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만 민간인학살 개요
들어가면서...
한국 전쟁 전후 100만 민간인학살은 한국현대사 최대의 비극이자 블랙박스다.
대한민국 태동의 비밀이 그 속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왜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죽었을까?
죽은 자는 누구고 죽인 자는 누구인가?
대학살이 한국사회에 미친 영향은 무엇인가?
부모, 형제, 자매를 잃은 유족들에게 국가란 과연 무엇이겠는가?
죽이는 이야기
(제정신 갖고는 돌아볼 수 없는 그 참상)
한국 전쟁 때 한반도에서는 세계 역사상 그 유래를 찾아보기 힘든 ‘만행’이 저질러졌다. 수도 없이 많은 사람을 죽였다. 온 산하가 피로 철철 넘치게... 뚜렷한 이유도 없이... 단지 우리 편이 아니라는 이유만으로도, 아니 우리 편이 아닐 가능성이 있다는 이유만으로 우리는 그것을 ‘학살’이라고 부른다. 학계에서는 일반적으로 학살을 ‘아무런 위협이 없는 데도 그저 좌익, 우익, 부역자 등 집합체의 성원이라는 이유 또는 혐의만으로 무고한 살인을 저지르는 행위’라고 정의한다. 반세기 전 대한민국은 온갖 유형의 ‘학살’의 전시장이요 백화점이었다.
얼마나 ? 100만 ?
그럼 얼마나 많은 사람이 그렇게 죽었느냐고? 남한에서만 무려 100만 명에 달한다. 이는 전투로 인한 군인, 민간인 희생자를 제외하고 순전히 ‘학살’당한 민간인들을 센 숫자다. 1960년 4.19 직후에 활동한 전국유족회는 자체 조사를 통해 피학살자의 수가 약 114만 명이라고 주장한 바 있지만, 당시의 유족회 자료를 5.16쿠데타 세력이 모두 수거해가 그 근거를 확인하기는 어렵다. 이후 민간에서 실태조사 및 자료추적을 통해 추산한 피학살자의 수가 약 100만에 이른다.
전쟁때는 으레 사람이 많이 죽는 것 아니냐고 ? 천만에, 전투와 무관한 학살이 굉장히 많았다! 아무리 전쟁때라도 전투와 무관하게 자행된 학살이 정당화될 수는 없다. 전쟁중인 적국의 국민이라 하더라도 민간인은 함부로 죽일 수 없으며 또 적군이라도 항복의사가 명백하다면 처형할 수 없다는 것이 국제법의 기본이다. 아무리 극단적인 상황에서도 인간의 생명은 최후까지 존중받아야 한다는 것이 인류라는 이름에 걸맞은 보편적인 상식이다.
죽이는 방법도 가지가지였다. 지금까지 세상에 알려진 잔인한 방법들이 다 동원되었다. 총살과 기총소사, 폭격에 의한 참살은 기본이고, 죽창으로 찔러 죽이고, 몽둥이로 때려 죽였다. 일본도로 목을 쳐 죽이고, 불태워 죽이고, 굶겨죽이고, 산 채로 생매장에 죽이고, 물 속에 처넣어 죽이고, 굴 속에 떨어뜨려 죽였다. 목 졸라죽이고, 껍질을 벗긴 채 나무에 매달아 죽이고, 사지를 찢어죽이는 끔찍한 행위까지도 서슴지 않았고, 죽일 사람이 없을 때 가족을 대신 죽인 경우, 씨를 말려 후환을 없애야 한다며 일가족을 몰살한 경우도 비일비재했다.
민간인학살의 유형 ?
한국전쟁기에 민간인이 불법으로 집단살해된 사건은 학살은 크게 6가지 유형으로 나뉜다.
