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종(變種)
변종
유년시절, 존 스칼지는 철학적인 아이였다. 나는 어디에서 왔고, 삶의 목적은 무엇이고, 우주는 무엇이고....... 하지만 그런 질문은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점점 잊혀졌다. 그게 바로 어른이 된다는 것이었다.
스칼지는 35살이 되던 해에 지구군 소속의 대위가 되었다. 대부분의 남자들은 외계종족 둠(Doom)과 싸우기 위해 지구군에 가입한 상태였다. 둠은 거미 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들은 8개의 다리를 가졌고 피부는 파랬으며 크기는 3m정도였다. 둠은 텔레파시로 대화를 했다. 그들은 자신의 종교를 맹목적으로 숭배하고 있었다. 역겹고 징그러운 둠. 50년간 이어져 오던 그들과의 전쟁은 막바지에 접어들고 있었다. 인간이 멸망하든, 둠이 멸망하든 둘 중 하나였다. 스칼지 대위는 지구군의 마지막 공격인 ‘운명의 날’ 작전의 중요한 임무를 맡고 있었다. ‘운명의 날’은 지구군의 모든 함선이 매복한 채로 둠의 전함을 전멸시키려는 작전이었다. 하지만 수백여 대의 우주 함선 중 하나를 지휘하고 있던 스칼지는 운이 없게도 둠의 전함에 발각당해 포로로 붙잡히고 말았다. 둠은 고문을 해서라도 스칼지가 알고 있는 군사 기밀을 캐내려했다. 하지만 스칼지는 1급 정신 차폐를 훈련받았기에 그 어떤 고문에도 비밀을 지킬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둠은 그를 고문했다. 그들은 지구-둠 언어 번역기를 스칼지의 귀에 꽂은 채로 고문하고 또 고문했다.
“말해라, 말해라, 말해라, 말해라, 말해라”
그를 심문하고 있던 녀석은 함장인 칸두둠이었다. 칸두둠은 파란색 팔을 스칼지에게 뻗어서 7개의 파란 손가락으로 그의 목을 졸랐다.
“인간. 말해라.”
그러나 스칼지는 전혀 말할 생각이 없었다. 그가 군사 기밀을 누설하게 되는 순간 인류의 패배는 확정이었다. 스칼지는 자신이 어떤 고통을 겪든, 어떤 죽음을 맞이하든 절대 침묵을 지키리라 다짐했다. 그리고 그가 그렇게 마음먹은 이상 칸두둠은 1급 정신 차폐를 뚫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칸두둠은 결정을 내려야만 했다. 아직은 실험단계이지만, 어차피 다른 대안이 없었으므로 칸두둠은 ‘그것’을 명령했다.
“존 스칼지. 너는 말하게 될 것이다. 너는, 너는, 너는, 너는.”
둠 병사들이 칸두둠의 명령에 따라 스칼지를 어디론가 끌고 갔다. 스칼지는 자신을 붙잡는 거미팔의 감촉을 느꼈다. 끈적하고 불쾌했다.
“이 거미 새끼들. 니들이랑 닿는 거야말로 최악의 고문이다. 이보다 더한 고문이 있으면 어디 한번 해보시지 그래.”
그는 이미 성한 곳이 없었다. 손발톱은 모두 뽑혔고 한 쪽 눈은 실명된 상태였다. 3시간 동안 받을 수 있는 고문이란 고문은 모두 받은 상태였다. 존 스칼지는 어차피 자기가 살아남을 수 없단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괜찮다. 그는 절대로 ‘운명의 날’ 작전을 말하지 않을 것이고 둠은 멸망하게 될 테니까. 스칼지 대위는 자신을 끌고가는 둠 병사 둘에게 미친 듯이 침을 뱉었다.
“이 더러운 벌레 놈들. 죽어라! 죽어!”
스칼지의 발악에도 불구하고 둠 병사들은 묵묵히 스칼지를 끌고 갔다. 8개의 다리를 분주히 움직이면서….
스칼지가 도달한 방에는 실험을 하는 듯한 유리 격리실이 있었다.
“이번엔 무슨 고문이지? 자백용 주사라도 놓을 생각인가? 그걸론 나를 굴복시킬 수 없어. 절대로! 이 역겨운 벌레들.”
둠 병사는 스칼지를 유리 격리실에 묶어놓고 기계를 조작했다. 스칼지는 그 모습을 유심히 보고 있었다. 모니터에는 정보들이 스쳐지나갔다. 잠시 후 수십 개의 주사기가 스칼지의 온몸을 향해 다가왔다.
