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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압)성추행범 빚쟁이 아버지, 완전체 집안, 20년 멘붕 인생 극복!!
게시물ID : menbung_58036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destafore
추천 : 15
조회수 : 3551회
댓글수 : 9개
등록시간 : 2018/03/30 23:3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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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걸 여기에 써도 될지 모르겠지만 전체적인 내용이 멘붕에 가까운 것 같아서 여기 씁니다.
스크롤을 줄여보려고 반말체. 20년치를 요약하려니 대하드라마 길이가 될 것 같음.

위키백과 각주처럼 괄호 치고 쓴 부분이 엄청 많으니까 그건 그냥 무시하고 넘어가셔도 내용엔 지장 없어요~

 
'미투'가 장안의 화제다. 대통령 후보를 했던 사람까지 성범죄자였던 게 나한테도 충격과 공포였다.
 
근데... 이 사건의 기사에조차 "멍청하게 오피스텔까지 왜 따라가느냐" 하는, 피해자를 비난하는 댓글이 달린다.
심지어는 피해자를 꽃뱀 취급하거나, 그 집단 내부에서 "네가 감히 우리 소중한 교수님/작가님을 곤란하게 해? 너 짤림ㅇㅇ" 같은 반응도 있는 것 같다.
 
피해자는 피해를 당한 것도 서럽고, 그자가 힘있는 자고 내가 약자인 것도 서러울 텐데.
이 나라에서는 약자를 도와주기는 커녕 사회 변두리에 방치하고, 끝까지 피해자를 비난하고 약한 게 죄인 것처럼 말한다.
 
1990년대 말, 내가 국가에게서 받은 인상도 지금과 비슷했다.
그나마 진보된 점은... 그 때는 정말로 야만의 시대여서 성폭행범과 피해자를 결혼시키는 일도 가끔 들을 수 있었고,
딸을 가진 엄마들조차 성추행범이나 성생활이 문란한 남편을 '능력있는 남자'라고 말했다.
성별 하나만 가지고 남자들에게는 언제나 혜택이 주어지고, 아무리 큰 잘못을 해도 "남자가 그럴 수도 있지"하며 면죄부를 받았다.
나의 큰언니, 이모뻘 되는 사람들은 단지 여자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모지리, 죄인으로 살아야 했다.
(근데 요새 돌아가는 꼴 보면 자칭 페미니스트란 자들이, 죄없는 자기 또래 남자애들을 비난하고 레알 유리천장과 여성차별의 주역인 기득권 남성들에게는 분노조절장애자 같이 입 다물고 있는 게 정말 꼴불견이다.)
아이들 인권도 바닥이었다. 옆집에서 애가 맞아 죽어가고 있어도 '집안일'이라며 아무도 신경쓰지 않았다. 애들은 원래 맞으면서 크는 것이라고 했다.
 
IMF, 경제공황, 그런 이유였다.
'스승'이라는 놈들이 학교폭력을 못 본 체하고, 애들은 찜통속에 놔두고 저들은 교무실에서 에어컨 쐬고, 부모들은 아이들을 집에 방치하고 돌볼 틈이 없었다.
"스승은 그림자도 밟지 않는다"는 미명 하에, 아이들이 인격모독과 폭언, 폭행을 당해도 부모들은 선생에게 항의하지 않았다.
 
뉴스를 봐도, 아동성범죄나 학대 같은 약자를 향한 범죄는 신고해봤자 가해자가 별 처벌도 안 받고 피해자만 인생을 망친다는 걸 속속들이 가르쳐줄 뿐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당시 10살이었던 나는 자연스레 내가 당한 성추행 피해를 그냥 묻고 지나가기로 결심했었다. 
 
이 글은 아버지에게 성추행당하고, 아버지가 재산 다 탕진하고... 답이 없던 그 20년 동안 내가 어떻게 꿋꿋하게 잘!!!!! 살아남았는지
어딘가 있을지 모를 제 2의 나에게 주고 싶어서 쓴다.
 




나는 막장 집안에 태어났다.
인터넷이나, "그것이 알고싶다"같은 데 나오는 사이코패스 집안이 바로 내 친가다.

내 손으로 적극적으로 벗어나지는 못해서 '탈출'이 아니라 '극복'이라고 썼다.
겨우 벗어났는데, '아버지'라는 단어만 들어도 열이 받고 성범죄라는 단어만 들어도
"그 새끼를 찾아가서 난장판을 만들어 놓을까? 아니야 나만 경찰에 체포될 수도 있다." 하는 억울한 생각이 들어서

가해자는 아무런 생각도 없이 잘 살고 있는데 나만 과거의 망령에 사로잡힌 것 같았다.
잠을 자면 그 새끼가 꿈에 나오고, 세상 남자들이 다 그런 x새끼로 보였다.

거기서 벗어나려고 무던히도 노력했다.
지금은 사실, 세상 사람들이 내 이야기를 아무런 편견 없이 들어주기만 한다면 덤덤하게 얘기할 수 있게 된 것 같다.



TV를 보면 어린 아이들이 학대나 성범죄를 당한 이야기만 나오고, 그 아이들이 10년 후, 20년 후 어떻게 잘 살고 있는지는 알려주지 않는다.
내가 친아버지에게 성추행을 당했을 때에도... 참고할 만한 게 없어서 최악의 상황밖에 가정할 수가 없었다.

부디 이 실화가 조금이나마 참고가 되기를...


내 개인정보는 최대한 드러나지 않게 두루뭉실하게 썼다.
 
 

사람들은 불행한 사람을 보면 그 사람이 원래 우울한 사람이고 평생 울기만 할 거라는 편견을 갖는 것 같다.
 
세월호 사건이 터져서 한창 장례식을 치를 때 누군가 온라인에서 이런 얘기를 한 적이 있다. "가족이 사고로 죽었는데 어떻게 장례식에서 웃을 수가 있냐".
 
내가 그 입장이 돼본 건 아니니까 딱 들어맞는 답은 아닐지 모르겠지만......
사람은 아무리 절망적인 일이 있어도 우스운 일이 생기면 웃고 농담도 할 수 있다. 겉으로 웃는 것처럼 보여도 그 속이 얼마나 찢어지고 있는지는 당사자만 안다.
남이 재단해서 "너는 불행하니까 이만큼 울어야 해"라고 말해서는 안 된다. 누구라도 그럴 권리는 없다.
한 면만 보고 남의 고통이나 도덕성을 가늠하면 안 된다. 세치 혀로 사람 죽이는 일이다.
 
사람이 어떻게 1년 365일 울기만 할까? 당장 내일 학교 가서 중간고사 봐야 하고, 직장 나가서 야근해야 한다.

내가 초딩 때 성추행 피해를 당한 후 했던 생활이 바로 그런 거였다. 내가 성범죄 피해 당했다고 하늘이 무너지거나 학교가 폐교하는 게 아니니까. 그냥 평상시처럼 살았다.
성추행같은 어마어마한 사건은 남에게 쉽게 밝힐 수가 없다. 그 사람도 세치 혀를 놀려서 나한테 2차 피해를 입힐 놈일지도 모르고, 소문이 날지도 모르니까.
크게 다쳐서 입원해야 할 지경이 아니라면, 경찰에 신고해서 다 까발릴 게 아니라면, 최대한 평소처럼 살면서 누군가 눈치채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는 수밖에 없다.

애비에게 성추행을 당하고도 나는 웃고, 떠들고, 뛰어 놀고... 좀 성질 독한 여자애이기는 했지만 그냥 다른 사람들이 웃을 만한 일에는 웃고, 잘 안 되는 일에는 고민하면서 살았다.
내 인생은 아직 80년은 더 남았는데 고작 열살 때부터 절망에 사로잡혀서 살아야 했나? 누군가 나에게 슬픔을 강요한다면 그렇게 반문하고 싶다.
그런 쓰레기로 인해 내가 공부에 집중을 못하고 인생을 제대로 못 살았다면... 문제가 해결되는 것도 아니고, 나만 피해를 볼 뿐이었다.
이 사회에서 빽도 없는 가난한 집 어린 여자애 따위야 자살을 해도 뉴스에나 한 줄 나오면 다행인 가증스런 사회였으니까.

애들한테 그런 환경밖에 제공하지 못한 주제에, 제 구실 못하고 어린 아이 하나도 못 지키는 검, 경찰 주제에 뻑하면 아동성폭행 재판에서 검사가 12살 짜리한테 "왜 아버지한테 반항을 안 했어? 즐긴 거 아냐?"라고 묻는 짐승만도 못한 일이 벌어진다는 게 정말 혐오스러웠다.



이 점에 대해서는 내가 정말 공감했던 웹툰을 추천한다. 만화는 내가 삐뚤어지지 않게 도와준 큰 벗이었다.
추천 만화도 목록 따로 써놓겠음!

좋아하면 울리는 139화 '독한 아이' (스포일러임. 첫 편부터 봐야 재밌음.)
http://webtoon.daum.net/webtoon/viewer/46084 
 
혹시라도 주변에 뭔가 엄청난 일을 당한 사람이 있어서 그 사람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모르겠다면... 나는 그냥 '자기 자신'이라고 생각하고 대하면 된다고 생각한다.
부모님이 갑자기 돌아가셨다든지, 15년을 기르던 강아지가 죽었다든지. 남친이 문어다리로 바람펴서 나한테 성병 옮기고 헤어졌다든지. 그런 일은 상상은 가능하니까.
내가 20여 년 동안 힘들었던 일들은 그 정도 고통의 일이었던 것 같다. 당할 때야 정신이 하나도 없고 죽을 거 같지만, 어라? 숨 쉬어지네. 사는 게 사는 게 아닌데 살아있네. 그러고 살다가 한 10년 지나서 "아 그거... 슬프긴 했지만 이제 괜찮음." 이럴 수 있는 일.



내가 10살 때, 나는 낙후된 지방에서 살았고, 외가는 가난했고, 친가는 많던 재산을 허세 부리느라 다 써서 없애버린 참이었다.
엄마의 생활력 덕분에 밥은 안 굶었지만, 어린 마음에도 보나마나 안 될 거란 생각이 들어서 차마 수영을 배우고 싶다든지 특목고에 가고 싶다는 얘기를 못 꺼낼 정도는 됐다.
포부는 크게 '서울대'라고 잡았지만, 고등학생이 되고 보니 고등학교 하나에서 서울대를 2명 가면 많이 갔다고 렛츠 파뤼타임!! 주모 셔터 내려!!!! 하는 동네였다.
인프라도 정보도 돈도 부족하기에 서울대 가려면 혼자 '알아서' 해야 했다. 내가 전교 1등을 하고 있는 것도 아니었다.
한마디로... 나 혼자 꿈만 크고 미래가 잘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결론적으로는 꽤 괜찮은 수준의 인서울 대학교에 갔다. 그리고 취직도 내가 바라던 조건으로 했다.
(난 정말 20대까지의 내 삶에 후회가 없다. 정말 열심히 살았고, 보상을 받았다. 어디 가서 자랑이라도 하고 싶다 ㅎㅎ)

나같은 상황에 있는 아이들이 그런 희망을 가진다고 해서 당장 삶에 변화가 생기지는 않는다. 여전히 불우하고 불행한 상황만 지속될 것이다.
그러나 세상이 아직은 그렇게까지 각박하지 않아서, 내가 희망을 가지고 열심히 공부하려고 노력하면 어른들이 안쓰러운 마음에, 기특한 마음에 도움을 주더라.

불우한 상황에서 애를 쓰다보면 나만 고생하는 것 같고, 내가 마음을 써봤자 호구취급만 당하는 것 같아서 한없이 가라앉는 기분일 때가 있을 것이다.
그렇게 옆 사람 노력 평가절하하는 저급한 사람들은 나이 먹을수록 마주칠 일이 없다. 그냥 걸러라.

대학교를 왔더니 그런 나쁜 놈들이 없어서 너무 좋았다.
대학교에도 진상은 있기야 하지만, 그래도 예상 가능한 수준의 또라이고 "저 새끼 나쁜 새끼네"하는 여론이 있었다.
웹툰 '복학왕'은 전문대의 진상들을 보여주고 '치즈인더트랩'은 명문대의 진상들을 보여준다고 하는데, 그 말이 딱 맞다.
이거 하나만으로도 공부한 보람이 있었다.
그리고 일단 괜찮은 대학교 타이틀을 얻으면, 편하게 과외 알바로 고수익을 얻을 수 있다.
편의점 야간 알바 정도를 해야 최저시급*1.5배인데, 과외는 주마다 두세시간 하고 수십만원 번다.
영어를 잘 하면 통/번역 꿀알바도 많다.
 
(나는 어학연수 한 번 안 가고 토익 성적 900점대 찍었다. 영어는 어려서부터 하면 굳이 돈 많이 안 들여도 배울 수 있는 방법이 무궁무진하게 많다.
영어 팁을 주자면, 듣기(말하기)-읽기-쓰기 순서로 익혀야 함. 나도 직접 해본 방법이고 언어 교육학에 따르면 그 방법이 효율적이라고 함.
스피킹은 한국에 사는 사람이 쓸 일이 별로 없으니 생략.

12살 전까지는 무의식적으로 영어 듣기를 많이 한다. 영어 동화나 회화 테이프 같은 걸 그냥 노래처럼 흘려들으면 됨.
영어학원에 어릴 때부터 가더라도 놀이에 접목된 곳이 좋음. 맛만 본다고 생각하면 됨.
음악을 관장하는 뇌와 언어를 관장하는 뇌가 같다고 하니, 음악을 꾸준히 배우는 것도 좋음.
 
그리고 학교나 학원에서 영어를 읽을 기회가 있을 때 최대한 원어민 발음 그대로 따라하려고 노력하기.
'틈메이러'라고 읽고 tomato라고 쓰는구나, 하고 외워야 함. 영어는 절대로 발음과 철자가 같지 않으므로 철자에 얽매이면 혼동이 온다.
한글과 달리 근본없는(...) 글자라 소리대로 쓰지 않는구나~ 여윽시 세종대왕 만세인 부분? 어 인정~. 하고 대충 넘어가야 편함.

특히 영어는 모음에 박자가 있고, 경상도 사투리처럼 억양 차이가 심하다. 꼬부랑 말이라는 별명처럼 단어마다 박자가 다름. 억양이 센 데만 들리고 다른 부분은 다 날아감.
DJ Koo가 "암거너메큐뭅"이라고 하듯이. 그 특유의 박자를 익히려고 노력해야 영어듣기가 편해짐.
내가 중딩 때 영어가 라틴 음악과 비슷하다며 특이한 음악이랑 같이 나오는 영어회화 테이프가 있었는데... 그런 걸 하면 더 편하게 익힐 수 있음. 중독성이 쩔어서 아직도 그 노래 몇 구절이 머릿속에 맴돈다 ㅋㅋㅋ 메-아-유? 똥동동 똥동동 똥동동 똥동동동~
 
중학생부터는 문법을 배울텐데, 영어 문법은 한국말과 다르게 각자 자기 위치가 고정돼 있어서 섞으면 안 된다.
가끔 예외적으로 문장의 어떤 부분을 강조하려고 문장 순서를 바꿀 때가 있는데, 그러면 그 강조 구문 규칙이 다 정해져 있음.
그러므로 문장 규칙을 외우기만 하면 된다. 문장구조는 시험에 나오는 건 전부 따져봐야 100가지 이내이므로 3년 동안 열심히 외우면 됨.

얘는 주어, 얘는 목적어라고 역할이 딱 고정돼 있으므로 레고블럭 끼우듯이 그 자리에 해당되는 단어를 집어넣기만 하면 된다.
응용하자면, 회사에서 미국사람한테 이메일 보낼 때 "Please find the attachment that..." 해놓고 that 블럭을 원하는 대로 2~3 개 추가해도 됨.
한국말은 저렇게 주어를 길게 꾸미면 서두가 너무 길어지지만 영어는 그래도 괜춘.)


서울에서 손가락에 꼽히는 대학교를 졸업한다면 웬만한 좋은 회사에서 원서는 다 받아준다.
근데 그 타이틀 하나 없다는 차이로 문턱을 아예 못 넘게 된다. 조선시대 양반, 서얼 차별하는 것 같이.
집안도 없는 놈이 대학교 타이틀이 없으면 레알 홍길동 급으로 뛰어난 인물이어야 겨우 기회가 주어진다.
나는 대학교를 졸업할 때쯤에야 차가운 현실을 맞닥뜨리고 깨달은 사실이다.
(학점도 망했는데 대학교 타이틀이라도 없으면 정말 큰일날 뻔...)
나보다 어린 아이들은 미리 이걸 꼭 알아서, 이용할 수 있는 사회 제도는 최대한 이용했으면 좋겠다. 

당장 눈 앞에 결과가 나오지 않고, 누가 날 지원해주는 상황이 아니더라도
공부하는 건 절대로 헛수고가 아니다.
공부머리가 안 된다면, 미용이나 조리사, 애견 관련 업종, 미장이, 타일공, 전기, 기계, 배관, 열쇠공, 정비, 중장비 같은 업종 공부하면 배는 안 곯는다.
성인이 되고 나면 누가 공부한다고 배려해주거나 시간을 빼주는 것도 아니고, 밥벌이도 하면서 해야 하므로 굉장히 힘들다. 고등학생 때까지 최대한 할 수 있는 건 해놓는 게 좋다.
 
 
 


이 글은 10살짜리 과거의 나에게 보내는 위로이기도 하다.
참 애썼다고. 열심히 했다고, 너 헛수고한 거 아니라고 셀프칭찬해주고 싶다.

어릴 때 나는 시궁창에 박혀서 살다보니 평범하고 정상적인 가정이 매스컴에서 보여주는 가식이 아닌가? 저런 부모가 진짜 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반대로 생각해서
내가 남들이 겪어보지 못한 끔찍한 아버지를 겪어보았듯이
그 반대의 천사같은 사람들도 분명히 세상에 있다.
바닥을 겪어봤으면 앞으로 겪을 것은 그것보다 더 나은 삶밖에 없다.
그걸 꼭 기억하고 이 글을 봐줬으면 좋겠다.



 
직접적으로 공감돼서 읽기 괴로운 내용은 최대한 안 넣었다.
 
#​완전체 #소시오패스 #막장 #콩가루집안 #빚쟁이 #사채 #친족성범죄 #인간쓰레기구별법
#성추행 #성교육 #데이트폭력 #가정폭력 #학교폭력 #왕따
#착한아이컴플렉스 #착한딸컴플렉스 #심리상담
#괴물과싸우는자는스스로도괴물이되지않게조심해야한다 #니체
 
 
 
서론
 

20여년 간 쓰레기 같은 집안에서 살면서 느꼈던 점은 이런 쓰레기들은 바로 내 주변에 있다는 거다.
그리고 수많은 사람들이, "그래도 가족인데 설마 날 해칠까?" 하고 착각하다가 인생을 말아먹는다는 거다.
또한 이런 쓰레기들은 가끔 잘해주기도 하기 때문에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정이 들거나, 자식이 생겨버려서 그걸 인질 삼아 사람을 속박해두기도 한다.

과거에 추억이 있든 사랑이 있었든, 이미 회복불가인 핵폐기물 인간을 가지고 재활용을 시도하지 마라. 강호순이 동물 애호가인 척 개랑 사진찍고 바로 잡아먹었듯이, 당신은 그냥 이용당하는 거다.

너를 칼로 찌르고 있는 살인마를 사랑하는 건 병신이다.
설령 살인마가 진심으로 당신을 사랑한다고 해서 당신과 당신 자식을 죽이도록 둘 건가?


답은 간단하다.
"이건 아닌데..." 같은 찜찜한 촉이 오는 순간이 있다.

그 순간에 "에이... 설마." 같은 인지부조화 일으키지 말고 반드시 도망쳐야 된다.
(모르면 이 단어 검색해봐라. 사람들이 배우자에게 가정폭력을 당하면서도 도망치지 못하는 큰 이유라고 한다.)

만약 당신 가족이, 애인이 하는 행동이 신경쓰인다면, 그 행동을 당신이 가장 사랑하는(또는 미래에 낳을) 자녀가 겪는다고 가정해봐라.
당신이 앞으로 겪을 그 고난과 고통이 그대로 대물림될 거라고 생각해봐라.
그것을 참을 수 없다면, 그 관계가 잘못됐다는 소리다.
 
사람 껍데기를 하고 있다고 해서 사람이라고 생각하면 안 된다.
설령 그 쓰레기가 나를 사랑하는 것처럼 보여도, 그건 그저 나를 '숙주'로 이용해먹기 위한 방법임을 명심해야 한다.
그건 사랑이 아니고 의존증, 기생이다.

503호와 오바마 모두 '사람'이지만, 정상인이 503호의 정신세계를 이해하기란 불가능하다.
제작년에 사건이 터졌을 때 사람들은 황당함을 감추지 못했지만, 나는 당황한 한 편으로 "저런 사람이 세상에 또 있구나......" 했다.

그런 사람은 아예 '사람'의 범주에서 빼서 생각해야 된다.


503을 겪어봤으니 그게 뭔지 다들 느낌은 알 거라고 생각한다.
"어떻게 사람이 저런 행동을 하지?" 할 만큼 기상천외한 행동을 하는 사람. 본인이 잘못해놓고도 뭐가 잘못인지 '전혀' 인지를 못하는 사람. 옆사람을 자신과 동등한 인간으로 전혀 생각하지 않는 사람.

