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뜨거운 감자인 미투 운동에 대한 내용입니다.
미투 운동에 대해 이렇다 저렇다 하는 이야기가 많기에 어떤 코멘트를 달아야 할까 하다가...
아무말도 하지 않는 것이 좋겠다 싶어 긴 이야기는 담지 않겠습니다.
세상에 존재하는 많은 '이레'가 행복하기를 바라며 글을 옮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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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만큼 여기 어울리는 사람은 없어] - 미 투, 이레
이레는 제자리에서 빙글빙글 돌았다. 눈앞에는 지하 계단이 곧고 길게 뻗었다.
이게 몇 개지. 둘, 넷, 여덟... 대략 스무 계단 정도. 다시 보니 제법 가파르기까지.
진지하게 고민해 본다. 내가 여기서 눈 딱 감고 구르면 뼈가 부러지겠지, 팔 하나쯤? 아니면... 다리 하나, 팔 하나?
그러다 물러서서 또 몇 바퀴 돈다. 무서웠다. 저 아래로 내려가는 것과 뼈를 부러뜨리는 것 중 어느 쪽이 더 무서운지는 잘몰라도
어쨌든 당장 죽을 맛인 건 확실했다. 매미 울음소리가 요란하다. 아지랑이가 빙글빙글 피어올랐다.
고3에게 8월의 여름방학은 각별하다. 모두에게 공평하고 그래서 더 치열한 시기인 것이다. 그 해 여름에 접어들면서부터 이레는 매일매일 생일이 2월인 걸 원망했다. 남들보다 늦된 주제에 학교는 왜 일찍 갔으며, 엄연히 태어난 연도가 다른 아이들을 빨리 입학시키라 종용한 정부는 또 무슨 생각이었느냐고. 그렇게 아무리 툴툴대도 현실은 변하지 않았다. 실력이 느는 속도는 변함없이 더뎠다.
이레는 예체능계의 수험생이었다. 학원을 다닌 뒤 이제 반년이나 되었을까? 그러나 이 바닥엔 초등학교를 졸업하기 전부터 진로를 정한 아이들이 쌔고 쌨다. 예술계 학생들의 입시는 인문계 아이들보다 몇 달 일찍 시작된다. 속전속결. 겨우 여름인데, 여름방학이 끝나기 무섭게 첫 수시 기간이 들이닥칠 것이었다. 그 사실만으로 벅차겠으나 이레를 괴롭히는 진짜 문제는 거대한 몸집으로 똬리를 틀고 저 계단 아래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학원의 구성원은 적었다. 애초에 협소한 규모의 학원이었다. 어느 동네 어느 학원엔 합격생이 몇십 명이라는 광고가 넘치는데 이레네 학원에선 그해 시험을 칠 총 인원이 8명에 불과했다. 그중 타 전공 둘을 빼면 6명, 그중에서도 이레는 유일한 여학생이었다.
첫 번째 동갑내기는 초등학생 때부터 실기를 했다던 지독한 집념의 녀석이었다. 두 번째는 어설픈 반항아 캐릭터. 학원 복도에서 이레를 만나면 높은 확률로 욕지거리를 하거나 빈정거렸다. 재수생 오빠 한 명, 마이클 볼튼의 노래를 곧잘 불렀다. 목사 아버지를 둔 두 형제는 학원을 연습실 개념으로 쓰며 나타났다 사라지곤 해서 일정 선 이상의 교류는 없었다. 그리고결정적으로 ‘그 오빠’도 있었다. 21살의 삼수생. 18살 이레의 눈에 21살 청년은 까마득한 어른이었다. 처음에는. 몇 번 말을섞고 나니 군대에 가 있는 친오빠와 얼추 비슷하게 보였다. 그리고 나중에는, 그 뒤로 꽤 오랫동안은, 그 오빠를 생각할 때마다 몇 년 전 국어 시간에 접했던 청소년 소설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을 떠올렸다.
마지막으로 이 모든 입시생을 가르치고 관리하던 스승이자 부원장, 그도 남자였다.
젊은 시절 알아주는 스펙과 경력으로 필드에서 뛰다가 불의의 사고를 당한 뒤 현역에서 물러나 실기생들을 받게 된 패잔병 같은 남자. 이레의 지도 시간이면 그는 종종 자신의 방 안에 단둘이 앉아 아픈 쇄골을 중심으로 안마를 부탁했다.
