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소에는 마트로 전화를 걸어 이것저것을 주문 배달 시켰다. 하지만 1년에 딱 하루는 직접 마트에 들렀다. 그날에는, 계산대에 오면 카트 안에 두었던 짙은 갈색의 지팡이를 제일 먼저 꺼내고 그다음엔 싱싱한 낙지와 냉동 군만두를 꺼냈다. 올드보이에 깊은 감명을 받은 게 분명했다. 그 영화를 생각하니 문득 한 녀석이 떠올랐다. 벌써 거의 10년 전의 인연이었다.
할아버지의 모습은 긴 백발의 머리, 덮수룩한 흰 수염이 덮여있었다. 마치 해리포터에 나오는 덤블도어를 연상케 했다. 하지만 어딘가 섬뜩한 분위기를 풍기는 할아버지는 그 흔한 포인트 적립도 하지 않았고 항상 현찰을 사용했다. 그리고는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나도 이 마트에서 일 한 지 이제 10년이 다 되어 가지만 할아버지와는 말 한번 섞지 못했다. 처음에 내 계산이 틀려 거스름 돈을 잘못 줬을 때 지팡이로 내 머리를 내리친 것 말고는.
집으로 배달을 가면 항상 현관 앞에 놔두라는 메모 때문에, 마트에 왔을 땐 괴상한 분위기에 짓눌려 말 한번 꺼내지 못했다. 10년 동안 지켜본 결과는 말을 걸어도 아무런 대답도 들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혹시 말을 못하시는 건 아닐까도 생각했다.) 1년 중 딱 한번 할아버지께서 나오시는 날들을 기록해 놨다. 10월 31일. 그 녀석이 또 다시 생각났다.
처음에 나는 노인이 마트에 오는 날이 무슨 날인지 몰랐다. 언제부터 우리나라 사람들이 할로윈을 그렇게 챙겼는지, 밖에는 한껏 분장을 한 사람들이 활개를 치고 있었다. 도대체 할로윈과 노인은 무슨 관계가 있을까.
“배달 왔습니다.”
할아버지의 거주지는 마트 가까이에 있는 아파트였다.
삐이이이용 삐이이이용 —
“화재가 났습니다. 모두 밖으로 대피하십시오.”
화재 경보기가 울렸다. 그런데 노인의 집에선 사람이 나오기는 커녕, 아무런 기척도 느낄 수 없었다. 혹시 정말로 올드보이 처럼 누군가 안에 갇혀 있는 건 아닐까? 그래서 못 나오는 건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하자 알 수 없는 두려움에 가슴이 미친듯이 뛰기 시작했다. 꺼내줘야 했다, 구해줘야 했다.
쿵쿵쿵
“저기요!! 안에 계세요?”
소리쳤지만 역시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하지만 안에서 어렴풋이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점점 가까이 다가오고 있는 발자국 소리와 함께 이런, 이라고 내뱉듯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철컥
“불 안 났어요. 자주 그래요. 신경쓰지 마세요.”
신발장을 지나 짧은 복도에는 흰색의 긴 가발, 덥수룩한 수염, 지팡이가 널브러져 있었다.
“누구냐 넌?”
젊은 남자는 베란다 난간을 잡고 창밖을 바라보고 서있었다.
“여기서 또 만나네요.”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젊은 남자는 뒤돌아 보며 무심히 말했다.
“소대장님 저 모르겠어요? 그렇게 힌트를 줬는데.”
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 천천히 베란다 쪽으로 다가갔다. 분명 10년 전 그 녀석이었다.
“넌 그때 탈영한..”
“어제가 딱 10년 째 되는 날이었어요. 전 이제 진짜 자유인 입니다.”
입을 벌린 채 녀석을 멍뚱히 보고있던 나는 정신을 가다듬고 말했다.
“들키지 않으려고 그동안 할로윈 데이 때만 분장하고 나온 거야?”
복도를 지나 거실로 들어온 나는 그 녀석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모든 분장을 벗어던진 그 녀석의 얼굴은 10년 전 그대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