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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세 번이나 성왕의 몸에 접신하려다 실패한 혜량. 천벌을 받아 누구에게 호되게 얻어맞은 듯 얼굴이 퉁퉁 부어 있다. 자신이 분신으로 활용한 검은 고양이가 성왕을 해치려다 곰의 일격을 받아 얻어터지자 그 상처가 그대로 혜량의 얼굴모습에 나타난 것이다. 혜량은 분신으로 쓰기 위해 길거리에 다니던 검은 도둑고양이의 목을 졸라 죽였다. 저번에 성왕 앞에 나타난 고양이도 혜량이 죽은 고양이에 주문을 외워 다시 살려내어 잘 키우다가 자신의 분신으로 활용하였다.
산봉우리 위에 떠 있는 뭉게구름에 묻힌 하늘이 빨갛게 불타올라 산과 들을 온통 붉게 물들이고 있다. 점점 어두워지는 계룡산 연천봉 언덕에 선 혜량. 욱신거리는 얼굴로 산 아래의 절경을 바라보고 있으려니 슬며시 부아가 났다. 그는 다시 고개를 돌려 이제 막 떠오르는 밤하늘의 희미한 별들을 하염없이 우러러보았다.
며칠 동안 호흡을 가다듬으며 뚫어지게 하늘을 바라다보고 있으려니 쌀 한 톨보다도 작아 보였던 별들이 점점 크게 보이기 시작한다. 처음에는 손톱만 하게 보이더니 주먹만 하게 보였다가 나중에는 자신의 크기를 훨씬 넘어섰다. 그렇게 커진 별들이 모두 혜량에게 다가와서 그의 온몸을 휩싸고 날아간다.
그때 혜량이 갑자기 가부좌를 튼 채로 합장한 손을 내리더니 옆에 있던 지팡이를 쥐고 땅을 두드리며 주문을 외었다. “진진 바라 사바. 일월성신의 뜻을 받들어 나 혜량의 이름으로 간곡히 바라노니 백제 땅에 별이 무수히 떨어질 것이며 죽음의 큰 별이 백제의 하늘에 마구 날뛸지어다.”
그 후 몇 달 후 성왕 10년(532년) 7월 갑진일에 별이 비오듯 떨어졌다. 이년 후인 성왕 12년(534년) 4월 정묘일에 형혹(화성)이 남두성 별자리를 침범하였다.
형혹(화성)이 남두성 별자리를 침범한 다음날 아침 웅진성 성왕의 정전에 불려온 천문박사 연희. 백제조정의 신하들 중 유일한 여인이다. 낭랑 십팔 세라고 하여 이제 십대 후반인 그녀는 백제 최고의 미인으로 연모의 누나이기도 하다. 독특하기는 하지만 어엿이 관복을 차려입은 그녀의 모습은 어떤 때는 사내 같기도 하고 어느 때는 여인 같아 보인다. 물론 백제의 관복은 관등에 따라 자색과 비색, 청색으로 복색이 정해져 있었다. 하지만 청소년기에 중국 양나라에까지 조기유학을 하고 돌아온 백제 제일의 귀족 연씨 가문의 연희에게는 임금으로부터 특별한 관복이 허락되었다.
백제 유일의 해외유학 여인이다 보니 콧대가 무척 높다. 웬만한 사내는 눈에 들어오지도 않아 귀족들의 자제나 왕실의 유력자들까지도 거들떠보지 않았다. 게다가 연희는 남녀 간의 사랑에 관해 모르는 것인지 관심이 없는 것인지 궁궐에서 자신에게 그윽한 눈길을 주는 사내들을 단지 조정의 신하로만 볼 뿐이다. 그녀는 천문박사답게 그럴싸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오색찬란한 성운을 아름답게 수놓은 옷을 입었다. 그녀는 그것을 남들에게 星(성)服(복), 하늘의 별들이 새겨진 옷이라고 자랑하며 즐겨 입었다. 물론 양나라에 유학할 때부터 남장을 하면서 입어온 옷이기는 하지만. 또한 항상 남장을 하고 다니느라 사내처럼 상투를 튼 머리 위에는 星(성)帽(모)라고 하여 으스름한 색상의 고운 비단 위에 오색찬란한 수정으로 된 별이 촘촘히 박힌 모자를 애지중지하며 쓰고 다녔다.
