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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투더코아의 詐欺 列傳]33.몽염열전(蒙恬列傳)
게시물ID : history_14378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투더코아
추천 : 5
조회수 : 1426회
댓글수 : 2개
등록시간 : 2014/03/01 02:18:19
투더코아의 詐欺 列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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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염열전(蒙恬列傳)
 
일전에 백기.왕전열전을 하면서 왕전을 삼대에 걸친 명문 장수가문이라고 소개한바 있다.
그런데 진나라에는 왕전의 가문 이외에도  또다른 삼대의 장수가문이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몽씨의 일가였다.
몽씨의 가문은 진소왕시대부터 진나라가 일통천하 할때까지 막대한 공로로 이름이 높았다.
진시황 또한 이들 몽가.몽오.몽무.몽염.몽의등 몽씨가문에 의지한바가 매우 컸다고 할수있다.
이들은 대대로 진나라에 끼친 공적이 실로 지대했고 나라안에서 충신양장으로 그 명성을 떨쳤다.
그러나 간신배의 모함에 하루아침에 멸족의 화를 당했으니 이또한 하늘의 뜻인가?
나라를 부강시키고 군주에게 충성을 다바쳤으나 그 영화가 삼대에 끊어진것은 다 이유가 있었으니
이들의 이야기는 후세에 진정한 군자의 행동이 어찌해야 하는지 잘 알려주는 타산지석으로
충분히 알아두어야 할만하다 하겠다.
진나라를 위해 영토를 확장시키고 인구를 늘렸다.
북으로 흉노를 쳐부수고 황하를 방패삼아 요새를 구축했다.
이제 부터 몽염의 이야기를 알아보도록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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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내죄지맥재(何乃罪地脈哉)
 
몽염(蒙恬)의 조상은 제나라 출신이었다.
몽염의 할아버지라고 하는 몽오는 진나라에 와서 진소왕을 섬겨 그 벼슬이 상경에 이르렀다.
열전에는 이 몽씨일가가 어찌해서 제나라에서 진나라로 흘러들어왔는지 자세히 나와있지 않다.
몽염의 할아버지라고 하는 몽오가 진소왕때에 진나라로 왔다고 하지만 역사에 등장하는것은
진장양왕때부터이다.
열전에 나와있지는 않지만 이야기를 시작하기 전에 몽씨의 가계를 잠시 살펴보도록 하겠다.
몽씨 가문에 몽오의 가까운 친척으로 몽가 라는 사람이 있었다.
몽가는 진왕정의 총애를 받아 중서자의 벼슬에 있었다.
이 몽가는 형가가 비수와 함께 번어기의 머리와 독항의 지도를 들고 진나라로 왔을때
형가가 제일 먼저 찾아갔던 사람이었다.
형가는 진나라에 왔으나 진왕을 만날길이 없었기에 우선 진왕의 총애를 받는 중신을 물색하여
몽가에게 줄을 놓았던 것이다.
몽가는 처음에 형가를 경계했지만 형가가 번어기의 목과 독항땅의 지도를 가져온것을 보고 매우 기뻐했다.
또한 형가에게 천금의 뇌물을 받아먹었기 때문에 형가가 진왕을 알현할수 있도록 주선을 해줬다.
어전에서 형가의 거사가 실패로 돌아간후에 진왕정은 이번일에 대하여 논공행상을 했다.
진왕을 위해 약낭을 던진 하무저에게 큰 상을 내리고 진왕에게 칼을 등뒤로 해서 뽑으라고
가르쳐 주었던 소내시 조고에게도 상을 내려 그 공로를 치하했다.
그리고 애초에 형가를 접견하도록 아뢴 몽가를 잡아들여 능지처참하고 몽씨의 일족을
모두 멸족시켜 버렸다.
 
