로 다시 내려가 우산을 2개 샀다. 사온 우산을 두명의 여자중 한명에게 내밀었다. 그녀는 당혹스러움과 반가움이 반반 섞인 웃음을 지었다.
주말 오후, 당연히 약속 같은건 없다. 이런 날은 서점의 과학 서가 사이에서 시간을 보내는 것이 좋다. 수십억 개의 점멸하는 흰색 점들과 현란한 문양의 프랙탈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인간의 시시콜콜한 연애 따위 한줌의 티끌이나 다름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 한줌짜리 티끌에 목숨거는게 인생 아니냐?' 멀리서 이런 항의 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다. 굳이 반박하진 않겠다. 언제나 그렇듯 내가 맞고 당신들은 틀렸으니까.
요즘은 우주의 법칙이 어딘가 근본적으로 잘못되어 버린 것이 아닌지 의심이 들곤 한다. 이 정교한 세계의 톱니바퀴에 무언가 이물질이 끼었음이 분명하다. DNA든 염색체든 어딘가에 예정되어 있을 나의 짚신짝이 나타나야 할 시기가 까마득히 지나버렸음에도 나타날 생각을 않고 있기 때문이다. 과거의 나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던 걸까. 선택할 수 있었던 893247366262 가지 미래 중에서 어째서 약속도 없고 휴가도 없고 애인도 없는 미래를 택한걸까. 이런 대사가 기억이 났다. '아무리 기다려도 태양은 녹슬지 않고, 기다리다보면 패는 뜨게 되어 있다' 나는 여전히 패가 뜨기를 기다리는 중이다.
등 뒤로 책을 찾는 사람의 인기척이 느껴졌다. 들고 있던 미치오 카쿠의 '평행 우주'를 접어서 서가에 꽂아 넣고 한칸 옆으로 자리를 비켜주었다.
"안녕하세요, 직장인이세요? 아니면... 학생?"
학생? 오랜만에 들어보는 소리다. 이런 질문에 기분이 좋아지면 안되는건데.
"직장인입니다. 왜그러시죠?"
아마도 나는 즐거운 표정을 짓고 있었을 것이다.
"책 읽으시는거 보니까 인상이 너무 좋으셔서요."
"........"
20대 중반쯤으로 보이는 여자 한명, 중학생과 고등학생 사이쯤으로 보이는 앳된 소녀 한명이 도망갈 틈도 없이 나의 퇴로를 압박하고 있었다.
"저희는 절대 이상한 사람들 아니구요, 홋홋, 기운이 너무 좋으신데 도화살 같은게 보여서요."
기운이 너무 좋은데 도화살이 있다고? 음...절대 이상한 사람이 분명하다. 성급하게 판단하는건 옳지 않다. 하지만 같은 자리에서 3번 정도 같은 상황을 겪게 되면 그건 선입견이 아니라 그냥 팩트인거다. 근처에 공부방으로 가서 심리 상담을 해보지 않겠냐고 말할 순서다.
"아저씨, 관운이 있는 얼굴이에요. 무슨일 하세요?"
옆에 있던 소녀가 대화를 자르고 끼어들었다. 송아지처럼 맑은 눈을 가진 소녀였다. 결코 미워할 수가 없는 눈이다. 뿜어져 나오는 신실함, 건강함, 세속에 찌든 인간으로서 범접하기 어려운 깨끗함이 있었다. '응, 아저씨는 걸그룹 기획하는 일을 하고 있어. 국민프로듀서라고 들어봤니?' 작은 웃음으로 친근감을 표하고 싶었지만, 갑분싸를 만들어 버릴거 같아서 그만 두었다.
"회사 다니고 있는데...왜?"
"그럼 종교는 뭐 믿으세요?"
재미있는 소녀다. 왜 이런걸 궁금해 하는 걸까. 그리고 같이 온 여자는 소녀와 무슨 관계일까. 엄마라고 하기엔 너무 어리고, 언니라고 하기엔 나이 차이가 좀 있어 보인다. 어른들의 꼬임에 넘어가 버린걸까, 아니면 무슨 협박이라도 받고 있는 것일까. 나는 경계심과 측은함이 반반쯤 섞인 기묘한 감정이 솟구쳤다.