 
 
 
 
완전체 가족 
한때 네이x판에 "완전체녀, 완전체남"라는 신조어가 나온 적이 있다.
겉으로 보기엔 외모, 사교성, 지적능력 모두 10 점 만점인 완벽한 여자가, 대화를 해보면 이상하게 핀트가 어긋나고 공감능력이 전혀 없다는 거다.
일종의 소시오패스 같은 건데, 나는 그 글을 보면서 내 친부와 친가친척을 보는 것 같아서 격하게 공감했던 기억이 난다.
(다른 점은, 내 친가 친척들은 사교성 0, 지능 0 이다.)

내 친부와 함께 그 형제들은 감정이 없는 로봇 같았다. 연료 채우듯이 밥을 먹고, ㅅㅅ하고, 전혀 다른 사람과 교감을 하지 않았다.
이 사람들은 이렇다 저렇다 할 인생계획도, 꿈도 없고, 논리도 없고, 사랑하는 사람도 없고, 이렇다-하게 좋아하는 음식도 없고, 애착이 있는 물건도 없었다. 하드디스크가 없는 컴퓨터 같았다.
이 치들은 아무런 미래계획도 없이 주먹구구식으로 사업을 한다며 돈을 빌리러 다니고 처가 가족들을 억지로 보증 서게 만들고, 임산부가 있는 집에 사채업자들이 들락날락하게 내비뒀다.
아마 자식이 사고로 식물인간이 돼도 "그래서 뭐 어쩌라고?"할 거다.
연민정이나 라헬은 이 인간들에 비하면 그래도 사람 축에 끼울 수 있다. 걔네는 그래도 욕망이란 게 있고, (지위나 명예에 대한) 사랑이라는 게 있으니까.
(=각각 '왔다 장보리', 웹툰 '신의 탑'. 신의 탑 재밌음ㅎ_ㅎ)

그 부모님도 가관이었다.
큰아버지가 7년 동안 불륜만 열댓번 저질러서 이혼할 때, 내 친할머니, 할아버지는 큰어머니에게 "남자가 살다보면 바람도 피울 수 있는 거 아니냐?" 했다. 큰아버지는 한술 더 떠서 다른 형제들에게 "내 자식들 대신 키워줄 수 있냐"는 개소리를 했다. (양육권을 당연히 자기가 얻으리라는 저 확신. 뭐죠?;;;)
아들들이 그 ㅈㄹ병을 떨고 다녀도 말리기는 커녕 빚 내고 보증서는 걸 부추겼으며, 사돈들한테 미안해한 적도 없고, 하다못해 며느리들한테 미역 한 줄기 끓여준 적도 없는 작자들이. 

이들은 거기다 보태서 인륜적인 데서까지 쓰레기짓을 서슴지 않았다.
신혼 첫날밤에 임신한 아내 앞에서 칼로 자해를 한다든지
군대 가기 전에 여자친구를 계획적으로 임신시킨다든지. 그것도, 몇달 뒤에 군대 갈 놈이 철모르는 스무살짜리를 사귄 거였고.
이혼한 지 이미 십수년 되어 새 가정 꾸린 전 며느리 집에 전화해서 "아범이 (늙고 돈 다 떨어져 스폰해주는 싸모님이 안 생겨) 외로워 하니 다시 합쳐라" 같은 헛소리를 한다든지.

어디 가서 칼 안 맞고 살아 돌아다니는 게 용하다.



 
비교체험 극과 극. 내 인생. 

나는 천사와 악마와 한 집에서 살았다.

한국사람이면 대부분은 엄마를 생각하면 마음이 아프다고 한다. 나는 우리 엄마를 생각하면 간장이 끊어지는 것 같다.
우리 엄마는 나에게 이순신 장군 같은 사람이다.

엄마는 언제나 나의 소울메이트이고, 나에 대한 전문가이자 연구자이다.
서너살 때에도 내가 "왜?"라고 물어보는 것에 대해 인내심 있게 대답을 다 해주셨기 때문에 엄마랑 노는 게 너무 재밌었던 기억이 난다.
엄마는 내가 어리다고 내 말을 무시하거나 제한을 두지 않아서 내가 원하는 만큼 실컷 말할 수 있었고, 일곱살 때까지 실컷 흙장난하고 뛰어 놀도록 두었다.
내가 글자를 모르는 불편함을 절실하게 느낄 때에서야 한글을 가르쳐주셨다.
나는 7년 동안 들에서 뛰어 놀다 지쳐서 "아 제발 학교 좀 가고싶다" 노래를 부르다가 입학을 했더니 학교에서 공부하는 게 너무 재밌었다.
엄마 덕에 나는 어릴 때부터 언어감각이 잘 성장했고, 공부에 큰 거부감 없이 살았다. 그것이 큰 자산이다.

만약 엄마가 평범한 집안에서 태어났다면.
만약 나를 임신하지 않았더라면.
지금쯤 최소한 존경받는 교장선생님쯤은 거뜬히 되었을 것이다. 엄마 같은 사람이야말로 교육 연구소 같은 데 들어가야 된다.


엄마는 평생동안 나를 어른과 같은 인격체로 존중해줬다.
엄마는 평생 내 약속을 어긴 적이 없다. 공부를 하라거나, 뭔가 하라고 한 번도 강요한 적이 없다. 나를 하대하거나 무시한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내가 시험 전날에 만화책을 쌓아놓고 밤새도록 봐도 놔두셨다. 내가 찔려서 엄마는 왜 내가 만화책 보는 거 안 싫어하냐고 물으니 "만화책도 책이다. 네가 무엇을 하든지 거기서 교훈을 얻는다면 그게 다 인생 경험이다."하셨다.
일기를 쓰기 싫다고 찡찡거리던 초1때 나에게도 "공부가 하기 싫어? 그렇다면 숙제도 하지 않아도 돼. 대신에 나중에 대학교에 갈 수 없고, 다른 길을 찾아야 해."라고 조곤조곤 말씀해주셨을 뿐이다.

생각해보면 내가 잘하는 것도 딱히 없어서 납득하고 공부를 했다. 성적이 떨어질 때면 순수히 나 자신에게 실망하고 가난을 벗어날 수 없을 것 같아서 우울해했다.
집안에 책이라고는 전집 하나뿐이었으므로 아까운 마음에 책을 대여섯번씩 정독했다. 학교 도서관에 가면 책이 많으니까 너무 반가워서 열심히 읽었다.

'넛지 효과'라는 신조어가 있었는데, 우리 엄마야말로 그 분야 마스터다. 내가 스스로의 의지로 선택해서 공부를 한다고 착각하면서 열심히 하게 만들었다.
30년 동안 내가 만났던 사람들 중에 엄마만큼 자식을 자발적으로 잘 공부시키는 사람은 기껏해야 내 친구 부모님이었던 의사 부부 한 쌍 정도밖에 못 봤다.
(의외로 부잣집에서는 시간이 없어 그런지 그런 아동 발달에 맞는 방법을 안 쓰고 너무 일찍부터 돈 들여서 때우려고 하더라.
내 생각에는 아이가 자발적으로 공부를 잘 하게 되려면 지능+대여섯살 때까지의 뇌발달+서너살 때 "왜?"하는 시기가 중요하다. 이 점에서는 미미하게나마 가난한 부모들에게도 희망이 있다.)

우리 엄마를 보고 있으면 내가 전생에 나라를 구했나 싶다.

그러나 아버지는 짐승새끼라고 부르기도 부족한 사람이다. 아무래도 내가 전생에 나라를 거의 팔아치우려다가 구했나 봐.-_-
그는 평생 단 한 번도 타인을 좋아한 적 없고, 자기 스스로까지 개농장에 팔려온 개처럼 방치하는 사람이었다.
엄마가 애걸복걸해야만 겨우 이발을 하고 양치질을 하고, 의치에서 썩은 냄새가 나는데 20년 동안 끝끝내 치료를 안 받았다. 지병이 있어도 절대로 병원에 안 갔다.

엄마가 뭐라고 한 마디를 안 하면 노숙자같이 후줄그레한 옷에 김칫국물을 다 묻히고 다녔다.
사업을 한다면서 사무실에 쓰레기를 다 쌓아놓고, 노다메 하숙집 같이 해놨었다.
심지어 사무실에 암막커튼을 치고 소파에서 TV만 봤다 ㅋㅋㅋㅋㅋㅋㅋㅋ 손님이 오라는 건지 꺼지라는 건지...

요새 '키친 나이트메어'를 봤는데... 와 진짜 미국에는 친부같은 새끼들 많더라.
내 친부의 행색이 잘 상상이 안 된다면, 딱 키친 나이트메어에 나오는 꼴통들 상상하면 된다.

 


'아버지'는 커녕 사람으로서의 자격도 없다.

제발 자식을 키우려면 자격증이라도 취득하게 시켰으몀 좋겠다. 이런 놈의 자식으로 태어나서 내가 겪은 삶을 생각하면, 안 태어나는 게 낫다.

한편으로 생각해보자면 그는 70-80년대 가부장제 문화에서 자라났고, 하필 몇 대 독자인 할아버지 밑에 줄줄이 아들이 태어나서, 오냐오냐하며 키워졌다.
'가부장제'라는 것에 영혼이 있다면, 자신의 위기를 느끼고 마지막 작품을 빚어낸 것이 그 개노답 형제가 아니었을까......
입만 열면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한다", "여자가 뭘 안다고 서방님 일에 참견하냐"... 300년 전 냉동인간이 깨어난 줄 ㅋㅋㅋㅋㅋㅋㅋ

집에 사채업자들이 찾아와서 행패를 부리는 것도 다 그 애비라는 새끼 때문이었고 저는 어디로 튀고 없었다. 일곱살짜리가 집에 있든 말든.
언제나 엄마에게 사업자금이며 차비, 생활비를 "빌려달라"고 하고는 갚지 않은 게 몇 억은 될 거다.
(여기서 중요한 사실. 배우자나 자식한테도 꼭 차용증을 받아내야 합니다. 한푼두푼 쌓이니 금액은 겁나 큰데 이혼해도 아무런 증거도 없어 ㅋㅋㅋㅋㅋㅋ
'결혼계약서'도 추천.)

당연히 내 학비는 관심조차 없었고, 머리도 송장같이 될 때까지 내버려 두니까 쪽팔려서 엄마가 마지못해 이발비를 줬다.
엄마가 나 먹으라고 사다놓은 간식을 자기 혼자 다 먹어 버리는 일도 많았다. 내가 화를 내면 전혀 미안해하지도 않았다.
그는 엄마에게 섹스를 원할 때 양치질도 하지 않고 주둥이를 디밀었고, 아무렇지 않게 내 앞에서 엄마의 가슴을 만지곤 했다.

한마디로 목숨만 붙어 있는 좀비 같은 사람이었다. 그는 다른 사람을 뜯어먹으면서 살았다.

그는 내가 심하게 아프거나 엄마가 집에 쌀이 없어 발을 동동 구를 때에도 평소와 같은 503스러운 표정으로 우리를 쳐다봤다.
나는 그 표정을 볼 때면 극도로 혐오스럽고 분노가 치올랐다. 어떻게 신이 있으면서 저런 인간이 세상에 존재할까, 아무리 고민해도 답이 안 나와서 속이 터질 것 같았다.
(ㄹㅎ가 마지막으로 무슨 대국민 변명같은 거 할 때 어찌나 친부 표정과 닮았던지... 미친 사람은 통하는 데가 있나보다.)
엄마랑 나한테 피해만 끼치면서. 엄마 인생의 전부는 나고, 자기 포지션은 원수, 도적놈, 핵폭탄이란 걸 모른다는 것처럼 뻔뻔하게 대접받기를 바랐다.
'당연히' 집안일은 여자 몫이고, 딸 같은 건 함부로 대해도 되는 애새끼고, 지는 하나도 잘못한 게 없다는 그 태도.
눈치가 있고 양심이 있으면 나한테 잘해줘야 하는 거 아닌가. 엄마한테 먼저 이혼 얘기를 꺼내야 되는 거 아닌가. 스무살 넘어서, 나중에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어이가 없어지더라. 사람 새낀가, 진짜. ㅋㅋㅋㅋ 



심지어 그는 초등학생이었던 나를 성폭행하려고까지 했다.
그 전까지 "그래도 나에게 사랑한다고 하니까. 사람이 모자란 거겠지. 나를 사랑하기는 하겠지."라고 생각해왔던 나 자신이 너무 병신 머저리 같아서
그 핵폐기물을 아버지라고 믿고,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상식적으로 초등학생 딸이 메리야스에 빤스만 입고 돌아다닌다고 아버지가 성폭행하진 않으니까... 편하게 다닌 내 바보스러움의 결과인 것 같아서
그 새끼를 죽여버리고 싶기도 했고, 엄마가 이 사실을 알고 나를 더럽다고 할까봐 무섭기도 했다.
내가 멍청하고, 조심하지 않았던 게 잘못이라고... 죄책감이 들었다. 큰 죄를 지은 것 같았다.

마지막으로 그를 본 지 10여년이 지났다. 근데 지금도 뉴스에서 아동학대 사건이나 자녀를 성폭행한 아버지의 기사를 볼 때면, 그 범죄자들의 뇌 구조가 이 사람이랑 비슷할 거라는 생각을 한다.
끔찍한 연쇄살인마를 보며 소름이 끼치는 것과 마찬가지다. 나는 그 인간을 생각하면 소름이 돋고 에일리언같이 징그럽다.
그는 '그 사건'이 있은 후로도 아무렇지 않은 듯이 10대의 나에게 "우리 딸 얼마나 컸나 볼까?" 하면서 가슴을 만지려 하곤 했다.
그 좀비새끼에게 나는 자식도 아니고 사람도 아니고, 아무것도 아니다.

그 사건 이후에는, TV에 나오는 아동학대 사건의 가해자들이 어떤 정신세계를 가지고 있을지 상상이 됐다.
내가 엄마를 엄마로 만나지 않았더라면 나도 서너살이 되기도 전에 죽었을지도 모른다. 태어나기도 전에 죽었을 수도 있고.
만약 내가 갓난아기였을 때 엄마가 나를 버렸다면, 이 새끼는 내가 울면 시끄럽다고 던져서 죽여놓고는 "어, 죽었네?"했을 것이다.

정말로 그가 전 여자친구와의 아이를 여러 차례 낙태시켰다는 사실이 현실적인 공포인 거고.



이 모든 흑역사의 시작은
아버지가 갓 스무살의 엄마를 임신시키면서부터였다.
군대 가기 전에 말이다.

순진해 빠진 촌부였던 외가 가족들은, 그 수많은 병크(ㅂㅅ+크리티컬. 엄청난 ㅂㅅ짓을 의미함)에도 불구하고 "애비 없는 자식이 되면 안 되니까..."라고 생각하면서 참기만 했다.
실제로도 내가 어릴 때는 애비 없는 자식은 욕먹으면서 사는 시대였다.

학교도 못 다닌, 찢어지게 가난한 부모 밑에서 막내딸로 자란 엄마는 피임법은 커녕 남자를 몰랐고, 아버지와 처음 마주쳤을 때 모태솔로 스무살 어린애였다.
죄가 있다면 엄마가 너무 예쁘게 생겨서 그 새끼 마음에 든 죄일까...(근데 나는 엄마 안 닮았다. 그냥 오징어다. ㅜㅜㅜㅜㅜㅜㅜㅜ)
첫 관계에서 ㅈㅇ을 보면서 저게 뭘까? 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엄마는 공장에서 일하다보니 생리가 끊어진 적이 많았기 때문에, 몇 달 동안 생리가 없는 것이 피곤해서인 줄만 알았다.

친부가 군대에 가고 나서, 그제서야 병원에 갔다. 임신이었다. 외할머니와 엄마는 고민고민하다가 아이를 낳기로 했다.

친부가 군대에 있는 동안 친정에 머물며 "스무살밖에 안 된 것이 임신을 했댜~" 하는 수군거림을 듣는 건 모두 엄마의 몫이었다.


중간에 아버지가 휴가를 내서 벼락치기로 결혼식을 하고, 2년을 독박육아하며 좋은 직장도 그만둔 채 기다리고,
그가 제대하고 나서야 엄마는 그가 전 여자친구와 낙태했던 사실을 알게 됐다.
시댁에 얹혀 살면서, 가끔 집에 응답 없는 전화가 왜 걸려오는 것인지 그제서야 알았다. 전여친을 정리하지 않고 엄마를 덥썩 임신시켰던 것이다.

잠자리를 가질 때면 그는 "전 여자친구는 비명도 지르면서 좋아했다. 왜 너는 안 그러냐" 같은 얘기를 자랑스럽게 했다고 한다.
엄마는 너무 아프고 염증만 생겨서 밥 먹듯이 산부인과에 갔지만, 아버지는 그러든가 말든가 했다.
갓 20살 넘긴 여자가 산부인과에 가서 진찰받는 게 수치스러울지 어떨지도 전혀 걱정한 적이 없다. 친부가 피임에 대해서 한 번도 신경쓴 적이 없어 엄마가 의사 선생님에게 물어봐서 그제서야 시작했다.
결과적으로 엄마는 결혼생활 20년 동안 ㅅㅅ를 하며 한 번도 쾌감을 느낀 적이 없었다.



ㅅㅅ할 때 드러나는 게 바로 그 사람의 인성이다.

애인과 ㅅㅅ를 하는데 상대가 좋아하는지 아닌지 관심이 없다면 100% xx놈이다. 배우자를 ㅅㅅ인형 정도로 생각하는 거든지.
그 사람은 결혼을 해도, 애를 낳아도 그 방식 그대로 인생을 살 것이다.

20년 내내 여자가 그렇게 싫어하고 아파하는데도 섹스를 꿋꿋이 했다는 게, 참 대~단한 인물이다.




엄마가 그딴 쓰레기짓을 한 아버지를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설마 아버지가 딸에게 못된 짓을 하겠어?"라는 매우 '상식적인' 생각대로 아버지와 나를 집에 둔 결과, 나는 아버지에게 성추행을 당하는 더러운 트라우마를 갖게 됐다.

지금이라도 이 끔찍한 기억을 지울 수 있다면 정말 행복할 것 같다.


그리고 속궁합을 맞춰봐야 한다는 얘기에 백프로 공감한다.
만약 엄마가 그렇게 번갯불에 콩 볶아먹듯 결혼하지 않았다면, 피임을 제대로 해서 섹스를 여러 번 해보았다면 헤어질 수 있었을텐데.

만약 그렇게 됐다면 나도 없었겠지만 그것도 좋지 않았을까.
엄마가 그대로 좋은 직장을 관두지 않고,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평범한 혼처에라도 시집갔더라면.
엄마는 성별의 제한도 뚫고 돈도 명예도 다 얻어 떵떵거리고 살 만한 똑똑하고 예쁜 사람인데.



 
괴물과 싸우는 자는 괴물이 되는 걸 조심해야 한다 

나는 지금 매우 행복하게 잘 먹고 잘 살고 있다. 나보다 더 행복한 사람도 드물 것이다.
오히려, 전쟁터를 벗어나고 나니 일상의 스트레스가 행복하게 느껴지기까지 한다.

하지만 이렇게 되기까지는 약 20년 동안의 '재앙(=친부)'과,
약 6년 동안의 죄책감과 자기연민, 피해의식, 그 안에서 4년 동안 심장을 베어내는 것 같이 고통스러운 심리상담 과정이 있었다.
왜냐하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괴물이 되었기 때문이다.


내가 제대로 망가졌다고 느꼈던 시점은 10살 무렵이었다.
나는 그 때부터 '사람'을 진심으로 싫어하게 됐다.
 
내가 본 '어른'이라는 놈들, 은행이나 법원이나 뭔가 힘을 가진 놈들은 전부 우리 엄마를 해코지하고, 내 것을 뺏으려고 하고, 어린애 따위를 불쌍히 여기지도 않는 인간들뿐이었다. 나를 도와줘야할 입장인 선생이란 사람들까지 그모양이었다. 도통 신뢰가 생기지 않았다.
게다가 내가 애비라고 믿었던 놈이 나를 배신했는데 세상에 믿을 놈이 어디 있나.
원래도 내향적인 아이였지만, 이때부터 더 안으로 파고들고 "그래, 니들한테 나는 아무것도 아니라 이거지. 나도 니들 필요없어.같은 심보가 됐다.
 
이 사람이 나를 해칠 만한 경박한 사람인지 아닌지가 마음의 문을 여는 기준이 됐다.
친구를 사귈 때도 얘가 혹시라도 내 비밀을 알았을 시에 떠벌리고 다닐 놈은 아닌지 재고 따져야 했다.
초딩, 중딩 여자애들이란 건 필연적으로 철이 없고, 뒷담을 하고, 남의 집안사정을 가지고 함부로 입을 놀리는 법인데, 그걸 다 걸렀더니 친구를 별로 사귀지 못했다.
 
 


열살 무렵, 어느 좋은 여름날, 시원하게 버드나무 밑을 지나 매미소리도 들으며, 신발가방 흔들며 평소처럼 집에 왔는데
문을 열어보니 집안이 텅텅 비고 이삿짐 박스만 쌓여 있었다.
하교하면 엄마가 항상 계셨는데, 아버지만 혼자 기계처럼 테이프를 뜯어 붙이고 있었다.

우리 집에 돈 될 만한 건 이미 몇달 전에 은행이며 경매꾼들에게 다 넘겨줬다. 엄마가 혼수로 샀던 냉장고, 내 피아노... 전부.
그거면 됐잖아. 아직도 더 남았어?
왜 내가 이런 일을 당해야 해. 내 인생까지 다 뺏어가라, 아주.
화도 나고 어이없고 머리가 하얘졌다.
(나는 아직도 은행 채무팀과 경매를 싫어한다. 제발 아이에게만이라도 그런 모습을 안 보여줄 순 없나?
채무자의 아이는 '아이'가 아닌가? 행복할 권리가 없는 건가?)