전쟁 상황과 전선의 이동을 감안하여 이를 시기별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 전쟁 이전 학살 : 6.25전쟁 이전 제주도와 여수·순천 지역, 지리산 중심의 ‘작은 전쟁’이 일어났던 지역에서 주로 군경 토벌대에 의해서 민간인들이 집단살해당한 사건
• 군경에 의한 예비검속자 및 형무소 재소자 학살 : 전쟁 발발 직후 국민보도연맹원을 비롯한 예비검속자, 형무소 재소자들이 법적 절차를 거치지 않고 집단처형당한 사건
• 미군 폭격에 의한 학살 : 유엔군(95% 이상이 미군) 참전 후 미군의 공중 폭격 등으로 피난민 등이 집단살해된 사건
• 점령기 인민군 등에 의한 학살 : 인민군 점령 직후와 후퇴 직전에 인민군과 지방좌익에 의해 우익인사들이 학살당한 사건
• 부역혐의 학살 : 주로 9.28수복 직후와 1.4후퇴기에 군경과 우익 치안대에 의해 인민군 점령지에 남아 있던 민간인들이 불법으로 집단살해된 사건
• 토벌작전 중 군경에 의한 학살 : 전선이 북상한 후 제2전선이 형성된 소백산맥과 노령산맥 일대 등지에서 군경 토벌대에 의해 민간인이 집단살해당한 사건
이중 부역혐의사건은 6가지 유형 중에서도 전국에 걸쳐 가장 폭넓게 진행되었고 희생자 수도 가장 많을 것으로 추정된다.
다만 경찰의 책임이긴 해도 마을에서, 마을 사람들에 의해 저질러진 경우가 많아, 수십 년이 흐르는 사이에 많은 사건들이 없었던 일로 덮어진 경우가 있고, 그 후유증도 가장 크다.
부역혐의 사건은 ‘전쟁기 민간인학살의 바다’라 할 만큼 부산-대구 일대의 미점령 지역을 빼고는 전국 방방곡곡 모든 곳에서 일어났다.
부역혐의 학살의 규모는 자수자와 검거자를 포함해 총 부역혐의자 수가 총 55만 915명으로 집계됐다는 ‘한국경찰사(1973)’의 기록을 통해 간접 확인할 수 있는데(이중 일부는 사형, 일부는 징역, 일부는 훈방), 여기에는 마을 안에서나 이송 과정에서 학살된 사람들은 빠져 있을 테니 그 수가 실로 어마어마했을 거라는 짐작만 할 수 있을 뿐이다.
이들의 행방은 제대로 기록, 정리돼 있지 않다.
부역혐의 학살에서 가장 슬픈 지점이자 그 본질을 알 수 있게 하는 에피소드는 당시 대통령 이승만을 비롯한 정권의 고위 관료들이 전쟁 발발 이틀 뒤인 6월 27일 이미 서울을 다 빠져나간 상태에서 국군이 북진중이며 서울을 기필코 사수할 것이니 서울 시민을 비롯한 국민들은 집에서 안전하게 대기해달라는 거짓 방송을 하고는 6월 28일 새벽 한강 인도교를 폭파하여 국민들의 피난길을 막아버렸다는 것이다.
참고로, 이승만은 6월 27일 전용기를 타고 경남 진해까지 날아갔다가 대구로 올라왔으나, 너무 멀리 왔다는 진언에 따라 다시 대전으로 거슬러 올라와 대전을 임시 수도로 정했다.
그러고서는 9월 28일 서울 수복 후 이른바 ‘도강파-잔류파’ 논쟁을 벌인다.
서울 수복 후, 소수의 ‘도강파’는 다수의 ‘잔류파’에게 부역혐의를 씌우고 압박했다.
이에 잔류파는 전황을 거짓 선전하고 한강 다리를 끊어 피난길을 막은 채 자기네만 빠져나간 정부가 오히려 남아 있던 사람들에게 사과하고 서울에 입성해야 하는 것 아니냐고 항변했으나, ‘도강파는 애국자, 잔류파는 부역자’라는 마타도어가 득세하면서 대대적인 부역자 처벌 및 약탈이 자행된다.
정권의 이런 태도가 전국에 걸쳐 부역자에 대한 엄중 처벌과 대대적인 불법학살을 조장하고 부추겼던 것이다.
부역자 심사는 수복 후 전국적으로 진행됐으나 실제 좌익세력과 부역자들은 대부분 후퇴하는 인민군과 함께 월북 또는 도피한 뒤였기에 부역자 처벌 명목으로 벌어진 약탈, 살해 등 불법행위의 피해자는 엄밀한 의미에서 적극 부역과는 관련 없는 사람들이 대다수였다.
