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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오가 되면 한창 물기가 오른 화초 같이 싱싱하게 피어난 처녀들이 밖에 나와 봉선화물을 곱게 들인 손에 손을 맞잡고 함께 들에 나간다. 여기저기 둘러보며 꽃 같이 고운 시선을 뿌리던 그녀들은 마침내 진분홍 복숭아꽃 뺨에 부드러운 미소를 띠우며 영롱한 이슬을 곱게 머금고 수풀 속에 고이 숨겨진 창포를 용케도 잘 찾아낸다. 그것을 따다가 집에 돌아와 가마솥에 삶아서 우려낸 검푸른 물에 윤기 나는 검은 머리를 시원하게 감고 깨끗하게 목욕도 하였다. 저녁을 가볍게 마친 후 예쁘게 단장을 하고 치마를 펄럭이면서 앞을 다투어 대문 밖을 나섰다.
동구 밖 버드나무에 매달린 그네 줄을 동시에 잡은 여인들은 조금 실랑이를 하다가 가위 바위 보를 내어 이긴 사람이 먼저 그네를 타고 진 사람은 그네를 뒤에서 밀어 올려주기로 하였다. 막 터질 듯 맺힌 봉숭아 꽃봉오리와 같고 가득 차오르는 달덩이 같이 훤칠한 여인들이 그네에 매달린다. 하늘 위에 둥근 달이 뜨고 꽃 그네 위에도 훤칠한 달이 덩실 돋았다.
드디어 그네를 탄 여인들이 하늘 높이 날아오르면 시원한 하늬바람이 옥색 치마와 진분홍 저고리를 가득 부풀어 오르게 하고, 저 먼 하늘을 향한 가슴도 한껏 들뜨게 한다.
한 처녀가 웃으면서 다른 처녀를 보고 말했다. “달솔댁 자제분이 너를 사모하느라 앓아누웠다고 그러더라.” 그러자 “와아~아! 아~아~! 호호호! 호호호!” 버드나무 주위에 여인들의 웃음이 활짝 피었다. 더불어 그네가 움직일 때마다 댕기머리 끝에 매단 방울이 명랑하게 울린다. 풀숲에 숨어 여인들이 그네 뛰는 것을 지켜보던 사연이 혼잣말을 했다. “우리 집 복실이 목에서 나는 귀여운 방울소리보다 더 듣기가 좋군.”
사연의 눈엔 은은한 달빛에 그림자 져 더욱 검푸르게 우거진 녹음이 그림처럼 눈앞에 들어온다. 그 사이 이제 막 피어난 자귀나무 꽃이 고운 색실 같이 아래로 늘어진 꽃술을 바람에 한들거리며 그네 뛰는 처녀들처럼 진분홍 저고리를 펄럭이고 있었다.
아까 사모의 대상으로 지목되어 다른 처녀들의 부러움과 자신의 부끄러움이 동시에 된 보연. 야산에서 시원하게 불어오는 산들바람을 부드럽게 받아 곱게 빗은 검은 색 머리카락을 시원하게 날리면서 하늘 끝까지라도 뛰어 오를 듯 몸을 높이 띄운다.
그러자 보연의 희디 흰 팽팽한 허벅다리가 사연의 눈앞에 훤히 드러났다. 순간 사연은 갑자기 눈앞이 아득해지고 숨이 컥 하고 막혀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숙여 외면했다. 간신히 다시 얼굴을 들어 올려다보니 아쉽게도 하늘에서 아래로 내려오던 선녀는 어느 순간에 보이지 않고 낭랑한 방울소리와 함께 보랏빛 댕기만 하늘로 솟구쳐 조금 보일 뿐이다. 보연의 모습은 다시 아래로 까마득히 사라져버려 그녀의 모습을 따라 사내의 마음도 같이 한없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다시 볼 수 있다는 희망을 불태우며 그는 기대가 가득 담긴 눈빛을 담은 얼굴을 치켜들었다. 이렇게 오르락내리락 하는 꽃 그네를 애간장을 태우며 훔쳐보고 있노라면 사내의 가슴도 온통 두근거려 곤두박질을 쳤다.
‘아아~아!’ 쏟아지는 졸음과 같이 몽롱한 황홀감에 자꾸만 눈이 감겨 잠시도 눈을 뗄 수 없는 아까운 모습을 하마터면 놓칠 뻔하였다. 점점 그의 얼굴은 오매불망 연모하는 그녀 저고리의 빛깔을 닮은 진분홍으로 저물어가는 태양 아래 붉게 물들어갔다.
