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세상에 세금 내기 좋아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나 세금을 걷지 않으면 정부가 제대로 기능할 수 없고, 따라서 세금은 일종의 ‘필요악’일 수밖에 없습니다.
누군가는 세금을 내야 한다는 것이 움직일 수 없는 진실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누가 얼마나 많은 세금 부담을 져야 하느냐에 있습니다.
좋은 조세제도의 첫 번째 기준은 납세자들 사이에서 조세 부담이 공평하게 나누어지고 있는지의 여부입니다.
공평한 조세 부담의 분배가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어느 누구도 기꺼이 조세 부담을 떠안으려 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공평한 조세 부담 분배의 원칙으로 우리나라를 위시한 대부분의 나라들이 선택하고 있는 것은 “능력원칙”(ability-to-pay principle)입니다.
즉 납세자의 경제적 능력에 따라 조세 부담의 크기가 결정되어야 한다는 원칙입니다.
공평한 조세 부담 분배의 원칙으로서 능력원칙은 전문가들 사이에서 폭넓은 지지를 받고 있습니다.
능력원칙은 수평적 공평성(horizontal equity)과 수직적 공평성(vertical equtiy)의 두 세부원칙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수평적 공평성의 원칙은 경제적 능력이 똑같은 사람은 똑같은 세금 부담을 지게 만들어야 한다는 원칙입니다.
그리고 수직적 공평성의 원칙은 경제적 능력이 더 큰 사람은 더 많은 세금 부담을 지게 만들어야 한다는 원칙입니다.
문제는 경제적 능력이 커짐에 따라 세금 부담을 어느 정도로 더 크게 만들어야 하는지에 있습니다.
조세제도의 누진성(progressivity)이라는 것이 바로 이 점과 직결된 개념인데, 어느 정도의 누진성이 적절한 것인지에 대한 답을 얻는 것은 매우 어려운 문제입니다.
적절한 정도의 누진성이라는 것은 수많은 요인을 고려해 결정되어야 하고, 그 과정에서 가치판단이 개입되기 때문에 ‘정답’이라는 것이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어찌 되었든 경제적 능력이 더 큰 사람은 더 많은 세금 부담을 지는 것이 공평하다는 데 이견이 있을 수 없습니다.
부자가 미워서 세금을 더 걷는 것이 아니라, 경제적 능력이 커서 세금 부담을 능히 질 수 있기 때문에 세금을 더 걷는 것입니다.
따라서 부자들이 내는 더 많은 세금은 징벌의 의미가 아니라 능력의 인정이라는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최근 재정개혁특위가 내놓은 조세제도 개편안을 놓고 말들이 많습니다.
오늘 아침 어느 신문의 사설을 보니 “‘가진 자에겐 더 걷어도 된다’는 편 가르기 증세”라고 이 개편안을 규정하고 있습니다.
이 논리대로 한다면 과거 MB정부가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부자감세’를 했을 때도 ‘편 가르기 증세’를 한 셈인데 내 기억으로 그 신문이 그때 그런 표현을 쓴 적은 전혀 없었습니다.
부자들에게 감세 혜택을 주는 것은 편 가르기가 아니고 조세 부담을 늘리는 것은 편 가르기라는 주장은 과연 어떤 논리적 근거를 갖고 있을까요?
우리가 차분하게 따져야 할 점은 과연 그와 같은 개편안이 가져올 귀결이 무엇인지입니다.
‘편 가르기 증세’라는 감정적 표현이 개입되는 순간 차분한 논의는 불가능해집니다.
그 사설이 세제 개편안을 비판하는 구체적 내용을 봐도 수긍하기 어려운 점이 많이 눈에 띕니다.
우선 그 사설은 “금융소득이 1000만원 이상이면 근로소득세와 합산해 최고 46.2%의 세율을 적용 받는다.”고 지적합니다.
물론 이 말에 한 마디의 틀림이 없지만, 얼핏 들으면 어느 정도 이상의 금융소득을 얻는 많은 사람들이 아주 무거운 세 부담을 지게 된다는 것으로 들릴 수 있다는 문제가 있습니다.
금융소득에 이 최고세율이 적용되려면 근로소득이나 사업소득 등 다른 소득이 1억원 이상 있어야 합니다.
따라서 다소간의 금융소득이 있는 많은 납세자들에게 적용될 세율은 그보다 훨씬 더 낮습니다.
46.2%의 세율을 적용 받는 납세자들을 중산층이라고 부르는 데는 분명 무리가 있습니다.
그 사설은 과세대상자가 40만 명으로 늘어날 것이고 적지 않은 중산층도 과세 대상에 포함될 것이라고 지적합니다.
