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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쨍그랑! 탁! 쿵! 와장창” 접시와 술잔이 제멋대로 공중을 날고 술상이 요란하게 엎어진다.
“대왕마마!” “야! 이년들아! 꼴 보기도 싫다.”
“마마, 고정하시옵소서.”하고 궁녀들이 임금의 옷깃을 잡자 비위가 뒤틀린 임금이 거세게 뿌리치며 따귀를 갈긴다. “에잇! 짝!”
“악!”
“모두 꺼져버려!”
“에구머니나!”
“흑흑흑! 아바마마! 아바마마! 어흐흐흑!”
곁에서 술시중을 들던 궁녀들이 무서워 얼른 자리를 비킨다. 하지만 아주 물러가지는 않고 임류각을 내려와 멀찌감치 떨어져 대왕의 동태를 살피고 있다.
오늘도 만취한 성왕. 전각에 누워 실컷 울다가 별빛 찬란한 웅진성의 밤하늘을 바라보며 고함을 지른다. “이년들! 모두 죽일 거야. 으~어~엉!”
“대왕이 완전히 실성했나 봐.”
“그러게. 며칠 전까지는 이러지 않으셨는데.”
궁녀들이 소곤거리고 있는데 다시 성왕의 커다란 울부짖음이 들려온다. “흑흑! 여인들은 모두 어마마마 같은 것들이여. 심하게 질투하고 권력을 탐해 지아비까지 죽이는 악마.”
“어머머! 대왕께서 대비마마를 살인자라고 하네. 완전히 미쳤나봐.”
“정말 별꼴이야. 누구 덕에 임금이 되었는데.”
“얘. 이러지 말고 자리를 뜨자.”
“아니, 대왕마마를 버려두면 큰일 나려고?”
“지금 대왕이 실세는 아니잖아. 여기 있다가 대왕이 내뱉는 불온한 넋두리 때문에 우리 모두 죽게 될지 몰라.”
“맞아. 대비께 신고 안하자니 불안하고 실성한 대왕을 신고하기도 애매하고.”
“얼른 가자.”
“그래. 우린 못 듣고 못 본 거라고.”
달아나는 궁녀들을 바라보며 성왕이 절규한다. “야! 이년들아! 어디로 도망치느냐? 이런 불충한 것들! 흑흑!”
“도대체 누가 잘못된 거지. 세상인가, 아니면 나 성왕인가?” “어쩌면 나까지 죽일지 어찌 알겠나. 세상이 무서워.”
그렇게 난동을 부리던 성왕. 하지만 신기하게도 임류각 난간에 산신령이 고이 모셔져 있다.
“신령님!” 누각 안에서 휘청거리던 성왕은 갑자기 산신령 앞에 무릎을 꿇는다. “그래. 그러니 나는 바보가 되는 거야. 신령님 앞에 선왕의 명복만을 비는 영원한 바보. 바보!”하고 답답한 마음에 소리를 꽥 질렀다.
“선왕께서 여신을 사랑하신 이유를 알 것 같아. 더러운 권력다툼을 하지 않는 순수한 여인. 거기다가 영원히 늙지 않는 세상 최고의 미인. 흑흑!”
깊어가는 웅진성의 밤에 말없는 산신령의 목상만이 그의 하소연을 묵묵히 듣고 있었다.
최근에 궁녀들은 한밤중에 침소에서 하얀 잠옷차림으로 울부짖으며 나오는 임금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었다. 하지만 누가 나서서 침소에 드시라고 말을 올리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선왕의 독살에 어쩔 줄 몰라 방황하는 임금을 감히 건드릴 수 없다는 것을 충분히 알고 있었다. 누각을 내려온 임금은 정신이 나간 것처럼 초점 잃은 눈으로 정원을 헤매다가 커다란 나무를 붙들고 맹맹한 목소리로 중얼거리며 흐느낀다. “아바마마. 소자는 어찌해야 좋겠사옵니까? 흑흑!” 그러다가 나무 아래에 주저앉으며 더욱 크게 울부짖으며 쓰러지기도 하였다. “아바마마! 으흐흐흐!”