뿐만 아니라 적극적인 부역행위를 했던 사람들이 자신의 부역 사실을 아는 사람을 오히려 부역행위자로 몰아 제거하려는 일도 빈번하게 일어났다.
이렇다 보니 자신을 보호할 능력이 없는 다수 서민들만 부역자 처단 포위망에 걸려들었다.
피해자 중에 부녀자들이 적지 않았던 점, 연좌제의 가장 극악한 형태인 일가몰살, 대살(代殺)이 빈번하게 자행된 점도 이러한 사정과 무관하지 않다.
요컨대 국민을 버리고 도망간 대통령과 정권이 그들의 말을 믿고 인민군 점령지에 남아 있던 국민을 적대시하는 웃지 못할 일이 벌어진 것이 부역혐의자 학살의 배경이자 본질이라고 할 수 있다.
죽인 자, 죽은 자
죽인 사람도 가지각색이었다. 남한측에서는 미군과 국군과 경찰이, 그리고 비정규무장대와 치안대가 학살의 전선에 나섰고, 북한측에서는 인민군과 빨치산, 지방 좌익세력이 크고 작은 학살에 가담했다. 전쟁 당시의 민간인학살이 더 충격적인 것은 그 다수가 적이 아니라 우리 군경에 의해 우리 국민이 집단학살 당했다는 점이다.
전체 학살 중 미군, 국군, 경찰, 그리고 우익단체와 비정규무장대에 의한 학살이 다수를 차지하고, 인민군, 빨치산, 지방 좌익에 의한 학살이 훨씬 적다. 당시 이승만 정권과 그 후견인인 미국이 다수 국민을 ‘잠재적인 적’으로 규정하고 무자비한 학살을 자행 또는 묵인했다는 증거가 적지 않았다. 이는 국제법과 인도주의 측면에서도, 그리고 국민주권의 우리 헌법 정신에 비추어서도 결코 용인될 수 없는 반인도적 전쟁범죄이자 국가폭력이었다.
죽은 사람도 천차만별이었다. 한강 이남의 보도연맹원, 형무소 재소자가 몰살되다시피 했고, 부역혐의자와 제2전선 지역 주민, 통비혐의자, 피난민이 무차별 학살의 대상이 되었으며, 불심검문 또는 가택수색에 의해 뚜렷한 혐의없이 붙잡혀가 불귀의 객이 된 이들도 적지 않았고, 미군과 군경의 초토화작전으로 죽어간 사람들도 부지기수였다. 한편 인민군과 좌익에 의해 반동분자로 분류된 친일파, 친미파, 경찰관, 우익단체원, 군인가족들도 학살의 희생이 되었다. 요컨대 학살희생자는 국민보도 연맹원, 형무소 재소자, 좌익경력자나 부역혐의자와 그 가족, 빨치산 활동지역 인근 마을 주민, 피난민, 우익 인사 등 사실상 국민 모두였다.
전쟁기의 한반도, 인권유린의 전시장
크고 작은 학살 현장에서는 인간의 탈을 쓴 짐승들의 향연이 난무했다. 전국 방방곡곡에 인권유린의 전시장이 설치되었고, 눈뜨고는 볼 수 없는 반인륜적 행위들이 자행되었다. 부녀자의 강간 능욕은 기본이고, 젖가슴 난자 살해 후 암매장, 알몸 고문, 부자간 뺨 때리기, 며느리 말태우기, 친족간에 생피붙이고 덥석말아 굴리는 장면까지 연출되었다.
사람을 죽이고 재산을 빼앗고, 심지어는 죽은 이의 부인을 강제로 첩으로 삼기까지 했는데, 천덕꾸리기가 된 남편의 아들은 문전결식하는 거지가 되고 여자는 미쳐버리기도 했다. 사람들을 상대로 일본도와 M1 소총의 성능을 실험하고 죽음까지도 실험 관찰하고, 가족이 총맞아 쓰러질 때 만세를 부르게 하고, 죽은 아들의 간을 입에 물고 돌아다니게 하는 등의 천인공노할 만행도 저질렀다. 일가족 몰살로 빈 집이 속출했고, 토벌군이 휩쓸고 간 마을은 잿더미로 변했다.