“이건 무슨 주사지? 어? 이런 걸로 내가 말 한 마디라도 할 거 같아? 헛수고를 하는군. 헛수고야.”
스칼지는 아무도 없는 허공을 향해 침을 마구 뱉었다. 그러는 중에 수십 개의 주삿바늘이 스칼지의 몸에 들어왔다. 주사액이 주입되자 색색깔의 빛이 깜빡이면서 그를 비추었다. 빨간색, 노란색, 흰색, 녹색, 자주색, …. 스칼지는 빛 때문에 어지러웠다. 곧이어 그의 몸이 뜨거워졌고(빛 때문인지 주사 때문인지는 알 수 없었다) 몸 안에서 무언가가 뒤집히는 느낌이 들었다. 스칼지는 이건 일반적인 고문과 다르다고 생각했다. 그는 자기도 모르게 기밀을 누설하게 될까봐 걱정이 되었다. 하지만 자신이 1급 정신 차폐 능력자라는 생각이 들자 안심이 되었다. 다만 다가올 고통이 두려울 뿐이었다.
그의 고통은 손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스칼지의 손바닥이 두 개로 쩍 갈라지기 시작했다. 엄지와 검지가 하나로 합쳐졌고 나머지 세 개의 손가락이 하나로 합쳐졌다. 스칼지는 비명을 지르려고 하였으나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두 개로 갈라지는 과정은 손에서 그치지 않았다. 그의 팔뚝이 두 개로 갈라지고 있었다. 그것은 팔 전체로 이어졌다. 결국 스칼지의 양 팔이 있던 자리에는 4개의 팔이 자리 잡게 되었다. 그 다음은 발이었다. 발도 똑같았다. 발도 두 개로 갈라져서 총 4개의 발이 생겨났다. 그러면서 그의 몸은 점점 형태를 변해갔다. 파랗게… 파랗게…. 스칼지의 8개의 다리는 거미처럼 길고 가늘어졌다. 인간이었던 목의 형태는 점점 짧아져서 몸통과 머리가 거의 붙어있게 되었다. 내장이 뒤집히는 느낌과 함께 무언가 속에서 변화가 일어났다. 그리고 그의 두상이 바뀌기 시작했다. 눈은 파랗게, 이는 날카롭게, 귀는 쫑긋하게. 그리고 벼락 같은 두통과 함께 뇌가 바뀌는 느낌이 들었다. 존 스칼지는 이 모든 변종 과정을 겪은 후에 곧바로 기절하였다.
둠
스칼지는 토굴 같은 방에서 깨어났다. 그리고 곧바로 자신의 몸을 확인했다. 새파란 8개의 다리. 자신이 둠으로 변한 것이다. 그는 8개의 다리를 이용하여 방에 놓인 거울로 다가갔다. 거울 속에는 더 이상 35세의 존 스칼지가 보이지 않았다. 다만 한 마리의 둠이 있을 뿐이었다. 스칼지는 8개의 다리에 힘이 풀려서 땅바닥에 폭삭 주저앉았다. 그 때 칸두둠이 들어왔다.
“스칼지. 너는 둠이다. 이제는 우리다.”
존 스칼지는 생각했다. ‘둠. 둠. 기밀 원해서 나를 바꿨다. 나를, 나를, 나를’ 그리고 분노에 떨었다. 스칼지는 8개의 다리를 일으켜서 칸두둠에게 달려갔다. 그러나 스스로의 몸에 익숙지 않았던 스칼지는 칸두둠에게 간단히 제압당해버렸다. 칸두둠이 말했다.
“너는 우리다. 우리….”
스칼지는 혼란 속에서 몸부림쳤다. 하지만 자신이 둠이 되었다는 사실만은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칸두둠은 자신의 주머니에서 언어학습기를 꺼내 스칼지에게 사용하였다. 스칼지는 일순간 몸부림을 멈추고는 최면에 걸린 듯 둠의 언어를 학습하게 되었다. 몇 분의 시간이 지나자 스칼지는 둠의 문화와 언어에 대해 기본적인 것들을 알게 되었다. 스칼지는 혼란스러워졌다. 둠의 언어로 스칼지가 말했다.
“나는 둠인가. 나는 둠? 기밀을 위해서 나를?”
칸두둠이 말했다.
“우리는 둠. 우리는 둠. 이제는 말하라. 말하라.”
