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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연모를 알게 되면서 어느 때부턴가 공주는 멍한 표정으로 한참동안 허공만 바라다보는 시간이 많아졌다. 무엇이 그렇게 좋은지 실성한 여인처럼 혼자서 히죽거리기도 하였고 즐거운 목소리로 자주 종알거렸다. 그녀의 눈에 단단히 박혀버린 연모의 아름다운 모습은 그대로 그녀의 가슴에 파고들어와 밤잠까지 설치게 한다. 환상속의 연모가 그녀의 달콤한 희망이자 미래가 되어버린 것이다.
며칠 후 천문수업시간이 되어 연희가 별실에 들어와 다소곳이 앉기가 무섭게 공주가 입을 열었다. “전번에 온 아이가 사부의 동생이오?”
“예, 마마. 인사를 드리게 할 걸 그랬나 봅니다.”
“아, 아니오. 헌데 나이가 얼마나 되었소?”
“올해 열 셋이 되었사옵니다.”
“그러면 내 동갑이잖아. 나랑 같이 말을 타고 사냥을 할 수 있겠네.”
“송구하오나 동생은 아직 무술을 익히지 않아 어렵사옵니다.”
“그럼 그동안 무엇을 하고 지냈소?”
“소신과 비슷하게 학문을 즐겨하여 철학에 몰두하여 왔사옵니다.”
“어린 나이에 그 어려운 학문을. 사부! 언제 한번 데려와 줘요.”
“아, 알겠사옵니다.”
부담스러운 마음을 안고 집에 돌아온 연희는 연모를 불러 말했다. “공주가 너를 보자고 하는데?”
“왜? 나를 보자고 하는 특별한 이유라도 있는 거야?”
“그냥 한번 보자는 것 같은데.”
“싫어. 내가 원숭이도 아니고 이유도 모르고 나를 남들에게 보여주어야 하는 거야?”
“그래도 공주마마가 부르는데 가보지 그래?”
“그렇게 나를 심심풀이로 생각하고 부르면 임금이 불러도 가지 않을 거야.”
“내가 눈치를 보니 공주가 잘생긴 너에게 호감이 있어 그러는 것 같아. 나중에 후회하지 않겠어?”
“외모로 굳이 잘 보일 필요가 없어. 사람은 실력이 중요한 것 아냐?”
“네 말이 옳기는 하지만 공주의 부탁을 들어주어도 좋을 것 같은데.”
“못 간다고 전해줘.”
“너의 옹고집, 정말 못 말려.”
“그건 누나도 마찬가지야.”
다음 날 천문수업 시간이 되어 연희가 태자궁의 별실에 들어오자마자 공주가 물었다. “동생이 오겠다고 하였나요?”
“합당한 이유가 아니면 임금이 불러도 오지 않겠다고 합니다.”
태자가 화가 난 얼굴로 크게 소리쳤다. “저런 무엄한 놈!” 그 말에 공주가 민망하다는 표정으로 오빠의 옆구리를 찌르면서 연희를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내가 사부의 동생에게 편지를 써보겠어요.” 그러자 태자가 얼굴을 일그러트리며 공주를 말렸다. “아녀자가 먼저 사내에게 무슨 편지를?” 그 말에 무슨 꿍꿍이 속인지 공주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내게도 다 생각이 있답니다.” 공주는 즉석에서 붓을 들어 편지를 썼다.
“연도령이 철학에 능통하다고 들었소. 태자마마와 나는 지금 어명에 의해 그대의 누이에게 수업을 받고 있다는 것은 들어서 잘 알 것이오. 어차피 누이가 가르치는 천문도 철학의 일부이니 그대가 와서 철학에 관해 강의를 하여 주기 바라오.”
공주가 건네준 편지를 가지고 더 큰 부담을 안고 집에 돌아온 연희가 연모를 불러 편지를 건네주면서 애원하였다. “연모야. 이것 좀 읽어 봐. 공주가 직접 너에게 써 보낸 거야.”
그러자 연모가 편지를 저쪽에 휙 집어던지면서 내뱉듯이 말했다. “흥! 되어 먹지 않은 여인네 같으니라고. 누구 보고 오라 가라 하는 거야.”
“아냐. 잘 읽어봐. 그냥 막 부르는 것이 아니고 뭔가 정중히 부탁을 하는 것 같은데.”
그제야 연모는 편지를 주워 읽어 내려가기 시작하였다. 편지를 읽는 연모의 이맛살에 주름이 잡히더니 잠시 후 긴 한숨과 함께 편지를 탁자에 내려놓았다.
“왜 편지에 걱정되는 일이라도 적혀 있니? 도대체 무슨 내용이야?”