"난 힌두교를 믿어."
옆에 있던 여자가 입을 가리고 킥킥 웃었다. 소녀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날 봤다.
"왜요?"
궁금한게 많은 소녀인거 같다. 대화의 주도권이 이쪽으로 넘어와버렸다.
"전생이나 윤회 같은게 있으면 좋겠어. 한번만 살고 죽기에는 인생이 너무 짧고 아깝잔아. 이 넓은 서점에서 우리가 딱 만난것도 인과 법칙처럼 정해져 있었던 건지도 모르고,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는데 전생에 우리는 가까운 사이였을 수도 있고, 뭐 그런거니까."
알아들을 수 없을 만큼 모호한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역효과가 났는지 전보다 더 호기심에 가득찬 눈으로 날 보고 있었다. 그냥 병신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때가 꼬질꼬질하게 탄 흰색 운동화가 보였다. 거기에는 생활의 고단함이 묻어 있었다. 평범한 정도의 영악함을 갖추었더라면, 또래의 아이들만큼 때가 묻었더라면 이런 요상한 세계에 발을 들이지 않아도 되었을 텐데. 가슴 속에서 기분 좋은 쓰라림이나 달콤한 통증 같은 것이 우러나왔다. 압정을 한 움큼 삼켰을때 느끼는 그런 종류의 아픔과 비슷하면서도 다른 것이었다. 분명 다른 평행 세계 어딘가에서 이 소녀는 좀 더 행복한 삶을 살고 있을 것이다. 보호해주고 싶은 생각이 들었지만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나는 소녀가 전해준 기묘하고 기분좋은 쓰라림에 작은 보답을 하고 싶어서 이런 이야기를 떠올려 보았다. 내가 할 수 있는 거라곤 이런 망상을 하는 것 뿐이다. 2018년 지구와는 다른 우주에 살고 있는 한 아저씨와 한 소녀에 관한 이야기다. 이 이야기는 '옛날 옛적에'로 시작해서 '슬픈 이야기라고 생각하지 않습니까'로 끝난다. 어쩌면 지금 이 세계와 동시에 진행되고 있는 이야기 일수도 있고, 다음 생에서 다가올 새로운 이야기인지도 모른다.
옛날 옛적에, 지구에서 멀지 않은 소혹성 B612에는 한 아저씨와 소녀가 살고 있다. 이 남자는 소녀를 사랑하고 있다. 엄청난 나이차를 극복한 로맨스라는 설정을 쓰고 싶지만 왠지 모를 죄책감 때문에 아버지와 딸의 관계라고 슬며시 설정을 바꾸었다. 공무원은 윤리 헌장이 있고 의사는 히포크라테스 선서가 있듯, 나의 망상에도 '아재 윤리 강령'이란 것이 있기 때문이다.
이 남자는 첫사랑에 성공해 결실을 맺는다. (엄청난 속도위반이었다) 우주 저항군의 핵심 전력으로 평가되던 남자는 차기 사령관 자리도 마다하고, 한 여자의 남편이 되어 열심히 육아와 내조를 하기로 마음먹는다. 퇴직금을 탈탈 털어서 B612라는 자그마한 보금자리도 꾸몄다. 지름이 약 100m 남짓 되는 작디작은 행성에 포근한 느낌이 드는 2층짜리 목조 주택을 지었다. 와이프가 출퇴근 할때 쓰는 우주선 주차장도 딸려있다. 물푸레 나무를 한그루 심었다가 관리하기가 귀찮아서 얼마 전에 뽑아버렸다. 이 세계에서도 역시 군인 퇴직금이 짱인것 같다.
와이프 혼자 외벌이면 난방비나 분유값 같은게 버겁지 안냐고? 이쪽 평행 세계에서는 뛰어난 과학자들이 많아서 이미 영구기관 같은 것이 발명되어 있다. 이 기관을 최초로 발명한 과학자 집단은 이 기관에 '행복 회로'라는 이름을 붙였다. 세상 사람들의 행복 지수가 높아지면 행복 입자가 우주공간에 가득차게 되고, 그 입자를 농축, 가공한 에너지를 원천으로 와이파이를 켜거나 세탁기를 돌리는 것이다. 나는 와이프와 부지런히 섹스를 하기 때문에 이 행성에 행복 에너지가 모자랄 일이 없다. 와이프가 퇴근하기 전에 턱걸이를 100개씩 하고 적도를 따라 난 오솔길을 50바퀴 정도 러닝한다. 가끔 저녁 반주로 복분자주를 마시기도 한다.