그렇게 독특하고 위풍당당한 그녀가 정전 안으로 들어가 임금께 인사를 올렸다. “소신 천문박사 연희, 대왕을 뵈옵니다.” 연희가 나긋나긋한 몸을 사뿐히 흔들며 들어와 인사를 올리자 얼굴이 환해진 임금이 은근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어서 오시오. 박사. 자리에 앉으시오.”
연희가 자리에 앉자 부드러웠던 임금의 얼굴이 바로 심각한 표정으로 바뀌며 말을 이었다. “이년 전에 별이 무수히 떨어져 고구려와의 전쟁에서 수많은 병사들이 죽었소. 석 달 전에는 형혹이 남두를 침범하여 매우 걱정이 되고 있소.” 임금이 하늘의 현상을 염려하자 연희가 그것을 자세히 풀어 말했다. “형혹은 죽음의 별입니다. 인간들의 운명은 우주에 그 징조가 보이게 되는데 형혹이 생명의 남두를 범했으니 분명 많은 죽음이 일어날 것입니다.”
“많은 죽음이라고? 그러면 우리 백제국에 그런 끔찍한 일들이 일어난단 말이오?”
“소신이 보기에는 백제가 아니라 고구려에서 비극이 생길 것 같사옵니다.”
“박사는 무슨 근거로 그렇게 보는 것이오?”
“형혹이 남두를 범할 때 북방의 허수와 서방의 필수 사이를 지나갔기 때문입니다. 즉 북북서의 방향으로 지나간 것은 웅진에서 볼 때 고구려의 평양성에 해당합니다.”
“그래도 마음이 놓이지 않는구려.”
“지켜보시옵소서. 몇 년이 지나면 아실 수 있을 것입니다.”
“알겠소. 더 고민해보리다. 이제 물러가 보시오.”
“예. 대왕.” 연희가 물러가자 아쉬워하는 표정으로 문밖을 바라보던 임금이 이번엔 왕비를 정전에 불렀다.
임금의 부름으로 내전에 있던 왕비 사씨가 정전 안으로 들어왔다. “소첩 대왕을 뵈옵니다.” 그러자 임금이 반갑게 왕비를 맞았다. “어서 오시오. 왕비.”
임금 가까이 앉은 왕비가 먼저 말을 꺼냈다. “대왕. 요즘 무슨 근심꺼리가 있습니까?”
“요사이 하늘이 뒤숭숭합니다.”
“걱정 마세요. 대왕의 덕이 요사한 기운을 없앨 것입니다.”
“나의 덕이? 그러게요. 서울을 사비로 옮겨 새롭게 출발해야 좋지 않을까요? 안 되면 마법이라도 써서 나랏일을 해결하여야 하나 봅니다.”
“대왕. 사람이 운명과 마법에 얽매이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더구나 백성의 본보기를 보이셔야 할 임금으로서 차마 못할 일입니다.”
“허면 어떻게 해야 좋을 것 같소?”
“모든 것을 대왕의 뜻대로 하세요. 사람과 나라의 운명은 다 사람하기 나름이고 사람이 스스로 개척해 나가는 겁니다.”
왕비의 자신 있는 말에 임금이 기대에 가득한 눈길로 묻는다. “허면 나는 무엇에 의지하여 내 마음대로 할 수 있겠습니까?”
“그동안 대왕께선 부처를 독실하게 믿어 오시지 않았습니까?”
“음. 알겠소.”
“분명 대비와 연씨들이 하늘의 변고를 이유로 사비로 서울을 옮기고 신라와 함께 고구려를 치자고 할 것입니다. 대왕께선 그때 가서 마지못해 그 말을 들어주는 것입니다.”
“왕비의 말씀은 일리가 있소. 내가 지금 사비천도를 주장하다간 선왕 독살의 누명을 모두 뒤집어쓰게 되오.”
“옳은 말씀입니다. 때를 기다리시죠.”
“그렇게 하겠소.”
선왕의 독살 후 비록 임금의 자리에 올랐으나 고립되어 혼자 고민하고 절망하였던 성왕. 이제는 왕비라는 현명한 동반자가 함께 하고 있어 무척 든든하기만 하다. 성왕이 사씨를 총애한 가장 큰 이유는 미모보다는 확실한 주관 때문이었다. 게다가 재물에 대한 감각이 뛰어나 궁중의 자금을 굴려 사씨 가문을 통하여 중국와의 무역에서 적잖은 부를 쌓은 것이 더욱 마음에 들었다. 그 돈으로 칠년 전 가림성 내의 대조사를 비롯하여 웅진 경내의 대통사와 동혈사, 서혈사와 남혈사, 주미사와 북혈사의 여러 절들을 건립하는데 큰 밑천이 되기도 하였다. 무역으로 이룩한 사씨 가문의 거대한 부는 훗날 정예한 사병을 키우게 된다.