이때 몽오는 이미 죽은지 오래였고 몽오의 아들 몽무는 전쟁터에 나가있어 이런 일을 몰랐다
그래서 몽씨 일족중 살아남은 것은 몽무 뿐이었다.
그러면 몽무의 아버지 몽오는 어찌 죽었는가?
열전에는 이야기가 없지만 열국지에 나오는 몽오에대한 설명은 다음과 같다.
 
몽오는 진소왕때 부터 진나라 장수였다.
일찌기 장평대전에서 백기장군의 부장으로 활약했고 그 이후에도 수많은 전투에서 이름을 날렸다.
그러나 신릉군이 위나라군사를 끌고 조나라를 도우러 왔을때 크게 패전하여 달아났던적이 있다.
 
진나라 왕손이인이 조나라를 탈출하고 진효문왕의 뒤를 이어 진장양왕이 되었을때
장양왕은 조나라에서 볼모생활을 하던때가 생각났다.
조나라가 그를 여러번이나 죽이려했던 일이 생각나서 그 원한을 갚으려는 생각이 들었다.
장양왕은 몽오에게 군사를 주어 조나라를 치게 하였다.
이에 몽오는 유차 등37개 성시를 함몰시키고 그곳에 태원군을 설치했다.
또 남쪽 상당땅까지 점령하여 조나라를 큰 위기에 몰아 넣었다.
 
몽오는 또다시 왕명을 받들어 위나라로 군사를 돌렸다.
이때 위나라의 신릉군은 조나라에 있었는데, 위기를 느낀 위안리왕은 신릉군에게 위나라로 돌아와줄것을 청했지만 신릉군은 조나라로 돌아갈 생각이 없었다.
그러나 모공과 설공의 설득으로 마음을 바꿔먹은 신릉군이 위나라로 돌아오게 되었고
조나라의 군사를 빌어온 위공자 신릉군에게 또다시 대패한 몽오는 군사를 모두 잃고 함곡관으로 달아났다.
 
조나라의 장수 방난은 여러나라와 연합하여 진나라를 공격할 계획을 세웠다.
이에 진나라와 친한 제나라만이 연합에 참여하지 않았고 그외에 위.조.한.연.초등 다섯나라가 힘을 모아
진나라를 치기위해 진나라 국경에 모였다.
이때 춘신군 황헐이 동맹을 배신하고 초나라 군사를 이끌고 혼자 달아났던일에대해서는
춘신군 열전에서 설명한 바가 있다.
 
이러한 상황에 여러나라가 진나라에게 도전하는것에대해 매우 진노한 여불위는
이 다섯나라의 연합군이 명목상으로는 춘신군이 의장이지만 실제로는 조나라의 장수 방난이
주모자였다는걸 알고 조나라를 공격하기로 했다.
여불위는 몽오와 장당에게 군사를 주어 조나라를 공격하게 하고
진왕 정의 아우 장안군성교와 번어기장군에게 몽오를 지원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몽오의 군대는 조나라명장 방난의 계책에 걸려 크게 패하였고 할수없이 후대의 장안군에게 구원을청하였다.
그런데 장안군의 수하장수인 번어기는 여불위를 몹시 미워하고 진왕정이 진나라 적통이 아니므로
장안군이 진나라의 왕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번기회에 군사를 보유하고 있을때
반란을 일으켜 진왕정을 몰아내고 진나라 영씨의 적통인 장안군을 왕위에 옹립하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몽오를 도와주지 않고 오히려 본국 진나라를 향해 칼끝을 돌렸다.
후대의 도움을 받지 못하게 된 몽오는 하는수없이 급히 회군하여 태행산일대까지 행군하였는데
조나라 방난의 추격군에게 포위되어 곤경에 빠지고 말았다.
몽오는 분발하여 크게 싸웠으나 중과부적이었고 또 싸울 뜻을 잃어버린 진나라군사들은 우왕좌왕 했다.
그러나 늙은장수 몽오는 몸의 여러곳에 중상을 입었으면서도 오히려 힘껏 싸워 조나라군사 수십명을 베고
조나라장수 방난에게 활을쏘아 방난의 가슴에 화살을 꽂았다.
조나라장수 방난이 제손으로 가슴의 화살을 뽑아 버리고 군사들에게 호령했다.
"적장 몽오를 포위하고 일제히 활을 쏘아라."
 