집이 경매되는 건 아주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그런데.
나는 오늘도 친구들이랑 신나게 뛰어놀고 급식도 씩씩하게 퍼먹고 열심히 인생을 살고 돌아왔다.
비록 엄마아빠는 사이가 나쁘고 언제 또 사채업자가 들이닥칠지 모르는 집이어도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고 엄마의 다정한 인사를 기대하며 집에 온 것이었다.
열살짜리의 최선으로 쌓아올린 삶이 그 동네에 있었는데.
작별인사조차 할 기회를 잃어버렸다.

인생 고작 10년 살았다. 이렇게 도망치듯이 쫓겨 갈 만한 잘못을 티끌만큼도 한 적 없었다.
선생님 말씀 잘 듣고, 길에 쓰레기가 보이면 줍고, 누굴 미워하거나 의심한 적조차 없는데
왜 내 인생이 남에게 좌지우지되어야 하는지, 누가 죽으라고 하면 죽어야만 하는 하찮은 인생인 건지 너무 화가 났다.


"집이 경매당했다"고 친구에게 말할 수 없다는 것이, 내가 이렇게 힘든데도 친구에게 알리는 게 망신이라는 얘기를 듣는 것이 황망했다.
항상 나에게 모든 것을 설명해주던 엄마가 경황이 없어서 나에게 제대로 말도 안 해주고 "미안하다" 한 마디 하고는 그 하루 내내 멍하니 침묵하던 모습이 너무 심각하고 무섭게 느껴졌다.
다음날 학교에 가서 작별 인사를 할 때에도, 사물함에 있는 소지품을 챙길 때도, 그 후로 다시 이사를 가기 전까지도
영혼을 두고 온 사람처럼 내내 가만히 서있고, 거짓말만 하고, 가면을 쓰고 웃었다.

그 무렵 대부분의 기억이 선명한데도 전학 간 반에서 그 해 한 학기 동안 짝꿍 얼굴조차 기억이 안 난다.
첫날에 "아무래도 상관없어"같은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이리 가라면 이리 가고, 저리 가라면 저리 가고 허수아비처럼 서있었던 기억만 난다.
어딘가 얻어맞아 정신이 하나도 없는 사람처럼 그렇게 지냈던 것 같다.


이사 간 동네는 다 쓰러져 가는 재개발 직전 아파트 단지였다.
저승사자랑 하이파이브할 것 같은 시뻘건 녹물을 양동이에 받아놓고 윗물로 음식을 해먹었다.
부엌에 보일러가 안 깔려 있어서 겨울이면 엄마가 발을 동동 구르면서 음식을 해야 했다.
놀이터 놀이기구는 죄 녹슬어 미끄럼틀 바닥 같은 곳에 구멍이 숭숭 뚫려 있었다.
아파트 건물 전체에 물때가 흘러내려도 새로 칠하지를 않으니 귀신 나올 것 같았다.

학교에도 가난한 아이들만 득시글거리는 게, 그 중에서도 내가 가장 처참한 상황이라는 게 너무 싫었다.
어쩌면 이 상태로 내 인생이 수렁에 빠져버린 건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현실을 죽어도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아무 생각 없이 자포자기한 상태로 허수아비처럼 살았다.
요샛말로 치면 '아무말 대잔치'를 하면서 진심을 주지 않았다.
영혼이 없어서 반 아이들 모두가 나를 싫어했다.

참 신기했던 것은
그 전까지 나는 최선을 다해서 엄마에게 효도하고 공부를 열심히 하고 선생님을 공경했는데
그랬던 나에게 관심 가져주는 사람은 없었던 반면에

내가 아무렇게나 살고, 아무 말이나 하고, 다른 사람에게 호감을 얻으려는 사교행동을 끊어버리자
오히려 반 전체가 내 일거수일투족을 관심갖게 되었다는 것이다.
 
심지어 나랑 사이가 나빴던 애들이 내 병문안도 왔다.

슬프지만, 그런 부정적인 관심이 오히려 나는 좋기도 했다.

인터넷에 나오는 관심병 종자들이 말 그대로 '관심'을 받고 싶은 욕구로 나쁜 짓을 한다고 하는데 그게 뭔지 조금 알 것 같다.
호구처럼 착하게 살면 모두가 나를 만만하게 보고 괴롭히지만, 남을 괴롭히고 다니면 사람들은 내 눈치를 보면서 나에게 함부로 대하지 않는다.



또 한 가지 희한한 것은, 막 살았는데도 친구가 생겼다.

환경이 불우할지언정 더 나은 인생을 살고 싶어서 스스로 착하게 살려고 노력했던 거였는데...
인생 다 쓸모없네. 노력도 다 쓸모없네. 그런 생각이 많이 들었다.

인생이 너무... '재미'가 없었다. 아무 맛이 안 났다. 돌을 씹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래도 그 전에는 동네에서 뛰어 놀기라도 하고, 의사가 될 거라는 꿈도 꾸고, 엄마가 나에게 신경쓰면서 간식도 챙겨주었는데
이 동네는 애들도 패배감에 쩔어서 분위기도 어둡고, 엄마가 이사를 가기 위해 열심히 돈을 버시느라 나는 본의 아니게 방치돼버렸다.


그 때가 내 인생의 암흑기였다. 앞으로 몇십년 더 살아본다고 해도 그때보다 더 힘든 일을 당할 수 있을 것 같지 않다.

그 학교에 있을 때, 그리고 다음 해에도 연달아 사고를 당했다.
건강체질이었던 내가 코피를 한대접 쏟아내는 일도 있었고.
아버지가 나를 성추행한 것도 그 무렵이었다.

열살 무렵에는 자는 중에 환청까지 들렸다.

초등학교 1학년 때부터 불면증이 불면증인 줄 모르고 그냥 누워서 멀뚱멀뚱 시간만 보내다 잠들곤 했다.
초등학교 3년 내내 하루 4시간 자는 게 고작이었는데, 그게 심해진 거 같았다.
핸드폰 소리나 사람들 웅성거리는 소리 같은 게 마치 뇌속에 이어폰을 넣은 것처럼 선명한 소리로 들리는데, 그 소리가 그쳐지지를 않았다.
무서워서 잠이 다 달아났다.


정신적으로도 너무 복잡하고 버겁고 힘들고, 육체적으로도 너무 피곤해서 정말 견딜 수가 없었다. 제정신이 아니었다.
고작 여댓살 짜리가, 화가 날 때면 나에게 전지전능한 힘이 있어서 주먹으로 아파트라도 때려부술 수 있다면 좋겠다는 간절한 생각을 했다.
짖궂은 남자애들이 장난을 칠 때면 땅에 파묻어버리고 싶을 정도로 화가 났다.


그때의 컨디션을 지금 몸으로 설명하자면, 3일 동안 밤을 새고 생리 터진 첫날같은 컨디션이었다. 초등학생 때부터 중2 때까지 내내.
낮잠으로 보충하려고 노력해도 전혀 회복이 되지 않았다.
 
그런데도 엄마에게 말할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 때 당시 나는 참는 것에 지나치게 익숙해서 남들도 자다가 환청 정도는 듣는 줄 알았고, 하루에 4시간 자면 더 못 자는 게 평범한 것인 줄 알았다. 

지금 생각해보면 너무 어처구니가 없다. 동상이몽이라더니, 딱 맞는 말이다.

엄마는 나한테는 전지전능한 신 같았지만 내가 말하지 않는 진심을 잡아낼 능력은 없었고, 아이는 엄마가 그러했듯이 고통이 고통인 줄도 모른 채로 참으려고만 했다.
"다들 원래 이렇게 사나보다."하고 살았다.

엄마는 알콜중독자 아버지를 두고 자랐다.
그래서... 불행에 대한 내성이 생겨서 그런 병신 남편도 참아낼 수가 있었던 거다.

아이는 부모를 보고 배운다.


엄마가 자신을 하찮게 대하면 아이도 자신을 하찮게 대하는 법을 배운다.



행복한 아이를 키워내기 위해서는 주변에 본받을 만한 가족이 있고, 엄마아빠가 행복해야 한다. 

드라마 주인공이 돌아가신 아버지와의 추억을 회상할 때
유원지에서 하하호호 웃으며 딸을 목마 태워주는 장면이 스쳐지나가는...... 그런 게 나오면 너무 이해하기 힘들었다.
"아무리 드라마라지만 너무했다. 저런 아버지가 어딨어?ㅋㅋㅋㅋㅋ 사람 놀리나?" 하며 비웃었다.

세상은 내가 겪은 것처럼 차갑고 무섭고 매정하며, 한국에 따뜻한 아버지 따위는 당연히 없다.
나처럼 그 사실을 '쿨하게' 인정하고 험한 세상에 대해 제대로 알려줘야지,
아이들 눈을 가리고 뽀로로 동산 같은 가족이 현실에 있다고 우기는 건 어른으로서 무책임하게 애들을 차가운 현실에 내던지는 거라고 생각했다.

그랬던 내가 행복한 가정을 어떻게 쟁취해야 하는지 스스로 알아내기란 너무 어려웠다.
그런 드라마 같은 남자가 존재하기나 하는 건지 사실 믿어지지도 않고.
행복한 삶을 '추구하는 것' 자체가 정말 큰 난관이고 시험이었다.
스키가 뭔지도 모르는 열대 지방 사람에게 혼자서 스키를 배우라는 것과 비슷한 막막함이랄까.

결론부터 장담하자면, 그런 그림같은 삶은 '당연히' 존재한다.
그리고 그 삶은, 당신이 배우자를 잘 고름으로써, 또는 당신의 가족으로부터 확실히 절연함으로써 분명히 이룰 수 있다.
당신이 미성년자고, 가해자가 부모라면 비영리단체 도움을 받아 확실하게 증거를 모아서 고소를 하든지, 절연을 할 수도 있을 것이다.
 

*나는 내 이상형을 만화에서 찾았는데, 분명히 여자들에게는 큰 참고가 될 거라고 본다.
이런 남주인공들이 현실에 없을 것 같지만, 있다!!! 아주 많다! (다만 외모는 눈을 낮춰야 함. 미남은 연예계 바깥에서는 멸종했다고 봐야...)
-양의 눈물
-VB로즈
-너에게 닿기를
-유부녀의 탄생, 환타
-좋아하면 울리는, 천계영
-설희, 강경옥
-흑집사
-패밀리 사이즈, 남지은 김인호
-유미의 세포들, 이동건
-기춘씨에게도 봄은 오는가, 네온비
-결혼해도 똑같네 
-나쁜상사, 네온비
 
그리고 웹소설도 하나.
-에보니, 자야: 웹소설 역사에 남을 만한 문장력과 스토리다. 누명을 쓰고 감옥에서 온갖 인권유린을 당했던 주인공이 어떻게 그 고통을 극복하고 삶의 주인이 되어가는지 보여주는 소설. 
비록 픽션이라지만 나에게 정말 큰 위로를 준 글이다.

내가 책 보고 울었던 건 '나의 라임 오렌지 나무'나 '어린왕자' 정도인데, 이걸 보면서도 울었다.
 
 
 
 
 
열살 무렵 나는 너무너무 힘들어서 "인생은 원래 힘든 건가? 왜 힘든 거지? 내가 어떻게 해야 되는 거지?" 혼돈의 카오스였고
사실 내 인생에 고통만 주는 부모님과 합법적으로 떨어져서 나 혼자 살 수 있다면 그러고 싶다는 추상적인 생각도 들었다.

제발 좀 조용하게 혼자 쉬고 싶었다.
내 주위에서 아무런 사건 사고도 일어나지 않았으면 좋겠고, 아무런 싸움도 일어나지 않았으면 좋겠고, 아무런 화도, 자극도 받지 않고 싶었다.
자궁에 다시 들어간 것처럼 동면할 수 있었으면... 일주일이라도 아무도 나를 건드리지 않는 곳에서 깨지 않고 푹 자고 싶다.
그게 고3 때까지의 간절한 꿈이었다.

 

내가 더 강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성인 남자만큼 강했다면, 아니면 그만큼 강한 지혜가 있었다면...
내가 약해서 당하기만 하는 거지.
억울했다.


지금도 '슈돌'같은 프로그램을 보면 드는 감정은 빡침이 70% 정도이다.
어쩔 수 없는 시대였다는 걸 알지만... "왜 나를 보호해주지 않았느냐. 그 시대의 수많은 불쌍한 애들을 왜 돌봐주지 않았냐.
몇 년 전에 죽은 아이들 시체나 겨우 찾아내서 어른들이 미안하다는 둥, 의미없는 흰소리나 지껄이고.
그래놓고 이제와서, 금수저 물고 잘 자라고 있는 아이들을 TV에 비춰서 상대적 박탈감이나 느끼게 만드느냐."하는 억하심정이 드는 것이다.




그런 모든 불우한 과정이 나를 괴물로 만들었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은 스무살 때였다.

다른 사람의 말에 공감할 수 없었다.
 
난 이제 막 전쟁터에서 벗어났는데,
옆에 있는 동기가 남친이랑 싸운 일, 수업 열심히 들었는데도 학점 C 받은 일, 동기 스타킹에 구멍 난 일, 그런 것들은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내 목숨이 붙어있고, 그 성범죄자한테서 벗어났고, 무려 대학교를 다니게 됐는데!! 
 
지구에 운석이 떨어진다는 얘기가 아니라면 1도 신경쓰고 싶지 않았다.

이제는 정말 지긋지긋했다.
다른 사람 얘기 경청해주는 거, 엄마 하소연 듣는 거, 어른스러운 척하는 거, 화났지만 참는 거, 사람을 욕하지 않으려고 애쓰는 거, 어린애인데도 기댈 데가 없어서 길에서 혼자 우는 거...
내가 아무리 울고 좌절하고 소리를 지르고 내 정신력을 쥐어짜내며 다른 사람들의 고통에 귀 기울이고 도와주고 기도하고 더 나은 사람이 되려고 노력해도
테레사 수녀처럼 되는 것도 아니고, 돈이 떨어지는 것도 아니고, 내 피 땀 눈물만 빼앗길 뿐이다.

대학교를 입학하면서 결심했다.
"더 이상 참고 살지 않을 거야.
내가 불쾌한 일, 힘든 일은 더 이상 겪지 않을 거야.
절대 손해보지 않을 거야."
대학교에서 학점 받고, 취직 잘 하려면 남의 비위를 맞춰야 한다는 생각을 못 하고
"남이 내 인생을 여기까지 끌어준 것도 아닌데 뭔 상관인가. 나는 나 자체로 훌륭한데. 당분간 나 혼자 살 거야." 하는 생각으로 아웃사이더로 살았다.
스스로에 대한 평가가 관대해서 화장도 별로 안 하고 편한대로 다녔다. 학점도 별로 신경 안 썼고...
일종의, 나한테 주는 휴가였다.

꾸미는 것에 대한 콤플렉스도 약간 있었다.
내가 조금이라도 예뻐지면 괜히 친부같은 꽃뱀(?)새끼가 엮이지 않을까, 하는 착각이었다. (코쓱)(민망)(이불킥)
엄마가 못 누린 몫까지 대학생활을 즐기려고 열심히 화장을 했다가도, 여성스럽게 보이기 위해 화장을 한 나 자신이 너무 약한, 병신, 심신장애자 같이 느껴지고
"내가 예쁘려고 구두를 신는 건데, 혹시라도 범죄자가 나를 쫓아오면 이 구두 때문에 죽겠네. 당장 내 아버지가 성추행범인데 이 동네에는 또 없으리란 법 있겠어?" 같은 남자 전체에 대한 불신, 여자라서 손해본다는 피해의식이 들었다.
죽을 게 두려워서 꾸미지도 못하고 다녀야 하나? 왜 여자라는 존재는 이렇게 약하고 쓸모가 없는가.
그러던 중 실제로 취객에게 해코지를 당한다든지, 교수가 불쾌한 농담을 한다든지. 소소하게 죠카튼 일들을 두세개 겪게 돼서...
아무리 그래도 내가 성인인데! 체력장도 B급 받았는데!!! 그 정도면 취객쯤은 간단하게 제압할 수 있을 줄 알았건만... 물리적으로 나는 병신 맞았구나, 천재지변이나 사고가 일어나면 괜히 여자와 노약자부터 구하는 게 아니구나. 하고 깨닫게 될 뿐이었다.
그 후로는 "이 xx놈이 나한테 시비 거는 건가? 아닌가?" 긴가민가한 상황에서 그냥 피하는 걸 택하게 됐다. 정말 남자한테 맞으면 인생 망하겠다는 느낌이 와서. 어떻게 지켜온 인생인데 얼굴에 흉터라도 남으면 너무 억울할 것 같아서... 그냥 비굴해지는 쪽을 택하게 됐다 OTL

어린 아이일 때도 약하고 쓸모없고 위험에서 벗어날 수 없었는데 성인이 돼도 마찬가지란 게 허무했다.
학교 성폭력 위원회도 못 믿겠고, 경찰도, 부모도 믿을 수 없고... 그렇다고 구두로라도 공격하자니 정당방위로 인정 안 돼서 내 인생 빨간 줄 그어질 것 같고.
범죄 피해 당하면 그냥 끝나는 거네.
어릴 때 단 한 번도 부모의 뒷배경 없는 것이며 돈이 없는 것에 대해 불평하지 않았는데, 성인이 되고 나니 아직도 한국은 법보다 주먹이 가깝고 돈, 인맥 많은 놈이 생존률(?)까지 높단 걸 체감하게 됐다. 




공감을 못하는 것과는 반대로,
누군가 나에게 직접적으로 질타를 하거나 화를 낼 때면
칼로 심장을 찔리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머릿속이 하얗고
"넌 인간이 아니야. 괴물새끼야." 같은 선고를 받는 기분이었다.



나에게 '화'라는 것은
엄마가 인생의 모든 것을 걸고 그 핵폐기물과 협상을 해보려고 하다가 실패했을 때, 즉 사람이 죽고 사는 문제쯤은 돼야 나오는 거였다.

내 눈 앞에 있는 사람이 나에게 화를 낸다는 건
내가 그만큼 쓰레기 같은 짓을 했고, 인생 막장이고, 소생 불능이라고 말하는 거라고 느꼈다.
마치 실수로 사람을 죽인 사람이 피해자 가족에게 "살인자" 라는 비난을 들을 때 도무지 뭐라고 해야할지 모를 감정을 느끼는 것처럼.
그에 대한 대답이나 이해보다는 죄책감과 자괴감, 공포감이 머릿속을 꽉 채웠다.



그런데 또 한가지는,
뉴스에서 아동 성폭행 사건이나, 그와 비슷한 극한상황을 접할 때면 너무 감정이입이 돼서 죽을 것 같았다.
며칠씩 입맛이 없고, 폐인처럼 누워 있어야 간신히 진정이 됐다.


내가 그 아이들을 도와줄 수는 없는 건지, 너무 마음이 아프고
이따위 세상은 왜 아직도 바뀌지 않아서 나보다 더 심한 피해자들이 꾸역꾸역 상처를 안고 살아야 하는 건지.
왜 그딴 쓰레기 새끼들이 결혼을 하고 자식을 낳는지.

왜 아무도 그 아이들을 발견해주지 않았는지.

너무 원망스럽고 혐오스러웠다.


지금에라도 엄마에게 말을 할까, 신고를 할까,
아니야, 자신이 없어. 엄마가 혹시 나에게 "네 잘못"이라고 하면 어떡하지?
고소는 커녕, 오히려 엄마가 날 버리면 어떡하지?
온갖 생각이 다 들었다.

설령 엄마가 고작 그 개l새끼 때문에 나를 버릴 만한 그런 정도로만 사랑했다고 할지라도,
스무살 때까지 내가 엄마에게 받은 사랑은 너무 컸다.
엄마가 20년 동안 고생하면서 너무 힘들었으니까, 대학교까지 보낸다고 내가 큰 짐이 됐으니까, 설령 나를 버리더라도 이해는 할 수 있었다.

엄마는 내가 가진 것의 전부였다.
엄마가 나를 버린다면 세상이 나를 버린 것 같이 아플 것 같았다.
나를 믿고 아낌없이 사랑해주는 엄마의 그 말이 나에 대한 경멸이나 저주로 바뀌게 될까봐
그게 가장 무서웠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내 미래에 대해서 가장 큰 걱정거리가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내 남편이 내 딸을 성폭행하면 어쩌지?"
"내 아들이 누군가를 성폭행하면 어쩌지?" 였다.
만약 그런 일이 일어나면 나는 그 새끼를 죽이고 나도 죽어버리고 싶을 거야. 어떡하지?



내 머릿속에 '남자'라는 것은
아버지=아동 성범죄자. 핵폐기물. 뇌가 없음.
할아버지=그런 핵폐기물을 키웠음. 적반하장으로 며느리들을 박대했음.
기타 아버지 형제=핵폐기물. 이하동문.
초, 중학교 같은 반 애들=여자애들을 성추행하거나 때림. 죄책감따위 없음. 아무런 처벌도 안 받음. 저 따위로 살아놓고 남자라는 이유로 나보다 취직 잘하고 결혼 잘 하고 살겠지. (지금은 아니지만 그때 당시는 사회 분위기가 그렇게 굴러가고 있었다)
내 외할아버지=알콜중독자. 외할머니에게 만날 큰소리를 지름. 만날 넘어져서 수술비 들어감.

이런 이미지였다.

(개노답 삼형제 뭐 그런 느낌?
참고로 돈, 술버릇, 명품, 여자, 비싼 차, 도박, 폭행, 의처증... 그런 걸로 사고 치고 다니는, 골이 텅 빈 사람은 상종하면 답이 없다. 여차하면 공권력까지 동원할 의지를 갖고 전력으로 도망쳐야 된다.)