우리나라 근로소득자가 1,600만 명 정도이고 사업소득자까지 포함하면 납세자 총수가
2000만명이 넘을 텐데, 그렇다면 금융소득 종합과세의 영향을 받는 사람은 고작 2% 내외라는 계산이 나옵니다.
이 사람들을 중산층이라고 부르는 건 어폐가 있지 않을까요?
이 세상에 상위 2%의 사람을 중산층으로 분류하는 나라가 어디에 있을까요?
뿐만 아니라 그 사설은 금융종합과세 대상의 확대가 소비 위축으로 이어질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나아가 증세가 경기에 찬물을 끼얹는 결과를 빚을 것이라는 주장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경제학자인 나는 이런 주장을 뒷받침할 수 있는 이론적 근거를 하나도 알 수 없습니다.
그 사설을 쓴 사람은 신자유주의적 감세정책이 경제를 활성화시킬 수 있다는 신화를 믿고 있을 것이 분명합니다.
세율을 낮추면 노동 공급이 늘어나고 저축과 투자가 늘어날 것이라는 게 그와 같은 신화의 근거이지요.
바로 이 점에서 그 사설을 쓴 사람의 논리적 비일관성이 드러납니다,
신자유주의적 감세정책이 저축을 늘어나게 만든다면, 그 반대로 이자소득의 세율을 올리면 저축이 줄어드는 것 아니겠습니까?
저축이 줄어든다는 것은 소비가 늘어난다는 것인데, 어떻게 이자소득에 대한 증세가 소비 위축으로 이어질 것이라고 단언할 수 있습니까?
논리적 일관성을 유지한다면 이자소득에 대한 증세가 소비의 증가로 이어질 것이라는 예측을 해야 마땅한 일입니다.
사실 이자소득에 대한 감세가 저축의 증가로 이어질지의 여부는 경제학자들도 잘 모릅니다.
미국 레이건 행정부의 감세정책을 분석한 결과를 보면 이자소득에 대한 감세에도 불구하고 저축은 크게 늘지 않은 것으로 나타납니다.
그렇다면 거꾸로 이자소득에 대한 증세를 해도 저축이나 소비에는 큰 영향이 오지 않을 것으로 예측하는 것이 순리입니다.
그리고 증세가 경기위축으로 이어질 것이라고 단언하는 것도 위험한 일입니다.
만약 정부가 더 거둔 세금을 지출로 전환하지 않고 금고 속에 꽁꽁 숨겨둔다면 그런 결과가 나올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정부가 그렇게 할 가능성이 전무하다는 것은 모두가 인정하는 사실 아닙니까?
그 사설에서도 그렇게 거둔 세금을 생색나는 곳에 선심을 쓰게 될 것이라고 예측하고 있지요.
경제학원론 책을 보면 ‘균형재정승수’(balanced budget multiplier)라는 말이 나옵니다.
세금을 일정액 더 거둬 정부지출로 사용하면 국민소득이 바로 그 크기로 늘어난나는 의미에서 쓰는 용어지요.
즉 정부지출로 이어지는 증세는 경기를 위축시키는 것이 아니라 확장시키는 효과를 갖는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증세가 경제 위축으로 이어질 것이라는 그 사설의 주장은 경제학원론에서 가르치는 기본원리를 무시한 것이 아닐까요?
여러 나라에서의 실험을 통해 감세정책으로 경제를 활성화시킬 수 있다는 신자유주의자들의 믿음은 허구임이 명백하게 드러났습니다.
그들이 즐겨 부르짖는 ‘낙수효과’(trickle-down) 역시 한 점 신빙성도 없는 허구임이 의심의 나위 없이 밝혀졌습니다.
이제는 “감세는 미덕, 증세는 악덕”이라는 신자유주의적 도그마를 헌신짝처럼 버릴 때가 되었습니다.
정부가 생각하기에 세금을 더 거둬야 할 필요가 있다면 당연히 증세의 길로 가야 합니다.
그리고 그 추가적 부담을 누가 져야 할지를 고려할 때 경제적 능력이 가장 중요한 변수가 되어야 하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입니다.
경제적 능력이 더 많은 사람에게 더 많은 부담을 지운다고 해서 무조건 이를 “편 가르기 증세”라고 몰아붙이는 건 합리성을 결여한 주장입니다.
부자들의 경제적 능력에 비해 너무나도 무거운 부담을 지웠기 때문에 공평성에 심각한 문제가 생겼다는 사실을 명확하게 밝히는 것이 건전한 비판의 자세입니다.
이 점에 대한 결론이 나기 위해서는 경제학자들의 세심한 연구과 많은 토론이 필요합니다.
지금 이 시점에서 정답을 알고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최근 증세관련해서 좋은 글을 보아서 공유합니다.
출처 | http://jkl123.com/sub5_1.htm?table=board1&st=view&page=1&id=18340&limit=&keykind=&keyword=&bo_class=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