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리대(자랄타이)가 일찍이 수군 70척을 거느리고 성대하게 기치를 늘어 세우고 압해(押海)를 치려 하여
춘과 한 관인을 시켜 다른 배를 타고 싸움을 독려하게 하였습니다. 압해 사람들이 대포 두 개를 큰 배에 장치하고 기다리니,
두 편 군사가 서로 버티고 싸우지 않았는데, 차라대가 언덕에 임하여 바라보고 춘 등을 불러 말하기를,
'우리 배가 대포를 맞으면 반드시 가루가 될 것이니 감당할 수 없다.' 하고, 다시 배를 옮겨 치게 하였습니다.
압해 사람들이 곳곳에 대포를 비치하였기 때문에 몽고 사람들이 결국 수공을 위한 모든 장비를 부수었습니다."
-고려사절요 제 17권, 고종 안효대왕 4, 병진 43년-
역사왜곡드라마 무신에 등장하는 최우. 뭐, 너무나도 호방해서 백성이 죽는 사소한 일은 신경 쓸 겨를이 없었나 보다.
1. 배경
“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섬기는 것은 도리에 맞는 일이니, 예로써 섬기고, 믿음으로써 사귄다면 저들인들 또한 무슨 명분으로
우리를 괴롭히겠는가. 도성과 종묘사직을 내팽개치고 섬에 숨은 채 구차하게 세월을 보내면서,
변방의 백성과 장정들을 적의 손에 죽게 만들고 노약자들을 노예로 잡혀가게 하는 것은 국가의 장구한 계책이 아니다."
-고려사, 유승단 열전-
고종 33년(1246), 최이(최우)가 왕을 위해 잔치를 열었는데 여섯 개의 상에 칠보(七寶) 그릇을 늘어놓았으며
음식들이 극히 풍족하고 사치스러웠다. 최이가 스스로 “오늘과 같이 좋은 날이 다시 있겠는가?” 하며 자화자찬했다.
최이가 잔치와 풍악을 즐긴 나머지 사람들을 모아놓고 술을 마시는 것이 절도가 없었다.
-고려사, 최이 열전-
(1) 고려의 전략
제 1차 여몽전쟁 이후, 최우는 혹시나 반복될지 모르는 전쟁을 피하기 위해 강화도로 수도를 천도하였다.
최우는 아예, 고려의 중앙군과 자신의 사병을 모조리 끌어모아 강화도로 데리고 왔고, 이 과정에서 격렬히 반대한 김세충을 본보기로
죽이기까지 하며 반발을 묵살했다. 이에 몽골은 재차 침입하여 기나긴 여몽전쟁이 다시 시작되게 된다.
최우의 전략은 간단했다. 몽골군이 한반도에서 깽판을 치든, 경주로 처들어가든 개경을 폐허로 만들든 내 알바 아니고,
그냥 강화도만 지키고 세금이나 받아먹으면서 탱자탱자 놀면 된다는 것이었다. 최우는 강화도로 천도한뒤,
백성들을 동원해 궁궐과 자신의 집을 크게 짓고, 얼음 저장고를 마련하고, 기화요초를 정원에 옮겨 심고 잔치를 벌이는 막장행각을 일삼는다.
정권을 물려받은 최우의 아들 최항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여몽전쟁 당시 이 최씨정권은, 한반도 역사상 일제강점기를 제외하고 가장 쓰레기같은 정권이었다고 평할수 있을 것이다.
(2) 곤경에 처한 몽골군
되게 쓰레기같은 전략이었지만, 역으로 몽골군에게는 매우 난처한 전략이었다. 당연히 몽골군의 목적은 수도를 함락시키고
지배층을 죽이든지, 항복을 받아내어 전쟁을 종결시키는 것이었는데, 섬인 강화도로 도망치자 그럴수가 없었다.
이에 몽골군의 선택은, 한반도 전역에 약탈을 자행, 폐허로 만들어 항복을 받아내겠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아무리 수십년을 약탈하고, 백성을 죽여도 이 미친 최씨놈들이 항복하질 않는다;; 그렇다고 물론 강화도에서 나오지도 않는다.