본인이 학원에 부재할 때면 학생들과 학원 시설의 관리 책임을 그에게 위임했다. 아끼는 제자 중 가장 연장자인 ‘그 오빠’.
학원에 팽배한 마초적인 공기는 협소한 규모만큼 유일했고, 그래서 더 강력했다.
원 전체에서 수컷에게만 풍기는 누린내가 났다. 그중에서도 이레는 유일한 여학생이었다.
이레는 그 해 2월 그 오빠와 잤다. 어쩌면 강간당했다. 억지를 써서 이레의 선택이었다. 이레는 본인이 선택한 일이니까 범죄가 아닐 수도 있는 거라고 믿었다. 그리 믿지 않는다면 쏟아져 내려와 스스로를 덮칠 현실이 어떨지 어렴풋이 보았고 막연하게 외면했다. 그 방향에서 무서운 악취가 풍겼기 때문이었다. 그날 자신에게 허락된 선택지가
1. 강간당한다.
2. 그 대신 스스로 섹스를 원한다고 말한다.
뿐이었다는 걸 정확히 인지할 수 있을 만한 경험이나 사전 지식은 그때껏 아무도 이레에게 가르친 적이 없다. 여자의 마음으로 남자를 대해본 적도 없이 늦되었던 이레는 겉옷과 속옷과 심장까지 풀어헤쳐진 채 마치 타인의 것처럼 흔들리는 생경한 신체를 목격했다. 두려움이나 분노, 당혹감을 뚫고 또렷이 보이는 자신의 몸은 놀랍도록 어른의 것과 비슷했다.
이레는 그 오빠를 좋아했다. 친오빠 같아 좋은 줄로만 알았는데, 뭐 실은 다른 것이었을 수도 있지 않겠냐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날도 제 발로 그 오빠를 따라갔었다. 그 오빠가 말해달라고 해서 사랑한다고도 말했다. 전부 이레의 발로 입으로 몸으로 한 일이었다. 그러니까 그 일은 실수나 뭐 그 비슷한 게 아니어야만 했다. 몸과 마음에 여과 없이 몰아치는 정보를 처리하기 버거웠고, 왠지 그날 이후로 모든 일상에 딱, 딱, 딱, 제동이 걸렸다.
달라진 사람은 한 명 더 있었다. ‘그 오빠’도 거짓말처럼 이제까지와 다른 사람인 양 굴었다. 너도 자신도 입시가 최고로 중요하고 학원의 분위기에 해가 되니 관계 정립은 할 수 없댔다. 이레를 탓했다. 몇 살이라도 더 먹었으면 말이나 매끄럽게 주워섬길 것이지, 그는 가해자도 연인도 다 싫은 모양이었다. 핑계로 가득한 벌판에서 겨우겨우 누더기를 주워 와 이레는 그와의 사이를 정의하는 안내문을 만들어 마음에 세웠다.
혼자만 달라진 게 아님을 기억하려는 이는 이레 혼자였으니까.
삐죽삐죽, 관리 안 된 칼로 지저분하게 잘린 관계의 단면에 요철이 가득했다.
어느 날은 스승의 추궁이 있었다. 슬하의 어린 암컷과 한 수컷의 상태가 이상했을 것이다.
불려갔다 돌아오는 그 오빠의 눈빛은 시퍼런 것이 꼭 짐승 같았다. 그날부로 이레는 지독하게 괴롭힘을 당했다. 이레의 외모, 말투, 표정, 행동, 실력, 가치관, 집안 사정, 인간관계, 웃음소리, 걸음걸이, 밥 먹는 시간, 연습시간, 원서를 넣은 학교, 머리 스타일, 잘 한 일, 못 한 일, 그리고 또, 그리고 또, 그리고 또...... 모든 것이 공격의 이유가 되었다. 괴롭힘은 쉽게 하류로 흘러 모든 수컷의 발 치를 적셨다. 그는 언제나 스승보다 더 가까운 거리에 상주했다.
그건 어쩌면 그가 이레에게만큼은 절대자보다 절대적일 수도 있다는 뜻이었다.