이런 참상들을 목도하고 살아남은 사람들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말문이 막혀 말이 나오지 않고 입이 있어도 말할 수 없다는 것이 바로 이런 상황을 두고 하는 말일 것이다. 아무리 잊으려 해도 잊히지 않는 그 악몽들, 눈을 감아도 질끈 동여 감아도 선연히 떠오르는 그 참상들을 안고 사는 사람들이 제정신이었을까?
지난 반세기동안 대한민국은 가히 거대한 정신병동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가족을 잃은 유족들은 물론이고 사람들의 끔찍한 죽음을 보고 들은 이들, 광기에 휩쓸려 학살에 가담한 이들에게 그 기억은 다시는 떠올리기도 싫은 일이었고, 도라질을 쳐서라도 꼭 떨어내야만 그래도 이 질긴 목숨을 연명해갈 수 있는 그런 끔찍한 일이었을 것이다.
거기에다 학살을 자행한 권력은 남은 사람들에게 재갈을 물렸다. 학살에 관한 이야기는 금기가 되었다. 특히 군경과 우익단체, 미군에 의한 학살은 아예 없던 일로 하거나 사실을 거꾸로 왜곡했다. 그럼에도 간간이 비어져 나오는 학살의 진실은 철퇴를 맞았다. 학살의 ‘학’자라도 입밖에 꺼내는 사람은 사상이 불순한 사람이 되었다.
도매금으로 ‘빨갱이 가족’으로 몰린 학살희생자의 유족들은 모진 목숨을 연명하기 위해 자신을 재포장했다. 군대나 우익단체에 들어가 신분을 ‘세척’했다. 권력의 실세가 된 가해자 집단과 어울려 그들과 교분을 쌓았다. 핍박받는 고향을 등지고 아무도 아는 이 없는 곳에 새롭게 정착하여 새로운 인생을 시작했다. 유족들은 자신의 2세들에까지 할아버지 세대의 죽음의 진상을 함구하면서, 오히려 ‘입 조심, 몸 조심’을 가훈으로 물려주었다.
사라진 우주, 그 자리엔 ?
그리하여 죽은 이들과 함께 학살 사실도, 그 존재 자체가 사라졌다. 일백만의 우주와 함께 온 우주가 사라졌다. 그리고 다른 우주가 열렸다. 그 곳은 오로지 오른쪽으로만 보고 오른쪽으로만 듣고 오른쪽으로만 생각하는 세계였다. 왼쪽으로, 아니 한가운데로라도 눈을 돌리는 사람은 이상한 사람 취급을 받는 별난 세계였다. 그 세계에서는 중립적인 사고도, 합리적인 사고도 들어설 자리가 없었다. 지금은 너무나 당연시되는 평화통일조차도 당시에는 ‘빨갱이’사상으로 몰렸다.
어디에 그런 세계가 있었느냐고? 한반도의 남쪽, 그리고 또 다른 의미에서는 북쪽도, 한반도 전역이 모두 그러했다. 불과 얼마전까지만 해도, 아니 지금까지도 그 잔영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에이, 이런 대명천지에 무슨 그런 일이 있었겠느냐고? 딴 나라 이야기 아니냐고? 귀가 닳도록 들어온 유태인 학살이나 남경 대학살, 만주의 731부대, 캄보디아의 킬링 필드, 베트남, 르완다, 칠레, 아르헨티나, 코소보, 동티모르, 아니면 스탈린 시대의 소련 이야기 아니냐고?
천만의 말씀! 바로 이곳 대한민국의 이야기다. 반백년 전, 대한민국에서는 세계 어느 곳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처참한 만행이 저질러졌다. 반백년 전, 한반도는 피바다였다. 대립과 원한과 증오와 복수의 피바다였다.
정치적 학살, 이념적 학살, 제노사이드
한국전쟁 전후의 학살은 대부분 정치적 학살이라고 할 수 있다.
