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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생 <2 >
게시물ID : lovestory_85592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미카엘의노래
추천 : 2
조회수 : 460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18/06/05 20:10:00
2.
 
졸업식 다음 날 16년 지기와 현금 30만원을 들고 서울행 버스에 올랐다.
청량리 근처 제기동에 보증금이 없는 단칸방을 구했다.
말 그대로 다 쓰러져가는 판자 집이었다.
원래는 방 하나였는데 판자로 가운데를 나눠서 두 개로 만든 그런 방이었다.
옆방에는 강원도에서 가출한 고딩들이 살고 있었다.
 
여자 하나에 남자 셋이었는데 보통이 넘는 꼴통들이었고
돈은 어디서 났는지 매일같이 소주를 마시고 노래 부르고 여자 하나를 두고 그 짓까지 벌이는 놈들이었다.
곧 내가 가져온 돈이 다 떨어졌다.
 
배가 너무 고파 친구와 주인집 김치를 훔쳐 먹었고 장독에 있던 고추장을 손으로 퍼먹었다.
밤에 속이 쓰려 죽을 뻔 했다.
수돗물을 마시고 설거지가 덜 된 냄비로 끓인 라면을 버리기 아까워
퐁퐁이 둥둥 떠다니는 걸 그냥 다 먹기도 했다.
오뎅 하나를 사먹고 오뎅 국물로 배를 채우다가 쫓겨나기도 했고 새벽에 우유 배달부 뒤를 미행하기도 했다.
굶주림은 도덕심을 잊게 만들었다.
 
그러다가 우연히 조폭 똘마니들이 운영하는 불법대출 찌라시 돌리는 일을 하게 된다.
같이 일하던 또래 여자애가 굶주린 나를 보더니 빵을 사주었다.
정말 맛있게 먹었다.
새벽부터 저녁 늦게까지 강북일대를 걸어 다니며 명함크기의 찌라시를 차에 꽂는 일이었는데
도저히 걸을 수 없을 정도까지 걸어 봤다.
 
조폭 똘마니 들은 다마스를 타고 골목골목을 쫓아다니며 제대로 하는지 감시했고
타사의 알바 놈들은 내가 꽂은 찌라시를 빼고 자기네 것을 꽂으며 신경전을 벌였다.
쫓고 쫓기는 첩보전을 방불케 했다.
강북일대 내 발자국이 안 찍힌 곳이 없을 정도로 걷고 또 걸었다.
늦은 저녁 기다시피 집을 찾았고 빅파이 하나와 요구르트 하나로 허기를 때웠다.
 
도저히 버티기 힘들어 막내 형에게 도움을 요청해 오 만원을 받아서 또 고비를 넘겼다.
아버지에겐 도저히 연락할 수가 없었다.
성공하기 전엔 절대 내려가지 않겠다고 호언장담을 했던 나를
끝까지 말리셨던 아버지이기에 이 꼴을 보여드릴 수가 없었다.
 
물탱크 청소를 하고 종로 3가에서 악세서리 파는 일을 잠깐 했다.
나는 태어나서 사람이 그렇게 많은 곳은 처음 보았다.
물 반 고기반이 아니라, 사람 반 공기 반 같았다.
사람에 치였고, 사람에 질렸다.
 
친구와 강남 롯데칠성 사이다 공장에서 재활용 빈병을 가려내는 일을 하게 된다.
닭장 같은 라인에 앉아서 하루 종일 빈병이 지나가는 것만 뚫어지게 쳐다보며
깨진 부분이 있는 빈병을 가려내는 작업이다.
전국에 빈병은 그곳에 다 모이는 것 같았다.
 
이중에 내가 주운 빈병도 있을까 어린 시절이 떠올랐고
빈병 같은 이놈에 인생이 서글프게 느껴졌다.
돈은 현실을 뼈저리게 느끼게 하며 좌절과 고통의 기억을 꺼낸다.
그냥 모든 게 슬펐다.
쉬는 시간 건물 모퉁이에 앉아 친구와 강남빌딩을 보며
20년 뒤에 우리가 저 건물을 사버리자는 말도 안 되는 농담도 주고받았다.
그리고 그 곳은 그만두게 된다.
 
그 곳에서 받은 수당으로 또 몇 주를 버티게 된다.
도저히 일자리를 못 구하다가 무작정 아무 식당이나 들어가서
먹여주고 재워만 주면 무슨 일이든 다 하겠다고 사정하며 애원했다.
며칠 동안 퇴짜만 맞고 골방에서 혼자 울었다.
 
