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년 돌아오는 5·18 민주화 운동 기념일을 맞아 제가 그리 엄청난 것은 아니지만 대단한 걸 하나 해냈습니다. 조선일보 최악의 흑역사, 그래서 자기네 아카이브에서도 슬그머니 뺀 1980년 8월 23일자 기사, '인간 전두환'의 본문을 컴퓨터로 옮겨놓았습니다. 그런데 마이크로필름 해상도상 제가 알아먹지 못한 글자가 몇 개 있는데 그건 도저히 제가 알아먹어 볼 수 없어서 네모 처리 했습니다. 그 점 양해 부탁드립니다. 제 노력의 결실이 부디 전두환과 조선일보를 비판하는 데 일말의 도움이라도 됐으면 참 좋겠습니다.
“여보. 나 나갑니다.” 국가보위비상대책상임위원장 전두환 장군의 한결같은 아침 출근 인사다. 여느 남편들처럼 “다녀오겠다”는 여운이 깃든 말을 거의 사용하지 않는다.
“군인이란 나라에 바침 몸”이라는 게 그의 설명이지만 이 짤막한 아침인사에서도 그의 사생관(死生觀)을 읽을 수 있을 것 같다.
영관 장교 시절 매일 새벽처럼 집을 나갔다가 밤늦게 돌아오는 그를 붙잡고 칭얼대는 어린 자식들에겐 “군인이란 나라를 위해 죽고 나랏일에 밤낮이 어디 있느냐”고 달랜 적도 있다.
그는 매사에 있어서 사(私)에 앞서 공(公)이고, 나에 앞서 나라 걱정이다.
그의 이 □한 사고는 어려서부터 ‘의(義)가 생명보다 □하니라’고 조상 대대로 구전돼 내려오고 있는 가훈에 영향을 받은 때문이라 할 수 있겠다.
그는 1931년 1월 23일 경남 합천군 요곡면 내천리에서 아버지 전상우씨(64년 별세)와 어머니 김(관향(貫鄕) 광산(光山))점문씨(76년 별세)의 6남매 중 넷째로 태어났다.
6․25가 발발하자 그는 어느 누가 시키지도 않았지만 밤마다 목총을 들고 나가 학교교사 순찰을 돌았다.
담력도 센 학생이었지만 그는 그만큼 동료를 사랑하고 학교를 아끼고 나라를 지켜야 한다는 자긍심에 불탄 학생이었다.
그러나 그의 투철한 국가관과 불굴의 의지, 비리를 보고선 잠시도 침지를 못하는 불같은 성품과 책임감, 그러면서도 아랫사람에겐 한없이 자상한 오늘의 ‘지도자적 자질’은 수도(修道)생활보다도 엄격하고 규칙적인 육군사관학교 4년 생활에서 갈고 닦아 더욱 살찌운 것인 듯하다.
그가 육사를 지망한 것은 적의 군화에 짓밟힌 나라를 위하는 길은 내 한 몸 나라에 던져 총칼을 들고 싸우는 길밖에 없다는 일념 때문이었다. 이 같은 사실은 육사 지망에 앞서 그가 보병학교에 지망했던 사실만으로도 당시 그의 심정을 쉽사리 헤아릴 수 있다.
그는 대구 공고를 졸업하자 친구들에게 “나라가 위태로운 마당에 가만히 팔짱을 끼고 있을 수 없으니 우리 모두 보병학교에 입교하자”고 권했다.
친구들은 물론 가족들도 “왜 총알받이가 되려느냐”고 적극 말렸지만 그는 끝내 지원서를 제출했다.
그러던 중 정규 육군사관학교 사관생도 모집 공고가 나붙어 육사 쪽을 택했다.
당시 육사는 전쟁이 한창 진행 중이었지만 이승만 대통령과 밴 플리트 미8군 사령관 두 사람이 “앞으로 한국군이 제대로 발전하려면 이러한 어려운 때일수록 군 간부를 양성하지 않으면 안 된다. 조지 워싱턴 대통령도 미국의 독립을 쟁취한 직후 어수선하던 때 웨스트포인트 미 육군사관학교를 세우지 않았는가”라는 점에 의기가 투합돼 4년과 정교육이 처음 시작되는 때였다.