그러나 스칼지는 말할 생각이 없었다. 군사 기밀을 듣기 위해서 이런 짓까지 저지르다니. 스칼지는 치가 떨릴 뿐이었다. 그는 자신이 지켜야 할 사람들을 떠올렸다. 인간들…. 그 때 스칼지는 처음으로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칸두둠은 스칼지의 표정을 살피며 말했다.
“시간을 주지. 너에게….”
칸두둠은 그렇게 말하고 방을 나가버렸다. 스칼지는 혼자 남아서 아까의 이상한 기분을 회상했다. 그는 인간을 떠올리고는 불쾌감을 느낀 것이다. 그는 자신의 손바닥을 보았다. 7개의 파란 손가락이 있었다. 아름다운 손이었다. 스칼지는 다시 인간을 떠올려보았다. 인간의 팔, 다리, 생식기, 머리, 모공, 털들…. 스칼지는 소름이 끼쳤다. 생각만 해도 역겹고 불쾌했다. 그는 인간의 몸 구조가 너무나 이상하다고 생각되었다. 스칼지는 자신의 모든 미적 감각이 바뀌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완벽하게 둠이 된 것이다. 스칼지는 처음으로 흔들렸다. 자기가 누구의 편인지 전혀 알 수 없었다. 자신이 인간인지 둠인지 헷갈렸다. 그는 한 시간 넘게 스스로 혼란을 정리하려고 했다. 그러나 쉽지 않았다. 칸두둠이 다시 돌아왔다.
“동지여, 따라오라.”
스칼지는 칸두둠의 뒤를 따라가며 그를 관찰했다. 그리고 칸두둠이 아주 잘생긴 수컷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스칼지는 칸두둠에게 약간이지만 호감을 느꼈다. 그건 정말 이상한 기분이었다. 분명히 처음 봤을 때는 벌레였는데…. 하지만 스칼지가 인간이었을 때 느낀 그 기분은 너무나 흐릿해서 이제는 떠올릴 수가 없었다. 단지 잘생기기만 한 칸두둠이 눈앞에 있을 뿐이었다. 칸두둠이 안내한 곳은 전함의 번화가였다. 거대한 규모의 전함에는 소도시 같은 상가 밀집 구역이 있었다. 칸두둠이 말했다.
“보라, 거리를.”
스칼지는 번화가를 살폈다.
‘녹색 점액질 전문점. 전통이 있는 맛집’
‘살을 빼세요. 그리고 사랑 받으세요.’
‘번식, 고민이시라구요? <번식할래요>가 이뤄드립니다.’
네온 사인이 가득한 번화가에서 스칼지는 정신을 뺏겨버렸다. 심지어 그는 점액질 집을 지나갈 때 강렬한 식욕마저 느꼈다. 그 모든 광고들은 너무나 매혹적이었다. 스칼지는 자신이 매혹을 당한다는 것을 납득하기 힘들었다. 스칼지를 조용히 지켜보던 칸두둠은 인간의 사진을 그에게 들이밀었다.
“윽!”
스칼지는 깜짝 놀라서 멈춰섰다. 사진에 보이는 인간의 징그러운 구조. 스칼지는 혐오스러워서 탄식할 수밖에 없었다.
“끄으으으…. 치워, 치워”
칸두둠은 사진을 치워주었다.
“스칼지. 방으로 돌아가지.”
방에는 따뜻한 점액질 스프가 준비되어 있었다. 스칼지는 잠시 주춤했으나 허기를 느끼고는 점액질 스프에 입을 대보았다. 스칼지의 뇌에 쾌감이 일었다. 스칼지는 스프를 허겁지겁 먹어치웠다. 칸두둠은 그 모습을 만족스럽게 바라보고 있었다. 스칼지가 접시를 깨끗하게 비우자 칸두둠이 말했다.
“너는 둠이다. 말해라. 둠을 위해!”
스칼지는 지구군의 작전을 거의 말할 뻔 했다. 그의 머릿속에 ‘둠을 위해!’가 울려퍼졌다. 스칼지는 자신의 정체성을 다잡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칸두둠이 표정을 살피며 말했다.
“너는 인간이 아니다. 너는 둠이다. 너는 지금 인간을 위해? 너는 둠이다….”
스칼지는 그의 말을 외면하면서 유년 시절의 좋은 추억들을 떠올렸다. 그러면서도 인간의 징그러운 몸뚱아리가 생각나면 혐오스러워졌다. 인간을 구한다는 게 자신에게 무슨 의미일까. 스칼지는 너무나 혼란스러웠다. 스칼지는 거의 실토할 뻔했다. 하지만 마지막 남은 인류애가 끝끝내 그를 붙잡았다. 칸두둠은 마지막 수단을 써야겠다고 생각했다.