남자는 B612에서의 생활에 꽤나 만족하고 있었다. 여기서는 마음만 먹으면 하루에 마흔 세번정도 해가 지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가끔씩 의자를 옮겨 주어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지만, 타오르는 듯한 황색 풍경 속에서 마시는 복분자 술이 일품이기 때문에 그런 귀찮음 정도는 눈감아 줄만 했다. 출근해야 할 회사도 없고 연말 공제 때문에 골머리를 앓아야할 일도 없었다. 군입대 때문에 남녀가 떨어져야 하거나 다퉈야 할 일도 없는 곳이다.
다만 여기에는 다른 평행 세계처럼 학교가 있다. 행복하게 사는 법은 태어날 때부터 익히고 있는게 아니니까. 딸이 어렸을 적에는 글쓰기와 그림그리기, 역사 과목을 홈 스쿨링 했었는데, 남자가 문돌이 출신이라 이번에 태양계 제 2347XXX 중학교에 입학 시켰다. 요즘은 '우주소년단'이라는 아이돌에 빠져서 아빠와 대화도 잘 하려하지 않는다. '저 나이 때는 다 그런거지' 하고 혼자 생각해보지만 어쩐지 섭섭한 마음을 감출 수가 없었다.
소녀의 이번 학기 수행 평가 주제는 '평행 세계의 아빠를 만나고 오기'였다. 소녀가 다른 평행 우주로 출발하는 날, 남자는 숨겨둔 비상금을 꺼내 딸에게 꼭 쥐어주었다. 차 조심하라고 신신당부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눈물을 글썽거리며 손을 흔드는 남자를 뒤로 하고 소녀는 평행 우주 XXXX년 지구로 여행을 출발했다.
모든 이야기가 그렇듯 그들에게는 가혹한 운명의 파도가 들이닥친다. 소녀가 지구에 착륙하는 순간 부주의로 타임머신이 파손되어 버린 것이다. 그 부분은 행복 입자 가속기였기 때문에 소녀 혼자 고칠 수가 없었다. 지구의 과학자들에게 도움을 청해보아도 상황은 전혀 나아지지 않았다. 기다리고, 기다리고, 또 기다리면서 소녀의 기억은 서서히 희미해져 갔다. 자기가 어디에서 왔는지 무엇을 하러 왔는지 조차 가물가물 해졌다.
완전히 절망에 빠져 있던 소녀는 무슨일이든 가능하게 해준다는 사람을 만났다. 그는 스스로를 '전지전능한 자'라고 소개 했다. 자신의 가르침을 모든 사람들에게 전파한다면 집으로 돌아갈 수 있게 해주겠다고 말했다. 설교에 깊이 감복한 소녀는 그를 따르는 추종자가 되었다. 소녀는 오늘도 길거리와 지하철 사이를 이리저리 헤메면서 사람들을 설득하는 중이다. 왜 이런 일을 시작하게 되었는지, 최초의 목적 따윈 오래 전에 잊어버리고 말았다.
평행 세계 B612에 남아 있던 남자는 돌아와야 할 날짜가 훌쩍 지난 딸이 걱정스러워 견딜 수가 없었다. 태양계 지방 경찰청은 딸의 사고를 단순 실종으로 처리하고 수사가 종결되었다는 말만 되풀이 했다. 가만히 앉아만 있을 수는 없었다. 와이프 몰래 B612 행성을 은하뱅크에 저당 잡히고 타임머신을 구입했다. 딸을 구하기 위해 거대한 시간의 장벽을 넘기로 결심 한 것이다. '여보, 미안해' 라는 편지만 남겨 둔 채였다.