멍청하고, 무능력하고, 가부장적이며, 자신은 항상 옳다고 생각하고, 남의 말 안 듣고, 남에게 피해만 주고, 심지어는 가족을 폭행해도 아내가 준 돈으로 잘 먹고 잘 사는.
그게 남자의 표준인 줄 알았다.

(나는 그래서 "사람은 서울로 보내라"는 말에 백퍼 공감한다. 지방에서는 멘토가 돼줄 사람이 없다. 직업군도 치킨집 아니면 공무원으로 수렴한다.
IMF 때문이었는지 몰라도, 고향에서는 만날 누구 집이 망했다는 얘기 들려오고, 대부분 부모님이 방치하고 사랑을 안 주는 환경이라 날마다 자살하고 싶다고 하는 친구가 서너명 있었는데 서울에 오니까 너무 럭셔리한 세계야...
부모님이 대기업 임원, 부모님이 예술가, 정치인, 강남 병원 의사...
이런 애들은 어려서부터 전혀 크기가 다른 꿈을 꾸고, 부모가 좋은 인생 멘토다. 자식에게 언제나 사랑을 듬뿍 주고, 부모님이 유치원에서부터 성적 관리를 직접 한다. 사업은 사람을 상대하는 것이기 때문에 특히 사업가들은 말투도 나긋나긋하고 자기보다 어린 사람이나 식당 종업원한테까지 예의가 바르다. 그 자식들의 인생이란 건 이미 다 길이 포장돼 있어서 그 위를 걸어가기만 하면 된다.
정 취업 안 되면 서른살에 부모님 회사 이사 자리를 그냥 준다.
그런 사람들을 어릴 때 겪어봤더라면 그냥 내 친척들이랑 내 친구 아버지들이 가정교육을 못 배워 쳐먹어서 인간이 덜 됐을 뿐이고, 대단하고 존경할 만한 사람은 다 출세해 있어서 내 눈에 많이 안 보일 뿐이라고 깨달았을텐데 ㅠㅠ) 

 

그래서...
어차피 남자는 핵폐기물이니까,
진심으로 사귈 필요도 없고, 전부 가지고 놀다 차버리고 혼자 잘 먹고 잘 살아야지.
사귀면 돈도 다 내라고 하고, 감정적으로 괴롭혀도 내 잘못이 아니다.
전부 조져버리겠다.
내가 엄마의 복수를 해주겠다고, 의적이라도 된 걸로 생각했다.
 
 
내 큰아버지는 큰어머니에게 간도 쓸개도 다 내줄 것처럼 굴다가, 결혼 후에 돌변해서 산모 앞에서 칼로 자해를 하고, 아이들을 방치하고, 처가댁 재산을 말아먹고, 벤츠를 끌고, 바람을 피고 다녔다.

나는 나한테 별도 따다 줄 것처럼 구는 남자라면 누구든, 사귀기 시작하면 그런 '본연의 모습'을 드러낼 거라고 확신했었다.
 
그래서 나에게 호감 있는 사람 중에 멀리 사는 사람만 계획적으로 골라냈다. 혹시라도 나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놈이면 피하기 쉬우려고. 헤어져도 절대 마주치지 않게.
 
누가 나를 좋아한다고 하면 "니가 뭘 알아서 날 좋아해? 미쳤냐? 제정신이냐?" 같은 말을 해주고 싶었다.
'어차피 사람을 진심으로 사랑하지도 않고, 내가 뭘 좋아하고 무슨 꿈이 있는지도 관심없고, 어떻게든 불쌍한 척해서 여자랑 ㅅㅅ만 하면 팽하는 놈들이... 지 새끼도 버리는 놈들이. 어디서 인간 흉내를 내.'라고 생각했다.


근데 처음 사귄 남친이 너무 착하고 멀쩡해서 실행에 옮기지 못했단 건 함정 ㅎ...... (헛헛 죽창은 내려놓으십시오. 불쌍한 인생 이거라도 있어야지... 봐주세요;ㅅ;)
남자친구가 너무 멀쩡해서 당황스러웠고, 세상에 이렇게 천사 같은 사람이 있나 싶어서 미안하기도 했다.

나를 여자라고 보기 전에 '인간'으로서 존중해주는 점이 너무 좋았다.
여자라고 해서 만만하게 보거나, 하여간 남자와는 종이 달라서 우아하고 여성스러운 취향을 갖고 있을 거라고 착각하거나, 나에게 '여자다움'나 '애교' 같은 걸 전혀 바라지도 않는 점이.
드라마에 나오는 것처럼 "네가 없으면 안돼!" 하면서 아베~마리아~ 같은 관현악이 깔리는 분위기도 전혀 아니고, 오히려 나 없어도 혼자 잘만 살 것 같은 점이 좋았다. (처음에 나한테 관심도 없었고, 초식남이었으니 당연한 거긴 했다... 허허헛ㅜㅜ)
 
많은 학자들이 사랑의 유통기한이 2년이고, 시간이 지나서 사랑이 식는 것은 '변하는 것'이 아니라 평소대로 돌아가는 것이라고 했다.
그래서, 혹여 사고로 애가 생겨도 애 아빠가 되기에 인성에 큰 문제가 없을 것 같은 사람을 골라서 사귀자는 게 게 내 지론이었다. 기본적으로 선하고 성숙한 사람은 사랑이 식더라도 상대에게 최소한의 예의를 갖출 테니까.

반전은 이 사람이 내 예상보다 더 마음이 따뜻하고, 이런 사람하고 사귀었더니 나를 날마다 더 많이 사랑해준다는 거였다.

공기를 의심하지 않듯이 상대에 대한 신뢰가 아주 당연하고, "너는 너이고 나는 나다. 너를 있는 그대로 인정한다." 그런 뿌듯한 느낌이 있음.
엄마 다음으로 서로를 가장 잘 아는 친구이자 남편이자 스승, 그런 대들보같은 존재가 되어 있음.

가장 중요한 점은, 남친이 나한테 '먹방 메이트' 포지션을 맡고 있다는 점이다. 치킨에서 안 먹는 부위를 등가교환함. 음식 취향이 비슷함.
나는 내가 말주변이 없는 게 싫은데 남친은 오히려 자기가 실컷 떠들 수 있어서 좋다고 한다. 나도 남친 앞에선 듣기만 해도 돼서 너무 좋다.
내 인생 최애임. 이 분 없으면 제 인생의 재미가 반으로 뚝 떨어질 것 같고요. 네.
(나중에 보니 사랑의 유통기한이 2년으로 끝나지 않는다는 연구결과가 나왔다 ㅋㅋㅋ 아 역시 연구결과는 이론일 뿐이었어.
소울메이트가 될 만한 사람을 애인으로 만나면 평생사랑도 가능할 것 같음. 나중에 뜻 안 맞아서 헤어지면 말고...
이렇게 알찬 사랑을 인생의 1/3이나 해왔는데 나중에 잘못한다고 해서 상대가 원망스럽거나 세월이 아까울 것 같지가 않음. 좋은 시간이었다, 고마웠다 할 것 같음.)



처음부터 그런 좋은 사람이란 게 느껴졌음에도 불구하고.
처음 남친이 성관계를 하고 싶다는 말에
'임신하면 나를 버릴지 어떻게 알고 성관계를 하지?'
'나는 절대로 엄마같이 살지 않을 거야. 엄마같이 된다면 죽어버리고 싶을 거야.'
'엄마는 나를 공부시키려고 남들보다 10배는 고생했어. 나는 절대 실패하면 안돼.'
'내 몸에 남의 신체 일부분을 넣는단 게 너무 혐오스럽다' '더럽혀지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남자친구를 피하고 미뤘다.


누군가에게 "네 지인 소개 좀 해줘라", 또는 "네 남자친구는 어떤 사람인지 소개해줘라"라는 말을 들으면
또는 누가 결혼한다는 소식을 전할 때면
내가 보기에는 "나의 xx 파트너는 이 사람이야^ㅂ^ x!!!!x!!!!!!"라고 만천하에 공표하는 것처럼 보여서 너무 추해 보이고 싫었다.

누군가 결혼한다고 하면 축하하는 마음보다는 '결혼식이란 게 따지고 보면 xx 파트너 소개식 같은 건데, 부끄럽지 않나?
어른들은 신랑신부를 보면서 그런 19금 장면이 떠오를 것 같은데.
내가 결혼식을 하면 다른 사람들이 내 얼굴과 남편 얼굴을 포르노에 대입하지 않을까? 진짜 싫다.
그리고 결혼생활이 행복으로 끝날지, 또는 배우자가 알고보니 쓰레기일지 아무것도 확실한 게 없는데 뭘 장담해서 성대하게 축하하라고?
사랑이 영원한 건지 자기들도 불안하니까 허세 부리는 거 아닌가.
 

지나가는 남자가 나를 보고 소위 '딸감'으로 소비하지는 않을지, 한 명이라도 나를 가지고 그런 상상을 하는 사람이 있다면 진짜 쫓아가서 짤라버리고(?) 싶을 것 같았다.
내가 여자라는 게 너무 싫고, '인간'에게 성욕이라는 게 있다는 사실 자체가 더럽게 느껴졌다. 친부라는 새끼가 가졌던 것처럼.
사람들 모두가 옷을 입고 문명인인 척 다니지만, 가랑이 사이에는 해삼이나 송충이 같이 징그럽게 생긴 게 달려 있다는 게 어색하고 무섭게 느껴졌다.
그딴 더러운 ㅅㅅ따위 하지 않아도 되고, 남에게 성욕의 대상이 되지 않도록, 누군가 나에게 성추행을 할 일말의 가능성도 없어지도록, '나에게서 성이 사라지면 좋겠다'고 생각했었다.

(지금은 옛날 얘기처럼 느껴지고 전혀 내 생각과 동떨어져 있음. 걱정 ㄴㄴ. 행복한 성생활을 즐기고 있음. 더러운 건 범죄자일 뿐 피해자나, 인간 전체나, 성 자체가 더러운 게 절대 아닙니다!! 나무로 죽창을 만들어 찌르면 찌른 놈이 나쁜 거죠! 지구에서 핵폭탄이 터져도 우주 자체에는 별 일 아닌 것처럼, 한 사람 한 사람은 모두 우주이고 큰 존재입니다. 가해자는 티끌같은 놈들이라 생각하세요. 꼭꼭 명심하세요!!!
 
그리고 책에서 읽었던 건데... 산부인과 의사가 말하길 20대가 되도록 자기 성기가 어떻게 생겼는지 한 번도 안 본 여자가 대부분이라고 한다. 나도 그래서 20대 초반에 내 성기를 거울로 처음 보고 으으 징그러ㅠㅠㅠ 싫다 ㅠㅠㅠ 그런 느낌을 많이 받았다. 대체 남자들이 이렇게 징그럽게 생긴 걸 왜 포르노로 찾아보고, 좋아하기도 한다는지 전혀 이해가 안 갔다. 아무리 사랑하는 사람이어도 내 성기의 생김새를 혐오스럽게 여길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했다.
 
성추행 같은 경험이 없더라도, 여자애들이 10대에 처음 우연히 포르노를 봤을 때 부모님을 혐오스럽다면서 피하거나, 자기는 절대로 섹스같은 거 비위 상해서 못할 거 같다고 말하는 경우가 있다.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건전하고 아름다운 섹스 비디오가 애들에게 보급되면 해결될 것 같다. 진짜 커플이 섹스하는 걸 다큐멘터리 식으로 조명만 좀 뽀샤시하게 해서. 성교육 때 성기 사진도 자주 보여주고. 어차피 다 감춰도 비현실적인 거 찾아서 보는데 그냥 현실적인 거 보여주지... 30년쯤 후에는 되려나....,...)



다시 한 번 말하건대, 핵폐기물은 그 옆에서 도망가는 것 이외에 답이 없다.
"이 사람도 사람이잖아. 구제해주고 싶어. 다른 방법이 없을까?" 같은 건 꿈도 꾸지 마라.
그 해로움이 지금 당장 눈에 잘 안 보인다고 그 옆에 붙어있다가는, 나처럼 인간으로서 뭔가가 상실되는 사태를 맞을 수 있다. 

지금은 내 멘탈이 배렸다는 얘기를 이렇게 담담하게 말할 수 있지만
스무살의 나는
"나도 남에게 고통을 주고도 눈 하나 깜짝 안 하는 그런 인간이 되는 건 아닐까? 괴물이 되느니 죽는 게 인간세상을 이롭게 하는 게 아닐까?" 심각하게 고민했었다.

스무살이 되기 전까지 나는 생존본능 하나 가지고 살았기에 '자살충동'이란 걸 전혀 이해하지 못했는데, 이때 깨달았다.
자살충동이란 건 미래가 캄캄하고 개선 가능성이 '전혀' 없을 때, 살아봤자 아무런 희망이 없을 때 생기는 거라고.
예를 들면 10살에 빚을 200억 정도 물려받았다거나, 전신이 마비되고 눈동자도 움직일 수 없는 상태에서 일생을 살아야 한다거나, 20살에 시한부 인생을 선고받는다거나.

그 때 당시 내 감정이란 그런 수준으로 최악이었고, 거기다 생리 전 증후군으로 우울감이 심해질 때면
밥 잘 먹고 잠 잘 잤는데도 아~~~무런 이유 없이 저런 기분이 되곤 했다.


이게 우울증인가? 우울증은 몸에 문제가 있는 거구나, 실감이 났다.
어릴 때 자면서 들었던 환청과 비슷했다. 환청이란 걸 알면서도 그 소리가 절대 내 의지로는 그쳐지지를 않았었다.
우울감이라는 감정도 그 때와 비슷했다. 제어할 수가 없었다. 약 말고는.
 
참고로 말하자면 생리 전 증후군으로 우울감이 있을 때는 진통제가 약발이 아주 좋다. !!!!!!!!중요!!!!!!!!!!
(신체가 아플 때랑 정신적으로 아플 때, 동일한 뇌 부분이 반응한다고 한다.
그래서 정신적인 고통에도 진통제가 효과가 있다고 한다.
생리 시작할 때쯤 진통제를 먹으면 생리 전 증후군을 거의 안 겪을 수 있다.)




상담을 통해서 내가 결론을 낸 바로는
나의 정신적 상처는 아래와 같은 과정으로 심화되었다.

친부는 평생토록 염치라든가, 부끄러움이라든가, 미안함? 태어나면서 아예 그런 인간적인 감정을 안 달고 나온 것 같은 사람이었다.

그 작자가 나에게 빈말로라도 "먹고싶은 거 있냐"고 물어본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뺏어먹었기나 했지.
내 수능날이 언제인지, 대학 합격자 발표가 언제 나오는지도 항상 그 자의 우주 밖에 있는 일이었다.
아마 아파트 경비아저씨가 그 새끼보다 더 나를 잘 알 거다.

그래서 사실 나는 남자가 도망가고 남겨진 미혼모들을 보면 "다행이다"라는 생각이 든다.
그런 사람은 인생에서 사라져 주는 것이 오히려 도움된다.
아이에게 아무런 사랑을 주지 않고 무관심한 부모는 오히려 정신 발달에 해악이다.

이런 새끼들하고 결혼을 하는 건 결혼이 아니라 애새끼를 하나 더 입양하는 거랑 비슷하다.
애기는 이쁘기라도 하지, 이런 새끼들은 하는 짓도 안 예쁘고, 평생 성장하지 않는다.




친부는 20대에 정신이 온전치 못한 외할아버지를 꼬드겨서 엄마의 혼수였던 땅을 팔아먹기도 했다.
외할머니가 힘들게 몇십년간 농사일로 돈 모아 샀던 그 땅을.
결혼한 지 1~2년 만에 말이다.

그 땅이 무사했다면 애초에 내가 초등학교 입학했을 때부터 "대학교에 갈 수 있을까?" 같은 고민 따위를 하면서 살지 않아도 됐다.

(여기서 또 참고로 말하자면, 절대 "그래도 땅은 남자 이름으로 해놔야지" 같은 편견으로, 믿을 만한 사람이 아닌데도 명의를 써두지 말아야 한다. 어디서 어떤 미i친놈이 나타나서 명의 도용할지 모른다.
제정신이 아니고 보호자도 마땅치 않은 사람이 재산을 소지해야 할 상황이라면, 법정후견인제도를 이용하기 바란다.)



엄마가 일련의 사건사고에 대해서 "이렇게 하면 어떠냐"라고 조심스레 대안을 제시하면
친부는 뭐 어쩌라고 -_- 하는 표정을 하며 아무런 답변을 하지 않았다.
엄마가 화가 나든지, 울든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아니면 버럭 화를 냈다. "어떻게 내가 회사원 따위를 하느냐", "사람이 돼지도 아니고 고작 생활비 가지고 난리냐" 기타등등. 



집을 공동명의로 바꾸거나, 서류상 이혼 같은 꼼수를 쓰면 고작 초등학교 저학년이었던 내가 빚쟁이를 마주칠 일 따위는 없었을텐데도 그는 아무 조치도 취하지 않고 나를 방치했다.

빚쟁이나 캐피탈 직원한테 엄마가 고개 숙이는 게 일상이었고(그때 엄마는 겨우 20대 후반이었다. 지금 내 나이다.),
내가 전화를 받을 때면 십중팔구, 이를 앙다물고 "000씨 있습니까."라고 말하는 3~40대 남자의 무서운 전화였다.
중학생 때, 집에 혼자 있을 때 경찰이 문을 따고 들어와서 빨간 딱지(압류 딱지)를 붙이고 간 일도 있었다.
내가 죄 지은 것도 없는데, 안전해야 할 집이, 언제든 공권력에 의해 침입을 당할 수 있다는 게 충격적이었다.

전화기만 울리면 엄마도 나도 경기가 나서, 전화선을 뽑아놓았다. 빚 독촉 편지는 뜯지도 않고 자루에 담았다.
(나는 지금도 집에서 전화벨 울리는 게 싫어서 전화를 안 쓴다.)

채무자 딸한테 인권따위는 없었다.
국가나 어른들, 심지어 아버지가 나를 지켜주지 않는다는 게 정말, 정말로 서럽고 어이없고 화났다. 세상이 싫고 사람이 너무 싫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그래서 내가 선택한 생존전략은 공부를 열심히 하고, 집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든지, 나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든지 눈 하나 깜짝 안 하고, 오히려 활짝 웃는 거였다.
어차피 저 부부싸움은 언제나 다람쥐 쳇바퀴 돌듯이 답이 안 나올 거고, 엄마가 고통받는 만큼 내가 감정이입을 하면 너무 힘드니까.

최신 유행을 선도하는 애들이나, 반의 권력(?)을 잡고 있는 일진 같은 애들이 내 인생을 해결해주는 것도 아니니까.
공부라도 잘 하면 10년 후에라도 이 집구석을 떠나서 서울로 갈 수 있으니까.

무엇보다도, 엄마가 저런 양아치 새끼와 끝끝내 이혼하지 않는 것이 진심으로 사랑해서라고 생각했으니까.
그렇다면... 이혼을 하면 오히려 엄마가 나를 포기할 수도 있고, 성추행 사실을 밝혀도 오히려 버림당할 수도 있으니까.

아버지에게 성추행을 당한 어린애의 사고과정은 딱 저 정도로 확정됐다.
 
무인도에 조난당하면 결국 탈수의 위험을 안고 소금물을 먹어서라도 탈출해야 하듯, 현재를 희생해서 미래를 얻으리라고 생각했다.



정말정말로 한국은, 범죄 피해자가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는지 예시를 만들고 널리 자랑스럽게 퍼뜨릴 필요가 있다.
왜냐면 인류가 존재하는 이상 범죄는 사라지지 않을 테고, 범죄 피해 후에도 삶은 남아있기 때문이다. 누구나가 피해자로서의 인생은 처음 살아보기 때문이다.

성범죄 피해 시 매뉴얼, 이를테면 병원에 가서 어떤 검사를 해야 하고 어디에 고소해야 하는지, 가해자가 분명히 어떤 처벌을 받을 것인지, 신원 보호가 되는지 등을 초등학생한테까지 현실적으로 가르쳐야 된다고 본다. 초등학생이나 10대는 그런 피해를 당해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고, 신원이 알려지는 게 싫어서 신고를 못하는 게 99%일 거다.

나는 설령 엄마가 나를 버리지 않고 끝까지 재판을 한다 해도, 재판에 나가야 한다는 사실 자체가 너무 고통스러웠다.
엄마에게는 돈도 없을 뿐더러, 아동 성폭행 미수, 초범으로는 기껏해야 집행유예나 나올까?
열살짜리의 증언만으로 혐의가 인정될 수 있나?
감옥에 간다 해도, 나온 후에 그에게서 우리 가족을 지킬 만한 제도적 장치가 있나?

나는 친부와 판박이인데, 그 수많은 방청객들, 또는 배심원들 앞에서 "내가 저 쓰레기의 딸이랍니다☆"하고 밝혀야 하는 건가?
괜히 나까지 '이상한 애'로 소문이 나서 이사를 가야 되는 건 아닌가?
또는 이상한 검사에게 걸려서 "너 즐겼지?" 같은 개소리를 한다면... 나 죽고 너 죽든, 미치광이가 돼버리든 할 것 같았다.