“들어와라.”
칸두둠이 말하자 방에 둠 한 마리가 들어왔다. 칸두둠은 스칼지에게 소개를 해주었다.
“저 여자, 스나둠.”
스칼지는 스나둠의 나체를 살펴보았다. 매혹적인 8개의 다리. 시원하게 뻗은 귀. 예리하고 백옥 같은 이빨. 저 이빨에 깨물릴 수만 있다면! 스칼지는 그렇게 생각하고 자신이 너무나 소름끼쳤다. 스칼지는 스나둠에게 강렬한 성욕을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스나둠의 진한 호르몬 냄새를 맡자 스칼지의 성기에 파란색 피가 쏠렸다. 스칼지는 스나둠의 매혹적인 둔부를 보았다. 스칼지는 호흡이 가빠졌다. 그 때 함장이 신호를 주자 스나둠은 스칼지에게 서서히 다가갔다. 스나둠은 8개의 다리로 스칼지의 온몸을 쓰다듬었다. 스칼지는 참을 수가 없었다. 스칼지는 스나둠에게 달려들어서 자신의 다리로 스나둠을 눌렀다. 그런 자세에서도 스나둠은 매혹적인 웃음을 흘겼다. 스칼지는 그녀에게 압도적인 매력을 느꼈다. 둠의 강력한 성욕이 그를 지배했다. 스칼지는 자신의 성기를 스나둠에게 집어넣었다. 그것은 완벽한 둠의 짝짓기였다. 그들의 거친 짝짓기가 끝나고 스칼지는 폭삭 주저앉아서 자기가 방금 무슨 일을 저질렀지 자각했다. 스칼지는 자괴감에 몸부림쳤다. 그러다 문득 널브라진 스나둠을 쳐다봤다. 그러니 다시 성욕이 끓어올랐다. 그 때 스칼지는 인정하고야 말았다. 자신이 둠이라는 사실을. 칸두둠은 승리의 미소를 지으며 스칼지에게 말했다.
“잠깐 낮잠을 자게.”
칸두둠이 방을 나가자 스칼지는 눈물을 흘리며 짧은 악몽을 꾸었다.
저항
스칼지는 잠에서 깨어났다. 그는 모든 것을 포기했다. 이제는 자기가 둠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여야만 했다. 그는 모든 군사 기밀을 실토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 때 어디선가 생각의 파동이 들려왔다. 스칼지는 그 느낌에 집중했다. 그러자 곧 목소리가 들렸다. 이것은 분명 둠의 텔레파시였다.
[스칼지. 실토? 실토?]
[곧…. 곧….]
[그리곤?]
[죽인다…. 죽인다….]
칸두둠의 목소리였다. 그들은 결국 스칼지를 죽일 생각이었던 것이다. 스칼지는 배신감에 몸을 떨었다. 일순간이었지만 둠에 호감을 느꼈던 것이 너무도 분했다. 이제 죽을 위기에 처한 스칼지는 자신의 신변을 생각해야만 했다. 스칼지는 인간에게도 둠에게도 돌아갈 수 없었다. 뭘 해야 하지? 그는 차라리 죽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절망보다는 둠 종족에 대한 분노가 컸다. 거대한 배신감이 분노로 전환된 것이다. 스칼지는 자신이 죽더라도 둠에게 피해를 입히고 싶었다. 그렇게 마음을 먹자 그는 무서울 게 없었다. 일종의 최면 상태 빠진 것이다. 하지만 이 흐물흐물하고 뭉툭한 8개의 다리로 무엇을 한단 말인가. 그 때 스칼지는 자신이 변종되었던 실험실을 떠올렸다. 그리고 유심히 지켜보았던 기계를 떠올렸다. 1등급 폴더부터 6등급 폴더까지 있었던 그 화면에서 인간과 둠은 2등급 폴더에 있었다. 그리고 6등급으로 갈수록 점점 하등한 동물이 있었다. 그렇다면 1등급 폴더에는 무엇이 있을까. 그러나 그 안에 뭐가 들었는지는 보이지 않았다. 스칼지는 결심을 했다. 1등급 폴더에 들어있는 더 우월한 생명체로 변종을 해서 닥치는 대로 둠을 사냥하리라. 그의 논리에는 비약이 가득했지만 그는 분노에 미쳐 있었기에 스스로 깨달을 수가 없었다.