조금 있으려니 비가 쏟아지려는지 제비 한 쌍이 낭랑한 목소리로 지저골지저골 쫑알대면서 땅바닥을 스치며 낮게 날기 시작했다. 남쪽 하늘에서 뭉게구름이 몽실몽실 몰려오더니 갑자기 하늘이 어두워지고 비가 억수같이 쏟아진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맑게 갠 날에 하늘을 날아갈 것처럼 즐겁기만 하던 처녀들은 너무나 놀라 비명소리와 함께 모두 흩어져 집으로 뛰었다. 집이 가장 먼 보연만이 버드나무 아래에 쭈그리고 앉아 나뭇잎에서 우수수 떨어지는 비를 처량하게 맞고 있다. 비에 젖어 몸에 달라붙은 옷에 요염한 몸매가 그대로 드러난다.
비는 좀처럼 그칠 기색을 보이지 아니하였다. 사연이 마지못해 나무 아래로 다가가 보연 앞에 비를 맞고 섰다. “뉘신지요?” 보연이 소스라치게 놀라 기어드는 목소리로 물었다. “잠시 나도 여기서 비를 피할 수 없겠소?” 보연이 대답 대신 고개를 돌린다. 나무 밑의 여인 곁으로 다가선 사연은 저고리를 벗어 보연에게 씌워주었다. 무언지 모르는 알싸한 냄새가 보연의 코를 어지럽게 한다.
사연의 두건 아래로는 비가 흘러내려 끊임없이 적삼을 적시고 있다. 비가 바람에 휘날리며 더욱 퍼붓자 사연은 비를 피해 자기도 모르게 보연쪽으로 밀려난다. 가까이 다가서는 그를 피해 보연도 등을 돌리니 두 사람은 엉덩이를 맞대고 엉거주춤하니 서 있게 되었다. 미끈하고 부드러운 감촉이 전율처럼 사연의 몸으로 전해져 왔다. 몸에 엄습하는 한기와 더불어 알지 못하는 짜릿함으로 사시나무 떨리듯 다리가 후들거린다.
얼마 후 비가 그치고 날이 개어 자신의 서재에 돌아온 사연이 책을 펼치니 평소 책이 뚫어지라 보았던 글자는 하나도 안 보이고 그녀의 그네 뛰는 모습만 눈앞에 아른거린다. 휘갈겨 쓴 초서의 글씨가 마치 보연의 그네 뛰는 모양으로만 연상이 되었다. 그는 앞으로 그녀를 보지 못하면 이 고상한 학문도 필요 없고 살아갈 희망조차 사라져버리는 것 같았다.
비를 많이 맞아 심한 감기가 걸려 밤새 열에 들뜨고 비몽사몽이 된 상태로 다음 날 아침 깨어난 사연은 몸을 움직이기도 어렵게 아팠다. 그래도 사연은 간신히 몸을 추스르고 그 버드나무 아래로 다시 다가섰다. 맑고 시원한 산들바람에 살며시 스치는 버드나무 가지가 우아하게 팔을 흔들며 내는 잎사귀 소리가 사연의 얼굴을 부드럽게 쓰다듬는다. 그 소리는 이미 숨이 막힐 듯 고운 자태가 눈에 박혀버린 한 사내에겐 사랑하는 여인의 가냘픈 숨소리로 들려오며, 미쳐버리도록 그리운 목소리로 끊임없이 어른거리고 메아리치는 것이다.
큰길 옆에 있는 논길을 걸어 언덕으로 오르는 곳에 웅진성으로 가는 길이 길게 이어져 있었다. 오르막길을 따라 한참을 걸으니 왼편에 누각이 나타났다. 계속 언덕을 오르고 넘어 다시 또 올라가니 고관대작들이 많이 사는 마을답게 저만치에 거대한 기와집들이 위엄을 갖춘 채 즐비하게 서 있다. 수려한 초록도포를 살짝 주름 잡혀 멋지게 몸에 두르고 윤기 있는 유건을 조금 눌러 쓴 사연의 두 눈은 일찌감치 딴 데를 바라보고 있었다. 매일매일 여기에 나와 길가를 지켜보며 보연을 기다려 온 것이다. 저만치에 마침 젊고 아리따운 여인이 삿갓을 쓰고 걸어가고 있었다. 바로 미치도록 그리운 그녀인 것이다.