이 때문에 육사의 모델은 자연 웨스트포인트였다. 학교 제도는 물론 교과내용 편성, 훈련도 그대로 웨스트포인트 것을 옮겨왔고, 맥킨리 대령 등 미 고급 장교들이 고문관으로 배속돼 새 사관학교 출발을 도왔다.
생도 모집은 51년에 있었지만 학교시설 정리가 덜 끝나 입학식은 다음해 1월 20일에야 있었다.
초대 교장에 안춘생(安椿生) 장군, 생도대장 이승우(李承雨) 중령, 교수부장 박중윤(朴重潤) 중령(현 서울시립대 학장) 구대장은 생도 1기인 신현수(申鉉銖) 대위 등이었고, 교관엔 차상□(車相□) (중국어), 최(崔)윤식 (영어), 이기백(李基白) (역사), 황의호(黃疑鎬) (영어), 변태변(邊太變) (국사), 조순(趙淳) (경제학), 최종완(崔鍾浣) (토목학․현 건설부장관) 등이었다.
전방에선 전투가 계속되고 있는 긴박한 상확 속에서 새로운 역사를 시작한다는 사명감 때문이었던지 생도들은 물론 교관들도 열과 성을 다했다.
최초로 이 땅에 완벽한 민주교육제도가 뿌리를 내리는 순간이었다. 도둑질하지 말라, 거짓말하지 말라, 커닝하지 말라, 이런 3가지 사실을 보고 묵과하지 말라는 명예제도와 양심보고제도도 도입되었다.
시험시간에 고개만 옆으로 돌려도 커닝행위로 지적돼 당장 퇴교령이 내렸고, 잘못 남의 속옷을 챙겨 넣었다가는 학교에서 쫓겨나야 했다.
평균 성적이 67점 미달일 때도 퇴교였다.
그러기에 정직함, 정당한 행동만이 통한 뿐 부도덕한 행위는 자그마한 실수도 용서될 수 없었다.
그러나 누구나 노력만 하면 정당한 평가를 받을 수 있는 터전이기에 모두가 머리를 싸매고 학업과 훈련에 정열을 쏟을 수 있었다.
같이 자고 같이 먹고 꼭 같은 환경에서 공부한 결과를 공평무사한 기준 아래 평가받을 수 있다는 매력은 경쟁 심리의 큰 자극제가 되었다. 당시는 전시(戰時)라서 누구나 시험에만 합격하면 생도가 될 수 있었다.
이 때문에 진해 육사 1기의 생도 가운데엔 고교 1년 수료자에서 대학 1년 수료자까지 있어 지금처럼 학력이 고르지 못했다.
이런 사실을 감안, 교수부에선 처음 교과내용을 한 단계 낮춰 영어의 경우 피프티 페이머스 스토리(Fifty Famous Story)를 교재로 택했고, 수학은 인수분해부터 시작했으나 열심히 하지 않으면 낙오하는 공부분위기 덕에 졸업 때엔 모두가 일반 대학 졸업생을 앞지를 정도의 실력을 쌓을 수가 있었다. 더구나 교관들은 틈틈이 “여러분은 새로운 군대를 창설하는 군의 간부가 될 사람들이다. 지금은 군도 다소 부패하고 모순된 점이 많지만, 이곳에서 교육받은 여러분은 제발 깨끗한 사람이 되어주기를 바란다”는 식의 정신교육과 국가의식주입에 열을 쏟았다.
그러나 교수부 교관들의 생활은 대개 끼니를 아침저녁 콩나물죽으로 때우는 비참한 것이었다.
하루는 땔감이 떨어진 이승우 생도대장이 진해 뒷산으로 솔방울을 주우러 갔다가 해병대 헌병의 굼문에 걸려 곤욕을 치른 일도 있었다.
교관요원들의 이같은 청렴하고 깨끗한 생활태도가 당시 생도들의 성격 형성에 많은 영향을 끼쳤음은 당연한 얘기다.
전두환 장군은 고교 때부터 축구 선수였던 그는 육사에서도 축구부 주장(골키퍼)으로서 다른 생도들과는 달리 학업과 운동을 겸하느라 공부에만 정열을 쏟을 수가 없었던 듯하다. 그러나 그는 남이 쉬는 시간에 부족한 수업, 뒤진 과목을 보완하느라고 심혈을 기울였다.