적군에 둘러싸여 무수한 화살을 맞은 몽오는 고슴도치처럼 형체를 알아볼수 없는 지경이 되어 쓰러져 죽고 말았다.
진나라의 명장 몽오는 번어기의 뜻밖의 배신때문에 태행산에서 그렇게 죽고 말았다.
한편 조나라 장수 방난은 비록 개선하여 조나라로 돌아갔지만 몽오에게 맞은 화살때문에
수일후에 역시 죽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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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오의 아들 몽무에 관한 기록도 열전에는 별로 찾아보기 힘들다.
 
진왕정이 초나라를 칠때 왕전장군에게 "군사가 얼마나 필요한가?"라고 물었을때
왕전은 "60만이 필요하다."고 대답했으며 이신장군은 "20만이면 충분하다."고 말했다.
 진왕정은 왕전이 늙어 겁이많아졌다고 생각하여 이신에게 군사 20만을 주어 초나라를 치게 하였다.
이때에 이신을 따라 초나라를 치러 갔던 장수가 바로 몽무이다.
이때 이신과 몽무는 초나라장수 항연에게 군사의 대부분을 잃고 겨우 진나라로 달아났다.
 
진왕정은 왕전장군에게 사과하고 왕전에게 60만의 군사를 주어 다시 초나라를 치게 했다.
이때에도 왕전의 부장으로 몽무가 따라갔다.
왕전이 전쟁에 나가면서 자꾸 진왕에게
"어디어디의 좋은 집을 주십시오.
어디의 아름다운 전택을 내려주십시오."
라고 과도한 청을 할때 몽무가 왕전에게
"장군께서 너무도 많은것을 왕께 청하시는것 아닙니까?"
라고 묻자 왕전은
"진왕은 성미가 사납고 의심이 많은 사람인데 이번에 내게 60만의 군사를 내주었다.
이는 진나라의 전병력인데 내가 이제 이 군사를 이끌고 모반을 꾀한다면 어찌 되는가?
그러니 내가 많은 땅과 집을 요구해서 왕이 나를 의심하지 않도록 하는것이다."
라고 대답 하였다.
 
이 싸움에서 왕전은 초나라를 크게 무찔러서 초나라 도읍 수춘성을 함몰시키고 초왕 부추를 사로잡아
진왕에게 바치는등 대승을 거두었다.
초나라 대장 항연은 초나라의 마지막 왕손 창평군을 보호하여 끝까지 싸웠지만
몽무의 군사에게 포위되어 창평군은 화살에 맞고 죽었으며 항연은 스스로 자결하였다.
 
천하가 통일된후 진나라에선 왕전의 아들 왕분장군과 함께 몽무를 만호후에 봉했다.
이 몽무의 아들이 바로 몽염이었다.
필자는 결국 그 이후에 몽무가 어찌되었는지는 찾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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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염은 한때 옥관이 되어 형옥의 문서를 담당했다.
몽염의 형제로 몽의(蒙毅)가 있었다.
 
시황제 26년. 몽염은 대대로 가문이 장군의 집안이었던 관계로 진나라의 장수가 되어 제나라를 쳐서
이를 크게 격파하고 그 공으로 내사의 벼슬을 받았다.
몽염은 진나라가 천하를 통일한뒤에 30만의 대군을 이끌고 북쪽을 정벌하여 융적을 내쫒고
하남을 점령한뒤에 장성을 쌓았다.
그것은 천험을 이용해서 성새를 쌓는일로 임조(감숙성)에서 요동에 이르는 장장 일만리의 거리였다.
몽염은 10년이상 국경 밖의 상군에 있으면서 흉노를 몰아냈다.
그당시의 흉노들은 몽염의 이름만 들어도 벌벌 떨 지경이었다.
시황은 천하를 순유하기를 좋아하여 몽염을 시켜 도로를 닦도록 하였다.
몽염은 산을 깎고 골짜기를메워 1800리의 새 도로를 내었다.
 