오후에 축축하게 내리던 소낙비가 그치고 마을 앞 논과 개울에는 개굴개굴 우는 소리가 시끄럽게 들려왔다. 멀리서 보이는 아기자기한 연꽃구름무늬의 벽돌로 지어진 서혈사의 은은한 풍경소리가 귓가에 살며시 스며든다. 초록이 더욱 짙어지는 싱그러움을 만끽할 수 있는 초여름의 망월산 봉우리에서는 귀족들의 모임이 즐겁게 펼쳐지고 있다. 그 자리에 함께 한 화공들의 그림솜씨와 악공들의 풍악소리도 시회의 흥취를 북돋는다. 그러나 마냥 즐거운 놀이와도 같은 모임의 내면은 항상 시국에 관한 진지한 토론이 자리를 잡곤 하였다. 그곳에 모여 있던 연씨 가문출신 신하들의 얼굴엔 근심이 가득 서려 있다.
“요사이 하늘에 이상한 변고가 있더니 궁궐이 왜 이리 어수선합니까?”
“그러게 말이오. 이년 전 갑진일에 별이 우수수 떨어져 고구려와의 전쟁에서 무수한 병사들이 죽어가더니만 석달 전에는 죽음의 형혹이 남두를 범하여 사람들의 수명을 끊으려고 하고 있소.”
“옳은 말씀이오. 불덩어리 형혹이 생명을 주관하는 남두를 범했으니 전쟁이 안 나면 기근이나 질병이 만연할 것입니다. 후왕도 그 때문에 몇 달 전부터 이상해지신 것 같지 않습니까?”
“그 무슨 말이오. 후왕이 이상해지다니요?”
“전에는 선왕의 명복을 빈다 하여 무속에 빠지더니만 요샌 확 달라졌습니다.”
“어떻게요?”
“후왕이 항상 가지고 다니던 산신령이 어느새 없어지고 지금은 항상 부처만 찾고 있고 그림만 좋아하고 있어요.”
심각한 표정을 짓던 한 신하가 신음소리와 함께 무엇인가 생각난 듯 말을 꺼냈다. “음! 분명 후왕이 무언가 숨기고 있는 것 같소.”
“그걸 어떻게 아시오?”
“전에 산신령을 섬겼다 함은 후왕 개별적인 일이지만 부처를 열렬히 믿는 것은 차원이 달라요. 분명 왕권강화.”
“옳은 말씀입니다. 겉으론 바보처럼 부처와 그림만 좋아하는 척하면서 속으론 우리를 휘어잡을 속셈을 감추고 있는 것 같습니다.”
“여러분들도 잘 아시다시피 불교라는 게 그래요. 실제 우리 귀족들에게 얼마나 도움이 되겠소?”
“아무 것도 없소. 임금을 부처처럼 섬기게 하는 우상화 놀음 같소이다.”
“아무튼 정말 요상한 일이오. 무속이든 불교든 이렇게 후왕이 문치만 신경을 쓰다간 우리 백제국이 나약해집니다.”
“옳은 말씀이오. 서울을 사비로 옮긴 후 군비를 강화한 후 신라와 합쳐 고구려를 쳐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 가문도 한몫 크게 챙길 수 있죠.”
“하지만 후왕이 까딱 안하고 있으니 우리 이대로 그냥 두고 볼 수는 없습니다. 함께 후왕께 건의하여 봅시다.”
“아무 소용없는 일. 차라리 대비께 말씀드려 보는 것이 어떻소이까?”
“그거 좋은 생각이오.”
“얼른 별궁으로 가 봅시다.”
봉황무늬 벽돌로 지어진 아담한 별궁. 어느새 창밖엔 연보라 등꽃이 피어 향기를 시원한 바람에 실어 보낸다. 그때 대비전에 몰려온 연씨 가문의 신하들이 숨을 헐떡이며 말했다. “대비마마, 큰일 났습니다.”
“도대체 무슨 일이오?”
“후왕께서 나랏일엔 전혀 관심 없고 온통 부처니 그림이니 하고 계십니다.”