스칼지는 칸두둠이 문을 열고 들어오기만을 기다렸다. 이윽고 칸두둠이 들어오자 스칼지는 그에게 기습을 가했다. 칸두둠은 예상치 못한 공격에 쓰러졌고 스칼지는 실험실을 향해 내달렸다. 곧 함내 경보가 울렸다. 둠의 병사들이 스칼지를 잡기 위해 출동했다. 그러나 스칼지가 빨랐다. 그는 실험실에 무사히 도착해서 문을 잠가버렸다. 스칼지는 버튼으로 뛰어가 1등급 폴더를 열어보았다. 거기엔 ‘샨(Syan)'이라는 이름이 있었다. 샨 종족. 스칼지는 자신이 어떻게 변화할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어차피 죽을 목숨이라는 생각에 '샨(Syan)'으로의 변종을 실행하고는 스스로 유리 격리실에 들어갔다. 실험실 밖에서 둠의 병사들이 철문을 부수려고 난리를 치고 있었다. 그러는 중에 수십 개의 주사기가 스칼지의 몸을 향해 움직였다. 병사들이 철문에 총을 갈기고 있었다. 주사액이 스칼지의 온몸에 주입되었고 다시 형형색색의 빛이 그를 비추었다. 그의 몸이 비틀렸다. 스칼지가 가진 8개의 다리가 다시 4개로 돌아오고 있었다. 이윽고 실험실의 문이 부서지고 병사들이 쳐들어왔다. 하지만 유리 격리실의 문도 잠겨 있었기에 병사들은 또 총을 갈겨야 했다. 총알은 유리에 맞고 튕겨져 나왔다. 하지만 조금씩 유리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그 때 스칼지의 온 몸은 은빛으로 변하고 있었다. 그의 몸은 전체적으로 인간과 비슷하게 변화했다. 몸에는 하나의 털도 없었다. 스칼지는 자신의 몸 주위에 부유하는 은빛 에너지를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에너지를 자신의 의지대로 조작할 수 있단 사실을 곧 깨달았다. 스칼지의 몸이 조금씩 커졌다. 2m … 2m50 … 3m … 그의 몸이 부풀면서 마치 거인과 같은 모습이 되었다. 결국 그의 키가 3m70cm 정도가 되자 변종이 완료되었다. 스칼지는 자신에게 내재된 어마어마한 에너지를 느낄 수 있었다. 그 때 둠의 병사들이 유리 격리실을 깼다. 병사들 뒤에서 칸두둠은 놀라움과 공포로 스칼지를 올려다봤다. 그는 소리치며 명령했다.
“쏴! 당장 죽여! 죽여! 죽여!”
둠의 병사들이 스칼지에게 무차별 사격을 가했다. 그러나 모든 탄환은 스칼지의 몸 주위에 부유하는 은빛 에너지에 닿자 가루가 되어 없어져버렸다. 스칼지는 가루가 되는 탄환을 천천히 살펴봤다. 사격은 계속되었다. 스칼지는 텔레파시로 말했다.
[그만]
스칼지가 팔을 휘두르자 팔을 둘러싼 은빛 에너지의 일부가 거대한 폭발을 일으켰다. 엄청난 에너지가 발산되었다. 총질을 하던 둠의 병사들은 대부분 가루가 되어 사라졌다. 뿐만 아니라 전함의 외벽까지 뚫을 뻔했다. 만약 그랬다면 이 전함은 박살이 나는 것이었다. 훗날 스칼지는 자기 힘의 원천이 핵 에너지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의 앞에 살아남은 칸두둠은 공포에 떨고 있었다. 칸두둠은 그 자리에 폭삭 주저앉으며 스칼지에게 고개를 조아렸다. 그가 스칼지에게 말했다.
“신의 사자(使者) 샨이시여. 당신에게 복종합니다. 오직 복종. 오직, 오직.”
상황은 완벽하게 정리되었다. 스칼지는 이들을 어떻게 처리할지 생각하기 시작했다.
군림
스칼지는 전함의 내부 질서를 다시 바로잡았다. 그는 전함 내에서 거의 신이 되었다. 그는 다른 전함이 이 곳의 상황을 알아채지 못하도록 철저히 단속했고 비밀은 잘 유지되었다. 스칼지는 어째서 둠 종족은 샨으로 변하지 않았는지 궁금했다. 그래서 칸두둠을 심문했다. 칸두둠은 다리가 하나씩 뜯길 때마다 자신이 알고 있는 모든 정보를 토해냈다. 칸두둠은 그에게 복종하고 있었으므로 스칼지는 그를 고문하지 않아도 되었다. 하지만 스칼지는 칸두둠을 증오했다. 칸두둠이 파란색 피를 토하며 힘겹게 말을 뱉었다.
