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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일파 잡아 족치기, 그 아홉번째 이야기
게시물ID : history_14477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글래머웨이터
추천 : 16
조회수 : 1170회
댓글수 : 7개
등록시간 : 2014/03/06 10:10:02
친일파 잡아 족치기 아홉번째 이야기입니다.

안녕하세요...

처음으로 오유 역사게에 인사드리네요...

오유는 주로 눈팅만 하구 있구..뽐뿌에서 주로 활등하는 글래머...입니다...

뽐뿌에서 현재 친일파 잡아 족치기 시리즈를 연재하고 있으면서..

오유 베오베에 가끔 제글이 올라오는 걸 보고 "이미봤다"님께 참 감사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미봤다"님께 무슨 일이 있으신건지.. 아홉번째 이야기부터는 안올리시길래..

이렇게 제가 직접(부끄럽지만  ㅡㅡ;;;) 글을 나릅니다....

다른 욕심은 없구..

우리 옆에 아직도 살아 숨쉬는 친일파들을 하나하나 까발리고 싶은 마음입니다..

도서관에나 가야 볼 수 있는 어려운 말들로 가득한 친일파 사전.....

저도 이 사전을 만드는데 많은 기부를 했지만. 친일파 사전이 많이 어려운 건 사실입니다......

서두는 이만 접구 오늘도 개색히 하나를 까발려 보도록 하겠습니다....



우선 아홉번째 이야기는 친일파의 이야기가 아니라.. 독립운동가의 이야기입니다.


이 글을 올리는 이유는 이글의 주인공이 친일파라는 것이 아니라..

태어날 때부터 독립운동가와 친일파의 운명이 정해진 것이 아닌.....

입신양명을 위해 스스로 노력하였던 사람이
(친일파들도 그들의 입신양명을 위해 일제에 부역했겠죠..)

어떠한 과정을 거쳐 독립운동가가 되는지 보여주고 싶어 이 글을 적게 되었던 겁니다....

이봉창 의사의 경우 전형적인 생계형 친일파이긴 하나 

그가 말년에 어떠한 일을 함으로서 

후손들이 그를 어떻게 기억하게 되는지를 알려주고 싶어 이 글을 올립니다...





기노시타 쇼조

1900년 8월 10일 아버지 이진규의 아들로 서울에서 출생
                      할아버지때부터 수원에 거주하며 농업으로 생계를 이어 갔으나
                      집안의 농지가 도시개발계획 근처에 있다는 이유로 쪽바리에게 강제로 빼앗김 
                      이후 어쩔 수 없이 가족을 이끌고 서울로 올라와 거주

1911년 10살 가정 형편이 어려워 학비를 마련하지 못해 어릴 때는 집에서 글을 배웠고
          11살 쯤 용산의 문창초등학교에 입학

1918년 17살 졸업 후 편의점 알바를 뛰다 기차 운전 견습생으로 들어감
          기차 운전 견습 중 같은 직위였지만 원숭이들과 조선인들의 처우에 차별이 있다는 걸 느끼고
          본격적으로 일본말을 배우고 일본인이 되고 싶어함 

1919년 18살 차별대우가 계속되자 "에이 조깥아서 못해먹겠네 하고" 
                 운전견습생을 그만두고 일본에 건너감
                 이때 건너간 목적은 일본을 좀더 배우기 위해서였고
                 쪽바리의 두목 원숭이를 눈 앞에서 알현하고 싶어서였음
                 
                 하지만 이토록 일본인이 되고 싶어했던 기노시타 쇼조는 일본 발음이 어눌하다는 이유로 순사에게 붙잡히고 맘
                 결국 두목원숭이의 행차가 있던 날. 유치장에 구속.
                 
                 기노시타 쇼조는.. "뭐 되는게 하나도 없네... " 하며.. 다시 귀국

1924년 25살 귀국 후 철도 쪽 인맥을 이용해 다시 용산역에 입사 
                 한국인의 성인남성 평균키가 162였던 시절 180의 훨친한 키를 뽐내며 
                 서울의 기생이란 기생집은 모두 탐하고 다님.....
                 그 당시 골프도 치는 등... 모던뽀이 행세를 하고 다님..