반공정권 또는 인민정권 수립이라는 정치적 목적하에 정치적 반대자나 그 동조자, 걸림돌이 되는 사람들을 조직적으로 제거한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바탕에는 이데올로기가 깔려 있었으므로 이념적 학살의 성격도 강하다. 한편 미군에 의한 직접 학살의 경우에는 인종차별적 성격도 짙게 깔려 있었다.
한국전쟁 전후의 학살은 해방 이후의 국가 수립 과정에서 벌어진 정치폭력, 내전의 와중에 일어났고 내전 당사자들인 정권이 사실상 학살을 주도했다는 점에서 공권력에 의한 학살의 성격을 띠고 있다. 그리고 전세계적 냉전체제 수립 과정에서 한반도에 우익반공 정권을 세우려는 미국의 의도가 크게 작용했다는 점에서 외세에 의한 학살의 성격도 가미되어 있다. 반면에 전쟁에 개입한 중국군의 경우, 학살 사례가 거의 보고되지 않고 있다는 점에서 미군과는 크게 대비된다.
한국전쟁 전후의 학살은 또한 일제하 폭력체제의 연장이기도 했다. 1948년 여순사건을 빌미로 제정된 국가보안법은 식민지 지배의 기둥이던 치안유지법의 연장으로서, 일제 말의 사상범 통제정책을 답습, 강화한 것이었다. 계엄령과 예비구금, 사상전향제도 역시 일제의 유산으로서, 미군정과 이승만 정권은 이 제도들을 불법으로 적용하여 학살을 뒷받침했다.
미군정과 이승만 정권은 일제하의 억압기구인 일제 군대와 경찰을 그대로 살려 대한민국의 기초를 닦았고, 이들은 자신의 친일 전력을 반공으로 포장하면서 야만적인 학살의 최전선에 나섰다.
학살의 은폐, 왜곡
학살은 한 바탕 피바람으로 그치지 않았다. 학살의 땅에 선 대한민국과 그 후견인인 미국, 그리고 학살자들은 자신들의 손에 묻은 벌건 피를 하루 빨리 씻어내야만 했다. 그래도 사람 사는 땅에서 존경받고 권위를 인정받고 지도자로 행세하자면 학살자라는 멍에를 벗어나야만 했기 때문이다. 그러자면 사실을 은폐하고 왜곡하는 수밖에 없었다.
저들이 일차적으로 취한 방법은 학살 자체를 없던 일로 하는 것이었다. 전쟁중에 죽은 민간인의 수는 터무니없이 축소되었으며, 그조차도 전투나 학살과는 무관한 병사, 객사 따위로 처리되고, 다수는 그저 실종자나 행방불명자로 간주되었다.
그것으로도 문제를 덮을 수 없는 사람들에겐 학살이 아닌 그럴듯한 명분을 씌워 사실을 호도했다. 이제 오갈 수 없는 장벽이 된 휴전선이 그런 은폐를 도와주었다. 어쩌면 북에 생존해 있는 지도 모른다. 북으로 ‘납북’된 건지도 모른다는 일말의 가능성들이 그런 모호한 통계를 뒷받침해주었다.
나아가 모든 피학살들은 ‘악질 빨갱이’로 둔갑하거나 아니면 외려 원수인 공산당에게 무참하게 학살당한 ‘착한 인민들’로 탈바꿈되었다. 자기네가 죽인 사람들을 함께 하늘을 이고 살아갈 수 없는 철천지원수나 선한 희생양으로 만들어야만 자신들의 행동이 합리화되고 자신들의 존립 기반이 만들어질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열 살 박이 아이도 댕기머리 소녀도 모두 ‘악질 빨갱이’가 되거나 그게 여의치 않으면 거꾸로 ‘불순한 이념의 희생양’이 되었다.
많은 피학살자들이 죽어 마땅한 인종으로 둔갑했고, 그 ‘인간 송충이’들을 잡아 처치한 것은 결코 죄가 아니었다. ‘선한 희생양’들은 국가가 나서서 그 원을 풀어주어야 마땅할 텐데, 사실이 밝혀지는 순간 그 이면이 드러날 것이 두려워 손도 대지 못한 채 세월을 침묵으로 버텨왔다.
