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폰소설 제6화>
대구달성공원
윤호정
서정호 선생이 중구청문화교실에서 한 달 치 강의료 24만원을 받아 잰걸음으로 달성공원에 도착하니 한 무리의 허기진 군상이 눈을 반짝이며 ‘하이고 교장선생님’ 하며 반색을 했다.
“오늘은 무슨 주제로 강의를 하셨습니까?” 하고 대학물을 먹었다는 김 씨가 물었다.
“오늘날 우리 한반도의 국제정세가 110여 년 전 조선을 둘러싼 열강의 다툼과 흡사하여 ‘러일전쟁과 한일합방’ 에 대해 주부들이 알아듣기 쉽게 강의를 했습니다, 내가 달성공원을 찾는 단체관광객들에게 누차 한 얘기지만 정작 여러분들께는 한 번도 얘기한 적이 없으니 오늘은 달성공원의 유래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대구의 옛 이름인 ‘달성’ 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되고 원형이 잘 보존된 토성으로 청동기시대부터 사람이 살아온 흔적이 있으며 삼국사기에 신라 첨해왕(沾解王) 15년(AD261)에 달벌성을 쌓고 나마극종(奈麻克宗)을 성주로 삼았다는 기록이 있으며 신라와 고려의 관아지로 사용됐고 지금은 사적62호로 등록돼 있습니다.”
“달성공원이 그렇게나 오래 되었습니까, 옛날에는 달성서씨 땅이었다고 하던데요.”
“그렇습니다, 조선 세종 때 달성서씨 세거지인 달성을 헌납 받아 경상감영을 두었으나 정유재란 때 불타고 1894년 청일전쟁 때는 일본군의 야영지가 되었으며 전쟁에 승리한 일본수비대장과 거류민단이 대구의 지기를 누르기 위해 명치천황의 생일을 기념하는 황대신궁요배전을 세우고 1914년 대구신사를 조성하여 토성보다는 공원으로서의 이미지가 굳어버렸습니다,”
“요즈음 공원입구에 있는 순종황제의 동상을 철거해야 하느니 마느니 말이 많던데...”
“예, 1909년1월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이토 히로부미가 전국의 의병봉기와 대구의 국채보상운동을 잠재우기위해 신설된 ‘경부선철도시승행사’ 라는 미명으로 대한제국의 마지막황제인 순종을 모시고 대구를 방문하여 달성공원에서 저기보이는 저 일본산 ‘가이즈카 향나무’ 로 기념식수를 하고 해산을 앞둔 관기들의 마지막공연을 관람했으며 이때 순종이 일본에 볼모로 잡혀간다는 소문이 나돌아 유생들이 바다에 접한 부산과 마산에는 행차하지 말도록 눈물로 상소를 올리고 수창학교학생들은 죽을 각오로 경부선철로에 몸을 던져 기차를 세우고 일본군으로부터 순종을 구출코자했으나 교사들에게 발각되어 무위로 끝났으며 훗날 이 소식을 접한 순종황제가 은사금과 함께 관리들이 쓰는 모자를 하사하여 1980년대까지 교모로 사용한바 있습니다, 오늘은 이쯤하고 출출 할 테니 자리를 옮깁시다.” 하자 일동이 송구한 걸음으로 뒤를 따랐다.
“주모, 여기 돼지껍데기볶음 큰 걸로 두 개, 소주 열병, 순대국밥은 나중에 주시오, 그런데 여러분들 얼굴이 왜 그 모양이오, 오늘 또 패싸움을 했소, 불쌍한 처지의 사람들끼리 그러면 되겠소?”
“그게 아니라 어제 집에 가서 밥 달라고 하니 마누라가 ‘돈을 못 벌면 밤일이라도 제대로 해야 밥을 주지’ 하며 주먹을 날립디다, 나는 그렇다 치고 박 형은 나보다 젊은데 왜 눈티가 반티가 됐소?”
“나도 마누라한테 전화를 했더니 계추마치고 들어와 ‘다른 친구들은 다 캬바레로 갔는데 나는 왜 지지리 서방복도 없는지, 60이 넘으면 언제 죽어도 호상인데 왜 안 죽고 전화질이냐’며 휘두르는 핸드백에 맞아 이 모양입니다.”
“나는 마누라가 잘 차려입고 나서기에 어디 가느냐고 물었더니 ‘남이사 어딜 가든지 말든지 니가 와?’ 하며 막 신으려던 하이힐을 던진 것이 하필이면 이마빡에 맞아 이렇게 됐습니다.”
“모두 맞을 짓을 했구먼, 나는 말이라곤 한마디도 안했는데 아침에 눈떴다고 ‘자는 듯이 가지 눈은 왜 떴느냐’ 며 목침으로 얻어맞아 눈알이 빠지는 줄 알았습니다.”
“다음에는 내가 약을 몇 알씩 사드릴 테니 분위기가 험악할 때 요긴하게 사용하시고 매사에 입조심, 몸조심하시오.”
서 선생은 퇴직연금을 안겨준 부모와 조국에 대한 보답으로 달성공원의 무료급식을 보고 몰려드는 불우노인들에게 소주잔을 베풀어 왔지만 오늘밤은 마누라에게도 사력을 다해 위문공연을 하기로 마음먹으면서 약국 문을 밀고 들어갔다.
※ 스폰소설: 지하철 한 정거장 가는 사이에 스마트폰으로 읽을 수 있는 짧은 소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