거기다 몽골군이 한반도 전역을 통제할수 있는 숫자가 되지 못한터라, 몽골군이 물러나면 강화도의 고려군이 상륙해 세금을 걷는 등
강화도에 대한 봉쇄도 이루어지지 못했다. (여담으로, 이런 상황에 반발하여 백성은 반란을 숱하게 일으켰으나,
몽골군과 고려 정규군을 동시에 상대할 여력이 없던지라 성공하지 못했다.) 또, 강화도가 그리 작은 섬도 아니라 농사도 지을수 있었고
고려는 간척사업을 통해 강화도의 면적도 넓히고 있었다.
이때 고려에 대해 민심이 크게 이반되어 반란이 빈발하던 상태라, 몽골군이 조금만 유하게 나갔다면 고려를 쉽게 정복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몽골군은 배운게 전쟁과 약탈밖에 없던 군대라, 그게 되나? 결국 끝도없는 전쟁의 수렁속으로 빠져들게 되었다.
비록 정예병들은 죄다 강화도로 건너갔다고 하나, 고려 정규군들이 지방에서 항전을 계속하고 있었고, 의병들도 일어나 몽골에 대항하였다.
산성에 의지하여 몽골군들에게 대항하고, 때때로 몽골군의 뒤를 치기도 했다. 가랑비에 옷젖는다고,
이런 손실은 몽골군에게 무시할수 없는 피해를 가져왔다. (처인성 전투에선 총사령관 살리타이가 김윤후에게 사살되기도 했었다.)
거기다, 제 3차침입 이후부터는 한반도 전체가 쑥대밭이 된터라, 약탈로 보급을 유지하기도 어려운 실정이었다.
(3) 미친척하고 강화도를 한번 쳐봐?
강화도가 육지에서 그리 먼 섬도 아니니 시간이 걸리더라도 배를 준비해 상륙해야 하는게 아니냐 할지도 모르겠는데,
몽골이 보기에 당시 강화도로 들어가는 것은 미친 짓이었다. 몽골군은 물을 두려워했고, (미신이 강해, 물 위에 소변을 보면 사형에 처할 정도였다!)
수전에 익숙하지 않았다. 또한 서해안은 물길이 참 뭐같은 바다라, 강남에서 뱃사람들을 데리고 오더라도 그리 쉽게 항해하기 어려웠다.
고려수군은 질적인 면에서 동아시아 최강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으며(여몽연합군의 일본원정 당시,
강남군의 배가 약하니, 고려에게 배를 만들게 하면 승리할수 있다고 원의 정우승이라는 대신이 말한 바 있다.),
강화도를 지키는 수군은 무려 천척에 달했으니 결코 상륙할수 없었던 조건이었다.
만에하나, 기습적으로 상륙해도 문제였다. 몽골도 당시 고려의 군사편제를 어느정도 알고 있었는데,
이에 계산해보니 강화도에 무려 5만에 달하는 중앙군이 득실거리고 있다고 판단하게 된다.
(실제로는 1차 여몽전쟁, 그리고 이런저런 이유로 줄어서, 삼별초까지 다 합해 3만이 될까말까였다고 한다.)
당연히 몽골의 수군으로는 보급로도, 퇴로도 유지할수 없을게 뻔했다. 강화도로 상륙하는 것 자체도 거의 불가능하지만,
설사 상륙한다고 해도 보급도, 지원군도, 퇴로도 없이 고립된 상황에서 5만에 달하는 정예군과 사생결단을 내야한다는 결론이 나온다.
말 그대로 답이 없다.
2. 압해도 대치
어쨌든, 강화도를 압박하지 않으면 전쟁이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으니, 살리타이는 전함을 건조해 강화도로 직공하겠다는 원대한 계획을 세운다.
그러나 막상 해보니 전함 건조도 어렵고, 수군 훈련하는 것도 하루 이틀 걸리는 것이 아니라, 만든 군함들을 도로 다 부셔버리게 된다.