(아버지와 닮았다는 사실 때문에도 나는 나 자신이 너무 혐오스러웠었다. 게다가 그딴 핵폐기물이 나를 낳아준 애비이니 그 부분은 감사해야 하는 건가? 그런 도덕률이 너무 끔찍했고, 할 수만 있다면 그 징그러운 에일리언 유전자를 나한테서 긁어낼 수만 있다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지금 상황은 거지같지만 10년쯤 지나면 법도 변하긴 하겠지... 라고 어렴풋이 기대했었다. 그러나 강산이 두번 바뀐 지금도 그다지 안 변했다 ㅋㅋㅋㅋ



답이 없었다. 그래서 나는 엄마에게 성추행 사실을 들키지 않으려고
예전처럼 엄마 앞에서 친부에게 밝은 표정으로 말을 하고, 팔짱도 끼고, 학교에서 칭찬받았던 일, 친구와 재밌었던 일만 앵무새처럼 반복했다.
남들 앞에서는 그 사실을 절대 들키지 않고, '예의바른 효녀' 타이틀을 얻을 겸해서, "아버지를 존경한다"는 헛소리를 진심처럼 말했다.
30대에 빚을 잔뜩 지고 실패한 인생인 아버지를 존경한다고 말하면, 백이면 백 "이 아이는 너무 순진해서 저런 아버지라도 존경한다고 하는구나. 안쓰럽게도... ㅉㅉ..."라고 생각해서 내 평판이라도 좋아지니까.

친자식에게 역겨운 짓거리를 하고도 뻔뻔하게 "너는 여자애가 살이 쪄서 그게 뭐냐?" "엉덩이 좀 만져보자" "너는 왜 그렇게 못생겼냐?" 하는 저 새끼의 모가지를 잘라버리고 싶다는 얘기는... 끝까지 참았다.
(너는 남자새끼가 아내랑 ㅅㅅ도 못해서 그 못생긴 딸을 강간하려고 했냐?^^ 하고 말해줬어야 했는데. 그 새끼가 노후에 딱 나만큼만 고통스러운 인생을 살기를 기도한다.)




날이면 날마다 문을 쿵쾅쿵쾅 두드리며 전쟁을 방불케 하는 사채업자들, 그리고 혹시 내가 자는 사이에 친부가 나를 만지지 않을까? 하는 공포로 몇 년 동안 잠을 잘 못 잤지만, 항상 피곤하고 표정이 어두워서 학교에서 왕따를 당하기도 했지만,
내가 학교에서까지 하찮은 인생을 살고 있다는 걸 세상에서 제일 사랑하는 우리 엄마에게 말하고 싶지 않았다.

또 한 가지는 "나는 절대로 저 새끼를 살인해서 죄책감 같은 마음의 짐을 지지 않을 것이다." 였다. 저딴 핵폐기물한테 그런 감정을 느끼면 내 자신이 너무 어이없을 것 같았다.
저딴 새끼에게 나왔지만, 나는 동시에 엄마의 딸이기도 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올바르게, 남부럽지 않게 자라고 싶었다.
너무 격에 맞지 않게 후진 인생을 겪고 있는 엄마에게, 나 하나라도 보상이 되어주고 싶었다.


다행히 어른들은 내 연극에 잘 속아 넘어갔다.

나는 누군가가 나를 발견해주기를 애타게 기대하면서도, 절대로 이런 내 모습을 엄마에게 들키지 않기를 간절히 바랬다. (feat. 만화 '달이 움직이는 소리, 윤지운', '사립학교 아이들, 커티스 시튼팰트' 이 사람들은 어떻게 내 맘을 이렇게 잘 알까 ㅠㅠㅠㅠ)



아버지의 성추행 후
남은 초등학교 중학교 동안, 학교에 다녀와서 집에 아버지만 있으면 바로 나와서 밤까지 버스 정류장에 앉아 있었다.

왜. 인생이 왜 이렇게 힘든 건지, 대체 왜인지.
남들도 이렇게 힘들게 사는지.
대체 이게 무슨 감정인지도 모른 채로 울다가 웃다가, 도로에 대고 고래고래 소리도 질렀다가... 하루에도 몇 장씩 일기를 썼다가.
인생을 사는 게 아니라 어디 감금돼 있는 것처럼 항상 답답하고 울고 싶고, 머리가 빙글빙글 복잡했다.

그 때 나는 가장 많이 곪아 있고 삐뚤어져 있는 애였고 세상에 대한 억하심정과 복수심으로, 악으로 사는 애였다.
사이 좋은 부녀를 보면 "혹시 저 집도?" 같은 생각이 들기도 하고,
아이스께끼 같은 장난을 치는 남자애들을 보면 "저딴 새끼들은 왜 태어났을까. 안 태어났으면 좋았을텐데. 남이 싫다고 하는 행동을 반복하는 저런 새끼들은 커봤자 아빠 같은 쓰레기가 될텐데."같은 생각이 들었다.
나를 은근히 따시키고 뒷담화하는 애들을 보면 "내가 적어도 니 새끼들보다는 잘 될 거다."라고 이를 갈았다.


몇 년이 걸리든지간에 이 모든 역겹고 고통스러운 일들을 다 참아내서, 이따위 것은 다 이겨내는 강한 사람이 돼서, 이런 시궁창 같은 데를 벗어날 거라고.
결국에는 내가 이길 거라고.
그렇게 생각했었다.



종종 어떤 사람들은 "애는 애다"라고 말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런 어린 시절을 겪었고, 대여섯살 정신연령보다 못한 어른들을 겪은 나는
어린아이도 배신감을 느끼고, 생존욕구가 있고, 복수심이나 살의를 느끼고, 어쩌면 어른보다 더 생존능력이 뛰어나다고 본다. 
위기 앞에서 애들은 어른보다 더 상처받고, 더 크게 철이 든다.
불순물이 박힌 채로 자라나는 과일 같은 것처럼.
나는 부디 세상 사람들이 아이들을 이렇게 일찍 철들게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슬픈 것은, 나에게도 몇 번 어른들이 알아챌 기회가 있었지만 그 시절 어른들은 항상 바빴다.
국가에서 실시하는 심리검사에서 내 정신건강이 매우 나쁘다고 나와도 담임선생님이 엄마를 부르지 않았다.
일기장에 만날 힘들다는 얘기를 쓰는 여자애에 대해서 담임선생님들은 하나같이 "참 잘했어요" 도장만 찍어주고 끝이었다.

설령 내가 죽었어도, 아무도 찾지 않는 게 당연했을 시대였다.

내 주변에서도 암울한 일이 수없이 많았다.
힘없는 아이들을 학대하거나 방임해도, 아무도 책임지지 않았고
아무도 그 아이들의 안부를 궁금해하지 않았다.



부디 학교에서 아이들을 다 케어할 수 있는 사회가 되면 좋겠다.
상담문화가 당연해지고 상담선생님이 많이 계셨으면 좋겠다.
학교에 경찰을 배치하면 좋겠다.

사채업자나 법원 직원이 미성년자 있는 집에는 못 들어갔으면 좋겠고,
누구나 딸 옆에 남자친척만 집에 남겨두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게 아버지든 10살짜리 남자애든 할아버지든 간에.
아이를 절대 혼자 두지 말았으면 좋겠다. 초등학교 고학년이거나 10대여도.
아버지라고 해도, 고작 초등학교 저학년 아이라고 해도, 함부로 아이 몸을 만지지 말았으면 좋겠다.
남자애라고 해서 성범죄를 당하지 않는 시대도 아니니 남을 너무 믿고 맡기지 않았으면 좋겠다.

내 친부는 초등학교 1학년 때 내 팬티에 손을 넣어 엉덩이를 만졌고, 엄마가 그런 행동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내가 고3이 되어도 친부가 "얼마나 컸는지 볼까~?"하는 행동을 엄마가 그냥 놔둔 것이 나는 정말 한이다.
내가 싫다고 의사표현을 해도 아무 생각 없이 나를 조롱하는 그따위 인간이었고, 엄마가 제지하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성범죄 2차 피해를 주구장창 당한 셈이다.

엄마 친척이나 친구도 혼자 따라가지 말고, 담임 선생님과도 단 둘이 있지 말라고 한 우리 엄마가, 미처 직계 가족의 성범죄율은 알지 못했다.






그리고 아이가 항상 착하기만 하고 좋은 얘기만 한다면,
애가 학교폭력을 당하고 있다는 걸, 아프다 못해 죽을 만큼 너무 아파서 말도 할 수 없는 비정상적인 상황이란 걸 인지했으면 좋겠다.

사춘기에는 반항하고 까칠한 게 정상이다.


무엇보다, 누구든지 아이를 낳을 거면, 꼭 행복한 부모가 됐으면 좋겠다.
불행한 부모 밑에 자란 아이는 다른 이유가 없더라도, 거의 불행하다.
당신 배우자가 당신을 불행하게 만드는 사람이면, 아이도 당신 눈치를 보며 그 사람을 억지로 좋아하는 척하는 중일 수도 있다.




다행히 내 인생에는 반전이 있었다.

나 자신이 너무 기특하고 좋았다. 대학교에 들어가니 뭘 하든지 행복했다.
더 이상 눈 앞에 죽이고 싶은 사람을 안 봐도 되니까 행복했다. 엄마도 친부와 소원해졌기 때문에 나도 그냥 안 만나면 그만이었다.


이대로 학교를 열심히 다니면 분명 평생 걱정 없이 먹고 살 터였다.
항상 선생님들에게 칭찬받았기 때문에 대학생활도 그렇게 흘러갈 줄 알았다.

그런데 그렇게 아름다운 캠퍼스 라이프를 시작하려던 찰나에 뭔가 심각하게 잘못됐다는 걸 깨달았던 것이다.


아버지가 식물인간처럼 아무런 반응 없는 것에 익숙해졌기 때문에, 나는 한번 화를 내면 심하게 화를 냈다. 화를 주체하기 어려웠다.

그런 '벽'한테 화내며 20년을 살다 보니까 적당히 화를 내는 게 어느 정도인지 몰랐다.

자연스럽게도... 나의 유일한 멘토인 엄마는 항상 울화병이 가득했고,
아버지와 함께하는 모든 순간이 분노였으므로 화를 낼 때면 무시무시하게 화를 냈다.

엄마가 화를 낸다는 것은 나에게 생존의 공포였다.
실제로 여덟살 때 엄마가 내 앞에서 가출을 하겠다고 해서 엄마의 트렁크에 매달려 말린 적도 있었기 때문에

누군가 나에게 화를 낸다=문제가 생겼다=문제란 건 언제나 해결불가임=내 인생 끝남

이런 등식이 성립돼버리고 만 것이다.



나는 엄마가 화를 내지 않도록, 엄마가 나를 버리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서 웃었고
최선을 다해서 착한 아이로 살았다.
한번도 어른들의 말을 어기지 않고 한번도 누구를 미워하지 않으려고
갖은 애를 쓰고
 
에x랜드가 가보고 싶고, 새 장난감이 가지고 싶어도, 주말에 엄마가 나와 시간을 보내주지 않아도
학교에서 왕따를 당해도
참아서
한만 남았다.




엄마는 날이면 날마다 나에게 사랑한다고 얘기했다.
"나는 언제까지나 딸 편이야. 설마 딸이 살인을 했더라도 나는 딸을 버리지 않을 거야."
"내 딸, 할 수만 있다면 너에게 금은보화라도 가져다 주고 평생 여왕처럼 아쉬움 없이 자라게 하고 싶다."했다.
학교에서 험한 일을 당하고 집에 돌아와도, 엄마의 따뜻한 말 몇 마디면 다음 날도 어찌어찌 살아낼 수 있겠다는 용기가 되었다.

나를 키운 건 팔할이 엄마의 따뜻한 지지였다.

그런데 열살짜리 어린애는 그 말을 이해하지 못해서, 심지어 스무살이 되어도 그 말의 뜻을 몰라서
고작 이혼을 하면 나를 버릴 거라고 생각했던 게 너무 가슴 아프고 아쉬울 뿐이다.


만약 이혼을 하게 되면 나는 어떻게 되는 건지 말이라도 한 마디 해줬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같은 아쉬움도 있다.

 


'착한아이 컴플렉스', '착한 딸 컴플렉스'란
바로 내가 처했던 저 상황
부모님의 불화로 인한, 생존에 대한 공포로 인해 만들어진다고 한다.



부디 꼭 아이 앞에서는 화난 모습을 절대로 보이지 말고, 둘이 따로 싸우고
싸우더라도 절대 소리 지르지 말고, 폭력적인 행동은 하지 말아야 한다.

싸움이 노출되더라도 "이러저러한 원인이 있고, 이러저러하게 협의가 되었다. 싸움은 언제나 있는 것이고, 해결책을 찾아 나가는 과정이지 파멸의 과정이 아니다."라는 사실을 알기 쉽게 설명해 줘야 한다.
안 그러면 아이는 무조건적으로 공포에 떨 수밖에 없다.


아이에게 부모님은 세상 전부이다.

아이에게 어른의 문제를 전가시키지 마라. 어린아이는 해결도 못할 문제이면서 부모님 문제를 같이 걱정할 수밖에 없다. 그 스트레스는 말도 못 한다.

아이가 해결 못할 문제는 애초에 노출시키지도 마라.


 
이러한 '착한아이'들은 무슨 일이 있어도 부모님이 나를 책임질 거라는 확신과
사람이 화를 내거나 싸우는 것이 오히려 자연스럽고 바람직한 일이라는 것을 강하게 설명해서 이해시켜 주면
행복하게 잘 클 수 있다.
 

 

결론적으로 스무살의 나는 첫단추를 아예 잘못 끼워버려서 남에게 감정이입도 안 되고, 대화도 불가능한... 사람이 아닌 상태였다.

화를 내는 것이 무슨
상대 심장에 칼을 꽂아버리는 행위와 비슷하다고 생각을 했으니.

무언가 남에게 지적하고 싶은 일이 있어도 화를 내자니 그건 너무 인간으로서 못할 짓이기 때문에 할 수가 없고
그렇다면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지 몰라서 발만 동동 구르고, 맨날 호구처럼 당하기나 하고 ㅎㅎㅎㅎㅎ

반대로 누가 나를 지적했는데
어버버버버 하고나 있고 ㅎㅎㅎㅎㅎㅎ


이딴 인간으로 자랄 거였으면 뭐하러 그렇게 노력을 했나, 뭐하자고 무고한 남자사람을 사귀어 이 고생을 시키는가...
널리 세상을 이롭게 하는 홍익인간이 되겠다는 어릴 적 다짐은 "너같은 괴물은 살지 말아야 남에게 도움이 되지 않냐?"하는 비수로 돌아왔다.

내 인생, 내 꿈이었던 대학교도 재미가 없었다. 학점이 좋아봐야, 능력 좋은 괴물 아니면 남에게 상처만 주다 혼자 늙어죽는 인생이 될 거란 생각이 들었다.
운 좋게 세상에서 제일 자상하고 착한 신랑감을 만난다고 해도, 내가 그를 상처입힐 게 뻔했다.




  
극뽁! 노하우

총 네 가지.
심리상담, 서비스직 아르바이트, 엄마의 보살핌. 
내가 잘 하는 것을 해보기.

 

대학교 2학년 때였나? 엄마가 "중요한 일이 있다"고 정색하며 나를 집으로 불렀다.
나는 "혹시 아빠가 토막살인이라도 했나?"라고 생각했다.

가보니까, 엄마가 자못 심각한 듯이 "이혼했다"는 거다.

어, 그래서?
......그게 끝이야? 하는 기분이 들었다.
이렇게 쉽게 할 걸 왜 그동안 안 했던 거지? 어이도 없고.
 

근데 알고보니 친부가 이혼하면서 "사랑과 전쟁" 한편을 찍었다.
엄마는 내가 다 크기도 했고, 아버지 뒤치다꺼리 해주는 삽질이 너무 지쳐서 내가 고등학생이 됐을 때부터, 그 새끼가 먹고 살든지 말든지 냅뒀다.
그러면서 친부가 자기 돈으로 셋방도 얻고 밥도 사먹길래, "좀 사람이 되려나?" 하고 헛된 기대도 했다.

(* 다시 한 번 강조해도 부족하다. 기생충 인간형들이 꿈에서라도 바뀔 거라고 생각하지 마라. 아마 살인마에게 찔려서 온몸을 얼기설기 이어붙여서 한 1년 혼수상태였다가 살아나더라도 안 고쳐진다.)


내가 대학생이 되고 얼마 후에 친부가 선뜻 "이혼하자"고 문자를 보냈다.
엄마는 "이게 웬일?"이라고 신나는 마음으로 합의이혼을 하러 갔다.
이 핵폐기물에게는 위자료를 낼 만한 돈 따위 없으므로 "먹고 떨어져" 같은 심정이었다.

근데 그렇게 이혼을 하고 난 2주 뒤,
지인에게 "자네 남편 결혼해? 한달 전에 청첩장 뿌렸어." 라는 말을 듣게 되었다.
 
???????????

 


엄마는 그 후로 1년 동안 너무 어이없고 황당하고 힘들어서 살이 5kg나 빠졌다.
아내가 한참 젊고 뒤치다꺼리 다 해줄 때는 죽어도 이혼 안 해주다가 밥 안 챙겨준다고 딴 여자를 찾아서 간 것이다.
친부에게 아내란 건 그냥 몸종이었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은 것이다.


그 후로도, 친부가 이미 몇 개월 전에 싱글이라고 하면서 선을 봤다는 얘기와
우리 집에 웬 모르는 여자 이름으로 카드 청구서가 날아온다든지 별 쓰레기 같은 지저분한 뒷마무리를 남기고
핵폐기물은 우리한테서 떠나갔다. 다행히도.



다행히 그 새끼 이름으로 된 재산이 전혀 없어서 돈 문제는 없이 끝났다.
혹시라도 배우자 싹수가 노랗다면 꼭 위자료를 받을 만한 증거를 남겨두는 게 좋다.
 
배우자가 개막장이어서 그냥 돈 포기하고 합의이혼을 하고 싶더라도, 재판까지 가는 게 나중에 후회가 없다.
상대가 돈이 없어서 뜯어낼 게 없더라도, 요새는 양육비 받아주는 국가기관이 따로 있더라... 하...... OTL



사람이라면 누구나 법률을 알아야 하고, 설령 자식이나 배우자에게 돈 빌려줘도 차용증은 꼭 쓰고, 절대 보증서주지 말아야 한다.
죽을 나이가 안 됐어도, 유언장을 꼭 써야 한다.

엄마랑 외가 사람들이 법을 몰라서, 나 어릴 때 집 경매도 속수무책으로 당한 거였다 ㅎㅎ
집을 공동명의로 해놓으면 부부 중 한 명이 신용불량자가 되어도 함부로 경매에 넘길 수 없다.

사람 말이 아니라 서류를 믿어라.


우리 집이 똥망했던 IMF 시기에는 신용도 없는 놈한테 카드도 잘 발급해주고, 사채업자가 아무 때나 전화하고, 하여간 막장이었다.
현재에도 법은 언제나 완벽하지 않으므로 미리 조심하는 게 좋다.
법률구조공단에서 무료 법률상담도 제공하고 있으니 추천함.

 
 
 

그런데 친부의 이 막장 쓰레기스러움은 나에게도 타격이 컸다.
내가 글 처음 부분에, 나를 죽일 살인자를 사랑하는 건 병신이라고, 추억팔이고 나발이고 당장 도망쳐야 된다고 그랬지?

내가 그랬다.
나는 스무살 때까지 아버지가 "악의가 없을 거다"라고 믿었다.
나를 자식으로 생각하기는 할 거고, 미안한 마음은 있을 거라고 믿었다. 사랑까진 아니어도 그 새끼를 아버지라고 생각해서 좋아하기는 했다.


그 사건 후로는 직접적으로 성추행하려 하지 않았고, 저렇게 무뇌아 같이 아무 생각이 없고, 그나마 인간이라면 양심이라도 있다고 생각했으니까.
해마다 그가 "내년이면 사업이 나아질 거야" 같은 "여러분 서울은 안전합니다!" 개소리를 하는 게 진심이라고 믿었으니까.

그리고 나는 병신같은 성선설을 믿는 독실한 크리스쳔이었으니까.
설령 악인이라도 하해와 같은 마음으로, 관대한 내가 용서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멍청하고 부주의했던 나에게도 일부 책임이 있다고 생각했다.
 
 



근데 이 새끼가 나에게 아무런 사과도 없이 도망가버린 걸 보니
내가 핵폐기물에서 생명이 소생하기를 바랐구나...
이런 놈도 용서해야 하나... 참 어이가 없고,
사람 새끼가 어떻게 그러냐고 신한테 따지기라도 하고 싶었다.

엄마가 "아버지에게 버릇없이 굴면 안 되지!"라는 발암스러운 말을 하는 것을 평생 들으면서
깍듯하게 별 병~신~ 같은 '아버지' 취급을 해 주고, 사춘기 하나 없이 애교라는 이름의 가식을 부리고(나는 여우주연상 하나쯤 타야 한다), 칼 들고 안 덤볐더니
돌아오는 건, 지나간 쓸모없는 세월과 조롱뿐이구나.


아직 10대일 때 찔러버렸어야 했는데. 딱 죽기 직전만큼 아프게.
준법정신을 지키며 욕도 안 하면서 수도승처럼 살아온 게 너무 후회가 됐다.



너무 뒤늦은 깨달음과 함께 현자 타임이 오고...
 
내가 뭐하자고 그렇게 힘들게 살았지?
엄마도 그 쓰레기를 싫어하는 줄 모르고 내가 괜히 헛짓거리 한 거네?
엄마는 내가 아버지를 진짜로 좋아하는 줄 알고 버틴 거였구나.
아 인생 ㅋㅋㅋㅋㅋㅋㅋㅋㅋ 병신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근데 그 고생 해놓고 제대로 큰 것도 아냐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괴물 새끼가 괴물이 돼버렸네ㅋㅋㅋㅋㅋ
그 새끼처럼 나도 남의 말을 못 알아듣는 인간 외 규격이지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같은 생각이 내 머리를 강타했다.




