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부야 나 대신 이것 좀 컴퓨터로 쳐 줘”
같이 수업을 듣는 형님이 수업 시작 십 분 전에 내게 노트 한 권을 내밀었다.
절반은 고등학생 아들이 풀던 수학 문제 공식이 빼곡하게 적혀 있었고, 나머지 절반은 그동안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온 형님의 영화 트리트먼트가 깨알같이 쓰여 있었다.
내 눈에 먼저 들어온 것은 그러한 노트의 사정보다는 노트를 쥔 형님의 손가락이었다.
물에 젖은 것의 끝을 간신히 잡은 것처럼, 집게와 검지손가락으로 노트의 끝을 잡고 있는데, 손가락이 소시지처럼 띵띵 부어 있었다.
왜 또 내게 이런 귀찮은 일감을 던져주는가 골치가 아픈 것은 아픈 것이고, 나는 손가락이 그 지경이 된 사정을 도저히 안 물어볼 수가 없었다.
연유는 이랬다.
지난달에 형님 어머니가 병원에 입원하셔서 간병하러 청주에 내려갔는데, 하필 제작사와 약속한 시나리오 마감일이 얼마 남지 않은 터라 밤이면 보조의자에 앉아 새벽까지 노트북 자판을 두들겼다는 것이었다.
형님이 오줌을 누러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어머니가 작은 누나와 통화하는 것을 엿듣게 되었는데, 어머니는 작은 누나한테 “아픈 것은 아픈 것이고, 병간호는 됐으니 제발 쟤 좀 가라고 하라”고 사정을 했다는 것이다. 아마 형님은 할 일만 딱딱 끝내놓고는 시간이 가는 줄도, 새벽이 오는 줄도 모르고 시나리오를 썼을 것이다. 그런 정도는 그와 한 학기만 수업을 듣다 보면 어렵지 않게 깨우칠 수 있다.
어쨌든 그렇게 나름대로 우여곡절을 겪은 끝에 완성한 시나리오가 엎어졌던 날이 어제였는데, 잠갔던 수도꼭지를 풀어버리듯 형님은 소주병을 들이켰다고 했다. 네 병쯤 마시다 보니 정신이 몽롱한 상태에서 하나의 결론에 도달했다. 이제 글은 그만 써야겠다는 것이었다. 형님은 그대로 주방으로 가서 식칼로 오른손 검지를 내리쳤는데 그 다음부터는 기억이 없다고 했다.
“너무 아파서 기절한 거야. 근데 븅신 같이 칼등으로 내리쳐가지고 손가락이 이렇게 퉁퉁 부었어. 이거 봐 봐.”
형님이 내민 손가락이 자꾸만 형님의 트리트먼트 노트를 내려다보는 내 시야를 가렸다.
나는 타자 치던 것을 멈추고 형님한테 말했다.
“알겠어요. 손 좀 치우세요. 글씨를 가리잖아요.”
“그러니? 알겠어. 오타 나지 않게 잘 좀 쳐 봐. 알겠지?”
지금 나는 학교에서 만난, 나이 차이도 스무 살이 넘게 나는 이 형님을 어쩌다 보니 작은 형님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뭐가 작은 다는 것인지, 나와의 관계는 어떻게 되는 것인지 나는 아직도 잘 설명할 수 없다. 하지만 분명한 건 그와 나는 계속 글을 쓴다는 것이다. 그와 내가 결국에 어떻게 될 지 어떻게 알겠냐만, 작은 형님 생각만 하면 아무튼 선보이지 못한 글 때문에 전전긍긍하는 것이 나 혼자는 아니라는 생각에 조금은 안심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