“용서를….”
그러나 스칼지는 자신을 배신하려 했던 칸두둠을 용서할 수 없었다. 고문은 계속되었다. 스칼지가 질문했다.
“너희들은 왜 샨(Syan)으로 변하지 않았지?”
“우리들은 불가능합니다. 불가능…. 원인은 모릅니다. 하지만 당신은 선택받았습니다. 신에게서…”
신이라…. 스칼지는 조금 궁금해져서 물었다.
“샨(Syan)이 어째서 신의 사자이지?”
“샨(Syan)은 우주에서 가장 강한 종족. 그러므로 신의 사자….”
“단지 강하다고 해서 신의 사자라고?”
“샨(Syan)은 무한한 전기를 몸에 저장하는 종족…. 신은 전기에 있으므로….”
스칼지는 코웃음을 쳤다.
“그게 둠의 종교인가보군. 하지만 나는 신의 사자도 아니고 뭣도 아냐.”
고문은 계속되었다. 하지만 칸두둠은 마지막 순간까지도 스칼지를 가슴 깊이 숭배했다. 스칼지는 칸두둠을 죽였지만 그의 믿음까지 바꾸지는 못했다. 칸두둠은 자신이 믿는 신의 사자의 손에, 괴롭지만 숭고하게 죽어갔다.
“광신도 녀석.”
스칼지는 칸두둠의 시체를 내려다보며 혼잣말을 했다. 그러고는 자신의 방으로 되돌아갔다. 스칼지는 거울로 자신의 모습을 봤다.
‘둠에 이어서 이번에는 샨이군.’
‘샨’은 거의 인간의 모습이었다. 그래서 스칼지는 인간을 떠올릴 때 징그럽지는 않았다. 다만 인간의 결함들이 보일 뿐이었다.(인간이 원숭이를 볼 때도 이와 비슷할 것이다.) 나약한 인간의 신체. 저급한 두뇌 수준. 한심했다. 한심한 건 둠도 마찬가지지만 말이다. 스칼지는 고민했다. 자신의 엄청난 힘이라면 혼자서도 인간과 둠을 모두 지배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게 무슨 의미인가. 자신은 인간도 아니고 둠도 아니었다. 그들을 지배해봤자 마음의 빈 공간은 채워지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외로움을 달래자고 그들로 변종하는 것도 싫었다. 열등하고 나약한 종으로 변하는 건 끔찍한 일이었다. 스칼지는 며칠이고 생각했다. 자기가 뭘 해야 할지에 대해서. 어떻게 살아야 할지에 대해서. 그런 날들이 계속되던 중 전함에서 ‘쾅’하는 충격음이 들렸다. 지구군의 총 공격 ‘운명의 날’이 시작된 것이다. 그리고 그 때, 스칼지는 자신이 뭘 해야 할지 명확히 깨달았다.
미래
‘운명의 날’ 작전 10년 후….
둠의 우주선 내부에서 인간들이 일렬로 나란히 줄을 서있었다. 둠은 그들을 노예처럼 취급했다. 행렬은 끝도 없었다. 그 행렬의 맨 앞에 도달하려면 일주일은 줄을 서야 했다. 둠은 인간에게 먹이를 던져주었고, 인간은 게걸스럽게 그것을 주워 먹었다. 고통의 행렬…. 그 행렬의 끝엔 무엇이 있는가. 일주일을 고통 속에 서있었던 인간은 알 수 있었다. 행렬의 끝에 있는 것은 변종이었다. 둠은 인간을 강제로 변종 장치에 집어넣고는 둠으로 변종시켜 버렸다. 그리고 그 다음은 끝없이 늘어진 둠의 행렬…. 그리고 그들을 감독하는 ‘샨’들. 그렇다. 이번에는 ‘샨’으로의 변종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결국 모든 인간은 둠을 거쳐서 ‘샨’이 되었다. 그리고 이 모든 행렬의 원천에는 스칼지가 있었다. 그는 ‘샨’ 종족의 왕이 된 것이다. 스칼지는 자신의 외로움을 채우기 위해 모든 인간을 ‘샨’으로 바꿔버렸다. ‘샨’으로 변하지 못하는 오리지널 둠 종족은 이미 말살된 후였다. 스칼지는 자기만의 왕국을 꾸몄다. 모든 것은 완벽했다. 너무 완벽해서 심심할 정도였다. 그래서 그는 지적 호기심을 가지며 이것저것을 탐구하곤 하였다. 변종 장치도 스칼지의 주요한 관심 대상이었다. 어느 날 스칼지는 우연히 변종 장치의 숨겨진 명령어를 발견했다. 그 숨겨진 명령어에는 새로운 종으로의 변신이 담겨있었다.