“대왕!” 저쪽 어둠 속에서 절망에 빠져 있는 임금을 부르는 다정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왕비 사씨. 성왕보다 세 살 연상인 그녀. 조금만 마음에 들지 않으면 불같이 화를 내는 사나운 대비에게서는 찾아볼 수 없는 포근한 사랑이 느껴진다. 어느 때는 자신을 항상 따스하게 품어주는 어머니와도 같고 또 어느 때는 자상한 누님과도 같은 포근한 여인.
“오늘도 여기에 계셨군요.”
“저리 가. 가란 말이야.”
“그만 진정하시죠.”
“비켜.”
“밤바람이 차가운데 어서 궁으로 드세요.”
“......”
그날 밤 성왕의 꿈에 온화한 표정의 무령왕이 나타났다. “후왕, 요즘 술타령만 하고 있으니 무슨 어려운 일이 있소?”
“아바마마, 저의 슬픔을 잘 아시지 않습니까?”
“음. 이 아비 때문에 후왕의 심려가 크니 나도 괴롭소.”
“무슨 좋은 방법이 없겠사옵니까?”
“후왕. 곰나루 근처 곰 여신의 사당에서 사제를 시켜 정성스럽게 초혼하여 보오. 여신이 도와줄 것입니다.”
“아바마마, 소자에게 인연이 없는 여신이 과연 응할까요?”
“곰 여신은 이곳 백제국의 수호신이오. 나와의 관계를 떠나 이 땅의 평안과 안녕을 돌보는 겁니다.”
“아! 그러면 어떻게 하여야 하옵니까?”
“초혼하려면 우선 내 제삿날에 곰나루 가에 세워진 사당에서 제사를 지내야 합니다.”
“아니, 그 누추한 곳에서 아바마마의 제사를 올리다니요?”
“반드시 그래야만 할 것이오.”
“......”
성왕이 속으로 곰곰이 생각한다. “선왕도 생전에 곰 여신에 홀리시더니 지금도 여전하시군. 꼭 선왕 말씀대로 하여야 하나.”
무령왕이 다시 말을 잇는다. “그러면 여신은 자신의 사당을 둘러볼 겸 반드시 나를 보러 나타날 것이오.”
“예. 알겠사옵니다.”
“하지만 제사를 지낼 적에는 반드시 주변에 향불을 많이 피워서 진한 연기가 하늘을 완전히 가리도록 하여야 하오.”
선왕의 기괴한 당부의 말에 궁금한 표정으로 묻는 성왕. “그것은 무슨 연유입니까?”
“천기이니 지금 말할 수는 없소. 천기란 것은 밖으로 새어나가 누가 알면 안 되는 것, 궁금하겠지만 곧 알게 될 것이오.”
비록 부자의 관계라 하더라도 하늘의 일을 함부로 발설할 수는 없는 법. 그렇게 생각이 들자 성왕은 고개를 끄덕이며 평소 의문을 가지고 있던 일을 조심스럽게 물어본다. “예. 아바마마. 송구하오나 전부터 궁금한 것 하나만 여쭈어 보아도 되겠습니까?”
“뭐든지 말해 보시오.”
“원래 아바마마는 웅진에 계속 도읍하라는 유지를 남기셨습니다. 하지만 말씀을 바꾸어 전번에 임류각에서는 사비천도를 하라고 하셨는데 소자 어떻게 하여야 합니까? 이곳에서 상처가 너무 깊어 견디기 어렵습니다.”
“흠. 나는 절대로 임류각에서 후왕더러 사비로 천도하라고 한 적 없소.”
“네? 소자가 분명히 듣고 대조사까지 세웠는데요.”
“후왕이 뭘 잘못 보았구려. 혹시 귀신이 씌웠나.”
아들을 똑바로 바라보면서 비장한 음성으로 다시 말을 잇는 무령왕. “후왕. 여긴 내가 목숨을 잃은 땅. 그런 내 마음은 어떠하겠소. 하지만 웅진은 큰 명당, 반드시 버텨야 합니다.”
“하지만 아바마마를 모신 자리는 반궁수라 하여 반란의 화살을 맞는 곳이랍니다.”
