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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계비행물체가 지구에 온지 12일이 지났다. 그 사이 현주의 말처럼 통신이 끊겼다. 통신뿐만 아니라 전기, 방송, 인터넷, 수도, 가스가 다 끊겨 버렸다. 단 며칠 사이에 사회 기능이 마비되었다. 바이러스의 발원지가 한군데가 아니라 전국에 고루 퍼져 있었기 때문에, 그리고 잠복기도 짧았기 때문에 전국은 순식간에 혼란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병원은 감염자들로 포화상태가 되었고, 감염자 임시수용소도 남는 자리가 없었다. 의료인들 중에도 감염자들이 속출해서 병원에 나오지 않는 의사와 간호사들도 많이 생겼다. 누군가는 히포크라테스 선서를 저버리고 달아난 의료인들을 비난했지만 누가 보더라도 전염병에 대한 희망이 안 보였다. 한국만 이런 게 아니라 세계 곳곳의 상황도 마찬가지였다.
“저, 대리님 조금 좋아했어요.”
현민은 방 안에 앉아 현주가 한 말을 생각했다. 현주는 괜찮을까. 싱숭생숭한 말만 남겨놓은 그 통화가 현주와의 마지막이었다. 말도 안 되게 절망적인 상황에서 생뚱맞은 그 고백이 며칠 동안 현민을 잠깐씩 헛웃음이 나게 했다. 그러나 그것뿐이었다.
세상이 멀쩡할 때 그런 말을 들었다고 해도 그녀가 자기 타입도 아닐 뿐더러 당장 회사에 집중해야 될 시기에 연애할 마음도 없었다. 쓸데없는 감정소비는 딱 질색이었다. 게다가 아주 잠깐의 호감이었다고 하지 않았는가. 현주도 불안한 와중에 의지할 사람이 별로 없으니 감정이 고양되어서 그런 말을 한 것이리라. 아마 전화를 끊고 나서 자신이 왜 그런 말을 했을까하고 이불킥을 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그런 민망함도 잠시 뿐이고 현실로 다시 돌아왔을 때는 그런 한가한 감정을 느낄 틈도 없을 거라고 현민은 생각했다. 기본적인 사회시스템이 다 망가진 이상 더욱 거칠고 괴로운 상황들이 닥칠 것이다.
수도가 끊긴 것이 가장 문제였다. 물이 끊기자 식품의 유통기한처럼 현민의 생존기한도 명확해졌다. 남아있는 물은 현민이 약수통에 받아놓은 것과 페트병, 대야, 욕조에 받아놓은 물이 전부였다. 현민은 최대한 아껴 쓰면 한 달 정도 쓸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그 후에는 바이러스에 감염되든 말든 밖에 나가서 물을 구해야 하는 것이다.
최대한 안 마시고 안 씻어야 했다. 샤워는 꿈도 못 꾼다. 변기에 용변 본 것도 씻고 남은 물을 모아 그걸로 흘려보내야 했다. 인간적인 삶이란 놈들이 지구에 오고 나서 끝났지만 이제는 정말 냄새나고 동물 같은 나날을 보내야 할 판이었다.
전기가 없어서 냉장고를 더 이상 쓸 수 없었는데 냉장고에 있던 음식들을 우선적으로 먹어치워서 큰 피해는 없었다.
전등을 켤 수가 없어 촛불이 조명을 대신했다. 그러나 전기가 들어왔을 때도 사람들은 집안의 불을 키지 않았다. 식량이 있을 만한 가게들을 털고 다니는 (그래봤자 이미 식량은 없었지만) 약탈자들에게 자기 집을 노출시키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밥은 가스가 끊겨서 부탄가스로 해먹을 수밖에 없었다. 현민은 줄어가는 부탄가스를 보며 좀 더 사 놓을 걸 하는 아쉬움을 느꼈다. 만약에 부탄가스가 떨어지면 책이라도 태워서 그걸 연료 삼아 밥을 만들어 먹어야 하나 하고 생각했다.
통신이 끊긴 것도 사람들의 심리에 큰 영향을 끼쳤다. 밖에 나갈 수도 없는 상황에서 방송과 인터넷이 바깥 상황을 알아볼 수 있는 유일한 창구였다. 그런데 통신이 끊기니 사람들은 물리적으로 고립된 상황에서 심리적으로까지 완전하게 고립된 느낌을 받았다. 현민만 그런 것이 아니었다. 모든 사람들이 그랬다. 그 때문에 사람들의 자살률은 높아졌다.
