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당대 가마쿠라 막부의 군조직은 비슷한 시기 원나라, 고려 등에 비교하면 매우 뒤떨어져 있었습니다. 고려나 중국 등이 조직적인 체계와 지휘계통을 가지고 조직적인 전투가 가능했던 것에 비해 일본의 군대는 사무라이들이 거느리고 온 크고 작은 부대들의 집합체였습니다. 그렇기에 일사분란한 전투는 불가능했습니다.
2. 가마쿠라 시대의 전투방식은 잇키우치(一騎打ち)였습니다. 이 잇키우치는 한문에서도 알 수 있다 시피 기마무사가 일대일로 싸우는 방식이었습니다. 이 때 사무라이는 전투를 시작하기 전에 부하에게 우는 화살(명적)을 쏘아 개전 신호를 삼은 뒤, 종과 징을 요란하게 치며 나노리(名乗り)라는 의식을 행합니다. 이 나노리란 사무라이가 서로 자기가 누구인지, 얼마나 용감한 전투원인지를 큰목소리로 외치는 일종의 기 싸움이었습니다. 자기는 어느 전투에서 어떤 공훈을 세웠는지, 조상이 역사적으로 이름이 난 무사였다면 어떤 가문의 누구의 자손인지를 자랑스럽게 외쳐서 적의 기세를 누르려고 하였습니다. 상대편 무사도 뒤질세라 가문의 명예와 전투 경력을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기 싸움이었기에 상대편의 말을 받아서 야유를 보내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가마쿠라 시대는 아니지만 <다이헤이키(太平記)>의 29권에는 전형적인 잇키우치 장면이 소개되어 있었습니다.
「남북조 시대인 1351년 아시카가 다카우지와 그 동생인 아시카가 타다요시의 부장이었던 모모노이 타다쓰네가 교토의 가모가와 근처에서 대진하였을 때의 일입니다. 먼저 모모노이군에서 키가 일곱 자나 되는 아키야마 미쓰마사라는 용사가 나섰습니다. 그는 전투태세로 정렬해 있는 병사들의 뒤로 하고 말을 박차고 나가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어릴 때부터 병법을 배우고 텐구가 요시쓰네에게 가르쳐준 병법을 모두 알고 있노라. 자신 있는 자는 앞으로 나와라. 멋진 한판을 겨뤄 구경하는 자들의 정신을 번쩍들게 하지 않겠는가."
잠시 후 고노 모로나오의 부대에서 아후 타다자네가 앞으로 나서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병법을 알고 있다고 말해도, 방바닥에서 헤엄치는 연습을 해서는 소용이 없다. 진정한 용사는 경험에서 배운다. 나는 책을 읽지 않으나 300회 이상의 전투를 경험하였노라."
기 싸움을 마친 두용사는 싸우기 시작했습니다. 사력을 다해 싸웠지만 결국 무승부를 기록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싸움은 명승부라는 평판을 받았고, 두 용사는 역사에 그 이름을 남겼습니다.」
3. 군에게 매우 필요한 역참이나 봉수제도 역시 매우 뒤떨어져 있었습니다. 여몽연합군의 1차 원정 당시 음력 10월 20일과 21일 사이에 하카타 만에 태풍이 불어 군선 900척 중 200척이 개작살나 결국 연합군은 철수하는데 이 소식이 막부에 전해진 것은 10월 28일이었고 막부가 명을 내린 것은 11월 1일 그리고 교토에 전해진 것은 11월 2일이었습니다. 무려 철수한 지 일주일이 더 됬는데도 막부는 전혀 그런 것을 모른 것이었습니다. 비슷한 시기에 넓은 전선을 커버했던 몽골 등의 정보전달력에 비하면 한참이나 뒤떨어진 셈이었습니다.
4. 2차 여몽연합군의 상당수를 차지했던 범문호 지휘의 10만 강남군은 군대라고 보기에도 챙피한 수준이었습니다. 실상 배에는 무기보다는 씨앗이나 농기구를 더 많이 실었고, 이들은 남송이 존재했을 때에도 가장 약한 그룹에 속했습니다. 오히려 몽골군 1만과 고려군 1만, 수부 1만 7천명으로 구성된 동로군이 군의 주력이었습니다. 1차 때는 당연히 일본이 여몽연합군에게 캐발리는 거였고, 2차 때도 당시 가마쿠라 막부는 이 2만 대군을 막을만한 여력이 전혀 되지 못하였습니다. 몽골이나 고려군이나 전투에는 이골이 난 집단이었고(당시 가마쿠라 막부는 상당히 평화기가 오래 지속된 상태였습니다. 사무라이 개인은 개인 무예 수련에 열심이었다고는 하나 이미 개인의 무력이 전황을 뒤엎지 못한다는 것은 이미 수천년전에 증명되었죠), 가마쿠라 막부의 군대는 싸우는 방식도 뒤떨어져 있었고 군조직 체계 또한 매우 뒤떨어졌습니다. 이런 와중에서 태풍이 없었다면 최소 규슈 초토화, 최대로 잡으면 당시 정치적, 경제적 중심이었던 교토까지 여몽연합군의 깃발이 나부끼고 가마쿠라 막부는 개작살났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