그는 육사 동기생이면서도 한 내무반 동료였던 민석원(閔錫源) (50․사업)에게 이따금 휴일이면 교과서를 들고 와 가르쳐 달라고 졸라댔고, 그의 열성에 민 씨는 금쪽같은 외출기회를 여러 번 포기해야 했다.
육사 4년 교육기관을 거치는 사이 그는 어느 누구보다 국가관이 투철하고 용기와 책임감이 강하며, 자기에게 가혹하리만큼 엄격한 지휘관으로 성장해 있었고, 몸 바쳐 나라에 충성한다는 것은 그의 신앙이 되어 있었다. 그에게 육사는 남다른 의미를 지닌 곳이기도 하다. 그는 당시 육사참모장이었던 이규동(李圭東) 대령(육사 2기․준장 예편) 댁을 방문했다가 훗날 부인으로 맞은 이순자(李順子) 여사(41)를 만나는 행운을 얻기도 했다.
특이한 것은 이처럼 육사에서 형성된 그의 국가관과 생활방식은 그 후의 오랜 군대생활에서도 조금도 흐트러짐이 없이 일관되고 있다는 점이다.
그래서인지 전장군을 잘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그에 대한 첫인상을 ‘무서운 사람’이라고 털어놓는다.
그러나 그를 가까이에서 대한 사람들은 무섭기는커녕 오히려 매너가 부드러우며 유머가 풍부하고 부하에게 자상한 사람이라고 입을 모은다.
상대방에게 무섭도록 강인한 인상을 안겨주는 것은 어쩌면 자기 자신에게 지독하리만큼 엄격한 그의 청교도적(淸敎徒的) 엄격성이 풍겨주는 인상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는 스포츠라면 축구에서 야구, 탁구, 테니스, 수영, 달리기 등 못하는 종목이 없지만 화투나 카드놀이라던가 잡기(雜技)를 모른다. 그가 26세 나이로 보병학교에서 구대장으로 있을 때다. 당시 장교들 간엔 춤바람이 불어 즐겨 댄스홀을 찾았지만 그는 단 한 번도 발길을 얼씬하지 않았다.
초급 장교 때도 다들 즐겨 찾는 당구장에조차 들른 일이 없으며, 주석(酒席)에도 주도(酒道)를 즐겨 찾고 가정교육에 더 관심이 깊은 쪽이다. 슬하의 재국(宰國) (대학 2년), 효선(孝善) (고3), 재용(宰庸) (고1), 재만(宰滿)군 (국민교3) 등 4남매와 틈만 있으면 대화 나누기를 좋아하고, 가족끼리 편을 갈라 테니스 시합을 갖는 등 공적 시간 외엔 늘 가족과 함께 지낸다. 그와 함께 부대 생활을 지낸 사람들은 그의 유별난 추진력과 박력, 그 때 그 때 정확히 내리는 그의 용단에 감탄한다.
이러한 힘은 사소한 이해에 얽매이지 않고 사물을 거시적으로 바라보는 폭넓은 시야와 강인한 체력 덕인 듯하다.
그는 대령 시절 조카뻘 되는 일가를 “일선(一線)에 안 가도록 해달라”는 친척의 부탁을 받고 “일선에 내 자식 내조카를 보내야지. 고생은 우리가 맡는 자세로 살아야 한다”며 단 한마디로 거절했을 정도다.
중앙정보부장 서리 때 기구개편에 따른 감원문제가 제기됐을 때도 그랬다. 지시한 개편지침은 단 두 가지뿐이었다. ‘어떻게 해야 국민의 신뢰를 받는 정보부가 되며, 국가와 국민을 위한 정보부가 될 수 있느냐’였다.
이해관계는 일체 염두에 두지 말고 최선의 방법만 강구하라는 당부를 덧붙였다.
2주일 후 3백여 명의 감원명당에 그는 서명했다. 서명이 끝난 뒤 “아무개는 어떻게 됐느냐”고 물었다. 방금 서명한 퇴직자 명단에 포함돼 있다는 대답에 그는 “그 사람 내가 추천하고 보증 섰던 사람인데…”라며 잠시 씁쓸한 표정을 지었을 뿐 두 말이 없었다.