 
거기다 엄마 없는 생활은
너무 힘겨웠다.
친구도 없었다.


어릴 때, TV에서 "어려운 고학 생활"이라고 하면 "유학 갔는데 왜 힘들지? 선진국 문화 좋다고 하던데? 난 집에서 벗어나면 어디든 천국일 것 같은데" 라고 생각했었다.
이제는 왜인지 안다.

내 또래 한국인들은 대부분 "혼자 사는 법"을 배우지 않았다.
"너는 공부만 해. 엄마가 다 해줄게" 식으로 가르친다.
거기다 우리 엄마는 특히 나한테 "너는 나처럼 손에 물 묻히지 말고 살라"며 집안일에서 항상 날 열외시키곤 하였다.
그래서 막상 혼자 살게 되니, 이 모든 살림부터가 고통이었다.


거기다 돌아버리겠는 게,
대학교는 고등학교와 반대로 "니가 알아서 해"라고 가르친다.
나는 우리나라의 주입식 교육에 최적화된 인간이었다.
누가 시키는 대로 하는 생활에 너무 익숙했다.

내가 뭘 하고 싶은지 전혀 몰랐다.

소위 '창의력'을 발휘하는 수업은 내게 너무 어려웠고,
"이걸 왜 해야 되지?" "난 어떤 사람이지? 뭘 좋아하지?" 전혀 알 수 없게 돼버렸다.


내가 좋아할 거라고 생각해 선택했던 전공이 나에게 고통을 주었다.

고등학교 친구들처럼 재밌고 똘끼가 넘칠 거라고 생각했었던, 대학 동기들은 다 점잖고 차가워서 너무 무서웠다. 내 또래 아닌 것 같았다.
고딩 때는 친구들이랑 너무 재밌게 놀았는데... 대학교 친구는 정말 사귀기 힘들었다.
(나중에 생각해보니까, 아무리 또라이라도 대딩이 되면 누구나 점잖은 척을 하는 것 같다. 동아리방에서 술판도 벌이고 그래야 친해지나 보다. 대학 생활도 전략이 필요한 걸, 그걸 내가 몰랐네~)



내 비밀, 스트레스를 남들과 도무지 공유할 수 없었기 때문에 더더욱 친구가 없었다.

내가 그딴 쓰레기를 아버지로 만나 얼마나 힘들었는지, 얼마나 고생했는지, 공감해줄 만한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세상 사람들 모두가 너무 정상적이고, 이런 얘기를 해봤자 동정만 받을 것 같았다.

나만 이상한 나라에 뚝 떨어진 것 같았다.
 
 
 


(1) 심리상담
남자친구를 사귀고 얼마 되지 않아
이대로라면 내가 죽겠다 싶어서 근처 아동상담소를 찾아갔다.
학교 홈페이지에는 취업 상담실만 나와 있어서-ㅂ-

상담비가 1회 7만원. 하... 정말 비쌌다. 보험도 안 되는데...... (대체 아동상담소조차도 이렇게 비싸면, 국가는 아이들의 정신건강에 전혀 신경도 안 쓴다는 말밖에 더 되나? 자폐증이나 ADHD, 이런 거 흔하던데 그냥 치료 포기하고 살라고?)
하지만 몇 백만원이 들든지 간에, 내가 그런 괴물밖에 되지 못하리라는 생각에서 좀 벗어나고 싶었다.
내 미래를 다시 되찾고 싶었다.
무슨 대가를 치르더라도. 과거 내가 엄마에게 버림받지 않기 위해 성범죄자에게 기꺼이 웃으며 '아버지'라 부르는 연기를 해왔듯이.
목숨 걸고. 뭐라도 하고 싶었다. 과거의 망령에 잡아먹히는 건 죽기보다 더 싫었다.


다행히 학교에 상담실이 있고, 선생님도 인상이 선한 여자분이어서 마음 놓고 상담을 시작하게 되었다.

몇 년 동안 상담을 받으면서 정말 내 속을 다 갈아넣는 시간을 보냈다.
사람이 "죽어도 안 변한다"는 말은 정말로 뼈저리게 맞다.
나 자신을 바꾸는 것보다 차라리 칼에 찔리는 게 백 배는 덜 고통스럽다.
내가 아버지와 같은 괴물이라는 걸 인정하는 건 죽음보다 더 싫은 고통이었다.


생각해봐라.
'매트릭스' 안에서 잘 살고 있는 백만장자가, 이 모든 게 허상이라는 사실을, 자신의 몸이 외계인의 연료로 쓰이고 있다는 사실을 꿈에라도 생각해봤을까?

나는 20년 동안 나 자신을, 환경을 극복하고 아름답게 살아가는 멋진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주변 어른 모두가 나를 인정했고, 기특하다고 했고, 나는 어른스럽고 착한 애라고 했다. 친구들도 나의 비글미와, 덕력, 4차원스러움을 좋아했다. 내성적인 성격에도 불구하고 열심히 똘끼를 발산했더니 고딩 때는 인생 최고 친구 수를 찍었었다.
나는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럼 없이 살아왔다. 내가 가는 길은 언제나 나와 엄마를 살리는 길이었고, 20년 동안 내 선택은 언제나 옳았다. 여덟 살짜리 꼬맹이였을 때도 나는 가장 좋은 길을 선택하는 똑똑한 애였다.


근데 이제 와서 내가 다 틀렸다니.



나는 뒤끝이 없는 성격이었다.
당장 오늘 우리집에 불청객이 들이닥쳤어도, 일단 저녁에는 잠을 잤다.
사채업자는 날이면 날마다 찾아오고 엄마아빠는 날마다 싸우는데
그게 속상하다고 잠도 안 자고 밥도 안 먹으면 내 인생까지 망칠 게 분명하므로.

내가 아무리 울어도 어른들은, 부모님은 눈 하나 깜짝 안 했고, 문제가 해결되지도 않았고, 나를 전혀 불쌍하게 여기지도 않으니.
화를 내도 내 말은 언제나 무시당하므로.
내가 할 수 있는 거라야 거기서 피하는 것, 그 상황을 무시하는 것밖에.

나는 무슨 고난이든 견뎌낼 수 있는 강한 사람이라고 스스로를 격려했지만
스무살이 되어 깨달은 사실은 그냥 감정이 없다는 거였다.

 
아침에 엄마에게 혼나고 난 후, 점심이면 잊어버렸다.
나쁜 감정은 잊어버리는 게 주특기가 됐다.
그러다보니 남이 나에게 안 좋은 상황을 얘기하면,
그 정도는 나라면 잊어버릴 일인데... 어떤 반응을 해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최근에 남자친구에게 "너는 남의 감정에 무관심하다. 소시오패스 비슷한 거다."라는 진솔한 평가를 받았다.
아마 이 소리를 들은 게 몇년 전이면 진짜 잠적해버렸을지도 모른다.

지금은 "뭐, 그런 면도 있지."하고 만다. 나는 내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만 집중하면 그걸로 족하다. (직장에 있는 또라이를 상대하는 데 이 무신경함이 매우 효과적이기도 하다☆)
내가 무슨 짓을 해도 진정한 핵폐기물은 '못 될' 거라는 걸 알기 때문이다.


남자친구는 나의 폐인같은 모습을 몇년 동안 아무렇지 않게 참아준 사람이고 "너는 절대로 괴물이 되지 않는다"고 단언해준 사람이다.
마치 지구가 돈다는 말처럼 아무렇지도 않게 그런 말을 해준 게 나는 너무 고마웠다.
 
만약 당신이 나처럼 완전체나, 가정폭력범이나, 알코올중독자나, 성범죄자, 불륜남, 아동학대범, 하여간에 쓰레기의 아들/딸이라고 해도
당신은 그 사람을 이해하기 어렵다.
난 절대 저렇게 살지 말아야겠다 생각할 거다.
그 사실 자체로 당신은 괴물이 아니라는 뜻이다.




그리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나와는 다르게, 친구를 사귈 때 그 사람이 도덕적인지는 별로 따지지 않는다. 같이 놀면 재밌는지가 중요하지.
설령 내가 악당이 되더라도 친구 한 명도 없이 인생을 마감한다는 막장 결론은 나지 않는다. 치매가 걸려서 대화가 안 되면 모를까;;




사람은 누구나 평생동안 남에게 상처를 주고, 문제는 그것에 대해 어떻게 해결하느냐다.
한번 실수했다고 괴물이 되는 것은 아니다.

당신의 실수 한 번에 친구나 가족이 큰 피해를 입을 거라고 생각하는 건 자의식 과잉이다.
당신은 그렇게 대단하지 않다.
당신의 친구의 말에 일일히 상처받을 필요도 없다.
나무에서 잎이 하나 떨어졌다고 나무가 죽을 거라는 뜻은 아니다. 나뭇잎은 언제나 떨어지는 것처럼, 실수와 갈등은 언제나 있는 것이다.


당신이 무언가를 실패해도, 그건 당신이 쓰레기라는 걸 증명하는 게 아니다.
고양이는 참치캔을 못 딴다. 돌고래가 기타를 칠 수는 없다.

지금 계속 실패하고 있다면, 그건 길을 잘못 들어서지 당신이 잘못돼서가 아니다. 




나는 안 친한 사람들에게 나는 그냥 다 괜찮다고 하는 호구였고, 친한사람에게 벙어리 아니면 분노조절장애자였다.
사랑하는 사람이 화를 내는데 혀가 굳어 버리고 머리가 핑핑 도는 나 자신.

누군가 나에게 화를 내면 살해 위협을 받은 것처럼 가슴이 쿵쾅대고 정상적인 사고를 할 수 없었다.
내 목에 칼을 댄 채로 토론회를 하라고 재촉하는 것 같았다.


화를 내야 할 시점에서 화를 내지 못했다.
아니, 아프다고 전혀 인지하지 못했다.

내가 사람들의 어떤 행동에 기분 좋아하고, 어떤 행동에 화가 나는지 전혀 알 수가 없었다.


상담 선생님이 "그 상황에서 어떤 기분이 들었나요?" 라고 물어보면,
"어.... 글쎄요...."라는 말만 나왔다.
그냥 바보처럼 울기만 했다.



'착한 아이'는, 병신이다.

피가 철철 나도 행복하게 웃는 건
시체다.




아이들은 어른에게 보호받고 존중받아야 할 존재이지
어른처럼 완벽해야 할 필요가 없다.
부모를 보살펴야 할 이유도 없다.

그걸 아이에게 기대하는 부모 자신도 아이에게 아무렇지도 않게 상처를 주면서
왜 아이는 부모를 속 썩이면 안 되는지.

부모는 아이가 자기를 버리지 못할 걸 아니까 쉽게 아이를 괴롭히면서, 아이는 부모를 속 썩이면 자기가 미움받고, 버림받을지 모른다는 공포를 겪어야 하는지.
아이는 그 말을 진심으로 믿고, 나를 죽을 만큼 괴롭히는 놈이 있어도 "부모님께 폐가 될까봐" 입을 꾹 다물고, 어떤 아이는 차라리 스스로 죽는 끔찍한 방법을 택하게 되는데 말이다.

제발 아이들은 그냥 행복하게 잘 자라게 두고, "착하게 살라"는 강요조차도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인생은 예의만 있으면 된다. 착하다고 복이 떨어지지 않는다.





내가 좋아하는 만화 주인공이 스스로에게 "그렇게 되면, 제가 사람으로서 살 가치가 있게 되는 걸까요?"라는 표현을 한다. (feat. 스킵!비트)
그 만화를 보면서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내가 과연 사람이 될 수 있을까 싶어서.

상담을 계속하면서,
날이면 날마다 울고, 어떤 날은 밖에 나가는 것 자체가 너무 힘겨워서, "나 같은 괴물이 멀쩡하게 옷 입고 정상인인 척 생활을 해도 되는 걸까?" 스스로에게 회의감이 들어서, 약속을 미루고,
"나 따위가 열심히 공부한다고 해서 괴물이 아니게 될까?" 모든 일이 무가치하게 느껴졌다.


집중적으로 3년쯤 상담을 받으면 성격도 고칠 수 있다는 얘기를 어디선가 주워들었는데, 그 말이 아니었으면 정말 참기 힘들었을 거다.
3년은 걸릴 거라고 예상하고, 무료 상담이 가능한 현 상황에 감사하면서 ㅋㅋㅋㅋ 원껏 울었다.
했던 말 또하고, 또 하고. 힘들었던 기억에 대한 얘기를 고장난 테이프처럼 반복하면서.


"몸이 아플 때처럼, 마음이 아플 때도 쉬어야 한다."는 상담쌤의 말을 믿고 열심히 쉬었다.
그때의 나는 아수라 백작 마냥, 어떤 날은 기분이 좋았다가, 어떤 날은 심각하게 우울했다가 했다.


수업에 나왔다가 안 나왔다가 하는 나를 보고 어떤 교수님은 "지금 나랑 장난하니? 수업을 듣자는 거야, 말자는 거야?"화를 내시기도 했다.
그리고 나는 예외없이 화난 사람 앞에서 꿀 먹은 벙어리가 됐다. 더럽게 한심했다. 뭐 어쩌겠어. 그게 그 때 당시의 나였다. 지금 되돌릴 수도 없는 일이고.
(근데 내가 노안이다보니 교수님이 내가 자기 앞가림 잘하는 고학년인 줄 알고 화내신 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열심히 나가던 수업에서 갑자기 안 나오는 나를 보고 다른 교수님은 "너 무슨 일 있니? 말해보렴."하셨지만
부모님이 이혼해서라고 말하기에도, 우울증에 걸린 것 같다고 말하기에도 모두 부끄러웠다. 나약한 사람이라고 생각될까봐 두려웠다.
수업에 몇 번 빠졌음에도 화내지 않고 "나도 학생 때 그런 적이 있다. 무슨 일이 있었니? 과제를 제출하면 학점을 줄게"라고 하시며 무려 C를 준 교수님께는 아직도 정말로 감사하다.

내 인생에서 참 유례없는 민폐 순도 100%의 인생이었다.
스스로를 감당하기 힘들었다.

차라리 엄마에게 "내가 상태가 안 좋다"고 말이라도 했으면 휴학이라도 했을 것을...
차마 친부의 성추행 사실을 밝히지도 못하고, 이도 저도 아닌 시간이었다.



상담을 하면서 가장 도움이 되었던 것은 세 가지다.
(1) 절대로 나를 비난하지도 않고, 판단하지도 않는 사람이, 한 마디도 놓치지 않고 내 말을 들어 준다는 것.
(2) 감정을 표현하는 법을 배운 것
(3) 나를 객관적으로 보는 법을 배운 것


"00씨는 지금 힘들다. ~해서 슬펐었구나. ~해서 화가 났었구나."라고 조곤조곤 말해주는 사람이 있다는 건 큰 위로가 되었다.
사람이 감정을 드러내지 않고 꽁꽁 싸매고 있으면, 언젠가 그것은 그대로 터진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나는 매 때마다 어린애처럼 엉엉 울었고, 엄마가 나를 버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는 대목에서는 죽을 것 같았다.
일주일 내내 우는 것도 가능할 것 같았다.

상담 때마다 몇 년을 끊임없이 울어도 불쌍했던 나 자신에 대한 연민에는 미치지 못하는 것 같았다.
학교에 가면 왕따를 당하고, 집에는 사채업자가 들락거리고 성추행범이 상주하는.
그런 곳에 들어갈 수가 없어서 해 질 때까지 거리에 앉아 있었던 어린애.

내가 얼마나 힘들었는데, 엄마조차도 내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몰랐다는 게 슬펐고, 

몇 년이 되어서야 나는 그때 내가 "시베리아 벌판 한가운데 조난당한 것처럼" 끝없이 막막하고 춥고 외로웠다는 표현을 찾았다.

벙어리로 살다가 내 목소리를 찾은 느낌이었다.


아무도 '어린애'의 꿈 따위는 물어보지 않던, 다같이 힘든 처지라는 이유로 이웃의 고통을 봐도 내버려두고, 어린애에게 용기를 북돋아 주기는 커녕 귀찮은 짐 정도로 여기던 그 각박한 시대와 어른들이 야속했다.

어쩌면 그렇게 나에게는 아무도 관심이 없었는지...
왜 조용한 아이는 관심을 안 줘도 괜찮을 거라고 생각하는지.

 
 

감정을 정리하는 일은 먼지를 털어낼 때 온 집안에 먼지가 날리는 것처럼 온갖 나쁜 감정에 스스로 노출되어야 하는 일이다.

차라리 외로움을 몰랐을 때는 괜찮았다.
초딩 때 학원에 다녀와서 깜깜한 집에 들어설 때의 서늘함도
혼자 밥을 먹기 일쑤고, 밤까지 혼자 엄마를 기다려야 해도
아버지가 혹시 입막음을 위해 나를 죽이면 어떡하지? 하고 숨이 콱 막혀왔던, 그 사건 당시에도
나는 그저 살기 위해서 할 수 있는 한 열심히 한 건데, 또래들에게 우습게 여겨지고 아무도 내 생각을 이해하지 못할 때도.

그것이 외로움인지, 슬픔인지, 분노인지, 무력감인지 알 수가 없었기 때문에 참을 만했다.

그런데 엄마가 이혼을 하고,
알바 사장님이 "나는 딸을 갖는 게 정말 소원이었다"는 말을 하시며 나에게 간식이나 보너스를 챙겨주시고
아무리 진상손님이고 쓰레기여도, 자기 자식에게는 밥을 먹여주고 입가에 묻은 음식을 닦아주는 걸 볼 때면
TV에서 연일 행복한 가족들이 무난하고 평범하게 잘 살고 있다는 것을 볼 때면

인생은 원래 그렇게 힘들 필요가 없는 것이었구나...
견딜 수 없이 더 외롭고 슬펐다.



나는 왜 저런 아버지를 못 만났나.
친부는 평생 나를 고깃덩어리 보듯 했고, 사장님 자식들은 부모가 될 때까지 그 '평범함'이 고마운 것인 줄도 모를텐데...
왜 간절한 사람에게는 안 주어지고 가치를 모르는 사람한테 귀한 것들이 주어지는 건가.
단지 내가 불행했던 게 운이 나쁘기 때문이라는 건가.
 


묶여있었던 감정들이 죄다 빵 터져버려서 사람 꼴이 아니었다.

19살 때까지는 "I can do it!"이라고 말하는 활기찬 사람이었는데 이후부터는 정 반대로 "어차피 안 될 거야"라고 말하는 사람이 된 것이었다.

정말 적응이 안 되고, 늪에 빠진 것 같이 어떻게 이 상태를 벗어나야 할지 모르겠고...
그러다가 전공 교수님의 싸늘한 표정을 본 날이면 "난 쓸모가 없어. 어떡하지." 하는 생각이 들어서, 내가 대체 잘하는 게 뭔지 공포감이 들었다.

학교에서 만날 칭찬만 받는 데 익숙했기 때문에, 비판을 받는 것을 못 견디고, 죽을 것 같았다.
비판을 받은 데 대해서 어떻게 개선해야 하는지 도무지 몰랐다.




맨 처음 상담을 시작했을 때 가장 먼저 한 것은 내가 죽어도 못 하는 '미운 소리'를 해보는 거였다.

나는 내가 'No'라고 하면 친구가 떠날까봐, 싫어도 싫다고 말 못하고 20년을 살았다.
병이라고 할 만한 수준이었다.

남자친구를 사귀면서도 삐걱거렸다.
남친이 "오늘 시간 괜찮아? 괜찮은 거 맞지!?"하고 들뜬 목소리로 나에게 묻기라도 하면... 지금 생각해보면 별 어이없는 고민을 심각하게 했었다.

'어떡하지... 오늘 시험 일정 잡혔는데. 실망시키고 싶지 않아.
지금 와서 안 된다고 하면 "너는 시간 약속도 제대로 못 잡는 애"라고 실망이라고 하면서 실연당할지도 몰라.
어떡하지...이 남자 놓치고 싶지 않은데 ㅠㅠㅠㅠ 난 이런 것도 하나 제대로 못하는 쓰레기야...
무릎꿇고 싹싹 빌기라도 하면 붙잡을 수 있을까 ㅠㅠㅠㅠ'하는 고민을 하다가 결국 남자친구가 학교에 도착했을 때에야 안 된다고 말했다.

그러고는, 내가 그렇게 실망시켰는데도 남자친구가 우리 엄마처럼 소리치거나 나를 버리지 않아서
너무 고맙고 천사 같다고 생각하면서, 그거에 비하면 나는 쓰레기야... 어떡하지... 어떡하지... 이 찌질한 행각을 무한 반복했다.




처음 큰 용기를 내서 남친에게나 엄마에게 "싫다"는 의사표현을 했을 때는
날아갈 것 같았다.
 
옛날에는 누군가 나를 불편하게 하면, 그 사람 자체가 싫어졌었다.
어떤 애가 길을 막고 있거나. 나에게 실언을 하거나. 나를 오해하거나 할 때.
그 사람 자체에게 그런 배려없음이 배어 있어서 나를 힘들게 하는 거라고 생각했다.
차라리 속이 꺼멓든 말든 일본놈들처럼 남에게 폐를 안 끼치려고 모두가 노력하면 좋을텐데.
그러면 내가 싫다는 소리도 못 하면서 이 불편함을 참고 있지 않아도 되는데.
왜 불편한 건 난데 "불편하다"는 무시무시한 말을 꺼내야 하는 것도 나인가 했다.