어느 날은 이레의 침대 위 모습이 깃털보다 가볍게 돌았다. 원생들은 스승에게서 ‘딸 잡듯이 노래하는’ 법이나 ‘쌀 때처럼 소리 내는’ 법을 배우다가 방을 나오면 그 형에게 전해 들은 이레의 교성을 상상했다. 공공연한 멸시가 허용된 존재. 하지만 없으면 허전할 희생양. 싸구려 동정이나 오락성 우월감이 마약처럼 진동했다. 어린 수컷들은 흥분에 취했다. 그 오빠는 기분이 내킬 때면 동생들에게 멋대로 얼차려까지 주곤 하였으나 합리보다 견고한 논리가 그를 지켰다.
짐승의 세계는 힘의 논리가 지배한다. 힘의 논리 앞에서는 어떤 논리도 힘을 잃는다.
이레는 생각했다. “이 오빠가 날 자기 눈앞에서 치워버리려고 하는구나.”
이레는 생각했다. “내가 내게 행하는 일만이 나중까지 내 안에 남는 거야.”
이레는 결심했다. 살아남기로 결심했다.
계단 앞에서 빙글빙글 돌았던 그날은 여름방학 특강 첫날이었다. 먹고 자는 시간을 제외하면 이레에게 허락된 거의 모든 시간이 그 학원에서 쓰여야 했다. 내장이 온통 꼬이는 것 같았지만 그때 이레는 결국 계단을 내려갔다. 숨 쉬듯이 핀잔 듣고 밥 먹듯이 비웃음 당하면서도 주어진 모든 일을 해냈다. 그러면 하루가 갔다. 하루들이 모이면 어느새 일주일도 한 달도 갔다. 자신이 선택한 일은 무슨 일이 있어도 끝까지 매듭짓겠다는 다짐을 뱃속에 박아 넣었으나 못 이기겠는 날도 주기적으로 찾아왔다. 그러면 그냥 울었다. 우는 것도 하루를 빨리 흘려보내도록 돕는 일 중 하나였다. 그렇지만 연습실 문 밖에서는
절대로
울지
않았다.
이레는 그해 학원에서 가장 먼저 대학생이 되었다. 합격한 학교 말고도 추가로 4개의 학교를 더 붙었다. 4개의 학교에서 차례로 합격장이 날아올 때마다 이죽거리던 원생들은 이레가 마지막으로 어디 내놔도 무시할 수 없을 학교의 서류를 받아들자 제 살이 베인 듯 분해했다.
해가 바뀌고 정시까지 끝났을 무렵, 아무도 이레보다 좋은 학교에 합격하지 못했다.
학원에서 떠나던 날 이레는 스승에게 예를 차린 편지를 남겼다. 모두와 그 오빠에게도 인사하였으나 그는 인사를 받을 여유가 없어 보였다. 실패한 입시 생활의 위로가 필요했었는지 자기를 추종하던 동생의 여자친구를 꼬여내어 섹스 스캔들을낸 바람에 정말 바빴기 때문이었다.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의 엄석대는 서울에서 부임한 젊은 선생님의 출연과 함께 몰락했다. 그 오빠는 엄석대와 많이 닮았지만 마지막 장면까지 같을 필요는 없었다. 이레는 구원자를 기다리지 않았다. 스스로 만든 길을 깔고 지금껏 그래 온 것처럼 걸어가면 그만이었다. 울거나 화내지도 않았다. 서두를 것도 없었다. 아무리 밟아대도 구김 하나 낼 수 없었던 빳빳한 뒷모습이 서울에서 부임해 온 젊은 선생보다 나았다. 빛나도록 살아 있는, 펄떡이는 생명력이었다.
끊이지 않는 부정에 시달리던 이레에게 이레는 온 힘을 다해 쌓아온 이레들로써 화답했다.
너만큼 여기 어울리는 사람은 없어, 이레. 너만큼 그걸 잘 해낼 사람은 없어, 이레.
네가 걸을 길을 갈아엎고 발을 거는 이들 앞에서 이레에게 말해, 이레.
네가 어떤 선택을 하던 어디에 있든 거기에 있는 너를 사랑해, 이레.
*이레(명사); 일곱 날. [비슷한 말]; 이렛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