“동성왕의 환락을 닮아가는 것도 아니고 정말 큰일이군요.”
“그러하옵니다. 우리 백제가 힘을 길러 한강유역을 되찾아야 하는데도 저렇게 태평세월에 젖어계십니다.”
“그렇소. 그것은 선왕의 뜻과도 분명 어긋납니다.”
“대비께서 얼른 후왕께 말씀하여 주시옵소서.”
“알았소.”
용무늬벽돌로 지어진 우람한 정전. 단단히 마음먹은 대비가 찾아가자 마침 그곳에 앉아있던 후왕이 반갑게 맞이한다.
“어마마마께서 오늘 어인 일이신가요?”
“오늘 이 어미가 큰 걱정이 생겨 찾아왔습니다.”
“무슨 걱정이시옵니까?”
“후왕께서 나랏일은 제쳐두고 있다면서요?”
“아, 방금 신하들이 다녀갔군요.”
“그렇소. 모두들 후왕을 염려하고 있어요.”
“소자에게도 깊은 뜻이 있습니다.”
“후왕께서는 국방을 게을리 하고 불교만 숭상하는 문치만 한다 하니 나라의 안위가 심히 염려됩니다.”
“소자, 부처님의 법을 수호하는 전륜성왕이 되고자 합니다. 오직 평화와 자비를 사랑하며 이웃나라에 불교를 전파”
말을 마치기도 전에 대비가 후왕을 사납게 노려보며 버럭 소리를 질렀다. “후왕!”
“네. 어마마마.”
“어서 군사들을 잘 길러서 영토를 늘리고 왕권도 튼튼하게 해야지 않소?”
“어마마마, 문치와 불교전파는 백성과 나라를 잘 안정시켜 줍니다. 이는 사실상 왕권강화이기도 하고요.”
“아니, 후왕께서는 백제를 중흥하라는 선왕의 유지를 벌써 잊었단 말이오?”
“어찌 제가 잊었겠습니까? 하지만 대외적으로 팽창하면 백성들만 죽어나가고 귀족들만 전리품으로 배를 더 불리게 됩니다.”
“후왕, 이 어미가 신신당부하지만 이러다간 귀족들이 모두 들고 일어날 겁니다. 다시 깊이 생각해보시오.”
말을 마친 대비는 치맛바람을 거세게 일으키며 화난 얼굴로 돌아갔다.
신하들을 등에 업은 대비의 항의방문을 받은 성왕은 심각한 고민에 빠졌다. 한참을 생각하느라 경대 앞에서 턱을 괴고 있던 성왕의 눈에 여신이 준 반지가 들어왔다. 그리운 여인의 반지를 손에 들고 만지작거리니 반지 안쪽에 여신의 모습이 나타난다. 성왕의 입이 귀에 걸렸다.
“오! 여신. 보고 싶었소.”
“후왕, 오늘 저를 부르셨습니까?”
“아니 부른 적은 없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나타나셨군요. 허허허.”
“후왕께서 어려울 때 반지를 계속 세 번 비비면 저의 모습이 반지 안쪽에 나타나게 됩니다. 그러면 제가 뭐든지 도와드릴 수 있어요.”
“처음부터 진작 나에게 일러주셨으면 이렇게 고민할 필요도 없었을 텐데요.”
“후왕, 만일 다른 사람에게 이 비밀을 말하시면 다시는 저를 보실 수 없습니다. 그래서 알려드리지 않았던 것입니다.”
여신의 말에 성왕이 크게 고개를 끄덕인다. “아, 그러셨군요. 그런데 여신.”
“네, 후왕.”
“우리 백제는 선왕의 유지를 받들어 한강유역을 반드시 차지하여야 합니다. 백제중흥의 기치를 높이 들어야 해요.”
“그래서요?”
“하지만 지금 당장은 내게 그런 마음이 전혀 들지 않고 신하들과 대비께서 닦달하니 정말 걱정입니다.”
“후왕, 내키시는 대로 하십시오. 이 마법의 반지가 후왕을 보호해드릴 것입니다.”
“아니 조정의 여론처럼 신라와 함께 힘을 합쳐 고구려를 쳐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건 후왕께서 넓게 생각하셔야 할 일입니다. 묵묵히 참고 때를 기다리시죠. 저는 이만”
여신은 반지 속으로 다시 사라진다. 반지만 영롱한 빛을 내면서 아쉬운 후왕의 손에 쥐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