“나보고 누나를 따라와서 철학에 관해 강의를 해보래.”
“네 철학실력이 출중하니 한번 가르쳐보아도 되잖아.”
“누나! 철학을 잘못 말하면 사람들을 오해와 분노를 살 수 있어. 함부로 말할 성질이 아냐.”
“무슨 오해와 분노를 가져올 수 있는 거야?”
“내가 철학으로 그들의 운명을 보아준다고 할 때 좋게 나오면 괜찮지만 나쁘게 나올 때는 말하기가 곤란해. 그렇다고 무조건 좋다고 거짓말을 할 수도 없고.”
“태자나 공주라면 좋게만 나올 것이 아니야? 걱정 붙들어 매어 두라고.”
“그건 아냐. 아무리 지위가 높은 임금이라도 좋을 때와 나쁠 때가 닥치는 법이야. 불길하게 될 때를 말해주면 십에 아홉은 다 싫어해.”
“그래도 다음번에 같이 가지고. 공주가 학문을 한다는 구실로 편지까지 보냈으니 만약 거절한다면 임금의 명을 어기는 결과가 되거든.”
“알았어. 누나가 수업을 해야 하니 먼저 들어가고 수업이 끝날 때쯤에 내가 들어갈게.”
“너만 믿겠다.”
하지만 연모는 정말 부담이 되었다. 제발 두 사람의 운명이 좋게만 나와 주어야 할 텐데 그것을 보장할 수는 없다. 직접 부딪쳐 보아야 알게 된다. 그들의 생년월일과 시간을 적어 하나하나 풀어 보아야 하는 것이다.
연모가 태자궁에 다녀간 후 공주는 시누이가 될 지도 모를 연희에게 잘 보이려고 몸가짐을 단정히 하고 공부를 열심히 하였다. 그동안 연희를 바라보느라 멍하니 시간만 보내던 태자도 사부가 나중에 사돈이 될 지도 모르므로 자세를 가다듬고 성실히 수업에 참여하였다.
연모가 공주를 만나러 오겠다는 약속에 연희는 가벼운 마음으로 태자궁에 갔다. 별실에 들어온 그녀는 오늘따라 기대감이 가득 섞인 눈빛을 던지는 공주가 부담이 되었다. 연희가 막 강의를 시작하려고 할 때 공주가 재빨리 입을 열었다. “오늘 동생은 같이 오지 않았나요?”
“아, 조금 있다가 강의를 마칠 때 혼자 오겠다고 하였사옵니다.”
“호호호! 그 콧대 높은 동생이 어쩐 일로 얌전해졌나요? 안 온다고 그렇게 버티더니만.”
“공주님의 편지를 읽어보더니 철학을 강의하는 일이니 어디든지 기꺼이 가겠다고 하였사옵니다.”
“그럼 조금 기다려볼까.”
공주가 입을 다물자 연희는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보며 수업을 시작했다. “오늘은 오년 전(534년)에 일어난 천문현상을 공부하여 보겠습니다.”
“오년 전에 무슨 일이 일어났소?”
“사월에 형혹(화성)이 남두성 별자리를 침범하였사옵니다.”
“그게 일식도 아니고 혜성도 아닌데 무슨 큰일이라도 일어난 것이오?”
“남두성은 생명을 주관하는 별이옵니다. 죽음의 별 형혹이 남두성을 침범한 이후 중국과 대식국(아라비아)에선 심한 가뭄이 일어나고 고구려에도 역시 그러하였사옵니다.”
“음. 그런 일이 있었소?”
“혹독한 가뭄에 의해 기근이 발생한 중국에서는 큰 난리가 일어났고 심지어 대식국 서쪽의 나라들까지 큰 재앙을 겪었다고 합니다.”
잠시 후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나더니 사내의 낭랑한 목소리가 울려왔다. “소신 연모, 태자마마와 공주마마를 뵈옵니다.”
그러자 연희가 조금 당황한 눈빛으로 말했다. “아직 강의를 마치지 않았는데 동생이 일찍 온 것 같사옵니다.” 그 말에 평소 학문을 그렇게 즐기지는 않는 태자가 마침 잘 되었다 생각하고 입을 열었다. “오늘은 이만하면 충분히 사부의 수업을 받은 것이니 그만 마치고 동생의 강의를 들어봅시다.”
그러자 곧바로 공주가 상냥한 목소리로 문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연모에게 말했다. “어서 들어오세요.”
그 말에 정원의 활짝 핀 꽃처럼 화사한 얼굴에 매혹적인 눈길의 어린 사내가 문을 열고 들어와 공손히 고개를 숙인다. “어서 자리에 앉으시오.”