운명의 폭풍은 거기서 멈추지 않고 모든 것을 집어 삼켰다. 평행 세계에 불시착하면서 타임 머신의 행복 회로가 폭발해 버린 것이다. 남자는 고장난 행복 회로 따위 안중에도 없었다. 딸을 찾기 위해 걷고 걷고 또 걸었다. 만나는 사람마다 딸의 행방을 물었다. 하루, 이틀, 사흘.....열흘....백일...그렇게 시간은 흘렀고 여전히 딸을 찾을 수는 없었다. 남자는 자기가 어디에서 왔는지, 이름이 무엇이었는지 조차 가물가물 해졌다. 그렇게 기억은 점점 희미해져 갔다. 모든 기억을 깡그리 잊어버린 남자는 지구의 평범한 사람들처럼 대학에 입학하고 군대를 다녀오고 취직을 했다. 가끔 쉬는 날이면 서점에서 평행 우주에 관한 책을 뒤적거리며 시간을 보냈다. 이제 모든 것이 흐릿해져버린 것이다. 그러나 무의식 저편에서 단 한가지만은 사실만은 지워지지 않았다. 딸을 만나야 한다는 것. 그것 외에는 모든 것이 불분명했다.
어느 토요일 오후였다. 그날도 남자는 서점의 과학 서가 사이에서 책을 읽고 있었다. 운명의 장난이었을까. 전도를 하려고 서점에 들어 왔던 소녀는 평행 우주에서 자신을 찾아온 그 남자와 마주치게 된다. 그러나 그들은 너무도 오랜 시간을 떨어져 있었다. B612에서 찰나 같은 시간이 지구에서는 수십, 수백년의 시간이었던 것이다. 두 사람은 너무도 만나고 싶어서, 서로를 생각하는 마음이 너무 간절해서 그만 서로를 잊어버리고 말았다. 눈 인사를 나눌 때에도 직업을 물을 때에도 인연과 인과법칙에 관한 이야기를 주고 받을 때에도 상대를 기억해내지 못했다. 기억력이 나쁜 것까지 유전되어버린 부녀사이였다. 그들은 그렇게 서로를 뒤로한 채, 스쳐 지나 버리고 말았다.
슬픈 이야기라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가느다란 인연의 실이 이어져 있었던 것인지 남자는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올라가는 지하 입구에서 소나기를 피하고 있는 소녀를 다시 만나게 된다. 남자는 소녀를 보면서 어쩐지 슬프면서도 따뜻한, 가슴 깊은 곳의 울림을 느꼈다. 자기도 모르게 지하도로 내려가 우산을 하나 사와서 소녀에게 내밀었다. 뜻밖의 호의에 당황했지만 소녀는 그것을 건네 받는다. 얼어붙은 시간의 강을 거슬러, 거대한 공간의 뒤틀림을 넘어, 깊디 깊은 블랙홀의 암흑을 돌파해 그들은 마주보게 되었다. 지구의 자전 주기처럼, 핼리 혜성의 운행처럼 정해진 우주의 법칙에 의해 다시 만나게 된 것이다.
그들이 우산으로 이어진 순간, 운명의 장난처럼 기억이 되살아 났다. 세월의 더께가 무색할 만큼 서로를 바라는 마음은 강력하게 이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두 사람 덕분에 지구의 행복 지수는 급격하게 높아졌다. 대기에 충만해진 행복 에너지는 타임머신의 입자 가속 기능이 필요 없을 만큼 충분했다. 그들은 긴 여행을 뒤로하고 꿈에도 그리던 집으로 돌아갔다.
번뜩 정신을 차린 나는 지하철 입구에서 채도가 낮은 연두색 우산을 건네는 중이었다. 찰나 같으면서도 영원 같은 망상 속에서 손을 놓아야 한다는 사실을 까맣게 잊어 버렸다. 우산을 받은 소녀는 웃는 얼굴로 고마움을 표시했다. 여전히 빗소리가 시원하게 들려오고 있었다. 나는 문득 기쁘면서도 영문 모를 슬픔이 솟아올라 버스 정류장 쪽으로 뛰어가버렸다. 이상하게 머리속에는 이런 말이 맴돌았다. '우리 이쁜 딸, 아빠가 알아보지 못해 미안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