“후왕. 부분적인 흉함이 명당 웅진의 전부는 아닙니다. 아무리 어려워도 반드시 웅진에 머물러야 하오. 하늘이 돌보고 내가 도와줄 것입니다.” 아무리 무령왕이 다독여도 불안하고 초조한 성왕은 부왕에게 자신의 처지를 하소연한다. “연씨 가문이 설치는 웅진에서는 저로서도 마음을 잡을 수 없습니다. 소자가 저들의 마음에 들지 않으면 언제라도 임금을 바꿀 수 있사옵니다.” 아들의 하소연을 들은 무령왕은 결연한 표정을 보내며 격려를 하였다. “후왕, 이게 다 백제국을 위한 우리들의 노고와 희생입니다. 아무리 불안해도 꾹 참고 아비의 부탁을 들어주오.” 말을 마친 무령왕은 슬며시 연기처럼 사라진다.
“아바마마!”
다음날 아침 내전. 분노한 왕비가 의자에 앉아 있는 가운데 계단 아래 좌우로 시녀들이 긴장한 표정으로 죽 늘어서있다. 왕비 앞에 공손히 머리를 조아린 형리. 왕비가 무겁게 입을 연다. “어젯밤에 임금을 모셨던 궁녀들을 데려오시오.”
“아뢰옵기 송구하오나 어제 있던 자들은 대비전의 궁녀들입니다. 대비께서 대왕이 과음하실 때마다 모시라고 특별히 보낸 자들입니다.”
“그래도 반드시 데려오시오. 따라오지 않으면 끌고라도 오시오.”
“예. 왕비마마.”
잠시 후 궁녀 둘이 고개를 뻣뻣이 쳐들고 형리를 따라 들어온다. 그 모습에 왕비가 화가나 소리 지른다. “고개를 숙여라.” 하지만 오히려 좌우에 서 있는 시녀들을 훑어보며 똑바로 왕비를 노려보는 궁녀들. “무슨 일로 저희를 부르셨습니까?”
더욱 화가 치민 왕비가 의자에 앉은 채로 발을 동동 구른다. “네. 이년들. 죄를 알렸다.”
“저희들이 무슨 죄가 있다고 아침부터 그러십니까?”
“어젯밤에 대왕을 모시다가 내팽개치지 않았느냐?”
“호호호! 저희는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누가 거기에 있더라도 마찬가지였을 거예요.”
“이, 이런 괘씸한 것들. 형리!”
“네. 마마.” 이것들을 내가 보는 앞에서 매우 때리시오.
“네.”
내전의 궁녀들이 달려들어 대비전 궁녀들의 손과 팔을 단단히 잡았다. “흥! 왕비마마. 꼭 후회하실 겁니다. 호호호!” 태연하게 웃음 짓는 대비전 궁녀들의 치마를 벌거벗기자 둥그런 엉덩이가 허옇게 드러났다. 대비전이 두려운 형리들이 머뭇거리다 곤장의 채를 가볍게 들어 살짝 내리쳤다. 그래도 그 굉음은 궁녀의 비명소리와 함께 내전에 널리 울려 퍼졌다. “퍽! 아이고! 퍽! 아이고!” 형틀 위의 그것은 뽀얀 복숭아의 색에서 점차 분홍으로 짙게 물들어 익어가더니 마침내 꾹 참았던 울음과 함께 진홍빛으로 무르익어 터지고 선혈이 낭자하게 흐른다. “으~흐흐흑.”
마침 그때였다. “이년들. 그만 두지 못할까.” 밖에서 커다란 고함소리가 내전을 뒤흔들며 점점 가까이 들려왔다. 살기등등한 기세로 궁녀들과 함께 내전에 들어온 대비가 왕비를 매섭게 쏘아보면서 소리 지른다. “누가 함부로 나의 궁녀들을 잡아다 욕을 보이느냐?”
대비의 벼락 치는 호통에 내전은 금방 쥐죽은 듯 조용하다. 다시 대비가 얼굴에 핏대를 세워가면서 소리쳤다. “누구냐? 말하지 않으면 내전의 궁녀들을 모두 곤장을 쳐서 궁 밖으로 쫓아낼 것이야.”