시황은 몽씨의 집안을 매우 총애하였다.
그래서 몽의에게 상경벼슬을 주어 궁궐에 드나들때 배승하도록 했다.
그리하여 진나라의 국경은 몽염이 지켰고 궁궐황실은 몽의가 정책을 수행하는격이었다.
그리하여 여타의 대신들도 몽씨의 권위에 도전하려 하지 않았으며
두형제가 충신이라는 평이 내외에 자자했다.
 
시황은 조고가 총명하였으므로 그를 매우 아꼈다.
한번은 조고가 죄를 지었는데 시황이 몽의에게 그 판결을 맡겼다.
몽의는 조고에게 사형을 판결했지만 시황이 부탁하여 조고는 사형을 면했다.
이때부터 조고는 몽씨형제를 좋게 생각하지 않았다.
 
시황37년겨울에 황제가 순유길에 올라 낭야까지 갔다가 사구땅에서 병들어 죽고 말았다.
그러나 승상이사와 부새령조고는 시황의 유언을 따르지 않고 시황의 죽음을 비밀에 부친뒤
국서를 위조하여 말자 호해를 태자의 자리에 세우고 사자를 보내 거짓칙령으로 장자부소와
장군몽염에게 죽음을 명하였다.
부소는 자결하였지만 몽염은 다시한번 명을 내려줄것을 청하여 일단 장군의 직을 삭탈 당하고
옥에 갇혔다.
이세가 즉위하고 난뒤에 조고는 몽의역시 모함하여 죽이려 마음먹었다.
몽염의 아우인 몽의를 살려두면 후환이 있을것이 두려웠고 또한 이전에 자신의 죄를 판결할때
자기에게 유리하게 해주지 않고 사형을 내렸던일에대한 앙갚음을 할 생각도 있었다.
그러나 이세는 이미 부소가 죽었기때문에 나라의 기둥이라 할수있는 두 충신을 죽이는것에
약간 거리끼는 마음이 있었다.
조고는 몽씨형제가 살아남아서 다시 권세를 잡으면 자신의 모의가 들통나서 궁지에 빠질것을 염려하여
몽씨형제를 죽이기 위해 이세에게 그들 형제를 모함했다.
"예전에 선제께서 호해황자가 현명하다 하여 태자를 삼으려 하시는것을 몽의가 반대하여 없던일로
한적이 있습니다."
이세는 처음에 반신반의 했지만 조고가 끈질기게 간하였기때문에 이세는 몽의를 체포하여 옥에 가두었다.
이를 들은 자영이 이세에게 간했다.
"몽씨형제는 대대로 진나라의 충신인데 이제 간신배의 한마디에 그들을 저버리려 하십니까?
몽씨형제는 죄가 없으니 그들을 용서하시고 간신 조고를 벌하시옵소서."
그러자 조고는 대전바닥에 엎드려 울며 이세황제에게 아뢰었다.
"폐하께서는 폐하의 등극을 반대한자를 살리시고 죽음을 무릅쓰고 폐하를 황위에 오르도록 충성을 다한
소신을 버리시려하시옵니까?"
고민에 빠진 이세는 결국 조고의 말을 들어 몽의에게 죽음을 명하는 조서를 내렸다.
몽의는 장문의 상소문을 써서 자신의 죄없음을 주장했지만 그 상소문은 조고의 밀명을 받은
사자의 손에 의해 황제에게 전달되지 않았고
사자와함께온 역사들은 도끼로 몽의를 쳐죽이고 말았다.
 