연모가 자리에 앉아 먼저 눈앞의 공주를 지그시 바라보자 공주의 심장이 심하게 떨려왔다. 태자가 보기에는 다르겠지만 공주가 보기에 연모는 아직 완전히 성숙하지는 않았어도 연희는 저리가라 할 정도로 너무나 매력적이다. 태자는 삐죽거리며 연모만 바라보고 있다가 연모와 눈길을 마주치자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공주에게 말했다. “우리 사부님 아우, 이 정도면 삼국 제일의 미남이겠어.”
그 말에 연모가 해맑은 얼굴에 가벼운 미소를 지으며 넉살좋게 말했다. “태자님의 말씀이 옳은 것 같습니다. 이제 저의 철학 강의도 아름답게 보여드리겠사오니 많이 기대해 주시기 바랍니다.”
우선 연모는 태자의 사주를 풀어보고 얼굴을 자세히 살펴보고 나서 큰절을 하며 입을 열었다. “역시 훌륭한 임금이 되셔서 오래오래 사실 것입니다. 위험한 고비만 넘기신다면.”
“내가 장차 임금이 될 것이라고 세상 사람들 누가 모르겠나? 헌데 위험한 고비가 찾아온다니 꺼림칙하군. 그게 언젠가?”
“삼십대 전반에 죽을 고비가 닥쳐올 것입니다.”
“아직 한참 후의 일이니 뭐 걱정할 것 있나?”
“그렇게 마음 편하게 사시는 것이 건강에 좋습니다. 운명에 얽매여 걱정하고 초조하게 살다 보면 없던 병도 생기게 되옵니다.”
옆에서 구경을 하던 공주가 호기심이 가득한 눈망울을 반짝이며 물었다. “난 어때요?”
공주의 사주를 풀어보고 관상을 살펴본 그는 아무 소리도 하지 않았다. 그러자 불안해진 공주가 다그쳐 물었다. “무슨 불길한 운명이라도 맞이하게 되나요?”
“공주님도 다른 나라의 왕비가 되어서 편안하게 사실 수 있는 팔자를 타고 나셨습니다. 하지만.”
“하지만?”
“공주님이 왕비의 자리를 박차버리면 곧바로 죽음을 맞이할 것입니다.”
“내가 과연 그 상황에서 죽으려고 할까요?”
“그건 공주님의 선택에 달려 있습니다.”
심상치 않은 자신의 미래를 연모가 이야기하자 화를 참느라고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하던 공주가 따져 물었다. “그럼 연모 당신의 운명은 어떻게 나옵니까?”
“저는 부모 복을 잘 타고 나서 초년운수는 좋지만 중년팔자가 기구하여 오랫동안 불길합니다. 이런 때에는 자칫하면 비참한 죽음을 당하게 됩니다.”
연모 본인도 자신의 험난한 운명을 솔직히 말하자 조금 누그러진 공주가 궁금한 표정으로 물었다. “허면 내가 언제쯤 그런 위험한 순간이 다가오나요?”
“그건 하늘의 비밀입니다. 미리 알려드리면 고민만 하시다가 세월을 보내실 것입니다.”
“정말 궁금하여 못 살겠소. 말해 보시오.”
“공교롭게도 소신과 같은 해에 매우 위험한 운수가 찾아올 것입니다.”
공주가 은근히 바라는 속내를 드러내며 힘주어 말했다. “결국 우리가 공동운명체일수도 있겠군요.”
“소신이 공주마마가 싫어서 드리는 말씀은 아니지만 소신과 같은 운명의 길을 걸으신다면 재앙이 될까 두렵습니다.”
그러자 공주가 서운한 표정을 숨기지 않고 물었다. “그건 왜 그렇소?”
“소신이 재복이 약하여 재물이나 여인의 행운이 별로 없다고 생각됩니다. 그것을 거꾸로 생각하면 소신과 함께 하는 재물과 여인은 그 가치와 능력을 발휘하지 못할 것입니다.”
“음. 그렇게 멀리 볼 것 있나요? 현재가 좋으면 되지. 호호호!”
연모가 그렇게 걱정스런 얼굴로 말려도 공주는 막무가내다. 태자는 연모에 매혹된 공주가 정말 눈꼴사납다. 그녀는 연모와 함께 한다면 뭐든지 무사태평할 것 같다고 생각한다. 게다가 요즘 공주의 얼굴에서 부쩍 웃음이 많아졌다. 우리 공주가 이렇게 명랑해진 까닭을 제대로 알 것만 같다.
며칠이 지난 후에 연희가 임금의 명에 따라 전내부의 내솔로 가게 되자 태자와 공주의 수업은 자연스럽게 끝이 났다. 한편으로는 생소하여 따분하기도 하였고 다른 한편으로는 재미있는 실험실습으로 재미있기도 하였지만 또래의 남녀 간에 얽힌 사연이 적지 않은지라 아쉬운 이별이었다.