근데 상담쌤이 알려주신 방법은 너무 실용적이고 좋았다.
예를 들어, "나는 민트가 싫더라. 내 아이스크림에는 섞이지 않게 해주면 안 될까?"
'나'를 주어로 한다. 내가 원하는 대안을 제시한다.
이런 것도 있다. 우리 엄마 어법인데, "우리 딸, 여기 빨래가 바닥에 떨어졌네?" 하듯이 물건을 주어로 하는 거다.
만약 "왜 너 빨래를 이런 바닥에 뒹굴게 뒀어?" 같은 말을 쓰면 같은 말이라도 상대를 공격하는 말이 된다. 그러면 상대방은 반기를 드는 마음이 생긴다. (근데 우리 엄마도 화나면 쓴다 ㅋㅋㅋ)

내가 나를 주어로 하는 화법으로 안 좋은 감정을 표현하니까 남친이 오히려 "솔직하게 말해줘서 좋다"고 해줬다.
내가 미운 소리를 하는 것보다,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이 더 괴롭다고 했다.
사람 사이에 갈등은 당연한 것이고, 이별할 거라면 자기가 싫은 소리를 할 필요조차 없다고 나를 다독였다.


엄마가 나에게 "미안해. 나도 섞이는 건 피하려고 했는데, 다른 그릇이 안 보여서 그랬어."라고 했다.
도마를 섞어서 쓴다든지, 물건이 뒤섞여 있는 게 엄마가 알면서도 일부러 그런 것인 줄 알았었다.


사람들이 나에게 일부러 나쁜 행동을 한다는 오해가 사라졌다.
적어도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은 내가 싫어하는 것을 하기 싫어하는 것이 본심이었다.
오히려, 그 사람들도 나에게서 사랑을 잃을까봐 걱정한다는 것을 알았다.
나에게도 관계의 주도권이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 나 자신을 누덕누덕 잘 메꿔가는 느낌이었다.


내가 우울한 것, 슬픈 것, 화난 것에 대해 엄마가 공감해줬다.
오히려 내가 어릴 때 힘든 일을 말하지 않은 것에 대해서, 엄마가 미안해했다.


물론 아직도 싫은 소리를 잘 못한다.
내가 뭘 싫어하는지조차 잘은 모르겠다. 요즘도 "싫다"는 느낌을 받아놓고, 뒤돌아서면 잊어버린다.

남친을 사귄 지 한 5년째 됐을 때까지도, 뭔가 지적을 당하면 자동반사로 벙어리가 돼버려서... 억지로 무슨 말이라도 꺼내느라고 정말 초인적으로 애썼다.
내가 게으른 것이 너무 참기 힘들다는 게 주 이유여서... '이번에야말로 놓치나보다 ㅠㅠ 그래... 내 욕심이야... 이런 좋은 사람은 나 같은 x 만나면 안 돼...'하는 생각을 참 많이도 했었다.
스윗한 사람을 사귀어 놓고도, 폭풍우가 몰아치는 연애를 했다 ㅋㅋㅋ

근데 지금은 사람 꼴을 갖추고 살고 있다.
아무래도 그때는 그냥 사춘기+우울증 맞아서 그렇게 폐인 같았던 것 같다-_-

"꾸미는 거랑! 인생이 꼬이는 거랑은 완전 다른 거야! 오히려 사회생활에 유리하다고! 예쁜데 인생이 망한 건 어머니가 그냥 사람을 잘못 만나서고!
정신차려! 넌 아무리 꾸며도 너희 어머니처럼은 안 예뻐져!" 남친이 수십번이나 주지시켜줘서 나아진 것 같기도 하고.
그 전에는 '예쁨', '여성스러움' 단어만 들어도 불쾌해질 만큼 컴플렉스가 심했으니. (그 두 단어는 '약함', '만만함'의 의미라고 생각했다.)



내 유년시절은 너무 냉골같아서, 제발 성인이 된 후에는 따뜻한 사람을 만날 수 있길 바랐다.
다행히 남친은 따뜻한 찐빵같이 동글동글하게 잘 생겼다. 하는 말도 동글동글 예쁘기만 하다.
성격도 나와 정반대로 꼼꼼하고 공감을 잘 해서 귀신같이 내 기분을 잘 파악한다.
나같이 덤벙거리고 그닥 안 예쁜 애한테 "나는 나보다 네 성격이 더 장점이 많다고 생각해. 너는 충분히 예뻐."라고 해준다 ㅠㅠ


집안도, 돈도 전혀 없는 내가 학력이라도 없었다면 감히 남친에게 대쉬도 못했을 것 같다.
그 점에서 나는 내 노력이 헛되지 않았다는 큰 위안이 된다 ㅠㅠ

내가 길 가다 "아!" 소리만 내도 "왜 그래? 무슨 일이야? 어디 부딪혔어? 아파?"라고 하고,
"네가 맛있는 음식 우물우물하는 걸 보는 게 좋아"라고 한다.
내가 3년 전에 했던 말을 기억해서 "아니야, 00이가 00는 싫어한다고 했어."라고 무심한 듯 여행 선택지에서 빼기도 하고 ㅋㅋㅋㅋ
사귄 지 10년이 다 돼가도 여전히 한결같이 동글동글 예쁘고, 나에게 사랑을 받으려고 파닥거리고, 그리고 나한테 바른소리를 마구 한다.
차가운 도시남자 스멜 뿜뿜했던 첫인상과 딴 판으로, 알아가면 알아갈수록 더 매력적이고 사랑스러운 사람이다.

20대의 나를 키운(?) 것은 팔할이 남친이다.
나에게는 상상속의 동물 유니콘 급이었던, '우리 엄마 인성 닮은 남자'가 실존한다는 걸 알려준 고마운 사람이다.

남친을 만나고부터는 이게 현실이 맞나? 싶고...
진짜 사람이 어쩜 이렇게 따뜻하고 귀엽고 사랑스러운지. 그것도 다 큰 시커먼 남자가;;
이건 말이 안 됨. 하여간 말이 안 됨. 내가 신이거나 내 남친이 하늘에서 벌 받고 쫓겨 내려온 천사임이 분명함.
신이 패치하다가 "어라 얘는 인생이 버그였넹?;; 미안하니까 버프 넣어줌ㅇㅅㅇa"이런 거 아닌가... 별별 생각이 다 들고 있다.





(2) 아르바이트, 엄마의 보살핌.
내가 일생일대의 용기를 내서 엄마에게 친부의 성추행 사실을 고백했을 때,
엄마는 정말 화를 내고 "뭐 그런 xxx이 다 있어? 내가 알았으면 가만 안 뒀어."라고 하셨다.
"지금이라도 다시 그 xx들 찾아가서 깽판을 놓을까? 아무래도 내가 속이 안 풀린다. 너무 화난다."고 하시면서 몇 년 동안 몇 번이고 나에게 물어보셨다.

나는 그 끔찍한 면상을 다시는 보기 싫어서
그리고 그 새끼의 재혼을 파토냈다가는 또 다시 이 쪽에 기생하게 될까봐서
그냥 두자고 했다.

무엇보다, 사회부적응자가 재혼을 했다고 해서 갑자기 사람이 될 리가 없기 때문에.
그냥 둬도 한 30년 후에 골목에서 노숙자로 발견될 인간, 굳이 내 손 더럽힐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제대로 된 구석이 하나도 없는 인간이란 게 참 다행이었다.


그래도 아주 속이 풀린 것은 아니었다.
어떨 때는 "공소시효가 남았는데, 신고를 할까?" 하다가도 "아니야, 연락처를 알게 되면 엄마한테 그런 것처럼 나한테 돈 빌려달라고 달라붙을 수도 있어."
"법원에서 아무 제재 없이 가해자한테 피해자 연락처 알려준다는데..."
또는 "때린 사람은 3일 만에 잊고 맞은 놈은 30년을 기억한다더니. 왜 이렇게 빡치지?" 싶기도 했다.

니 새끼 때문에 나는 성격도 삐뚤어지고, 인생의 밝은 면만 봐야 할 시기에 암흑의 구렁텅이에서 살았는데.
하지만 생각해볼수록 별 득도 없고, 무죄판결이 나올지도 모르고.
법률구조공단 변호사분께 물어봐도 딱히 이 핵폐기물이 내 인생에서 더 뜯어갈 건 없어서 냅뒀다.

 

 


또 한 가지 의외였던 힘든 점은,
꿈이었다.

날마다 악몽을 꿨다.
그 핵폐기물이 나를 찾아와서 열받게 하는 꿈.


심리상담에 큰 용기를 얻은 내가 온갖 쌍욕을 시전해도 그 핵폐기물은 빙글빙글 웃으며 나한테 기생충처럼 달라붙었다.
나는 생각만 해도 그리마 같고, 벌레같아서 끔찍한데
그 새끼가 내 손을 잡는다든지. 엄마에게 또 피해를 끼치려고 한다든지. 나를 차로 받아버리려고 한다든지.
내 결혼식에 나타난다든지, 온갖 등장으로 나를 빡치게 했다.

나는 다 극복했다고 생각했어도 그 감정이 쉽게 사그라들지 않은 모양이었다.

"저 새끼를 총으로 쏴버려야 되는데" 하는 생각이 너무 간절했지만
꿈인 줄 모르고 "참아야 해, 참아야 해"하는 생각만 하다가 끝나는 열받는 꿈이었다.

"총으로 쏴버리자. 그 새끼가 나타나면 꿈이다. 쏴버리자." 수백 밤 동안 자기 암시를 하고 잠들고 나서야
꿈에서 그 새끼를 쏴버릴 수 있었다.
너무 개운하고 행복했다.

그 후로도 꿈에 자주 나오기는 했지만, 이전처럼 열받지는 않았다.
얼마 지나자 아예 꿈도 안 꾸고 잘만 자게 됐다.



이미 말아먹은 학점에 대해서는
엄마가 "서울에 올라가겠음. 너님 학비 대줄려면 용돈은 직접 벌으렴. 콜?"하는 협상이 됐다.
 
엄마가 해준 밥도 먹고 ㅠㅠ 집에 온기가 도는 것 같아서 행복했다.
내가 찌질찌질한 소리를 하면 엄마가 "그건 너의 착각이란다~"하고 정정해줘서 생각이 더는 이상한 쪽으로 잘 흘러가지 않았다.



영어 점수도 올리고 용돈도 벌 겸 학교 영어 튜터를 했다.
새삼스럽게, 너무 낯설게도 칭찬을 받고, 후배들에게 "비법을 알려달라"는 얘기를 들었다.
그래 나는 수능식 공부에 강한 사람이지. 언어가 내 특기였었...지....? 뒤늦게 깨달았다.
(흔한 전공선택 실패의 예 OTL)

나도 어딘가 쓸모가 있구나.
뭔가를 가르치는 건 재미있구나.
내가 당연하게 포기했던 것들 중에서, 이렇게 재밌는 일이 있지 않았을까?

학과에서는 듣보잡인 내가 어학원에서는 대단하다는 소리를 듣는 게 신기했다.

무려! 번역 알바도 할 수 있게 되었다. 내가 별로 한 것도 없는데 급한 건을 해줬다는 이유로 큰 돈을 덥썩 안겨주는 분도 계셨고, 중견기업에서 인턴 해보지 않겠냐는 제안도 있었다.
자존감이 바닥을 치고 있었고, 내가 그 정도의 능력을 갖고 있다고는 전혀 생각을 못 해봤기 때문에... 너무 얼떨떨했다.

바닥까지 내려간 자존감이 조금씩 회복되었다.




아르바이트는 꽤 재밌었다.
그리고 참 빡쳤다.


(서비스직 알바였는데, 사장님이 월급도 많이 주시고 대우가 좋은 편이기는 했음.)

동전을 던지는 아저씨도 있고, 말도 안 되는 꼬투리 잡아서 화내는 진상들도 많고...
다같이 쓰라고 놔둔 가게 기물을 훔쳐가는 일은 예사고.

나는 법 없이도 사는 외할머니를 보고 자라서 나이 좀 있는 어른은 다 공경할 만한 분들인 줄 알았는데
여기서 일하면서 대부분의 아줌마, 아저씨들은 상종을 말아야겠구나. 하는 걸 느꼈음.
새누리당에서 미친짓을 할 때에도 왜 그렇게 많은 사람이 1번을 찍었나 했더니......
(누군가 나한테 사람 차별하는 거 아니냐고 항의할 수도 있는데, 일부라고 하기에는 진짜 너무 진상이 많음.
그 가게에 오는 아줌마 아저씨들에게 어떤 공통분모가 있는 거든지, 아니면 예비군 훈련만 가면 사람들이 다 또라이가 되는 거랑 비슷한 현상일지도 모름.)

밤에는 사람 폭행하는 꽐라들도 종종 찾아온다. 오래 일하면 경찰아저씨와 친목도 다질 수 있을 것 같음.

직원들도 다들 내 부모님뻘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졸렬하고 불성실하고 입방아 찧기만 좋아해서,
심지어 어떤 직원은 술에 만땅 취한 채로 출근하는 사람도 있었다 ㅋㅋㅋㅋㅋㅋㅋㅋ
가게 물건을 훔치질 않나.

꽤 큰 업체라서 자기 할 일만 하면 월급 꼬박꼬박 나오고 짤릴 염려도 없는데...
짤리고 싶어서 안달난 미i친놈들 같았다.

그 와중에 그런 미친자들도 자식 학비 벌려고 그 일 한다고 하는 걸 보면... 친부가 정말 쓰레기 T.O.P였구나 하고 더 실감이 났다 ㅋㅋㅋㅋㅋ



그런 인간군상을 보고 있다 보니까 아, 나 정도는 쓰레기 축에도 못 끼는구나.
세상에 쓰레기가 저렇게 많은지 몰랐네. 나는 명함도 내밀지 말아야겠다.

나는 참 좋은 사람이었어.


이런 생각이 퐁퐁 솟아올랐다.


자신이 괴물일까 두려운 사람은
눈을 들어 서비스직 아르바이트를 하라.
강추한다.
 
거기다가 저런 헬오브헬 직장은 절대 가지 말아야겠다 하는 데드라인이 생겨서 일자리를 고를 때 좋은 기준이 되었다.

적어도, 아무 기술 필요없는 저런 업종은 저딴 사람들을 상대해야 한다는 점에서 극한직업이란 걸 알았다.
진상 직원들과 날마다 헬게이트를 열어야 되고, 진상 고객이 ㅈㄹ하고, 여름에 덥고 겨울에 춥다. 머리도 힘들고 몸도 힘들다.

지금은 괜찮은 사무직 직장으로 와서 누가 남 뒷담하는 일도 없고, 저런 급의 진상은 없어서 매우 행복하게 살고 있다.




일반인은 괴물을 상대하기 힘들다.

당신이 금수저이고 당신을 끔찍이 사랑하는 힘 있는 부모가 있다면 그냥 그런 놈이 걸리는 순간 골로 보내버리면 되지만
그런 핵폐기물들은 애초에 만만한 타겟을 설정해서 더 이상 빼먹을 게 없을 때까지 놓지 않는다.
게다가 곁에 있는 그 순간부터 사람의 멘탈을 털어버려서 무력화시키기 때문에 일반인이 상대하기 극히 어렵다.

내 생각에 나쁜 일은 오히려 착한 사람에게 일어난다.
"착하게 살았는데 왜 나에게 이런 일이 일어나지?"라는 말은 오히려 그 문제 속에 답이 있다.
착한 사람은 저런 정신병자들을 만나면 도무지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기 때문이다.
살인자를 만났다고 해서 나도 똑같이 칼로 찌르기는 누구에게라도 두렵고 당황스러운 일이니까.


*좋은 참고문헌을 첨부한다. 이 글 보고 뽐뿌질 와서 글을 쓰게 된 것도 있다.
http://www.todayhumor.co.kr/board/view.php?table=bestofbest&no=329881&s_no=329881&page=6
다중채무자를 이해해보는 만화 [상식을 초월하는 와타나베군)

차라리 길거리 불량청소년이나, 알코올중독자는 예측할 수 있다.
그러나 저 만화에 나오는 정신세계를 가진 사람은 도무지 예측할 수 없다.
그냥 재앙이라고 보면 된다.
쓰나미를 만난 것처럼, 피하거나/죽거나. 선택지가 두 개밖에 없다.

 
 

내가 상담을 받으며 행복해지는 데 정말 큰 도움을 주었던 책이나 팁 등을 소개한다.


대학생활 동안 책을 정말 많이 읽었다. (만화책은 원래 좋아했다.)

촌스럽게도, 서울에서 대학교 나오면 자연히 유시민 아저씨나 손석희 옹이 되는 건줄 알았다.
수업은 째더라도 세계사나 철학을 마스터해야 하는 건줄 알았다 OTL
'대학교'라는 게 이제는 유명무실해지고 사실상 취업학원 정도의 지위를 갖게 되었다는 걸 나중에서야 서서히 깨달았다 ㅎㅎ...

어쨌거나 독서는 옳았다.
촌구석에서 자란 나에게 아주 중요한 간접 체험원이었고, 책만큼은 꾸준히 읽음으로써 그것이 스스로에게 작은 자존감이나마 되어 주었다.

그리고 대체 "내가 누구인지" 연구하는 데에 도움이 되었다.

나 자신을 앎으로써, 나는 심리 치료도 하고, 취직도 잘 했다.
(자소서 쓸 때 편했음. ㅎㅎㅎㅎㅎ 가난하게 산 게 썰 풀기 참 좋기도 하고...)

심리상담을 하면서 느낀 점은, 생각보다 사람은 자기 자신에 대해서 잘 모른다.
어떤 감정은 그저 덧씌워진 거고, 무의식에는 사실 전혀 다른 감정이 들어 있기도 하다.

그리고 사람이란 게 의외로 어떤 현상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큰 고통이다.
예를 들어 길을 가고 있는데 모르는 사람이 와서 아무 말 없이 내 싸다귀를 마구 때리고 튄다고 해보자.
아픈 것도 아픈 것이지만, 그보다는 "대체 왜?!?!?!? 왜 그러는 거야?!?!?!? 뭐야 저 새끼?!"하는 감정이 마구 북받쳐 오를 것이다.



나는 인생 전반이 그런 느낌이었다.
"저 인간은 왜 저렇게 사는가?" "왜 사람 말을 '안' 듣는가?" "인생은 원래 이렇게 고통인가?" "왜 착하게 살았는데 나한테는 불행만 닥치는가."
내가 내린 결론을 뽑자면,

- 내가 초콜릿을 사랑하고, 애연가들이 금연을 못하는 것처럼 인간의 그런 나쁜 특성은 바뀌지 않는다. 고치고 싶다고 해도 못 고치는 것이다.

폐암에 걸릴 수도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흡연가를 배우자로 맞든지, 못 받아들이겠으면 다른 배우자를 찾든지 하면 될 일이다.
강도, 살인자, 성폭행범이 어느 나라에나 일정 비율 존재하듯이, 그냥 그런 사람도 존재하는 것이다.
운 나쁘게 성범죄자의 딸로 태어났을 뿐이다. 차라리 성폭행까지는 안 당해서 다행이고, 팔다리 잘 붙어있고, 살해당하지 않아서 다행이고,
다른 여린 여자애가 딸로 태어나서 큰 피해를 받느니 그냥 든든한 엄마도 있는 내가 조금(은 아니지만...) 당하고 말아서 다행이다 싶어서, 내가 절대다수의 최대행복(?)에 기여했거니 하고 생각하련다.


- 사람이 자기 말을 경청해주지 않는 환경에서 컸기 때문이다. 어느 누구에게도 애착이 없고, 상대방의 기분을 신경쓰지 않기 때문이다.


- 아버지를 잘못 만나서 고통이었던 것이다. 엄마에게 이혼하라고 했어야 했다. 고작 사람 한 명 때문에 수십명의 인생이 그렇게 고통스러워질 수 있는 거다.

싫은 것을 싫다고 말하고, 화났을 때 화났다고 표현했다면 고통스럽지 않았을 것이다.


- 나쁜 사람들에게 '착한' 사람들은 만만하기 때문이다.
세상이 자본주의 논리로 흘러가기 때문에, 돈과 인맥을 가진 사람이 잘 되는 것이지 착한 사람이 잘 되는 것이 아니다.

나쁜 사람들은 전에 없던 기상천외한 방법으로 사람들을 등쳐먹는다.
법은 그 기상천외함을 미처 따라잡지 못하고, 착한 사람들도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모르고 허둥대다가 된통 당하고 마는 것이다.

 
 
 
이 정도 되시겠다.
 
나 자신을 객관적으로 보면 싫기만 했지만 그래도 계속 바라보다 보니 나에게도 장점은 있었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알 것 같았다.

나는 앞에 나서는 것보다는 누군가를 도와주는 게 마음이 편하고 공부를 가르쳐주는 게 좋고 맞춤법 틀리는 거 싫어하는 문과문과 변태다.
야근은 죽어도 싫다. 안 그래도 불면증으로 고생했는데 잠 가지고 더 이상 당하고(?) 싶지 않다.

엄마처럼 아이의 말을 한 글자도 빼놓지 않고 다 경청해주는 부모가 될 것이다.
내가 겪었던 사회적 부조리를 내 아이까지 겪어야 한다면, 차라리 낳지 않는 것이 낫다.
열심히 오랫동안 근속해서, 내가 열심히 공부해왔던 대가를 받을 것이다.
사회 경험을 통해서 더 나은 사람이 될 것이다.
 
생각이 정해지자 어떤 곳에 취직해야 할지 감이 왔고, 학점이 영 별로여서 삽질은 했지만 1년 좀 넘어서 취직을 했다.