이세는 몽염에게도 사자를 파견했다.
ㅡ그대는 부소를 도와 난을  꾀했으니 그 죄가 크다.
또한 그대의 아우도 대죄를 짓고 죽었으니 이것은 법률상 장군에게도 연루된다.ㅡ
몽염역시 죄없이 죽는것이 억울하여 황제에게 상소문을 썼다.
사자가 말했다.
"저는 폐하의 명을받아 법을 집행해야 하기때문에 감히 장군의 말씀을 황제폐하께 전해 올릴수 없습니다."
몽염이 길게 탄식하며 말했다.
"나는 십여년동안 상군에 머물며 비바람 찬이슬을 맞으며 노숙으로 세월을 보냈다.
눈보라를 이불삼고 언 밥을먹으며 오직 충성을 다했을뿐이다.
내가 하늘에 무슨 죄를 지었다고 이렇게 죽어야한다는 말인가? "
한참 동안 말이 없더니 이윽고 다시 입을 열어 천천히 말했다.
"그렇다.나의 죄는 죽어 마땅하다.
내가 그동안 임조에서 시작해서 요동까지 장성을 일 만여 리나 쌓았으니
그 중 지맥을 끊은것이 얼마이고 인명을 죽인것이 얼마이겠는가?
이것이 바로 이 몽염이 죽어야하는 죄인 것 같다."
말을 마친 몽염은 사자가 가져온 사약을 들이키고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이 열전의 말미에 사마천은 이렇게 평하였다.
 
"나는 북방의 변경지방에 갔다가 직통로를 통해 돌아왔다.
오면서 몽염이 수축한 장성및 요새와 산을 깎고 계곡을 메워 개통한 직도를 보고
나는 몽염이 백성들의 노고와 재산을 너무나 가볍게 생각했다고 느꼈다.
진나라가 육국의 제후들을 멸한 직후여서 천하민심은 아직 안정되지 않았고
전쟁 중에 입은 상처가 미처 아물지 않고 있었다.
그런데 몽염은 명장이라는 큰 명성을 얻고 있었음에도 백성들의 어려운 처지를 구한다거나,
노인들을 공양한다거나, 고아들을 돌본다거나 해서 백성들의 평안한 생활을 할 수 있도록
극력 간하지 않고
오히려 토목공사를 대대적으로 일으켜 후세에 공적을 남기려는 진시황의 마음에 아부하려고 했다.
그들 형제가 모두 사형을 받은것은 당연한 결과가 아니겠는가?
무슨 지맥을 끊은것이 죽을죄의 이유란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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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 몽염열전에 대하여 모두 알아보았다.
이번 몽염열전은 열전본문보다는 오히려 열국지를 비롯한 다른 문헌을 많이 참조하였기때문에
이것이 역사적 사실과 부합하는지 아니면 그냥 소설의 이야기인지 필자도 확신할수는 없다.
그러나 열국지라는것이 비록 소설이지만 그래도 역사적 사실과 사서를 바탕으로 하여 이뤄진
이야기이므로 어느정도는 사실에 근거하는 이야기가 아닐까 생각한다.
하기야 사마천의 사기조차도 허황한 이야기가 종종 등장하니 당세의 중요한 몇몇 기사를 빼고는
모든 이야기가 전부 사실일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특히 어떤 인물이 키가 몇척이요 허리가 몇아름이요 하는얘기들이나 무서운 장수들이
귀신을 때려잡았다는둥 호랑이를 맨손으로 때려잡았다는둥 하는 이야기는
저 단재신채호 선생의 말대로 그저 신괴록(神怪錄)에 불과한것 아니겠는가?
그러하니 독자들은 역사서를 읽을때 스스로 판단하여 그것이 사실인지 과장인지
생각해보는 습관을 들이는것이 좋을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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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씨가문은 삼대에걸쳐 진나라에 세운공이 매우 컸다.
그런데 자세히 보면 왕전.왕분.왕리로 이어지는 왕씨일가와는 약간의 차이와 공통점이 있는듯하다.
 