폴더는 0등급. 종의 이름은 ‘신(God)'.
'God'은 무엇일까. 그는 둠에게 물어볼 수도 없었다. 이미 수십 파섹의 거리에 있는 모든 둠을 말살시켰기 때문이다. 하지만 분명 'God'은 둠 언어로 신을 의미했다. 전지전능한 신. 신으로 변종을 할 수 있다고? 스칼지는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분명히 신이라고 적혀 있었다. 근데 이름만 ‘신’인 다른 생물체를 지칭한 것이라면? 0등급이라고는 해도 1등급보다 강한 생물의 분류라고는 확신할 수 없었다. 0은 특이한 숫자였으니까 말이다. 일반적이라면 이런 위험을 안고 변종을 시도하지는 않을 것이다. 스칼지도 당연히 변종을 포기하고 기억 속에 이 일을 묻어두려고 했다.
하지만 스칼지는 떠올리고야 말았다. 철학적 질문을 던졌던 유년기를. 스칼지는 한 때 인간이었고, 둠이었고, 샨(Syan)이었다. 스칼지라는 존재는 도대체 뭐란 말인가? 스칼지는 자신을 정의할 수 없었다. 인간이었던 때는 스프를 좋아했고 둠이었던 때는 초록색 점액질을 좋아했고 ‘샨’인 지금은 에너지를 흡수하는 걸 좋아했다. 스칼지는 고뇌했다. 그것은 자유의지에 대한 물음이었다.
‘나는 왜 인간이었을 때는 인간의 욕구를 따르고, 둠이었을 때는 둠의 욕구를 따르는가.’
그 맹목적인 욕구들은 스칼지가 결정한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종(種)이 결정한 것이었다. 자유의지란 결국 종에 속박된 것이라고 스칼지는 생각했다. 그렇다면 자유의지에는 자유가 없단 말인가. 그는 샨의 번화가를 거닐었다. 그가 지나가자 모든 샨들이 고개를 숙였다. 스칼지는 번화가의 면면을 살폈다. 모든 상업광고들… 욕구들…. 거기에는 생존과 번식을 향한 종(種)의 의지만이 있었다. 거기에 스칼지는 없었다.
‘에너지 전문점. 힘을 보충하라’
‘살을 빼세요. 그리고 사랑 받으세요.’
‘결혼, 고민이시라구요? <결혼할래요>가 이뤄드립니다.’
종(種)을 벗어난 스칼지는 과연 무엇일까. 어쩌면 스칼지 그 자체는 아무것도 아닌 존재인지도 모른다. 그 생각에 미치자 스칼지는 자기 존재의 가벼움에 현기증을 느꼈다. 스칼지는 무언가에 조종당하고 있다는 느낌을 떨칠 수가 없었다. 그는 자신이 무대에서 춤추는 꼭두각시처럼 느껴졌다. 스칼지는 괴로웠다. 이런 괴로움을 느꼈기에 스칼지는 변종 장치에 더욱 관심을 기울였다. 0등급 폴더에 숨겨진 ‘신’이 된다면 완벽한 자유 의지를 가질 수 있을까?
신이라는 이름은 스칼지의 마음을 갉아먹었다.