                 "난 일본인으로 태어났어야 해.... "하며 한탄하고 술과 마작과 여자에 빠져있던 기노시타 쇼조는
                 얼마안되는 철도 노동자 월급으로 기생집에 빚을 짐
                 결국 이를 갚기 위해 퇴직하며 퇴직금을 수령함

1925년 26살 백수로 빈둥거리며 뽀던모이 행세를 못하던 시절....
                 철도공무원을 그만 둔 일본인이 조선인 식모를 구해 원숭이의섬으로 데려가고 싶다는 얘기를 듣고
                 조카딸 이은임을 식모로 주선함.....
                 이때 받은 여비로 이은임과 함께 도쿄로 다시 넘어감

1929년 30살 도쿄와 오사카를 오가며 하루 벌어 하루 노는 생활을 이어감
                 오사카의  비누상점에 취직했을 땐 수금한 돈 100원을 갖고 도쿄로 튐
                 이후 해산물 도매점의 알바로 취직했으나 옆집 가게와 싸우기 싫다고 다음날 그만둬 버림
                 가방점에 외판원으로 취직한 적도 있으나 가방 판 돈을 들고 술마시다 또 짤림
                 하여튼 술마시는거 좋아하고 여자 좋아하고 마작 좋아하는 그런 분이셨음

1931년 32살 나고야에서 병이 들어 병원에 입원. 
                이때 기노시타 쇼조는 친구가 내준 병원비로 병을 치료하며 신세 한탄을 또 하고 있었음...
                친구는 "그렇게 일본인이 되고 싶으면 일본의 참한 처자를 꼬셔서 일본인의 사위가 되라고 함"
                하지만 이때 이미 마음이 바뀜
                쪽바리에게 독을 품었음
                병상에서 상하이에 대한민국의 임시정부가 있단 소식을 접하고 김구를 만나고 싶어 함

1931년 32살 상하이로 밀항(떼먹은 돈이 많아서..)
                생계비용이 필요했던 기노시타 쇼조는 명선철공소에 입사했으나 
                이곳에서도 잦은 결근으로 짤림..
                참 대책 없던 사람이었음...

1931년 32살 김구를 만나고 싶었던 기노시타 쇼조는 임시정부의 주소를 찾아내 무작정 임시정부를 방문
                 2층에서 회의를 하던 김구는 
                 쪼리 질질 끌고... 쪽바리처럼 보이는 색히가 갑자기 한밤중에 찾아와 대한민국을 위해 일을 달라하길래 의심부터 했다고 함

                 임시정부 사람 중 2~4명의 청년들이 쫓아내려 했으나 
                 제발 한 번만 만나뵙게 해달라 하여 일단 근처 여관에 잠시 있으라고 전함

                 김구는 기노시타 쇼조를 어떻게 시험할까 궁리하다가 경호원들을 데리고 일단 여관으로 감
                 여기서 이것저것 떠보던 김구에게 기노시타 쇼조는 이런 말을 함
                 
                 "독립운동 하는 사람들이 왜 원숭이들의 두목을 가만 놔두는 것입니까?"
                 - 그일이 그렇게 쉬우면 우리가 왜 안하겠습니까?
                 "제가 일전에 섬나라에 살면서 원숭이들의 두목이 행차하는 것을 자주 보았습니다. 
                  그때 저는... 나에게 무기가 있다면 저 색히를 당장 탕탕 쏴죽일텐데 하고 생각했습니다."

김구는 이 말을 듣고 기노시타 쇼조의 진심을 알게 됨. 그리고 그의 풍세에서 흘러 나오는 원숭이들의 모습을 이용하고자 했음
기노시타 쇼조는 딱 보기에도 일본인이었음

1931년 2월 김구는 기노시타 쇼조에게 홍커우 쪽에 살면서 일본인 행세를 하라고 함

1931년 12월 13일 안중근의 동생 안공근의 집에서 
               "나는 적성으로써 조국의 독립과 자유를 회복하기 위하여 한인애국단의 일원이 되어 
                적국의 괴수를 도륙하기로 맹세하나이다."라는 선서를 하고 김구선생과 기념 촬영을 함  


546546566.jpg


1931년 12월 17일. 드디어 원숭이두목 처단 프로젝트의 첫 발이 내디뎌 짐.
               기노시타 쇼조는 김구에게 폭탄 구입 자금을 받고 됴코로 다시 넘어감
              
               하지만 폭탄 구입 자금을 또 술먹고 노는데 다 써버림. ㅠㅠ
               진짜 대책 없이 술 좋아하던 양반이었음

               결국 김구에게 두번째 자금 송금을 요청함

               하지만 김구도 똑똑한 인물이었던지라 이번엔 돈으로 안보내고 일본으로 들어가는 식료품 사이에 폭탄을 실어 보냄

               1932년 1월 초 기노시타 쇼조는 이를 수령

1932년 1월 8일..... 김구가 전해준 폭탄을 기노시타 쇼조는 원숭이들의 두목에게 멋지게 투척
                          이 폭탄이 터졌어야 하는데 ㅠㅠ
                          식료품 사이에 끼어 먼 바다를 건너온 폭탄이었던지라..
                          습기때문에 불발이 되고 맘.. ㅠㅠ



작전은 실패



1932년 1월 8일 기노시타 쇼조는 현장에서 체포

Arrested_Lee_Bong-chang.JPG





1932년 9월 16일 도쿄 대법원은 기노시타 쇼조에게 사형을 선고

1932년 10월 10일 이봉창의사 순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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