사연은 보연의 손을 이끌어 저만치 산기슭에 있는 자귀나무 아래로 데려갔다. 마침 진분홍 꽃잎이 가지마다 막 귀엽게 피어나고 있었다. 옆에 있는 그녀에게서 몽실몽실 묻어나오는 강렬한 육향에 파묻히고 싶은 욕망이 자꾸만 고개를 쳐들어 머릿속이 새하얀 해진다. 허나 그녀를 안아서는 절대로 아니 된다. 그러면 그녀에게서 빠져나올 수 없고 영원히 그 사랑을 차지하고자 스스로 그녀의 곁에 뿌리를 내리고 매이게 되어 결국 입신출세를 하지 못하게 될 것 같다. 게다가 드넓은 대지를 어느 곳에나 굽이치는 물처럼, 바람에 이리저리 떠도는 구름처럼, 아무 때나 하늘을 날며 즐겁게 노래하는 새들처럼 무엇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로운 삶은 더 이상 바라볼 수 없게 된다. 그러나 세상 인간사가 어디 사람 마음먹은 대로만 흘러갈 것인가.
하루를 못 보게 되면 미쳐 병이 나버려 온통 헛것이 보이고 들리다가 이틀을 보지 못하면 그리움에 몸부림치다가 속절없이 죽어가는 것이 바로 사랑의 마법이다. 그들은 서로를 향한 뜨거운 사랑을 그칠 수 없기에 사람들 몰래 달도 뜨지 않는 캄캄한 밤에 비어진 서낭당이나 물방앗간에서 만나 멀어질 수 없는 서로의 몸과 마음을 또다시 확인하는 것이다.
그러한 일이 있은 후 두 달이 되어 보연은 태자비로 간택되어 궁에 들어가게 되었다. 사연은 하늘이 무너지는 듯 땅이 꺼지는 듯 앞이 캄캄하기만 하였다. 아들이 식음도 전폐하고 한없이 절망하고 있자 부친 달솔 사현이 아들을 조용히 불렀다. “소자 사연 아버님을 뵈옵니다.”
“요즈음 네가 상심이 많아 식사도 못하고 있어 나도 괴롭구나.”
“......”
“나도 알고 있다. 우리 가문의 보연이를 못 잊어 그렇다는 것을.”
“흑흑! 예.”
“태자비로 갔으니 완전히 잊고 아예 궁에는 얼씬도 하지 마라.”
“아버님. 소자 소원이 하나 있습니다.”
“뭐든지 말해보아라.”
“벼슬을 하여 보연을 먼발치에서라도 보고 싶습니다.”
“음. 정말 잊지 못하겠다는 것이냐?”
“예. 하여 이제 마음을 잡고 학문을 열심히 하겠습니다.”
“그건 정말 좋은 일. 내 적극 도와주마. 네가 왕궁에서 임금을 모시고 높은 벼슬을 하는 것이 나의 소원이야.”
사연이 태자비로 간택된 보연을 못 잊어 몸부림치고 있을 때 웅진성 왕궁의 정전에선 무령왕이 신하들을 모여 놓고 국방에 관한 일을 상의하고 있었다. 그가 신하들을 찬찬히 둘러보며 입을 열었다. “전번에 고구려가 국경지역에서 소란을 피웠다 하니 이런 중요한 때에 귀족의 자제와 왕실의 종친들이 무과로 들어가 정예병으로서 나라를 지키는 일을 맡는 것이 더욱 바람직하지 않겠는가.”
그 말에 병관좌평이 공손히 아뢴다. “너무나 지당하신 말씀이옵니다. 우리나라는 그동안 끊임없이 외적(敵)의 침략을 받아왔으므로 대왕의 말씀처럼 지도층들이 솔선수범하여 국방(國防)을 튼튼히 해야 하옵니다.” 이에 내두좌평이 강력히 반발한다. “병관좌평은 대왕의 성덕으로 인해 이룩된 지금의 태평세월에 백성들의 피땀이 어린 귀중한 나랏돈을 낭비하는 어리석은 일을 아뢰고 있사옵니다.”
내두좌평의 말에 대왕이 정색을 하며 병관좌평을 감싼다. “그 무슨 가당치 않은 말인가. 병관좌평이 설마 병사들로부터 뇌물이라도 받아먹었다는 것인가. 확실히 잘못된 일이 아니라면 말을 삼가시오.”
대왕의 말에 내두좌평이 지지 않고 큰 소리로 말했다. “대왕. 그런 뜻이 아니옵니다. 군사가 늘어나면 거기에 쓰이는 비용이 산더미처럼 불어나서 나라의 살림이 팍팍해진다는 말이옵니다.”
“허면 내두좌평에게는 무슨 좋은 생각이라도 있소?”