그는 모든 사항의 판단기준을 이처럼 정의와 대국(大局)에 놓을 뿐 세세한 이해관계에 얽매이지 않는다. 전장군의 밑을 거쳐 간 부하장교는 그의 통솔방법을 3분의 1만 흉내 내면 모범적 지휘관이란 평을 얻을 수 있다는 게 군 내의 통설로 되어 있다.
그의 통솔방법이라고 해서 유달리 있을 수 없다.
첫째, 그는 지방색이나 누구 사람이란 컬러를 가리지 않고 인재를 발탁, 부단한 교육으로 동화시키고, 둘째로 부하의 잘못은 ‘현장 시정’으로 끝내며, 셋째, 독특한 방법으로 사기를 진작시킬 뿐이다.
78년 1사단장 재임시다. 그는 부임 후 무슨 일이 있더라도 그날 모범을 보인 사병 10명을 매일 선발, 표창하는 데 열을 올렸다.
뭇사병 가운데서 평범한 영웅을 만들어 부대의 사기를 올려보겠다는 그의 겨냥은 그대로 들어맞아 모든 사병이 표창과 휴가 기회를 얻어 보려고 애쓰는 통에 부대는 삽시간에 흥분의 열기에 싸였다.
하루는 어느 운전병에게 “내일 몇 시까지 사단장실로 표창 받으러 오라”고 일렀다.
당사자인 운전병은 왜 표창을 받게 되었는지조차 알 수 없어 어리벙벙한 표정이었다.
“내가 어제 네 차 뒤를 따르다보니 어느 지점을 통과할 때 맞은편에서 오던 트럭에 길을 양보하고 감속운행을 했는데, 잘 한 일이야.” 전장군의 표창이유 설명이다. 물론 그 운전병은 운전교범에 명시된 일을 그대로 지켰을 뿐이다.
이 소문이 수송부 안에 쫘악 퍼져 그 후 차량안전사고가 줄어들었음은 물론이다. 다음 해엔 북괴의 제3땅굴을 발견, 그 공으로 그는 5․16 민족상을 받는 행운을 안을 수 있었다. 땅굴을 발견할 수 있었던 것도 그의 노력으로 진작된 사기 높은 사병들의 훈련 덕분이었다.
전임 부대장이 땅굴을 찾기 위해 구멍을 뚫었지만 허사였다. 그러나 땅굴을 발견한 실마리는 바로 전임자가 뚫어 본 시굴자리에서 불과 15㎝밖에 떨어지지 않은 장소에서였다.
아직 해가 돋기 전 어슴푸레한 새벽에 보초를 서고 있던 사병이 물길이 치솟는 걸 보았다. 물길은 20초 만에 멎었다. 짧은 한순간이었다. 보초가 기 사이 졸고 있었다면 제3땅굴은 영영 발견되지 않았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가 심혈을 기울인 사병들에 대한 훈련과 사기진작 덕이었으며 그가 쏟아놓은 노력의 대가라고 하는 쪽이 옳을 것이다.
70년 11월 육사11기생으로 유일하게 파월(派越)연대장 직을 맡았을 때도 그의 탁월한 리더십을 그대로 발휘했다.
그가 수명(受命)을 받은 백마부대 29연대는 연대장이 부정사건에 연루돼 전투력이 최하위였으나 부임 1년 만에 전과(戰果) 1위의 최상 부대로 끌어 올렸다.
부대 통솔에서도 그 성격이 잘 나타나고 있지만, 전장군은 누구에게건 ‘뒤질 수 없다’는 투지력과 부족한 부문에 대한 부단한 연마를 게을리 하지 않는 끈질긴 성품의 소유자다.
부하장교와 단 한 번의 탁구시합에서 패한 전장군은 탁구 실력이 부하에게 뒤떨어짐을 시인하고 틈틈이 연습을 쌓아 그 부하가 4개월의 고등군사교육을 마치고 돌아왔을 때엔 “내가 왼손으로 상대해 주마”고 선뜻 나설 정도였으며, 테니스 실력은 지금도 육군장군단의 대표전수다.
또 그는 파월직전 참모총장 수석부관시절 유갑수(劉甲壽)박사 (육군 13기)를 매일 사무실로 초치, 경제학 강의를 들을 정도로 배움의 자세에 성실한 군인이다.