친구는 포기하고 고향을 내려가서 얼마 뒤 군대를 가버렸다.
골방에 앉아 세상에 혼자 남은 기분으로 교차로 신문을 뒤지다
마침내 광나루 마창수산 홀 서빙으로 취직하게 된다.
숙식 제공이 가능해서 당장 짐을 싸들고 제기동 골방을 떠났다.
떠나기 직전 마지막으로 그 곳을 보며 훗날 성공하면 다시 오리라 다짐했다.
 
나중에 들은 얘기로 마창수산 사장님이 같은 경상도 놈에다가
요즘 세상에도 이런놈이있구나 기특히 여겨 나를 뽑으셨다고 했다.
 
당시 전국매출 3위권 안에 들던 광나루 마창수산.
광나루역 5번 출구였던가 언덕위에 위치하고 있었다.
늘 한 시간 이상씩 줄을 서서 먹는 식당이었고,
하루 평균 500개 이상의 회와 탕을 나르고 상을 치우니 발이 부어 잠을 못 잘 정도로 통증을 느꼈다.
 
사장님이 왜 나를 뽑았는지 알 것 같았다.
나 같이 오갈 데 없는 놈이 아니면 하루 일하고 다 도망가 버리기 일쑤였기에...
물론 좋은 점도 있었다.
이 일하던 형과 새벽에 수족관에서 농어를 잡아서 회 떠먹고
손님들이 남긴 매취순이라는 당시 꽤 비싼 술도 마음껏 마셨다.
 
22살이 되었다.
 
같이 서빙일을 하던 아이 둘 딸렸고 열 살이나 많은 이혼녀와 사랑에 빠졌다.
얼굴이 굉장히 동안이였고 전도연을 많이 닮았으며 마음도 너무 여린 여자였다.
전남편과의 결혼부터 이혼까지의 이야기는 굉장히 충격적이었다.
그녀의 프라이버시로 인해 이 곳에 남기지는 못 할 것 같다.
 
어머니 없이 자란 나는 그녀를 동정했고 공감했으며
그녀는 나를 아껴주며 내 인생을 위해 이러면 안 된다며 멀리하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철없던 어린 나는 더욱 그녀에게 매달리게 되었다.
그때는 사랑인 줄 알았다.
 
훗날 생각해 보니 그건 이성에 의한 사랑이 아닌 모성에 의한 사랑이었음을
철없던 어린아이의 떼쓰는 것에 불과 했던 것임을 느끼게 되었다.
 
곧 아버지 귀에 들어가게 되었고 막내형에 의해 울산으로 끌려 내려오게 된다.
아버지에게 거의 반죽을 정도로 두들겨 맞았고,
그로부터 몇 달 간 막내형 밑에서 샷시 일을 하게 된다.
 
그리고 비 오는 저녁 다시 차비와 가방 하나만 챙겨 몰래 그녀가 있던 인천으로 야반도주를 한다.
철없던 나는 가족도 버렸고 고향도 등졌다.
차창을 타고 빗물이 흘렀고 할머니를 보낸 그날처럼 울어댔다.
 
그녀는 광나루 마창수산에서 나와의 일로 안 좋은 소문이 돌아
더 이상 못 버티고 인천 계산동에 있는 마창수산으로 도망치듯 내려왔다고 했다.
그리고 나도 그 곳에 서빙으로 다시 취직하게 된다.
 
당장 숙식 할 곳이 없어서 횟집 창고에 있는 한 켠에서 그녀와 지내게 된다.
그녀와 함께 듣던 창고에 떨어지는 빗소리가 너무 좋았다.
쾌쾌한 그곳이 그 순간만큼은 그 어떤 곳도 부럽지가 않았다.
 
한 달쯤 뒤 나보다 열 살 많던 지배인의 친구와 새벽에 술을 먹다가
그녀를 두고 싸움이 붙어 회칼에 찔릴 뻔 했다.
그녀가 말리지 않았다면 아마 이 글 또한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 자에게 흠씬 두들겨 맞고 또 그녀만 남겨두고 그곳을 쫓겨나게 된다.
 
내가 나이와 돈이 많았다면 이런 수모도 겪지 않았겠지
입술이 찢어질 정도로 깨물며 그 곳을 떠났다.
 
그리고 노숙 생활 한 달 뒤 그녀의 소개로 부천시청에 앞에 있는 청해수산에 취직하게 된다.
 
-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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