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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반성문
게시물ID : panic_98169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가막새
추천 : 3
조회수 : 1558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18/03/24 09:05: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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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교 새내기였을 적의 일이었다.
교수들은 학과MT에 안가면 결석처리라며 새내기는 일 명 열외없이 가도록 강요했다.
선배들은 기대하는 눈빛으로 새내기의 이름과 취미따위를 물었다.
중고등학교에서는 상상도 하지못했던 자기소개의 시간을 가졌다.
부모님이 고른 집 옆에 산다는 이유따위로 친해지는 사이가 아니었다.
같은 반이어서 친구의 친구여서 친해지게 되는 운명적 관계에서 벗어나는 첫걸음이었다.
상대의 색깔과 맛을 느껴보고 친구라는 호명을 허락하는 최초의 선택적 관계였던 것이다.
자유라는 맛에 설레였다.
하지만 좋은 두근거림은 낮의 한 때로 끝이었다.
밤이 되자 이른바 군기잡기라는 미명하에 새내기들을 전원 집합시켜 얼차례를 치렀다.
좀 전까지만 해도 상냥했던 선배들의 얼굴은 석고상처럼 굳어졌다.
학교와 집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공기 맑은 곳에서 미니 군대를 체험했다.
어쩌면 가장 군대와 흡사한 환경을 골라서 MT를 추진한 건지도 몰랐다.
한차례 근육의 뒤틀림과 영혼의 쪼그라듬이 끝나자 술파티가 이어졌다.
선배들의 얼굴은 언제그랬냐는 듯 예전처럼 밝게 돌아와 있었다.
인간의 양면성을 몸소 보여주는 솔선수범이란.
나는 나중에 저러지 않으리라 비릿한 조소를 품었다.

공포는 그로부터 대략 3년 정도 뒤에 일어났다.
군대를 제대하고 복학한 나의 눈에 새내기들의 행동이 거슬렸다.
선배들이 땀흘리며 학과일을 하고 있는데도 새내기들은 담배나 태우며 수다를 떨었다.
이런 새내기들의 건방짐이 마음에 안들기는 교수들도 마찬가지였나보다.
조교로부터 교수님들이 새내기의 예절교육을 시키라는 명령을 하달받았다.
우선은 웃는 낯으로 그들을 초대해야했다.
MT에서 벌어지는 지리멸렬한 술주정을 영웅담으로 포장했다.
앉으라면 앉고 오라면 오고 가라면 가는 12년 정규교육에 길들여진 새내기 따위 후리는 건 일도 아니었다.
다들 강아지같은 눈망울로 MT를 신청했다.
밤이 되자 한 달 남짓 참아왔던 분노가 나를 휘감았다.
이번 기회에 사회의 엄격함을 보여 주리라.
나는 새내기를 돌리고 또 돌렸다.
그들은 공포에 물들어 숨소리조차 내지 못하였다.
이제 그들은 복도에서 교수님을 마주치면 깎듯이 인사하리라.
선배들의 고충을 보고 달려와 일을 거들리라.
교정은 성공적이었다.

대학을 졸업한 지도 한참이 지났다.
뉴스에서는 여전히 대학 MT의 얼차례문화에 대한 비판적 보도가 나왔다.
이제와 생각해본다.
그때의 얼차례가 과연 무슨 효과가 있었는지.
꼭 그런 식으로 했어야 했는지.
나에게 숨 죽였던 그 새내기들은 그들의 후배에게 똑같이 했는지.
지금도 돌이켜보면 거대한 무언가에 사로잡혀 마왕의 탈을 썼던 내가 너무 부끄럽다.
그들에게 진심으로 사과하고 싶다.
내가 지켜주지 못 했음을.
내가 나를 잃어버렸음을.
못난 내가 그들과 그들 이후의 그들에게 그 공포를 전염시키지는 않았을까 너무 두렵다.
그들이 그 당시의 나를 비웃고 반면교사로 삼기를 간절히 바란다.
이런 글을 써도 나의 마음은 여전히 무겁기만 하다.
출처 못난 나 자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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