그의 자기연마와 개선에 대한 집념은 누구보다 강해, 부족한 부문에 대한 보완은 평생을 두고 갈고 닦는 집념의 사나이며, 이 덕에 그는 육사 11기 동기생 1백56명(입학은 2백 명) 가운데 69년 제일 먼저 대령으로 진급하는 영광을 누렸다.
그는 70년 동기 동창회 때 육사 재학시절 줄곧 수석을 차지해 온 김성진(金聖鎭) 박사(공학(工學)․당시 중령)에게 “4년 동안은 자네가 1등을 했지. 나는 졸업하고 15년 뒤에야 겨우 자네를 따라잡았네”라고 우스갯소리를 털어놓아 좌중에서 폭소가 터졌다는 일화는 너무나 유명하다.
장군에 진급된 후 한 때 후배 사관생도들 사이에 “공부를 잘 하면 무얼 해. 1등짜리는 뒤에 처지더라”는 말이 나돈다는 풍문을 전해듣고는 육사로 달려가 전생도를 모아놓고 “인생은 4년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공부를 못하는 것이 출세의 필요조건이 될 수 있는가. 사람은 죽을 때까지 발전할 수 있으며, 노력 여하에 달려있다”는 내용의 따끔한 연설을 행한 것도 육사 출신자들 간엔 지금도 화제가 되고 있다.
그에게서 높이 사야 할 점은 수도승(修道僧)에게서나 엿볼 수 있는 청렴(淸廉)과 극기(克己)의 자세인 듯하다. 지난날 권력 주위에 맴돌 수 있었던 사람치고 거의 대개가 부패에 물들였지만 그는 항상 예외였다. 서울 서대문구 연희동 302의 2. 그의 자택에선 요즘 흔한 족자 한 폭, 값나가는 골동품을 찾아볼 수 없고, 팔목에 차고 있는 투박한 미 특수부대용 시계도 월남 연대장 시절부터 애용하고 있는 싸구려다.
그는 확실히 챙겨 넣는 것보다도 남에게 나누어 주기를 좋아하는 쪽이다. 이런 성향 때문에 그는 상관과 부하 간에 음식에 차별을 두면 충성심이 일어날 수 없다는 주장 아래 주-부식에 있어 언제나 장-사병 간에 구별을 두지 않았고, 처가살이 덕에 한 달에 한 번씩 타오는 불식미(不食米)는 식구가 많아 어려움을 겪는 부하들에게 아낌없이 나눠주곤 했다. 이런저런 이유로 그의 주위에는 항상 사람이 따랐고, 한 번 그와 인연을 맺은 사람은 떨어질 줄 몰랐다. 한마디로 전장군은 타고난 성품도 그렇지만 육군사관학교에서 배우고 익힌 교범(敎範) 그대로를 입관 후에도 줄곧 실천하고 발전시켜 온 전형적인 모범군인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살을 깎는 자기단련을 육사 졸업 후 25년간 해오는 사이, 동기생일지라도 어쩌다 그를 대할 때면 □히 범접할 수 없는 거대한 암벽을 대하는 느낌이 들 때가 없지 않다는 얘기가 심심치 않게 나돌 정도다.
이러한 성실한 삶의 자세와 불굴의 투지로 그는 이미 오래 전부터 군 내부에서는 널리 알려진 인물이었다.
다만 그 이름이 국민 사이에서 알려진 것은 10․26 사태 후 계엄사합동수사본부장으로서 김재규 일당의 범죄 사실을 공표하기 위해 매스컴에 이름이 오르내리면서였다.
대통령 시해라는 생각지도 못할 끔찍한 국가 위기에 처했을 때 그는 싫더라도 이미 국민 앞에 나서지 않을 수 없게 된, 피할 수 없는 운명에 처해있었다.
그가 국가원수 시해사건에서 보여준 집요하고 철두철미한 사건규명으로, 그의 당당함은 자신도 모르게 이미 군의 의지를 결집시키는 촉매제가 되었고, 불의를 보고 침자 못하는 천성적인 결단은 그를 군의 지도자가 아니라 온 국민의 지도자상으로 클로즈업시키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그의 오늘은 주어진 자리에서 늘 그가 그래오듯 최선을 다해 온 결과일 뿐이다.