“몸으로 직접 뛰는 군역이야 상것들이 짊어지고 변방에 가서 수자리를 하거나 바닷가에서 수군으로 종사해야 하지 않겠사옵니까.”
“경의 말대로라면 군역은 약한 백성들만이 부담해야 하니 옳지 않소. 그렇다고 억지로 귀족의 자식들을 정예병으로 끌어올 수도 없고 그냥 두자니 형평상 올바르지 않으니 참으로 난감하오.”
“전하, 잘 찾아보시면 돈 좀 있는 상것들도 적지 않사옵니다. 그들로 하여금 돈을 내게 하여 사람을 사서 병사를 기르는 일이 상책이라고 생각하옵니다.”
“모병제를 실시한다? 그 말도 일리가 있소. 헌데 더 좋은 방법이 없을까.”
한참을 생각하던 대왕이 갑자기 무릎을 친다. “옳지. 좋은 수가 있구나. 유능한 귀족들이 그들만 군역을 면제받지 않고 나라를 위하여 군대에 올 수 있는 방법이 있소.”
그 말에 내두좌평이 걱정스런 눈빛으로 입을 연다. “아니, 열심히 학문을 닦는 귀족들에게 군역을 지우면 이 나라 백제의 미래가 어찌되겠나이까. 대왕?”
“우리 백제는 학문을 널리 장려하고자 처음부터 박사들의 강의생들에 대해서는 군역을 면제해 주었던 것이오.”
“그건 선대왕들께서 참으로 잘 하신 일이옵니다.”
“헌데 교활하게도 귀족의 자식들이 이러한 점을 이용하고 있소. 학문을 한답시고 허울 좋게 강의생으로 등록하여 군역을 회피하고 실제로는 발을 들여놓지 않은 자들이 허다하오. 경들도 진짜 학문을 하고 있는, 할 자격이 있는 사람만 학문에 임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소. 어떻소?” 무령왕이 진지한 눈빛으로 신하들을 둘러보자 모두들 서로 눈치만 보고 아무 말이 없다. 그러자 잠시 숨을 돌린 후 대왕이 말을 잇는다. “모두들 이의가 없으니 내 뜻을 말하겠소. 낙강자(落講者)를 충군하는 정책을 즉시 시행하시오. 하여 강의를 신청한 후 강의에 불참한 자를 모두 엄정하게 조사하고 시험문제를 내서 성적이 형편없는 사람들도 골라내야 하오.”
“잘 알겠사옵니다. 대왕.”
나라에서 귀족의 자식들에 대한 충군정책이 일제히 시행되자 이들도 가만히 있지만은 않았다. 귀족들은 가끔씩 시회를 열고 서로 얼굴을 마주칠 때마다 투덜거린다. 사연의 부친 달솔 사현이 짜증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뭐, 세상만사가 다 그렇지. 세상은 약육강식이 아니오. 헌데 빵빵한 우리가 왜 괴롭게 군역을 짊어져야 하는가.”
그 말에 같은 사씨가문 출신인 은솔이 맞장구를 친다. “그러게 말이오. 우리가 태평한 세상에 임금을 잘못 만나 괜히 애꿎게 생고생을 하는군 그려. 그렇지 않아도 지금은 연씨네 세상인데 수자리 열심히 한다고 무슨 소용이 있겠소.”
달솔 사현이 은근한 눈빛으로 은솔을 바라본다. “무슨 좋은 방도가 없겠는가. 우리 아이는 웅진향교에 이름만 걸어두고 강의에 참석한 적이 없이 사방으로 싸돌아다니기만 하는데, 이러다 쥐도 새도 모르게 수자리에 잡혀가는 것이 아닌가 모르겠소.”
은솔이 잠시 생각하더니 무릎을 치면서 말했다. “탁! 잠시 자제분을 절에 보내 중처럼 보이게 하면 될 것이오. 아니면 계속 박사들의 강의에 접수하게 하여 뭔가 공부를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든지.”
그 말에 얼굴에 함박웃음을 지으며 기뻐하는 사현. “그것 참 좋은 생각이오. 덕분에 큰 시름을 덜었소이다. 고맙소. 정말, 고맙소.”
한편 보연이 웅진의 궁궐로 떠난 후 인생이 허무해진 사연. 더욱 그리워지는 보연을 기필코 다시 만나고자 별로 흥미도 없는 경학을 억지로 붙잡고 있다가 팽개치고 저절로 도학에 깊이 빠져들었다. 불교와 도교에 심취하여 현실과 동떨어진 세상을 꿈꾸며 부모가 오매불망 고대하는 경학을 통해 입신출세를 하려고 하지를 않는다. 애간장이 타는 부친은 군역이 강화되고 있는 시국을 기회로 아들이 경학에 관심을 쏟도록 유도하고 싶었다. 그러던 어느 날 여전히 몽상에 빠져있는 아들을 사랑채로 조용히 불렀다.