회식이 없다 ㅠㅠㅠㅠㅠ 꼰대가 없다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이 사실만으로도 너무 감사하고 행복하다 ㅠㅠㅠㅠㅠㅠㅠㅠ





어느덧 나도, 내가 여덟살이었을 때쯤의 엄마 나이가 됐다.
살아보니, 당장 코앞에 닥쳐서 뒤질 거 같이 고통스러운 취업 과정도, 엄마가 나를 버릴까 말까 고민하던 것들도, 지나고 보면 그냥 망각하게 되거나, 사실은 별 거 아닌 일들이 꽤 많았다.

나는 내가 쓰레기이고, 소생이 불가능하므로 죽어야 한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그건 그냥 내 생각이고, 우울증의 증상일 뿐이었다.

나는 어릴 때 우리 집안 꼬락서니처럼 세상이 돌아간다고 생각해서, 세상엔 선인과 악인만 있다고 생각했다. 세상엔 친구, 아니면 모르는 사람만 있다고 생각했다. 남의 뒷담화를 하거나, 자기 자식을 잘 못 보살피거나, 선생이 말도 안 되는 체벌을 하거나, 길에 쓰레기를 버리는.... 그런 사람들은 싸그리 몽땅 검은색이라고 생각했다.

당연히, 그런 검은 사람과 친구를 해선 안 된다고 생각했다. 사극 같은 데서 나오는 '전략적 협력' 같은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사람은 '당연히' 영혼이고, 사람은 지적 생명체다. 측은지심이 없고, 무오지심이 없으면... 내 친부 같은 쓰레기다. 그건 사람이 아니잖아.
그게 내 고정관념이었다.

근데... 지금 한 30년 살아보니까 느끼는 게...

사람은 완벽할 필요가 없다.
숭고한 사람은 그 자체로 성인이나 부처처럼 천상계에 따로 존재하는 거고, 보통은 그냥 회색 인간들만 옹기종기 모여 산다.
나의 기준이 되어버린, 세상에서 가장 '된 사람'인 우리 엄마조차도 나에게 가끔 실수를 할 때가 있었다.
 
예수님조차도 모든 사람에게 사랑받지 못했는데, 내가 사람에게 종종 미움받는 건 당연한 일이다.
김구 선생님이나 마틴 루터 킹 목사를 싫어하는 사람도 있는데.

이전의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당신이 아니라도 세상에 사람 많고, 당신보다 부족한 사람이 지구 반절은 된다. 당신을 싫어할 사람도 반절은 된다. 본심을 숨기면서까지 완벽할 필요 없다."
"당신은 조금 무책임해져도 된다"고 하고 싶다.
 
사람은 고체가 아니라 액체같이 변한다. 당신이 존경하는, 빛나 보이는 사람들도 태어나면서부터 잘났던 게 아니다.

그리고 그런 일을 겪었던 어른에게 해줄 말이라면...
당신은 더 이상 어릴 때 그 고통을 겪던 어린 아이가 아니다.
이미 다 큰 어른이고, 당신에게 피해를 주는 사람은 이미 옆에 없거나, 당신이 신고해서 구체적으로 엿을 먹일 수 있다.
당신에게는 힘이 있다.
 
세상은 아주 병신같이 느리기는 하지만 분명히, 좋은 방향으로 변화하려 노력하고 있고, 변화하고 있다.
꼭 명심했으면 좋겠다.






각설하고, 아래에 책+도움받은 곳 목록으로 글을 마치겠다. 
 
사랑하기 때문에, 기욤 뮈소
- 내 인생이 최악이고 더 이상 나아질 것 같지 않은 사람에게 권함.
"사람이 이런 일을 겪고도, 이겨낼 수 있구나. 사랑도 하고 다시 생명력 넘치게 살아나갈 수 있구나." 같은 위로를 준다.


콘스탄쯔 이야기

- 네이버에서 연재했던, 성범죄 피해자의 이야기.
10대에 장래가 유망한 발레리나였던 주인공은 성폭행을 당하고 꿈을 접어야 했다.
20대가 된 주인공은 아마추어 만화가를 찾아가서, 가해자에게 "가해자 때문에 내가 얼마나 고통받았는지, 어떤 인생을 살았는지 보여주기 위해서" 자신의 만화를 그려달라고 부탁했다.
자신이 '예쁜 것'이 잘못이라고 생각해서 머리를 짧게 자르고, 성폭행을 연상시키는 "개구리 자세" 때문에 더 이상 발레를 할 수 없어 그냥 죽은 것처럼 사는... 그 모습이 너무 아팠다.

이 사람이 더 상식적인 부모님을 만나서 바로 신고라도 할 수 있었더라면...
수많은 '만약에'를 읊게 되었던 만화다.
이 만화를 보고 나서 엄마에게 성추행 사실을 얘기할 수 있었다. 작가님과 주인공 분께 정말 큰 빚을 졌다.
 
 
화성에서 온 남자 금성에서 온 여자
- 하도 베스트셀러라서 설명할 필요도 없을 것 같다.
내 친부는 여기 나오는 남자처럼 행동하고, 엄마는 여기 나오는 여자처럼 행동하곤 했다. 항상 둘의 행동이 이해가 안 갔었는데 이 책을 보고 너무 딱 맞아서 감명받았던 기억이 난다.

뭐... 유전자가 꼭 "남자는 남성스럽게" 이런 식으로 배정되는 게 아니니까, "이성적인 성격과 감성적인 성격이 얼마나 극단적으로 다를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책이라고 할 수 있겠다.
내 입장에서는 다른 섬세한 여자들의 생각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됐다.
 
사회생활하면서 어떤 사람하고 싸울 때에는 정말 이해가 안 갈 때가 있는데, 이 책이 큰 참고가 된다.
 
 
설득의 심리학
- 얘도 완전 스테디셀러니까 설명은 줄인다. 사회생활 하려면 보세요. 꼭 보세요. 두 번 보세요.


닥터 프로스트
- 심리학자 만화. 스릴러 1g 가미됨.
심리상담에 대해서 아무래도 거부감이 있는 사람들은 이걸 보면 좀 심리적 장벽을 없애는 데 도움이 될 것 같다.

사람들이 암에 걸려도 공포에 질리지 않고 "나을 수 있다"고 믿는 이유는 암이 무엇인지 알고, 어떤 방법이 있는지 알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반면에 우울증에 걸리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공황장애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제대로 아는 사람이 드물다.
심지어는 아픈 사람에게 삿대질을 하기도 한다. 나약하다면서.
암에 걸린 것이 나약해서인가? 의지만으로 폐나 심장을 고칠 수 있는가?
마찬가지로, 정신질환은 그저 뇌의 증상일 뿐이란 걸 알았으면 좋겠다.


착한 딸 콤플렉스
작가 이름이 잘 생각 안 난다. 심리학자, 한국 여자분이었던 것 같다.
'착한아이 콤플렉스'에서 더 작은 카테고리로 들어가면 '착한 딸 콤플렉스'란 게 있다는 거다.
주로 아버지가 무력하고 어머니가 모든 일을 다 해냈던 집안에서 맏딸로 태어난 아이가
엄마의 말에 무조건 순응하고, 자기 본심을 억누르고 산다는 것이다.

어떻게 보면 우리 엄마도 독재자였다.
엄마는 지혜로운 사람이었기 때문에 매 순간마다 적절한 대안을 제시했고, 나는 불만 없이 따랐다.

엄마에게 잘 보여야 한다는 강박관념도 인생에 참 큰 해가 됐다.
차라리 엄마가 이혼을 했다면 버림받을 거라는 두려움은 느끼지 않았을 텐데.
엄마는 언제나 인생이 버거워 보였고, 나는 효녀가 되어야만 했다.

엄마에게 항상 즐거운 얘기만 했지만, 정작 내 본심은 아무 것도 몰랐다.
세상에서 제일 사랑하는 사람과 전혀 소통하지 않는 모순이었다.
 
 
씨엘, 임주연
- 너무 예쁘고 똑똑하지만 마음 속에 허무함을 가진 소녀가, "내 꿈은 뭐지? 사람은 왜 살아야 되는 거지? 이 세계는 왜 구해야 되는 거지?"하며 세상과는 상관없이 개썅마이웨이~하며 살다가 타의로 영웅이 되어 버리는 이야기.
인생의 의미를 느끼지 못하는 여자애도, 자신의 친척들처럼 이익을 위해서는 가족도 아무렇지 않게 죽여버리는 괴물이 될까봐 두려워하는 남자애도 너무 공감이 됐다.


스킵! 비트, 나카무라 요시키
- 부모에게 버림받고 가수 지망생 소꿉친구 집에 얹혀살며 일편단심 내조하다가 이용만 당하고 버려진 '쿄코'가 복수를 하려고 연예계에 입문하는 이야기.
다시는 사랑따위 하지 않겠다는 맹세와 함께, 스스로가 사람으로서, 배우로서 부족하다는 딜레마에 빠져있는 여고생의 인생 고군분투기.


양의 눈물, 히다카 반리

나처럼 강한 척하는 우유부단한 주인공이 안쓰러웠다.
내 탓인 거 같은 일도 사실 내 탓이 아닐 때가 많다는 교훈. 따뜻한 결말이 좋았다.
절판이라서 한국어본 보려면 웹북으로 봐야 될 거다.


아래는 내가 윤지운 작가 덕후라서 많이 쓴다.
이 작가는 치유물을 많이 그려서 정말 도움이 될 거다.
이 작가 작품들은 우리 집에 CCTV 달아놨냐?! 할 정도로 공감되는 게 많다.
내 트라우마를 하나씩 캐릭터로 만들어서 만화를 그리는 것 같은 기분이다 ㄷㄷ


디어왈츠, 윤지운
- 아버지와 불화가 있는 사람에게 추천.
부자 아버지의 친척들은 하찮은 여자에게서 난 여주인공을 못 잡아먹어 안달이고, 엄마는 죽고,
"남겨진 아이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나름대로 따뜻하게 알려준다.
 
 
달이 움직이는 소리, 윤지운
- 남에게 싫은 소리 못하는 '호구'에게 추천.
"내가 착하게 구니까 다른 사람도 나를 해치지는 않겠지"란 건 착각이다.
사람은 이유 없는 친절은 좋아하지 않고, 내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뭘 좋아하고 뭘 싫어하는지 알고 싶어한다.

또 한가지는, 진짜로 진짜로 나보다 훨씬 더 외톨이인 사람이 있다. 세상에는.


파한집, 무명기, 윤지운
- 옛날 중국을 배경으로 한 미스터리물 두 개.
내가 하고 싶은 행동을 대신 해줘서 좋았다.
노비인 남편을 죽인 나으리에게 마지못해 시집가는 척하며 복수를 하는 화는 너무너무 카타르시스를 느꼈다.
여기 나오는 인간사의 극혐스러운 부분과, 따스한 부분이 모두 좋았다.

 
별빛속에, 강경옥
- 내가 이 상황이 안 돼서 정말 다행이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설희, 강경옥
- 소심하고 호구 같은 여대생 주인공에게 나타난 4차원 여자애, 설희.
설희 앞에서는 인간사 모든 고민이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느껴진다.

 
개인주의자 선언, 문유석
- 그냥 읽으면 힐링된다.
내 인생 철학인 "나도 너한테 피해 안 줄 테니까, 내 취향 존중 좀 해줘."가 나만의 상상이 아니었나보다.
부모님뻘인 분이, 그것도 기득권인 분이 이런 책을 쓰니까 신선했고, 이런 어른들이 더 많아졌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다.
 
 
열한 계단, 채사장
- 내 인생의 가장 큰 질문이었던 "인생은 왜 힘든가? 어떻게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나?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어떻게 하면 지식인이 될 수 있나?"에 대해 뚜렷한 답변을 준 책이다.
인문학 서적 몇 가지를 알기 쉽게 설명해 주는데, 내가 지금까지 잘 모르고 살았던 세상의 흐름을 알 수가 있어서 좋았다.
 

자기절제사회, 대니얼 액스트
- 다이어트를 하고, 소비를 절제하는 것이 어려운 것은 오히려 당연한 것이다.
우리 유전자는 구석기 시대와 크게 다를 바 없다. 구석기인들이 회사에 다니고, 잠을 줄이고, 가만히 앉아 공부를 하는 것만으로도 대단한 거다.
왜 요즘 세상에 절제가 힘든지 자세히 설명해 주고, 나름대로 해법을 제시해준다.


탤런트, 천계영
- '오디션'으로 유명한 천계영 작가의 단편집.
나같이 '제 주제에 맞지 않는' 꿈을 꾸는 10대의 얘기가 가슴에 와닿아서 단행본으로 꼭 사고 싶은 책이었다.
완전 옛날 거라 절판됐음. 웹북으로 봐야 함.


 
햄릿, 셰익스피어
- 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코믹하게 재해석되기도 하고, 온갖 곳에서 인용되는데... 원작을 보면 되게 진지하고 이래서 명작이라는 느낌이 온다.
불의를 눈 앞에 두고도 더러운 목숨 부지하기 위해서 참느냐, 아니면 인간답게 저항하고 몸부림치다 인간으로서 죽느냐.
내가 어릴 때 하던 고민과 너무 비슷해서 마음에 위안이 되었었다. 나는 그냥 불의를 참고 축생처럼 살며 재기할 기회를 노리기를 택했지만 ㅋㅋㅋㅋ
그래도 현실은 햄릿 시대의 왕정과는 달리 내가 왕권다툼에 들어가 있는 상황도 아니고ㅎㅎ 법이란 게 있고 도와주는 단체들이 있으니, '인간'을 선택했다고 해서 꼭 죽으란 법은 없다.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톨스토이
- 추천하는 것이 너무 진부할 정도로 이름난 명작이다 ㅎㅎㅎㅎ
꼭 원작으로 보기를 추천함. 잔잔하게 삶에 대해 논하는 것이 좋았다.
 
 
허삼관 매혈기, 위화
- 산다는 건 그런 거지~ 수지맞는 장사잖소~ 이 노래가 어울릴 법한 책이다.
중국의 문화대혁명(이 명칭이 맞는지 모르겠음;;) 시기에서 너무 힘든 삶을 사는 소시민이 그래도 웃음과 사랑을 잃지 않고 지금껏 살아왔다는 이야기.
 
 
명견만리, KBS 명견만리 제작팀 지음
- 인문학적 소양이 전혀 없거나, 현 시대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이 읽기 좋다.
 
 
 
워킹푸어, NHK 특별 취재팀 지음 
-지금 한국에 닥쳐오고 있는 지옥같은 상황을 잔인하게 까발리는 책이다.
가난이 대물림되고, 일하면 일할수록 더 가난해지는 현상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왜 내가 가난하고 불우한가"에 대해서 현실적인 대책을 세우기 위해 필요한 책이라고 본다.



한국청소년상담원 사이트
https://www.cyber1388.kr:447/
뉴스 같은 데서 이 기관 전화상담 질이 떨어진다는 얘기가 많은데, 그래도 내가 여기 온라인상담 이용했을 때는 성심성의껏 한 1~2일 뒤에 답변해주셔서 많이 위안이 됐다.
만 24세? 까지 준 청소년으로 보고, 답변해준다.
물론 이건 임시다. 직접 상담 선생님에게 꾸준히 상담받는 게 낫다.

인서울 대학교나 국립대라면 상담실이 있을 거다.
내가 낸 학비는 이럴 때 뽕을 뽑아야 된다 +ㅂ+
그리고 성범죄 관련 상담이나, 취업 관련, 그룹 상담 등등 이것저것 열심히 하고 있더라.
요즘 고등학교 상담쌤은 상담내용을 선생님이랑 부모님한테 죄다 소문낸다는 얘기가 있던데, 혹시 대학교 상담쌤도 그런 사람이 있을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만약 그대가 나처럼 아웃사이더였다면 설령 상담쌤이 다른 이에게 얘기하더라도 교내에 나를 아는 사람이 없으니 큰 문제는 아닐 거라 생각된다.



취업성공패키지
대학생 때 그 학점으로는 대기업은 당연히 무리였고, 전공을 살리겠다는 생각도 싹 사라져 있었다.
대학교 생활도 아싸로 해서 조언을 얻을 데가 없었다.

취업성공패키지 광고를 보고 연락을 해봤다.
한달 동안 몇 차례 고용센터에 방문해서 적성검사도 받고, 담당자분이 indeed 사이트도 알려주시고,
"몇 군데 일자리를 찾아서 이력서를 5부 내라" 같은 과제를 내주신다.
그 분도 '상담사' 같은 계통이라 그런지, 자존감이 한껏 낮아져 있던 나에게 용기도 북돋아 주셔서 감사했다.
교육 마치고 바로 취업이 돼서 매우 행복했음.

취업성공패키지 교육을 받고 취업이 되면, 월급 150만원 이상 준다는 조건으로 국가에서 1년 동안 사업장에 50%를 환급해 준다.
덕분에 나도 예상 외로 높은 월급 받아서 좋았다.

내가 그 전에 2년 동안 보낸 이력서 갯수가 총 20개쯤 됐는데, 서류심사조차 탈락하는 게 대부분이어서 굉장히 의기소침했었다.

그 점에서는 학교에서 하는 취업 설명회도 큰 도움이 됐다.
대기업 인사담당자 출신인 분이 말씀해주신 거였는데, 요즘 시대에 이력서를 100개는 내야 붙는다고 하셨다.
다른 말로, 이력서를 아직 10개 정도밖에 안 썼다면 떨어지는 게 당연하고, 탈락이 100개 모여야 1번 성공한다고 편하게 생각하라는 거였다.

오히려 이력서 20개 정도에서 맘에 드는 직장에 붙어서 엄청 세상(?)에게 감사하는 마음이 든다.
나는 운이 좋았다.



무료재무설계
인터넷에 검색해보면 무료재무설계 해주는 단체가 나온다.
돈을 모으기는 해야겠는데 엄마 세대처럼 통장에 넣기만 한다고 모아지는 것도 아니고...
이자율(기껏해야 2%)이 물가상승률 4%보다 낮으니까 결국 손해라는 얘기를 듣게 돼서, 이런 건 전문가에게 도움 받아야지 싶어서 재무설계사를 찾아보다가 알게 됐다.
사회초년생인 내가 어떻게 돈을 모으면 되는지 합리적으로 설명해주셔서 좋았고, 이율 높은 은행 추천해 주셔서 너무 좋았다.
나처럼 부모가 지식인이 아니거나 기득권이 아니어서 별로 인생조언을 못 얻을 입장인 사람은 그때마다 전문가를 찾는 게 한 가지 방법인 것 같다.


고딩 때, 명문대 나오셨던 어떤 선생님이 이런 조언을 해주신 적이 있다.
"진학하고 싶은 대학교에 찾아가서 강의실도 둘러보고, 교수님 연구실에 노크를 해서 이 학교에 오려면 뭘 준비하면 좋냐고 물어봐라. 의지도 강해지고, 또 혹시 모르지 않냐. 면접 때 그 교수님이 알아보고 적극적인 학생이라며 좋은 점수를 줄지."
내가 나의 대학 입시에서 후회되는 게 있다면, 그 조언을 실행에 옮기지 않은 것이다.

무대 울렁증으로 교수님들 앞에서 완전히 얼어버려서 개소리만 하다 나온 게 후회된다.
시험도 모두 잘 봤고, 자기소개서도, 담임 선생님 추천서도 모두 완벽했는데... 그걸 실행했다면 그 교수님이 낯이 익어서 면접을 잘 준비했든지, 아니면 문전박대를 당해서 "교수님들은 차갑구나. 고등학교랑 다르네" 깨닫고 웅변 학원에라도 갔을 것 같다.
그 선생님이 나한테는 어려운 분이어서 찾아가서 무언가를 물어보거나, 그럴 생각조차 하지 못했었는데... 경험을 해본 사람의 말은 쫓아다니면서라도 캐내서 내 것으로 만들어 실천했어야 했다.
그런 데에는 엄마한테 돈 달라고 하기 미안하다는 생각을 버리고 도와달라고 했어야 했다.

나같이 금수저를 못 물고 태어나면, 스승이 될 사람이라도 내가 찾아다니면서 꼭 붙잡아야 된다. 단 한 마디라도, 경험자의 말은 내 인생을 바꿀 수 있는 보물이다.


 

덧붙여서.
불면증이 어떻게 나았는지 궁금한 사람도 있을텐데, 기도로 나았다.
민망하지만 실화;;;
교회 목사님들 중에는 기도를 해서 병을 치료하는 분들이 있다.
(이런 분들은 얼굴만 보고 그 사람이 뭐하는 사람인지 알아본다. 그런 걸 보면 진짜 영적인 능력이란 게 있는 것 같기도 함. 그냥 눈치가 초능력 급인 걸수도 있지만-ㅂ-;;)

플라시보 효과였는지, 기적이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나는 내가 정신질환이 있다는 것조차 모르고 그냥 엄마 따라 갔는데 "00이는 머릿속에 새까만 게 들어차 있어. 힘들지 않니?"하시더니 머리에 손을 대고 기도를 하시는데 뇌가 뜨거워지는 느낌이 들었다. 그렇게 3-4번 정도 기도를 받고 완전히 나았다.

잠을 충분히 자니까 옆에 있는 애들이 장난을 치든 말든 "니는 떠들어라, 나는 씹는다" 가 가능해져서 평화롭고 좋았다. 이거 아니었으면 진짜 체력이 딸려서 대학교 못 갈 뻔했음.

정신질환 있어도 병원은 꺼려지는 게 사실이다. 약 부작용, 보험이 안 되는 점, 혹시나 정보가 유출될까 싶은 걱정이 있으니까.
그럴 때 이런 목사님을 찾아다녀 보는 것도 추천함. (돈을 엄청 요구한다든지, 대규모로 집회 여는 건 사이비일 가능성이 있으니 거르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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