학살자들은 정부의 절대적인 비호하에 애국자로 둔갑했다. 반공이 ‘국시’인 나라에서 ‘빨갱이 사냥’은 영웅적인 행위였고, 그 일을 서슴없이 행한 사람은 ‘애국자’였다.
심지어는 학살을 자행한 국군 부대를 공비로, 우익단체원들을 변장한 인민군으로 조작하는 일도 서슴지 않았다. 그리하여 학살 만행을 저지른 사람들은 모두 인민군이나 공비라는 터무니없는 등식이 모든 공식 기록과 교육 자료에 버젓이 자리잡기에 이르렀다. 요컨대. 사람을 죽인 것은 인민군이요 빨치산이요 지방 빨갱이였다. 자신들은 손에 피 한 방울 묻히지 않은 선량한 사람이거나 자유와 평화를 위해 악당들을 물리친 ‘정의의 사도’였다. 그럼에도 어쩔 수 없이 간간이 확인되는 피학살자들은 정말 한 지붕을 이고 살아갈 수 없는 ‘악질 빨갱이’였다.
진실을 알 권리조차도 유린하다
학살자들의 행위를 정당화하거나 비호하는 사실은 대서특필하고 그에 반대되거나 그럴 우려가 있는 사실들은 무시하거나 왜곡하여 없애버렸다. 은폐와 조작들에 용감하게 의혹을 제기하는 사람들은 무참하게 짓밣였다. 사람들은 벙어리 냉가슴 앓듯 속만 끓었다.
피학살자들의 목숨에 이어 유족들의 알 권리까지도 유린당했던 것이다. 가장 큰 은폐, 왜곡은 진실규명운동의 무자비한 탄압으로서, 이는 피학살자들을 두 번, 세 번 죽이는 행위였다.
4.19직후 영남 지방을 비롯한 전국에서 양민학살 진상규명 운동이 봇물처럼 터졌으나, 1년 뒤 5.16쿠데타로 철퇴를 맞았다. 많은 유족과 사회운동가들이 ‘특수반국가행위’로 투옥되어 심한 고초를 겪었다.
전쟁기의 학살과 무관하지 않은 쿠데타 세력은 아예 학살의 흔적조차 없애버리고자 했다. 곳곳에서 위령비를 박살내고 무덤을 파헤쳐서는 유골을 내다버렸다. 사실은 물론 역사마저도 깨끗이 지우고자 했던 것이다.
5.16 직후 남제주의 백조일손 묘역에서, 거창 신원면 묘역에서, 경남 진영의 피학살자 묘역에서, 그밖의 수많은 곳에서 위령비가 파손되고 공동묘역이 파헤쳐지고, 희생자 명단과 많은 증거문서들이 압수돼갔다.
하수인은 4.19로 자취를 감추었다가 다시 나타난 이승만 정권의 앞잡이 경찰들이었고, 명령자는 쿠데타의 주역들이었다. 참고로, 5.16 쿠데타의 핵심 주역인 장도영, 박정희, 김종필 등은 6.25 당시 육군 정보국장과 그 요원들이었다.
유족회에서 자체 조사한 자료, 4.19 직후 국회와 정부에서 조사한 자료는 거꾸로 연좌제의 기초자료가 되었다.
상식이 통용되지 않는 야만의 사회에서 그 고통스런 기억들은 사람들의 뇌리에서 점점 잊혀져가며 재구성되었다.
악의적으로 재구성된 이야기들이 버젓이 교과서에 등재되며 자라는 세대들의 정신마저도 옭아맸다. 우리 사회는 거대한 정신병동이 되었고, 한국전쟁기의 100만 민간인학살은 병든 사회의 제일 금기가 되었으며, 언론도, 학자도 이 문제를 외면하기에 이르렀다.
마침내 학살은 없던 일이 되었고, 사라진 100만의 고귀한 생명은 기록 속에도 존재하지 않는 완전한 ‘부존재’가 되었다.
그것은 또 다른 학살이었다.
피학살자들을 두 번, 세 번 죽인 것이었다.