“사연. 아버님 뵈옵니다.” “어서 오너라. 거기 자리에 앉아라.”
“예. 아버님. 그런데 무슨 일이옵니까?”
“연아, 이제는 혼자 상상하는 것을 그만두고 얼른 웅진의 향교에 입학하여 박사의 강의를 받아라.”
“아버님. 갑자기 무슨 말씀을?”
“요새 나라에서 놀고먹는 귀족의 아이들을 모두 군대에 잡아간단다. 군대에 끌려가면 학문을 할 시간이 없고 머리가 녹슬어 좋은 시절 다 보내게 되느니.”
그러자 사연이 두려움에 잠긴 얼굴로 묻는다. “그러하옵니까? 소자, 아버님 말씀대로 따르겠습니다. 허나 요새 남들도 군대에 끌려가지 않으려고 아우성을 치는 때라 벌써 교동에 있는 웅진향교의 입학정원이 초과되었사옵니다.”
그 말에 사연의 부친이 한숨을 내쉬면서 입을 연다. “벌써 그렇게 되었느냐? 하는 수 없지. 네가 어디든 박사의 강의를 듣고 있으면 저들이 수자리(군대)에 끌어가지 못할 것이야. 그러니 전국 각지에 있는 향교를 모두 찾아보도록 해라.” 그러자 사연이 억울한 표정으로 말했다. “사방으로 알아보니 때마침 어이없게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더구나 재수 없게도 사군부에 저의 신원이 파악되어 부득이하게 수자리에 가기로 정해졌사옵니다.”
그 말에 부친이 자상한 눈빛을 보내며 입을 열었다. “안 되겠다. 너의 외가댁에 사군부에 벼슬을 하고 계신 대감을 통하여 너를 몰래 빼내 줄 터이니 산속에 파묻혀 학문에 몰두하여 반드시 출중한 실력을 닦아놓아라. 그것만이 네가 사랑하는 여인에 접근할 수 있는 지름길이다.” 보연의 이야기가 나오자 사연이 감격하여 눈물을 흘린다. “아버님, 감사하옵니다. 소자, 동학사에 들어가 두문불출하고 주야로 책을 읽어 반드시 학문을 이루겠습니다.”
드디어 “병관좌평은 군사들을 사방에 풀어 군역을 기피하고 도망한 자들을 잡아들여 군역에 종사하게 하라.”고 하는 무령왕의 추상같은 명령이 사군부에 내렸다. 며칠 후 병관좌평과 군사들이 여승이 많은 동학사에 당도했다. 절 안에서 비구니들의 해맑은 웃음소리가 들려온다. 간간이 낭랑한 젊은 남자의 명랑한 목소리도 섞여 들린다. 부장 하나가 좌평에게 나직이 묻는다. “이 절은 본래 여승들만 거처하고 있는 곳이니 그냥 지나치리까?”
그러자 좌평이 굵은 목소리로 입을 연다. “저기 남자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가. 절에 거처하는 처사인가.”
“그럴지도 모릅니다.”
“음. 아니 혹시 모르니 잠시 들렀다 가자. 요즘 군역을 기피하는 무리들이 절에 숨어 지낸다고 한다.”
“예.”
절 앞에 다가선 병관좌평이 큰소리로 말했다. “개미 새끼 한 마리도 놓치지 않게 절 안팎을 샅샅이 수색하라.” 병관좌평이 뒤에서 지켜보는 동안 군사들이 나아가 거칠게 절의 일주문을 두드렸다. “쾅! 쾅! 쾅! 어서 문을 여시오. 사군부에서 나왔소.”
마지못해 문을 연 여승 하나가 밖을 빼꼼이 내다보며 말을 하였다. “여기는 여승들만 있사옵니다.” 그러자 병사들이 달려들어 문을 확 열어젖히자 문 앞에 있던 여승들이 모두 겁에 질려 말똥말똥 바라보고만 있다. 절 안을 둘러보던 좌평의 눈에 등을 돌린 채 청소를 하고 있는 스님 하나가 들어왔다. “저기, 뒤를 돌아보지 않고 마루만 닦고 있는 여승을 불러오게. 조금 수상하구나.”
그러자 가까이에 서 있던 여승이 마음을 졸이며 입을 열었다. “본사에서 잠시 들린 비구니이옵니다.”