몽골의 5차침입때부터 몽골군을 이끈 자랄타이는 살리타이보다 꽤 근성이 있는 남자였던 것 같다. 그는 본격적으로 수군을 양성했고,
1254년에는 군함 7척으로 갈도를 약탈하는 등 소기의 성과를 거두었다. 이에 자신감을 얻은 자랄타이는 압해도를 공격하기로 마음먹었다.
압해도는 조운선과 무역선이 지나가는 길목으로, 만일 이곳을 장악한다면 강화도를 압박할 수 있었다.
자랄타이는 자신만만하게 70척의 군함을 이끌고 나아갔는데...
압해도 주민들이 몽골보다 훨씬 큰 전함에 대포(투석기)를 2개나 싣고 기다리고 있었다.
(사실, 압해도는 예전부터 해적으로 유명한 섬이었고, 그곳의 주민들도 흉년이 들면 해적질을 병행하는 사람들이었다고 한다.)
그렇기에 정규군이 아니었음에도 주민들이 이런 전함을 보유하고 있었든듯 싶다.
어쨌든 몽골군은 매우 당황했다. 이제 막 수군을 양성하기 시작한 그들로서는 대포를 어떻게 전함위에 올릴수 있는지 상상도 되지 않았다.
거기다 몽골군의 배에 비해 크기도 매우 컸으니 덤벼들자니 그냥 개박살날거 같고, 그렇다고 물러나자니 그동안 배만들고 훈련한게 아깝고...
혹시 우회해서 상륙할수 있을까 싶어, 여기저기 살펴봤지만 압해도 주민들이 이미 대포를 해안가마다 배치하여 대비하고 있었다.
결국 자랄타이는 압해도 공격을 포기하고 물러난다. 그리고 그동안 양성했던 전함을 모두 불태우게 된다.
3. 결과
"....지금의 계책으로는 섬 안에 둔전하여 농사도 짓고 지키기도 하여 청야(淸野)하여 기다리는 것이 상책입니다." 하였다.
최항이 옳게 여겨 춘에게 집 한 채와 쌀ㆍ콩 3백 석을 주고, 계급을 뛰어서 친종장군(親從將軍)을 제수하였다.
(중략)
장군 송길유(宋吉儒)를 보내어 청주(淸州)의 백성을 섬으로 옮기게 하였다. 길유는 백성들이 재물을 아껴
옮기기를 싫어할까 염려하여 공사(公私)의 재물을 모두 불태워 버렸다. 이 일보다 먼저 최항이 사신을 여러 도에 보내어
주민들을 모두 몰아서 섬 안으로 들어가는데, 명령을 좇지 않는 자는 집과 전곡을 불태워서 굶어 죽은 자가 열에 여덟ㆍ아홉은 되었다.
-고려사절요 제 17권, 고종 안효대왕 4, 병진 43년-
정규군도 아닌 압해도 주민들에게 몽골군이 물러나게 되었다는 결과가 나오며 다시 몽골수전막장전설을 이어가게 된다.
이에 몽골은 전쟁이 끝날때까지 약탈밖에 할 짓이 없었다;; 결국 수십년에 걸친 약탈 끝에, 고려의 민심이 완전히 돌아서서
무신정권이 붕괴하고 고려는 몽골에 항복하게 되긴 한다.
반면, 이 소식을 들은 최항은 엉뚱한 생각을 하게 된다. 몽골의 수전막장전설을 들으니 아예 백성들을 모조리 섬으로 옮기고 청야작전을 펼치면,
약탈도 못하니 보급이 곤란해진 몽골이 결국 물러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었다.
그래서 명령을 내려 청주의 백성들을 모조리 섬으로 옮기게 하였다. 아예 돌아올 생각도 품지 못하고 겸사겸사 약탈도 막을겸
집이니, 논밭을 죄다 불질러 버린다;;
아, 갑자기 섬에 바글바글하게 모이게 된 사람들을 위한 식량대책은? 그런거 없ㅋ엉. 그들중 대다수가 굶어죽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