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사회 민주화운동의 한축을 담당했던 민변(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창립30주년 관련 글이네요
조영래, 노무현, 한승헌,이돈명, 홍성우, 박원순 등 쟁쟁한 이름들이 나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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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강희철의 법조외전(25) 30년 전 민변 창립일 스케치
경기도 포천 한 콘도에 비밀결사하듯 조용히 모여
중견 ‘정법회’와 젊은 ‘청변’ 합쳐 51명으로 창립
‘민협’될 뻔하다 조영래 변호사가 ‘민변’으로 지어
노무현 변호사 “표 준다면 개한테도 절” 웃음바다
창립 30돌 맞아 25일 ‘민주주의와 인권’ 기념행사
1988년 5월28일 토요일 오후, 가벼운 옷 차림을 한 변호사들이 경기도 포천에 있는 ‘베어스타운’ 콘도미니엄으로 하나둘 모여들었다. 얼굴은 조금씩 상기돼 있었고, 다소 긴장한 표정으로 주변을 살피는 사람도 있었다. 건물 주변에는 일부 ‘기관원’으로 보이는 낯선 사람들이 눈에 띄었지만, 멀찌감치서 동태를 살필 뿐 접근하거나 제지하지는 않았다.변호사들의 손엔 누런 갱지에 타자기로 찍은 행사 일정표가 한 장씩 들려 있었다.
□ 5 월28일
18:00 ~18:30 방 배정 및 정리
18:30 ~ 19:30 총회
가) 신회원 가입 승인
나) 회칙 개정
다) 간사 선출
라) 기타
20:30 ~ 23:30 연구 발표
가) 한승헌 회원 “방송통신법, 정간물 등록법 등에 관하여”
나) 박원순 회원 “국가보안법에 관하여”
□ 5월29일
08:00 ~ 09:00 식사
09:00 ~ 10:30 토론
10:30 ~ 11:00 정리 및 출발
박연철 변호사의 이 날짜 일기에는 이런 구절이 적혀 있다.“정법회 모임에 참석, 신규 회원 24명 가입하고, 규칙, 조직을 정비하였다. 명칭을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약칭 민변)으로 개칭하였다. 한승헌, 박원순 회원의 연구 발표가 있었다. 강신옥, 김광일, 노무현 의원 등이 동석.”박 변호사는 이날 행사를 자신이 속해 있던 정의실천법조인회(정법회)가 확대 개편하는 모임으로 착각했지만, 실은 정법회와 청년변호사회(청변)가 합쳐져 전혀 새로운 조직을 탄생시킨 날이었다. 지극히 ‘80년대스러운’ 풍경이긴 했지만, 훗날 감사원장과 서울시장을 지내게 될 두 회원이 기조 발제를 맡아 자정까지 빡빡한 토론을 이어갔다. 1세대 인권변호사를 대표한 한승헌 변호사는 당시 한창 사회적 쟁점이 되고 있던 방송통신법과 정기간행물 등록법에 대한 주제 발표를 맡았고, 2세대 인권변호사의 앞 자리에 있던 박원순 변호사는 국가보안법에 관한 연구 성과를 풀어놓았다.(박 변호사는 이 때의 관심을 더 발전시켜 나중에 ‘국가보안법 3부작’-각각 변천사, 적용사, 폐지론을 정리한-을 완간한다)이날 총회에서는 기존 정법회와 청변의 구성원을 아울러 모두 51명이 창립 회원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강신옥 고영구 김갑배 김광일 김동현 김상철 김선수 김원일 김충진 김형태 노무현 박성민 박연철 박용석 박용일 박원순 박인제 박주현 박찬주 백승헌 서예교 손광운 안영도 유남영 유현석 윤종현 이경우 이돈명 이돈희 이상수 이상중 이석태 이양원 이원영 이해진 이홍식 임재연 임희택 정미화 조영래 조용환 조준희 천정배 최명규 최병모 최영도 하경철 하죽봉 한승헌 홍성우 황인철(가나다 순)
박연철 변호사가 이 많은 사람 가운데 유독 강신옥, 김광일, 노무현 변호사를 일기에 적은 까닭은, 이들이 그해 4월에 치러진 제13대 총선에서 당선돼 국회에 진출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박 변호사는 “강신옥, 김광일 두 분이 인사말 내지는 신상 발언을 하였던 것은 생각이 나는데, 당시 노무현 의원이 어떤 인사를 했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고 했다.당시 소장그룹에 속했던 조용환 변호사의 기억은 좀 다르다. “김앤장에서 김영무 대표 변호사의 총애를 받으며 잘 나간다는 천정배 변호사가 총회장에 나타났길래 참 의외라고 생각했다”는 조 변호사는, 이날 노무현 변호사가 말한 ‘선거 후일담’을 또렷이 기억해냈다. “이 앞에 선거를 해보니, 그 선거라는 게 사람을 참 미치게 만들더군요. ‘표’만 준다면 지나가는 개한테 절이라도 하겠더라구요.” 