그 말에 할 수 없이 실토하는 왕비. “제가 그랬습니다. 대왕을 잘 모시지 않기에 버릇 좀 가르치려고 한 겁니다.” 왕비가 이실직고하자 잡아먹을 듯이 노려보는 대비. “이년이, 어디서. 에잇! 짝!”
“악!” 볼을 움켜쥐고 대드는 왕비. “대비께서 한 나라의 왕비에게 어찌 이러실 수 있습니까?”
“이년. 네 년은 그래도 곤장 맞은 건 아니지 않느냐?”
“......”
“앞으로 이런 일이 있으면 네년을 친정으로 쫓아낼 것이야. 얘들아 가자.”
“예. 대비마마.” 엎어진 두 궁녀를 들쳐 업고서 사라지는 대비전 궁녀들. 마침 그때 황급히 내전에 들어오는 비색 관복을 입은 젊은 신하. 들어오다가 대비와 정면으로 마주친다. 신하가 가볍게 허리를 숙이니 아직 화가 안 풀린 대비가 날카롭게 쏘아보고 휙 지나가버렸다.
“휘이~이~익.” 밖에선 여전히 매서운 눈보라가 창틀을 때리고 있다. 수치심에 턱과 이를 덜덜 떠는 왕비. “아!” 정신이 까마득하게 아득해지며 그만 실신하고 만다. “왕비마마!” 내전의 궁녀들이 소리치자 사태를 직감한 젊은 신하 장덕이 황급히 묻는다. “왕비께 무슨 일이 생겼습니까?”
“대, 대비께서 왕비께...” 말끝을 흐리는 궁녀. 따귀를 잘못 맞아 코피가 흐르는 왕비를 바라보며 어깨를 들썩이는 사연. “흑흑! 왕비마마. 소신이 반드시 마마의 억울함을 풀어드리겠나이다. 흑흑!”
우아한 봉황무늬 벽돌의 대비전. 긴장한 대비전 궁녀들이 죽 늘어선 가운데 장덕 사연이 대비 앞에 꼿꼿이 서 있다.
“그대는 누군가?”
“소신 장덕 사연이옵니다. 궁의 화공으로 있사옵니다.”
“그래. 무슨 일로 왔는가? 혹시 내 초상화라도 그려주려고 온 건 아니겠지.”
“마마. 자고로 궁궐의 여인네들을 단속하는 일은 왕비마마의 소관이옵니다. 하물며 대왕마마의 안위를 보살펴야 할 궁녀가 맡은 바 소임을 다하지 못하여 혼이 난 것인데 어찌 대비께서 왕비께 손찌검을 하신단 말입니까?”
“장덕. 그 궁녀들은 대비전 궁녀일세. 내가 특별히 정전에 보내어 요즘 술타령이 심한 후왕을 살피라 하였던 것이네.”
“대비마마. 아무리 대비전 궁녀를 위하신다 하여도 어찌 한 나라의 왕비께 그러실 수 있사옵니까?”
“뭐, 뭐라고? 이, 이런 무엄한지고. 당장 물러가지 못할까.”
“물러갈 수 없사옵니다. 어서 왕비께 사과하시죠.”
“네. 이놈. 여기가 어디라고 행패를 부리느냐?
“마마야말로 궁중에서 행패를 부리신 것입니다.”
“안 되겠다. 여봐라.”
“예. 마마.”
“형리를 불러라.”
이번엔 대비전에 불려온 형리. 정말 난감한 표정이다. 들어온 형리에게 불호령을 하는 대비. “당장 저놈 장덕(將德)을 장독(杖毒)이 나게 매우 쳐라.”
“예!”
내시들이 달려들어 사연의 손과 팔을 꽉 잡았다. “왜들 이러십니까?” 잡힌 몸을 뿌리치려고 발버둥치는 사연. 하지만 여럿이 잡아끌어 사연의 바지를 벌거벗기자 탱탱한 엉덩이가 불룩하게 드러났다. 역시 내전이 두려운 형리들이 곤장의 채를 가볍게 들어 살짝 내리친다. “퍽! 퍽! 퍽!” 입을 꾹 다물고 고통을 참는 사연. 하지만 너덧 대가 지나자 마침내 아픔을 참지 못하고 비명을 지른다. “퍽! 아이고! 퍽! 아이고!” 스무 대가 넘고 삼십 대가 넘었다. 형틀 위에 놓인 사연의 엉덩이도 결국 새빨갛게 부끄럼을 타더니 피가 터져 흐른다. “으~으~.” 신음하다가 기절하는 사연.