일제 40년보다도 더 무서운 여파를 남긴 대학살극
전쟁 전후의 대학살은 일제 40년 지배보다도 더 무서운 여파를 남겼다. 사람이 개처럼 떼거리로 죽어가는 판에 사람이 조금 두들겨 맞는 것이 무슨 큰 문제겠는가 ? 고문 좀 당하는 것, 억울하게 잡혀가는 것, 차별 좀 받는 것, 불이익 좀 당하는 것 등등이 무슨 대수겠는가?
사람들이 떼로 죽어가는 걸 보고도 입도 뻥긋 못했는데, ‘대수롭지 않은’ 부정과 불의에 대해 어찌 목소리를 높이겠는가 ? 세상은 다 그렇고 그런 거고, 죽는 놈, 맞는 놈만 서러운 거지, 재수없이 그런 꼴 안 보고 살려면, 권력에 붙어서 안전막을 쳐놓든지, 그게 싫으면 여기저기 끼어들지 말고 내 가족이나 챙기며 조용히 살아야지, 그런 사고가 사람들의 뇌리에 깊숙이 새겨지면서, 우리는 인권 후진국, 민주주의 후진국이 되었다.
전쟁 후 반백 년 동안, 피학살자 가족은 물론 그 이웃들에게도 ‘입 조심, 몸 조심’은 아버지가 아들에게 들려주는 제일의 가훈이었다. 그리고 학살자들이 지어낸 이야기, ‘죽을 짓을 했으니까 죽었겠지’하는 말들이 별다른 여과장치 없이 곧 바로 사회의 지배 담론이 되었다.
그런 가운데서 인권이니 민주주의니 하는 말은 교과서 한구석에나 힘없이 박혀 있는 허언일 뿐이었다.
요컨대 세계에서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극우반공체제, 인간의 목숨을 파리 목숨 정도로 여기는 생명경시와 인권유린 풍조, 웬만한 폭력은 폭력의 축에도 끼지 못하는 국가폭력의 사회, 이것이 우리가 전쟁과 학살을 통해 물려받은 유산이었다.
극우반공체제하에서 인권유린과 국가폭력은 그 뒤로도 계속 되풀이되었다. 4.19와 5.18의 무자비한 진압에서, 수많은 의문사와 고문치사, 각종 의혹사건, 민중 생존권의 폭력적인 진압 등등에서 국가폭력은 계속 기승을 부렸다. 그것은 국가가 다수 국민을 적으로 간주하던 전쟁중의 태도가 크게 달라지지 않았음을 뜻한다.
들고 일어난 유족들, 무참하게 짓밟히다
학살 문제가 결코 유족들만의 문제일 수는 없지만, 그래도 일차 당사자는 유족이다.
가족주의를 강요받는 우리 사회의 풍조에 비추어보면 더더욱 그렇다. 다수 유족들은 갖은 고초를 다 겪으면서도 자신의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침묵하고 자식들에까지도 함구했지만, 그래도 그걸 기억하고 싸우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러나 큰맘 먹고 앞장선 유족들은 오히려 이중 삼중의 고초를 겪어야만 했다.
학살진상규명 요구가 처음으로 전면 제기된 4.19 직후에는 유족들이 그래도 힘이 있었다.
유족들이 아직 젊었고, 유족들과 이웃들의 기억이 생생했다. 50년대 이승만 정부의 폭정도 그런 기억들을 깡그리 제거할 수는 없었다. 누가 누구를 죽였고, 죽인 자가 어떤 사람이고 죽은 자는 어떤 사람인지, 세상이 다 알았다.
북진통일의 슬로건 아래 지독한 ‘빨갱이 사냥’이 계속되고 지독한 탄압이 이어졌지만 압제의 뚜껑이 빠끔히 열리는 틈을 타고 거세게 터져 나오는 유족들의 한과 분노를 억누를 수는 없었다.
그러나 반공을 국시로 내건 5.16쿠데타 세력에 의해 피학살자들은 지하에서 또 한 차례 죽음을 맞았고, 유족회 간부들이 붙들려가 고초를 겪으면서 학살은 또다시 은폐되었다. 당시 자기 부모형제자매의 억울한 죽음의 진상을 밝히는 일에 앞장섰던 유족회 간부들에게 내려진 죄목은 ‘특수반국가행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