세 번째 변종
스칼지는 모두가 잠든 시간에 홀로 일어나 변종 장치가 있는 실험실로 걸어갔다. 무수한 질문이 머리에 가득했다. 정말 신이 될 수 있을까. 아니면 혹시 하등 생물로 변하는 게 아닐까. 스칼지는 변종 장치 앞에서 마지막으로 고민했다. 어쩌면 자살 행위에 가까운 일이었으니까. 그는 고민했다. 모든 질문을 잊고 침실로 돌아가려고도 했다. 그래서 결국 돌아갔던 적도 많았다. 그러나 스칼지는 중독된 것처럼 다음 날이면 결국 여기로 오고 마는 것이었다. 아, 멍청한 스칼지! 그는 결국 0등급 폴더를 활성화 시키고는 'God'을 실행했다. 그러고는 주사를 맞으러 달려갔다. 주사, 신으로의 변종을 이뤄낼 수천 개의 주사기가 그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이내 스칼지의 온몸에는 주삿바늘이 빼곡하게 꽂혔다. 그렇게 주사액이 모두 주입되자 오만 가지 빛이 그를 향해 발사되었다. 스칼지의 몸이 요동쳤다. 그 어떤 변종보다도 강렬한 통증이 몰아닥쳤다. 그의 은색 몸이 점점 검게 변하고 있었다. 팔과 다리가 짧아지고 몸은 줄어들었으며 피부는 점점 단단해졌다. 스칼지의 뇌는 그 어느 때보다 큰 변화를 겪었다. 스칼지는 감당할 수 없는 통증을 느끼며 자신이 죽게 되리라고 예상했다. 그의 몸은 우주에 존재하지 않았던 어떤 금속으로 점점 변해갔다. 가장 단단하고 무엇으로도 부술 수 없는, 그는 검은 구체가 되었다. 그러나 그게 끝이 아니었다. 스칼지는 자신의 안에서 점점 강렬한 전기가 끓어오르는 것을 느꼈다. 그 전기는 막대하게 증가했다. 전기가 스파크를 튀며 실험실을 초토화시켜버렸다. 이윽고 무한한 전기가 스칼지의 몸에 차올랐다. 전함을 모조리 부숴버릴 정도의 압도적인 에너지였다. 스칼지는 정신이 아득해지고 있었다. 전기는 특이점에 도달할 정도로 강해졌다. 스칼지는 자신을 구성하는 분자 하나하나가 불에 타는 느낌이 들었다. 스칼지라는 존재를 수만 수억 개로 쪼개버리는 고통. 그리고 그는 이 고통보다도 더 거대한 힘이 서서히 다가오고 있다는 걸 느꼈다. 그것이 가져올 게 파멸이든, 부활이든 종점을 찍을 게 분명했다. 이제 온다. 오고 있다. 신이 되는 것인가, 아니면 파멸할 것인가. 그 때 힘이 몰아닥쳤다. 공간을 부수고, 시간을 부수고, 우주를 초월한, 신이 그의 몸에 강림했다.
스칼지는 시간이 멈춘 듯한 상태를 경험했다. 신은 스칼지의 마음 안에 작은 공간을 만들고는 혼의 모습으로 머물렀다. 신은 우주보다도 까만 눈으로 스칼지를 응시했다. 신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만 신이 머무는 자리에 깊은 자국이 생길 뿐이었다. 깊고, 또 깊게 아득한 흔적이 남았다. 그 흔적은 절대 지워지지 않을 정도로 깊어졌다. 그러자 연기가 사라지듯 서서히… 신이 사라졌다. 스칼지는 신이 떠난 후 자기에게 남은 구멍에 당황했다. 그는 그것에 적응하려 하였으나 무한한 깊이에 빠져 허우적댈 뿐이었다. 스칼지는 그렇게 발버둥치다가 그만 의식을 잃고 말았다. 깊은 잠에서 스칼지는 신의 흔적에 점점 적응해 나가고 있었다. 파괴할 수 없는 검은 구체인 채로.
스칼지가 눈을 뜬 것은 아주 먼 미래였다. 우주의 멸망이라 할 수 있을 정도의 까마득한 미래. 그동안 생명체들은 살고 죽었을 것이다. 그 모든 꼭두각시들은 다 어디로 갔는가. 하지만 스칼지는 무한한 존재였으므로 더 이상 그들이 궁금하지 않았다. 스칼지는 잡음만이 존재하는 우주를 바라보았다. 허무하다. 우주는 참으로 허무한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던 중 스칼지는 자신이 우주를 창조할 능력이 있음을 깨달았다. 그는 자기 힘에 감탄했다. 스칼지는 심지어 자신과 같은 존재도 창조할 수 있음을 알았다. 그렇다면 외로움을 느끼지 않아도 될 터였다. 그러나 그는 더 이상 외로움을 느끼지 않았다. 번식을 원하지도, 생존을 원하지도 않았다. 스칼지는 자신을 조종하는 모든 자유의지를 벗어버린 것이다. 그는 아무것도 원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그는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다시 영원한 고요에 빠져들었다. 다만 가끔 단잠에 뒤척이며 사소한 질문을 하나 생각할 뿐이었다. 그렇다면 신은 왜 우주를 만들었나 하는 유년기의 질문을…….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