감싸려드는 여승에게 좌평이 눈살을 찌푸리며 손짓한다. “어서 가까이 와 보라 하게.”
여승이 달려가 등 돌린 여승에게 귓속말을 하고 돌아오자 청소를 하던 여승이 고개를 돌리고 천천히 다가오다 두려운 눈초리를 하고 멈춰 선다. 그것을 본 좌평이 기가 막힌다는 표정이 담긴 얼굴을 돌려 심부름 보낸 여승을 똑바로 노려보았다. “허, 웬 여승이 수염이 덥수룩한고. 바른 대로 말하지 않으면 스님도 사군부에 끌려갈 것이오.” 그러자 더욱 겁에 지린 여승. “소승도 확실히는 모르옵니다.” 그러자 좌평이 수상한 스님 쪽으로 고개를 돌려 손을 까닥거리며 부른다. “거기 있는 스님 잠시 이리 와 보게나.”
그러자 그 스님이 그 말을 못 들은 건지 갑자기 부리나케 멀리 뛰어간다. “저 자를 빨리 잡아오너라.” 잠시 후에 사연이 양팔을 군사들에게 잡혀 끌려온다.
양 옆의 군사들이 사연을 째려보면서 회심의 미소와 함께 입을 열었다. “대담하게도 승적도 없이 대낮에 버젓이 절에 숨어 있으면서 군역을 피하는 맹랑한 놈일세.”
“마침 잘 됐소. 그러지 않아도 군역을 짊어질 자들이 부족해서 여기저기 잡으러 다니던 중인데. 예이 이놈, 너 잘 만났다. 사군부에 같이 가자.”하면서 육모방망이를 꺼내어 들었다. 그러자 기겁한 사연이 손사래를 치며 소리쳤다. “아, 아닙니다. 저는 분명 스님입니다.”
“잔말 말고 좌평 어른께 가자고.”
“안 돼요!”하고 사연이 팔을 거세게 뿌리치려 한다.
“이놈이!”
군사들이 사연을 힘껏 쥐어박으며 걸음을 재촉해 좌평 앞에 대령한다.
병관좌평이 자신의 앞에 잡혀 온 사연을 힐끗 노려보며 입을 연다. “자네가 진짜 스님인지 아닌지 시험해 보아도 괜찮겠나?”
“예. 얼마든지.”
“스님이라면 불경을 잘 알고 있겠구나. 본관도 옛날에 수도 입산한 적이 있어 불경을 조금 알고 있다. 무엇이 좋을까. 그렇지. 가장 기본적인 반야심경을 외워 보아라.”
얼굴이 하얗게 질린 사연이 더듬거리면서 반야심경을 외운다. “반야바라밀다...사바하...사바하.”
“중간은 왜 빼먹는가. 얼른 더 외우지 못하겠는가.”
“나무아미타불. 소승은 출가한지 얼마 안 되어서 아직 완전히 모르옵니다.”
“그래도 그 어려운 사서삼경은 줄줄 외겠지. 여봐라. 이 자를 잡아내어 사군부로 데려가라.”
사연은 하늘이 노래져서 중얼거린다. “아이고 신세 조졌다. 본래 신약한 팔자에 올해 관재수가 있다더니 운수가 사납구나. 남들은 용하게 잘도 숨어 다니는데 이게 무슨 꼴이람.”
곁에 있는 스물쯤으로 뵈는 비구니가 목소리에 물기를 담아 애교를 떨며 병관좌평의 팔에 매달린다. “좌평어른, 저 불쌍한 젊은이 이번 한 번만 봐 주세요. 네~에?”
“내 마음대로 할 수 없소. 나라에는 법이 있소이다.”
조금 있으려니 나이 들어 중년이 다 된 주지스님이 밖에서 들어왔다. 분노가 치밀어 위로 쭉 째진 그녀의 두 눈은 당장에라도 군사들을 집어삼킬 듯 사납다. 병관좌평은 주지비구니를 감히 쳐다보지 못하고 눈을 내리깔고 곁에 웅크리고 서 있는 군사들에게 시선을 던졌다. 그러자 주지가 성난 목소리로 좌평에게 말했다. “부처님을 섬기는 청정한 도량에 소승의 허락도 없이 난입하여 이 무슨 행패를 부리십니까?”
“주지. 이 자를 보시오. 아무리 여승들만 기거하는 사찰이라도 이렇게 군역을 피하는 죄인을 숨겨 준 사실은 용서받을 수 없소.”
“소승은 이 사람을 여기에 숨겨준 일이 없습니다.”