한편 성왕의 모후 무령왕비와 신하들은 성왕에게 무령왕의 유지를 받들 것을 계속 요구하였다. 즉 배양된 국력을 바탕으로 신라와 힘을 합쳐 고구려에 잃어버린 한강유역을 회복하는 일이다. 하지만 태평성세의 마법에 빠진 성왕은 쉽사리 관심을 기울일 수 없다.
그 후로부터 일 년이 지난(540년) 가을 사비성 왕궁. 오동잎에 떨어지는 가을비에 궁궐의 밤은 깊어만 가는데 한편 구석에선 귀뚜라미 귀뚤귀뚤 슬피 운다. 비가 갠 다음 날 쪽빛 하늘은 높아만 가고 하얀 구름 산산이 부서져 바람에 흩어져간다. 그 날 아침 성왕 앞에 선 연씨의 좌평이 정중히 아뢴다. “대왕. 이제 고구려를 치셔야 합니다.”
하지만 여전히 전쟁을 싫어하는 성왕. “아니, 최근 하늘에 무슨 전쟁의 징조라도 나타났습니까?”
“나타나지는 않았습니다. 하오나 우리가 고구려를 정벌하면 그 뒤에라도 하늘이 계시를 보여줄 수 있다고 봅니다.”
“하늘의 계시도 사람 마음대로 될 수 있나 보군요.”
“하여튼 백제가 살 길은 북방으로 진출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신라도 같이 동참하기로 했나요?”
“신라에서도 아직 고민 중이라고 합니다. 이번에 어린 왕이 새로 즉위해서 경황이 없는 것 같습니다.”
“그러면 백제 혼자서. 알아서들 하시오.”
“예. 대왕.”
왕궁을 나온 연좌평은 말을 타고 가면서 생각했다. ‘임금이 나랏일에 전혀 관심도 없군. 그러니 우리 연씨들이 백제를 이끌어나갈 수밖에.’ 그의 말은 배를 타고 강을 건너 어느덧 수촌마을 재실에 다가서고 있었다.
연씨의 재실. 재실에 들어온 좌평이 먼저 도착한 가문출신 신하들을 한자리에 모아 놓고 진지한 논의를 하고 있다. 먼저 좌평이 무겁게 입을 열었다. “이번 고구려정벌에 누구를 보내면 좋을 것 같소?”
다른 신하가 거침없이 대답한다. “물론 우리 연씨 가문 장수가 출전해야 합니다.”
“누가 나가면 좋을 것 같소?”
“장군(將軍) 연회(燕會)가 적합한가 합니다.”
“연회(燕會)? 아무리 우리 가문이지만 이름 그대로 잔치만 좋아하는 사람 아닌가요? 오늘도 여기 중요한 자리에 오지 않고 잔칫집에 가지를 않았소이까.”
“좌평어른. 한 번 믿어보시죠. 고우나 미우나 우리 가문이 정벌의 중심이 되어야 승리했을 때 생기는 게 많지 않겠습니까?”
“하하하! 옳은 말이오. 그럼 우산성(牛山城)으로 연회를 보내도록 합시다.”
“예. 좌평어른.”
한 달 후 사비성. 사비궁 정원 뜰에 있는 감나무엔 저녁노을에 비친 감이 더욱 붉게 물들어 있다. 나뭇가지가 휘어지도록 주렁주렁 매달린 빨간 감이 가을을 풍성하게 물들이고 있었다. 우산성(牛山城)을 공격한 백제군이 고구려의 기병에게 대패하였다는 소식이 날아들었다. 잔뜩 화가 난 성왕이 염치가 없어 고개를 숙이고 있는 좌평을 보고 화를 냈다. “그러기에 과인이 뭐라 그랬소?”
“송구하옵니다.”
“하늘의 계시도 없는데 전쟁을 하면 절대 하늘이 돕지를 않아요.”
“소신도 이번에 확실히 깨달았습니다. 하지만 자꾸 책망만 하시면 소신 정말 난처합니다.”
“따지려들지 말고 앞으론 반드시 명심하도록 하시오.”
“알겠사옵니다. 소신도 괴롭사옵니다.”
그러한 백제조정의 심란한 상황이 삼국사기의 기록에 다음과 같이 잘 나타나고 있다.
경신년(庚申年, 540) 고구려 안원왕 10년, 백제 성왕 18년 9월 백제왕이 장군(將軍) 연회(燕會)에게 명하여 고구려 우산성(牛山城)을 공격하게 하였는데, 고구려왕이 정예 기병(騎兵) 5천 명을 보내어 격퇴시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