마침 그때였다. “좌평어른 납시오.” 밖에서 궁녀의 긴장한 목소리가 내전을 울리며 들려왔다. 살기등등한 기세로 사연을 매섭게 쏘아보던 대비가 내관들을 돌아보며 말한다. “이제 저놈을 내전에 갖다 놓아라.”
“예. 대비마마.” 엎어진 사연을 들쳐 업고서 사라지는 대비전 내시들.
마침 그때 초조하게 대비전 문 앞에 서 있던 좌평이 피에 젖은 사연이 실려 나가는 것을 발견하고 얼굴을 찡그린다. “그자는 누구이기에 여기서 변을 당해 저 지경인가?” 그러자 들쳐 업은 내시가 대답한다. “장덕 사연이라고 합니다. 대비께 왕비마마의 일을 가지고 따지다가 곤장을 맞았습니다.” “음. 일이 더 커졌군. 흠흠!” 수염을 만지며 헛기침을 두어 번 한 좌평은 대비전 안으로 들어간다. 가볍게 허리를 숙이니 아직 화가 안 풀린 대비가 금방 반색하며 좌평을 반긴다.
“호호호! 좌평 어서 오시오.”
“대비께서 조금 전에 왕비를 따끔히 혼내셨다면서요?”
“조금 손 좀 보았죠.”
“대비마마. 너무 심하게 하시지 말고 살살 다루어주시죠. 하하하!”
“좌평은 무슨 이유로 그년을 감싸는 겁니까? 나는 왕실의 기강을 바로 세워야 합니다.”
“옳은 말씀이나 사비로 간 이후에는 사씨와의 관계가 매우 중요합니다.”
“......”
“더구나 지금 나간 장덕 사연은 비록 화공을 하고 있지만 사씨 가문 출신의 촉망받는 신하입니다. 그가 왕비를 감싸다 곤장을 맞고 앓아눕게 되었으니 그녀의 노여움이 이만저만이 아닐 겁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좋겠소?”
“사연의 벼슬을 올려주는 겁니다. 그것도 4품을 훌쩍 건너뛰어 은솔(恩率)로 진급시켜 주셨으면 합니다.”
“아니, 그렇게 벼슬을 높이 올려주면 나중에 좌평이 되어 이 나라를 사씨네가 장악할 것 아닙니까?”
“걱정 마십시오. 저와 연씨 신하들이 있는 한 평생 은솔로 지내다가 인생을 마칠 것입니다.”
“알겠소. 그럼 왕비는 어떻게 해야 좋겠소? 대비 체면에 이제 와서 애송이 왕비에게 사과를 할 수도 없는 노릇.”
“제가 왕비를 찾아가 보듬어 주겠습니다.”
“고맙소. 하지만 너무 기를 살리진 마시오.”
“그 일은 마음 푹 놓으셔도 됩니다.”
경대 위 연분홍 진주장식을 찬란히 비춘 햇살이 다시 거울에 반사되어 방안이 온통 눈부신 내전. 그곳에는 대비전에서 실려 온 사연이 끙끙거리며 누워 있다. “보연.” 가끔씩 왕비의 어릴 적 이름을 부르며 헛소리를 하는 사연. 같은 사씨 가문인 왕비는 어쩌다 마주치는 미관말직인 자기를 항상 친동생처럼 따뜻하게 대해 주었다. 어린 시절엔 같이 산과 들에 나가 뛰놀면서 술래잡기도 하고 구슬치기도 하면서 몸을 부대끼며 자라 왔지만 나이가 들어선 그것도 어렵게 되었다. 입궁하기 전까진 가끔씩 명절에 보연을 볼 수 있었지만 왕비가 되고 나선 이따금 먼발치에서 그리운 모습이 보였을 뿐이다. 비몽사몽을 헤매는 사연에게 그리운 지난날이 아련히 떠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