“분명 주지께서 이자가 이 절의 스님이 아니라고 하신 거죠?”
“다른 절에서 왔나봅니다.”
“다른 절 어디? 만약 우리를 속이면 주지스님도 승적을 박탈당하고 감옥에 가야 할 것이오.”
“......”
“얘들아, 가자.”
“예. 좌평어른.”
군역을 피해 산으로 도망할 때는 나는 듯이 발걸음이 가벼웠으나 지금 붙잡혀 끌려가는 사연의 발걸음은 천근만근 한없이 무겁기만 하다.
웅진성 왕궁. 정전에 있는 무령왕 앞에 한 신하가 다가와 고개를 숙이며 아뢴다. “대왕, 전국 각지에서 귀족들의 반항과 저항이 심하옵니다. 특히 귀족이 많은 경내에서는 모병관으로 파견된 관리와 귀족들 사이에서 갈등이 더욱 깊어지고 있사옵니다.”
“요사이에 무슨 특별한 일이 생겼는가?”
“얼마 전에 박사들이 관례상 출제하는 예상범위 외에서 문제를 출제함으로써 전체 수강생 중 무려 4분의 1에 해당하는 자들이 낙강하였사옵니다. 하여 경내의 수강생들은 집단적으로 저항하는 태도를 보이고 있는가 하면 모병관 개인의 비리와 불법사례를 드러내어 압력을 가하고 있사옵니다.”
“그래, 모병관이 어떤 문제가 있기에 탄핵하겠다고 그렇게 야단들인가.”
“그것은 아뢰옵기 황공하오나 주변사람들의 뇌물수뢰 혐의나 개인적 비리가 있다 하옵니다.” “옛말에 털어서 먼지가 안 나는 사람이 없다고 하였는데, 무슨 커다란 부정축재라도 하였단 말인가. 어서 말해보아라.” “그 관리가 창칼과 활을 수리한다는 구실로 옻을 독촉하거나 군비확충을 위해 어전(漁箭, 물고기 잡는 도구)을 몰수하는 과정에서 불법을 저질렀다고 하옵니다.” “무엇이라고. 그러면 당장 문제가 된 모병관을 해임시키고 충군을 다시 원점으로 되돌려 공정하게 운영하도록 하라.”
대왕이 심각한 얼굴로 혀를 차며 입을 연다. “과인은 일방적인 강의생 충군정책이 그렇게 많은 반발과 부작용을 가져올 줄 몰랐소.” 그가 잠시 깊은 생각에 잠기더니 말을 잇는다. “그러면 이렇게 하면 어떠하겠소. 고강을 계속해 나가되 충군 대상이 된 자들에 대해서는 보상의 차원에서 관직에 진출할 수 있게 함으로써 불만을 줄여나가도록 합시다.”
“지당하신 말씀이옵니다. 그들을 일반 군사와 다르게 특별히 대우하여 충분히 사기를 북돋아주어야 할 것이옵니다. 하여 강의생들에게는 군사 본연의 방어임무 외의 천한 노역에는 절대로 동원하지 말고 말 타기와 활쏘기를 집중적으로 가르쳐 재능이 뛰어난 사람은 대왕을 모시는 위사에 특별 채용하는 것이 어떠하옵니까?” “좋은 방법이오. 그리 하도록 하시오.”
드디어 고된 훈련 끝에 귀족의 자제들을 훌륭한 군사로 키워낸 병관좌평에게 무령왕이 그 공을 치하한다. “좌평. 그동안 노고가 많았소.”
그 말에 머리를 조아리는 병관좌평. “이 모두 대왕의 지혜이옵니다.”
“허면 혹독한 군사훈련을 마친 자들을 내 앞에 데려오시오.”
“알겠사옵니다.” 잠시 후 좌평이 사연을 비롯한 귀족출신 병사들을 대동하고 정전에 들어온다. “모두들 대왕께 절을 올리게.”하는 좌평의 말에 일제히 엎드려 고개를 수그린다.
무령왕이 흐뭇한 표정으로 웃으며 입을 열었다. “고개를 들라. 그대들은 이제부터 자랑스러운 백제의 무장들이오. 그대들에게 벼슬을 내리겠소.” 그러자 병사들의 얼굴이 환하게 밝아진다. 고생 끝에 낙이 온다더니 향교의 박사 수강생에서 쫓겨나 군대에 잡혀 온 것이 엊그제와 같은데 이제는 일찌감치 장수의 길을 걷게 된 것. 병사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둘러보던 대왕이 말을 계속했다. “그러면 그대들에게 똑같이 장덕의 벼슬을 내리려 하는데 모두 이의가 없소?”