우선 차이점을 살펴보면 왕씨가문은 대대로 대장의 직분을 수행했다.
그런데 몽씨가문은 대장이기보다는 항상 부장(副將)의 위치에 머물렀다.
이것은 어찌된 이유인가?
몽씨가문이 전쟁에 나가 대장이 되어 싸워이길 능력이 없었던것일까?
 
필자가 보기엔 그런것 같지는 않다.
다만 이들몽씨일족이 제나라에서 온 외국인 신분이 그러한일에 영향을 끼치지 않았을까 하는
근거없는 의문을 가져볼뿐이다.
여하간 몽씨일가는 항상 대장보다는 부장의 위치에서 공을 세웠던것은 사실일듯 하다.
 
또 공통점을 찾아보면 이들이 삼대만에 불행을 당해 죽고 말았다는점이다.
필자가 전에 왕전의 열전을 이야기 할때에 했던 말중에
 "삼대에걸쳐 장수를 배출한 가문은 반드시 패한다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그토록 수많은 인명을 살상했으니 그 원혼이 가만 있겠는가?"
라는 이야기를 언급한 일이 있다.
이러한 이야기가 어찌 그리도 틀림없이 맞아떨어지는지?
이러한 일들을 생각하면 소름이 끼치지 않을수가 없다.
 
왕전의 손자 왕리는 통일진제국 말기에 항우에게 사로잡히고 말았고
몽염은 옥에 갇혔다가 사약을 받아 죽고 말았다.
 
어쨌든 천하가 통일되고 진나라가 제국을 건설하게 된것은 왕씨와 몽씨의 공이 컸다.
또한 그들의 명성은 후세에까지 높이 떨친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이들은 황제를 잘 보필해서 덕을 세우고 국가의 근본을 견고히 하지는 못하고
부질없는 미봉책만 쓰며 시황에게 아부하고 비위맞추기에만 급급했다.
그리하여 인민들의 고혈이 산하에 흐르고 무수한 백성들의 생명이 장성아래 묻혔으니
가히 그 죄가 죽고도 남음이 있는듯 하다.
태사공의 말대로 자기의 죄를 알지 못하고 죽음의 핑계를 지맥 끊은것에 돌린것은
마지막 가는길까지도 솔직하지 못하고 비겁했다고 밖에 할수 없을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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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맥을 끊은 죄로 죽을 죄를 받는다면 우리나라에도 대표적으로 죽어야할 인물이 하나 있다.
사대강을 파헤쳐서 온나라의 강물을 썪은 녹차라떼로 변하게 하고 맑고 깨끗하던 하천을
죽음의 강으로 변하게 했으니 이야말로 그 죄가 삼대에 미칠수밖에 없을듯 하다.
 
또한 전편에 언급했던 정국거의 공사이야기를 봐도 국가가 필요없는 거대토목공사를 일으키면
나라가 망한다 하였는데
진나라는 정국거를 짓고 아방궁을 짓고 여산릉을 조성했으며 만리장성을 쌓았고 용도와 직도를
만듦으로서 나라의 재용을 탕진하고 백성을 성벽아래 죽게했으니 이것만 해도 진나라가
망하지 않는것이 이상한 일임을 알게한다.
 
이제 우리나라에서도 어서 정권이 바뀌어서
나라를 팔아먹고,국토를 파헤쳐 강을 썪게 만들고 국민을 피폐하게 만든자를 체포하여
무상급식을 시키고 재산을 몰수하는 통쾌한 일이 벌어지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저 쥐새끼가 만행을 저지를때 주변에서 극력 만류하지 않고 오히려 아첨하여
동조하고 또 그 떡고물을 주워먹기에 바빴던자들은 저 몽염이 어떻게 죽었는가를 똑똑히 기억해
두어야 할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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