치안시스템도 더 이상 작동하지 않았다. 그러자 약탈자들이 더욱 날뛰었다. 상가의 건물은 약탈자들로 멀쩡한 곳이 없었다. 음식이 있다고 생각되거나 생필품이 있다고 생각되는 곳은 모두 털렸다. 현민의 아파트 단지 내에 있는 상가도 마찬가지였다. 슈퍼, 프랜차이즈 빵집, 치킨집, 카페, 모두 간판이 꺼지고 입구 문이 부서져 있었다. 현민은 베란다에 서서 단골집이었던 빵집의 통유리창이 박살난 걸 멍하니 내려다보았다. 출근길에 아침식사할 시간이 없을 때 빵을 사먹고 했던 곳이었다. 점장이 친절하고 서비스가 좋아 이 아파트에 장사한 지 꽤 오래 된 집이었다.
현민이 한참 빵집을 내려다보며 상념에 잠겨 있는데 그때 오토바이를 탄 세 명의 남자가 요란하게 소리를 내며 아파트 단지 안으로 들어왔다. 모두 방독면을 쓰고 있었다. 남자들은 오토바이에서 내리더니 오토바이 옆에 걸어 놨던 쇠파이프를 들고 슈퍼를 들어갔다가 빵집에 들어갔다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나왔다. 식량을 찾는 모양이었다.
식량을 찾는 데 실패한 남자들은 상가 앞 주차공간에 주차된 차들 근처로 다가갔다. 그리고 차들의 주유구를 강제로 열어서 자바라로 석유를 빼내어 준비된 자신들의 석유통에 넣기 시작했다. 주유구를 빠루를 이용해 파손시켜 강제로 열다보니 몇 개의 차들에서 도난 경보음이 울려댔다.
상가 앞의 지상주차장에는 스무 대 정도의 차량이 주차되어 있었는데 놈들은 도난경보음이 울려대는 것도 개의치 않고 차량 끝에서부터 한 차량씩 잡고 석유를 빼나갔다. 머리를 투블럭 스타일로 깔끔하게 자른 놈이 리더 같았다.
투블럭은 중간쯤에 있는 아우디차 안에 뭔가 탐나는 게 있는지 쇠파이프로 차문 유리를 박살내기 시작했다. 안 그래도 시끄러운 와중에 삐잉삐잉 아우디의 도난경보음이 보태져 시끄럽게 울려 퍼졌다.
지상주차장과 가장 가까이 붙어 있는 현민의 동 건물 사람들이 요란스런 소리에 베란다로 나와 밖을 내려다 봤다. 놈들은 주민들이 자신들을 내려다보자 사람들에게 가운데 손가락을 내밀었다. 뭘 봐, 씨발, 어쩌라고. 표정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호기심에 베란다 창 가까이 와서 섰던 주민들은 상대할 인간들이 아니라고 판단하고 얼른 베란다에서 모습을 감췄다.
“야이 새끼들아! 뭐하는 거야!”
그때 중년남자의 잔뜩 성난 목소리가 도난경보음을 덮었다. 아우디의 차주인이었다. 차주인은 베란다 창문을 열고 고개를 내밀어 세 남자를 노려봤다. 놈들 중 투블럭이 재밌다는 듯이 입꼬리를 올리더니 더욱 격렬하게 쇠파이프를 휘둘러 차를 뽀개기 시작했다. 그러자 석유를 빼내고 있던 두 놈도 가세해서 차를 부수었다. 세상이 망하지 않았다면 저 파괴본능을 어떻게 계속 참고 살았을까 싶은 모습이었다.
“그만 안 해! 이 양아치 새끼들아!”
차주인이 외치자 투블럭이 차주인을 보고 손을 까딱하며 씨익 웃었다.
“아, 꼬우면 나와서 말려보든가.”
나머지 두 놈이 킬킬 웃었다. 차주인은 말이 안 통하는 놈들이라는 걸 깨닫고 얼굴만 새빨겨져서 씨익씨익거렸다.
“안 와? 내가 갈까?”
그러자 남자 한 명이 투블럭에게 말했다.
“가보자. 저 새끼 되게 포동포동한 거 보니까... 식량이 넉넉한가 봐.”
“그럴까?”
투블럭은 손가락을 들어 차주인의 집 층수를 헤아렸다. 그러자 차주인은 얼른 베란다 문을 닫고 몸을 감췄다. 투블럭이 말했다.
“킬킬킬, 다 셌다. 병신아.”
놈들은 쇠파이프를 바닥에 끌면서 동 입구로 들어갔다. 현민을 포함해 그 아파트의 몇 명은 경찰에 신고하려고 했지만 통신이 안 된다는 비참한 현실만 다시 깨달을 뿐이었다. 통신이 된다고 해도 경찰이 제대로 출동할지도 몰랐다.