12․12 사건만 해도 그렇다. 정승화(鄭昇和) 육참총잠 쪽에 서면 개인 영달은 물론 위험부담이 전혀 없다는 걸 그도 잘 알았으리라.
이미 고인(故人)이 된 대통령의 억울함을 규명한다고 하여 누가 알아줄 리도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그가 배우고 익혀 온 양식으로선 참모총장이 아니라 그보다 높은 상관일지라도 국가원수의 시해에 직접-간접적인 혐의가 있는 사람이면 누구든 철저히 그 혐의가 규명되어야 바른 길이었다.
그렇지 않고선 자식이 아비를, 제자가 스승을, 부하가 상관을 모함하고 교살하는 식의 땅에 떨어진 윤리(倫理)를 회복할 길이 없다는 것이 그의 신념이었다.
그의 이런 판단은 육사 선후배라는 사사로운 정리를 떠나 국가 장래를 내다보는 ㄷ승적 윤리관에서 내려진 결론임은 물을 나위도 없다.
시해사건을 수사하는 초등단계에서부터 일선 수사관들은 정총장을 소사할 필요가 있다고 전해왔다.
그러나 그는 자칫 군의 동요가 일지도 모르고 그로 인해 북괴의 오판을 불러일으킬 우려도 있는데다 국민들의 흥분이 조금 가라앉은 뒤에 조용히 규명에 나설 작정이었다.
더구나 김재규의 재판이 진행되고 있는 동안 일부에서 김을 ‘의사(義士)’라고 부르는 움직임조차 일자, 전장군의 입에선 쓴웃음과 함께 차제에 나라의 도덕관 절입을 위해 한바탕 몸으로 부딪쳐야겠다는 마음까지 일었던 듯하다.
‘설사 온 백성을 먹여살릴만한 공을 이루었다 할지라도 아비를 죽인 놈이 용인되고, 국가원수를 시해한 자가 의사로 칭송되는 것이 민주화의 뿌리라면 그 뿌리는 송두리째 뽑아내 화근을 없애야 한다’는 게 당시 그의 신념이었다는 게 한 측근들의 귀띔이다.
10․26 사태 이후 그가 보여준 일련의 행위는 육사에서 익히고 오랜 군대(軍隊)생활에서 다져진 애국심을 바탕으로 한 도덕적 행위라는 게 주위의 얘기다.
이러한 전장군을 두고 요즘 군내에선 위기에 강한 사람이라고 일컫고 있다. 대소의 위기 때마다 아무도 앞장을 서려 하지 않을 때 그만은 자신의 도덕관에 비추어 옳다고만 판단되면 위험여부를 가리지 않고 앞장서서 난관을 극복해 왔기 때문이리라.
그가 혼신의 정열을 쏟고 있는 사회정화, 정치풍토의 개선도 그의 구국(救國)적 도덕관에서 그 뿌리를 찾아야 할 것 같다.
그는 사회 각계의 지도자는 기본적으로 나라에 몸을 바친다는 각오 아래 행동하고 처신해야 한다는 생각인 듯하다.
지도자가 사심 없는 행동, 당당한 태도를 지닐 때 정상적인 윤리가 제대로 통하는 밝은 사회가 이룩될 수 있다는 얘기다.
따라서 사회는 원래 “그런거다”하는 식으로 비리, 부정에 대해 눈감아 주고 있는 혼탁한 현 사회 인식을 올바른 사리가 제대로 행세될 수 있는 차원까지 끌어올려야겠다는 그의 의지의 발로가 바로 사회정화운동으로 나타난 것이라는 설명이다.
아무튼 그의 다짐이 아니더라도 사치, 낭비, 술수, 선동, 협잡, 뒷거래 등의 단어가 우리 주위에서 사라지는 날, 밝은 사회가 된다는 사실은 틀림없는 일일 듯하다.
변화는 고통이다. 그러나 그것은 어느 때 어느 사회에나 필요한 것일지도 모른다. 더 밝은 사회, 더 좋은 나라를 만들기 위해 잠시의 고통쯤은 참고 견디는 길만이 우리 모두가 승리하는 길이다.
〈김명규(金明珪)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