그러자 갑자기 한 병사가 앞으로 나와 절을 올리면서 입을 열었다. “소신 사연이라고 하옵니다. 대왕께 송구하오나 무장이 아닌 다른 일을 하여도 되겠사옵니까?” 그러자 옆에 있던 좌평이 얼굴이 새빨개져 사연을 꾸짖는다. “저, 저런 건방진. 대왕. 정말 송구하옵니다.”
“하하하! 괜찮소. 어서 말해보게.”
잠시 주저하던 사연이 무겁게 입을 열었다. “화공이 되고 싶사옵니다.”
“뭐, 화공? 그대는 어찌하여 출세가 빠른 무장을 마다하고 남들이 천하게 여기는 화공을 원하는가?”
“소신. 그림이 너무 좋사옵니다. 하오니 청을 들어주소서.”
“하하하! 별스런 젊은이로군. 알았다. 그대를 오늘부터 궁궐의 화공으로 임명하겠소.”
“성은이 망극합니다.” 사실 사연의 마음은 벼슬에 높이 오르는 곳에 있지 않았다. 무장이 되면 출세의 길은 활짝 열리게 되지만 변경을 떠돌거나 궁궐에서 근무하여도 자주 궁 밖을 나가기 때문이다. 하지만 화공을 하고 있으면 발전성은 별로 없어도 그리운 태자비 보연을 먼발치서나마 바라볼 수 있기 때문이다.
아직 깨어나지 못한 사연의 모습에 근심이 가득한 얼굴로 다그쳐 묻는 왕비. “병세가 좀 어떻습니까?”
“몸이 펄펄 끓고 있습니다. 열이 내려야 깨어날 것입니다.” 급히 불려온 어의가 차분한 목소리로 대답한다. 고통스러워하는 사연을 바라보며 안타깝게 눈물짓는 왕비 앞에 문밖의 시녀들이 조심조심 말씀을 올린다. “좌평께서 오셨습니다.”
“드시라 해라.”
“드시라 하십니다.”
“흠흠. 왕비마마. 그동안 안녕하셨습니까?”
“전혀 안녕하지 못했습니다.”
“마마. 소신도 그 소문 들었는데 대비께서 성질이 좀 괄괄해서요. 왕비께서 너그럽게 이해하여 주시죠.”
“도저히 이해할 수 없습니다. 저도 그렇지만 저를 위해 바른말을 하던 신하를 곤장을 치다니요? 당장 친정 사비성으로 돌아가고 싶군요.”
“소신도 마마의 심정을 충분히 알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이 젊은이를 높이 진급시키려고 합니다.”
“나라에 공을 세우지도 않았는데 무슨 진급을?”
“왕비마마에 충성을 다하는 것도 나라를 위한 일입니다. 그래서 장덕에서 은솔로 진급해주시라고 대비께 말씀드렸습니다.”
그 말에 왕비의 안색이 확 밝아진다. 하지만 마냥 기뻐하는 내색을 보이면 체면이 깎이고 만다. “그건 고마운 일이지만 저의 자존심도 많이 상했습니다.”
“왕비마마. 계속 화나 계시면 아름다우신 모습이 덜 보이게 됩니다.”
그 말에 성왕비가 뾰로통한 얼굴로 “내가 뭐 그렇게 아름다운가요? 대비께서도 나를 함부로 대하는데?”하자 좌평이 태연하게 웃으며 “왕비께선 너무나 눈부시게 아름다우십니다. 꽃이 시샘하다가 지쳐 금방 시들어 버릴 것이에요. 대비께서 시샘하신 것입니다.”한다.
“어머. 좌평!” 기뻐 어쩔 줄 몰라 손을 볼에 대면서 얼굴을 붉히는 성왕 비.
이때를 놓칠세라 좌평이 은근하게 바라보면서 부드러운 목소리로 입을 연다. “대비의 권세는 점차 시들어가고 왕비마마께서 높은 덕과 미모로 결국 이 나라를 휘어잡게 될 것입니다. 하오니 이번 일은 액땜하였다 생각하시고 넘어가 주세요.”
“호호호! 좌평의 얼굴을 봐서 아무 일도 없던 것으로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왕비마마. 방금 말씀드린 사연의 승진 건은 임금이 오시면 바로 대비께서 말씀하실 것입니다.” 좌평이 다짐하듯 사연의 승진을 언급하니 왕비가 기쁜 얼굴로 말했다. “임금께서 선왕의 제사준비로 바빠 지금 궁에 계시지는 않으나 곧 오실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