양아치 일당 세 명은 쇠파이프를 어깨에 걸쳐들고 계단을 올라갔다. 뭐가 그렇게 신나는지 낄낄대는 웃음을 멈추지 않았다.
“그 새끼 일단 감염자는 아닌 거 같은데... 집에 들어가도 안전하겠지?”
“안에 식량 좀 많으면 좋겠다.”
“살 찐 거 보니까 집에 먹을 거 엄청나게 많이 쌓아놓는 놈일지도 몰라.”
맨 앞의 놈이 7층 쯤 올라갔을 때였다. 갑자기 놈이 뭔가에 안면을 강타당하고 뒤로 넘어지며 계단을 굴렀다. 두 놈은 넘어지는 앞의 놈을 받아주기는커녕 놀라 피해버렸다. 뭐야 하면서 남은 두 놈이 앞을 쳐다보니 차주인이 계단을 막 도는 계단참에 서있었다. 야구방망이를 들고 씩씩 대고 있었는데 덩치가 꽤 컸다. 양아치 놈들의 덩치도 작진 않았는데 차주인의 덩치는 그야말로 왕년에 운동 좀 제대로 한 몸집이었다.
“와 봐! 와 봐! 이 새끼들아!”
안면을 강타당한 놈은 방독면 렌즈가 깨지고 얼굴이 피범벅이 되어 기절해 있었다. 차주인은 한 놈이 기절하자 기세가 등등해졌다.
“아저씨 쌈 잘해? 힘 좀 세네?”
곱슬머리를 길게 장발로 기른 놈이 뒷주머니에서 식칼을 꺼냈다. 식칼에는 이미 피가 말라붙어있었다. 사람에게 이미 한번 썼던 것인가? 차주인은 생각했다. 아니, 한번이 아닐지도 모르지.
놈은 식칼의 피를 일부러 보여주듯이 칼을 쭉 내밀고 헤헤 웃었다. 차주인도 지지 않고 놈들이 접근 못하도록 야구방망이를 마구 휘둘렀다.
“대가리 빠개지고 싶으면 올라와라. 이판사판이야. 개쓰레기 같은 것들.”
야구방망이를 마구 휘두르자 식칼을 든 곱슬머리가 쉽게 접근하지 못했다.
“비켜봐.”
뒤에 있던 투블럭이 보다 못해 칼을 들고 있던 곱슬머리을 밀치고 앞에 나섰다. 그리고선 자신도 뒷주머니에서 식칼을 꺼냈다. 그리고 손잡이를 잡고 뒤로 팔을 젖혔다. 던질 자세를 취하는 거였다.
“내가 너 심장에 정확히 맞춘다.”
투블럭이 그렇게 말하자. 차주인이 움찔하면서 투블럭의 칼을 주시하며 피할 자세를 취했다. 그러나 투블럭은 던질 듯 말 듯 하면서 시늉만 했다. 차주인의 움찔거리는 반응을 즐기는 듯 히죽거리기도 했다. 그러다가 획 던지는 시늉을 했다. 차주인이 움찔하면서 몸을 피했는데 그 순간 투블럭이 두 세 계단을 성큼성큼 올라가 차주인의 배에 칼을 꽂아넣었다.
“아악!!”
차주인은 고통으로 일그러진 표정을 하면서도 투블럭의 얼굴을 잡고 힘을 줬다. 엄청난 아귀힘이 투블럭의 얼굴을 압박했다. 투블럭이 얼른 칼을 비틀었다. 차주인이 더 심해진 고통에 몸부림쳤다.
“끄아아아악!!!”
투블럭의 얼굴을 옥죄고 있던 손에선 힘이 빠졌다.
그러자 곱슬머리도 칼을 들고 차주인의 다른 쪽 옆구리를 찔렀다. 마치 사자가 곰 사냥을 하는 듯한 모습이었다. 차주인은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투블럭은 칼을 빼고 피를 털어냈다.
“아, 찝찝해서 피보기 싫었는데... 젠장.”
“그래도 가끔씩 찔러줘야 감 안 잃는다.”
곱슬머리가 낄낄댔다. 그러고서 시선을 아래쪽에 기절해 있는 남자에게 던졌다. 바닥에 닿은 남자의 머리에 피가 고여 있었다.
“저 새끼는 어떡하지?”
“뒤진 거 같은데... 깝치더니. 잘 됐지 뭐.”
투블럭과 곱슬머리는 차주인과 동료를 두고 계단을 마저 올랐다. 계속 올라가 아까 헤아렸던 층수와 위치에 섰다. 현관문은 잠겨 있었다. 곱슬머리가 빠루를 들고 문고리를 내리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