좌중에 잠시 웃음이 번졌다고 한다.이 세 사람의 국회의원은 “정치인인 변호사와 판사·검사·법학자를 특별회원으로 두기로” 한 규정에 따라 특별회원으로 분류되며 회원 자격을 유지했다.이튿날 오전의 토론 일정은 거의 전적으로 ‘작명’에 배당됐다. 전날 밤 ‘진한 뒤풀이’의 여진이 남아 있었지만, 이름 하나는 제대로 지어보자며 다들 머리를 맞대고 앉았다. 사회는 황인철 변호사가 맡았다. 그는 회의장 앞쪽 화이트 보드 앞에 마카펜을 들고 서서는, 회원들이 불러주는 후보작들을 받아 적으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차분하게 토론을 이끌었다.기대와 바람이 유달리 컸던 탓인지, 이름 짓기는 수월하지 않았다. ‘민주변호사회’, ‘민주변호사협의회’ 등 후보작이 나왔지만, 다수의 동의를 얻지는 못했다. 민주변호사협의회는 청변의 ‘야심작’이었다. 청변이 창립 총회 직전 작성한 내부 문건 ‘조직확대개편 시안’을 보면 새 모임의 명칭을 ‘민주변호사협의회’(민협)로 하자는 안이 들어 있었다. 또 이 모임의 목적을 “기본적 인권의 옹호와 사회정의의 실현을 위한 조사, 연구, 변론, 여론 형성 및 연대활동을 통하여 사회의 민주적 발전에 기여함”이라고 밝히고 있다. 민협이라는 ‘이름’은 받아들여지지 않았지만, 이 ‘목적’ 부분은 민변 회칙 3조에 수정 보완된 형태로 수용됐다.작명 논의는 이내 이름의 들머리를 ‘민주’로 할 것인지, ‘민주화’로 할 것인지로 옮겨갔다. 민주와 민주화를 놓고 제안자들의 설명이 이어졌다. 각각의 근거와 타당성을 놓고 갑론을박이 이어졌지만, 결론은 쉽사리 내려지지 않았다.그 때 한 사람이 자리에서 일어나 회의장 앞으로 걸어 나가더니 새로운 이름 하나를 화이트 보드에 공들여 써내려갔다. 앞서 거론되지 않은, 다소 낯선 낱말의 조합이었다. 그는 칠판에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 이렇게 열 두 글자를 또박또박 적었다.당시 상황을, 현장에 있던 김갑배 변호사(현 검찰과거사조사위원회 위원장)는 이렇게 기억하고 있다. “‘민주’냐 ‘민주화’냐를 놓고 논의가 한참 진행됐지만 결론이 나질 않고 있었다. 그 때 조영래 변호사가 조용히 앞으로 걸어 나가더니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이라는 제법 긴 이름을 칠판에 적고서는 “무슨 무슨 ‘회’보다는 ‘모임’이 더 낫겠다”고 했다. 그러면서 ‘지금은 여러분 귀에 생소하게 들릴지 몰라도, 앞으로는 우리 말로 된 이런 이름을 자연스럽게, 많이들 쓰게 될 것’이라면서. 조 변호사가 확실히 선견지명이 있었던 것 같다.”
조영래 변호사는 ‘무슨 무슨 회(會)’로 끝나는 일본식 이름을 피하고 싶었는지 모른다. 박연철 변호사의 회상도 김 변호사의 그것과 거의 같았다. “이런 저런 한자 명칭이 마음에 차지 않던 순간에 신망이 두터웠던 조 변호사가 그 제안을 해서 새로운 명칭으로 채택되었다. 이때, 황인철 변호사가 ‘약칭은 민변으로 하자’고 하여, 우리 모임은 지금까지 ‘민변’으로 통칭되고 있다.”표결을 했는지, 박수로 채택했는지는 창립 회원들 간에도 기억이 다르다. 아무튼 조 변호사는 모임의 새 이름을 ‘작명’한 상금으로 ‘거금’ 10만원을 받았다.새로운 조직을 이끌어나갈 대표간사에는 당시 ‘인권 변호사 4인방’ 이돈명, 조준희, 홍성우, 황인철 중 조준희 변호사가 선임됐다. 모임의 대표를 회장으로 하지 않고, 대표간사제를 도입한 것은 “변협이나 지방변호사회 등의 제도권 변호사 단체와 같은 형식을 지양하고 회원 모두가 동등한 권한과 책임을 갖고 참여한다는 뜻이 내포되어 있었다.”(<민변백서-민변 10년의 발자취>)이렇게 온전히 하루가 걸리지 않은 조촐한 창립총회를 거쳐 “인권변호사들의 총본산”(박원순 변호사)이라 할 수 있는 민변의 깃발이 세워졌다.그로부터 30년, 한 세대가 흘렀다. 그 사이 회원은 교수·국회의원 등 특별회원 116명을 포함해 1185명으로 늘었다. 회원 중에서 노무현 변호사, 문재인 변호사가 대통령에 당선됐다. “쿠데타로 집권한 하나회 회원 두 사람(전두환·노태우) 말고는 전례가 없는 일”(한 회원 변호사)이다. 창립 회원 중 유현석, 이돈명, 조준희, 조영래, 황인철, 노무현 변호사 등이 유명을 달리했다.원래 민변 창립일은 5월28일이지만, 창립 30주년 기념식은 사흘 앞당겨 25일에 열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