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차 여몽 연합군
1. 동로군 함선 9백여척 총 병력 4만 2천여명
2. 강남군 함선 3천 5백여척 총 병력 10만여명
5월 3일 합포 지금의 마산에서 동로군이 출정을 합니다, 그러나 강남군과의 연락 두절로 6월 15일에 이키섬에서 강남군과 접선하는 계획에 차질이 발생합니다.
강남군 총사령관 아라한(阿剌罕)이 출발 직전에 병으로 쓰러졌고 이에 따라 사령관을 교체하는 작업이 벌어진데다 원나라 조정에서는 표류하다 잡혀온 일본 선언의 증언을 토대로 지리적으로 가깝고 또 대규모로 상륙하기 유리한 히라도로 상륙 지점을 옮기며 2차 일본 원정의 전략을 수정하고 있었습니다.
1달여를 거제도에서 연락을 기다리던 동로군은 마침내 일단 가보기로 결의 합니다, 그리고 5월 21일 당일치기로 대마도의 저항을 분쇄합니다.
이후 이키섬으로 향하는 와중에 수군 130여명과 사공 36명이 풍랑으로 전사합니다.
21일 혹은 그 이후인 26일이라는 이야기도 있으나 아무튼 이키섬에서는 쇼니 가케스케의 둘째 아들 19살난 쇼니 스케도키가 후나카쿠 성을 보강하고 물자와 병력을 끌어모아 대비하고 있었지만 동로군은 가마쿠라 측 의도와 다르게 큰 피해 없이 섬을 지워버립니다.
6월 6일 마침내 하카타 만에 도착하였으나 1차 원정 이후 가마쿠라 막부에서는 하카마 만에 인접하여 방벽을 세웠는데 방벽의 길이는 약 20km로 사실상 해안선을 완전히 틀어막아놓은 형태이며 높이는 2m로 상시적으로 1백여명의 무사들이 주둔하는 것 외에도 유사시에는 규슈 내의 군사력을 집결시켜 최대한의 효과를 거둘수 있는 말 그대로 마지노선을 쌓는 것이었지요
이때문에 동로군 단독으로 공성전을 펼쳐야 하는 위험성을 안고 있었기에 하카만으로의 직접적인 상륙을 피하고 300척을 간몬 해협으로 보내 혼슈에서의 원군을 차단한 후, 하카타 만의 좌우에 있는 시카노지마 등에 상륙해 어떻게든 길을 뚫어보려 했습니다.
문제는 일전의 경험 그러니까 정면으로 대규모로 붙으면 빼도박도 못하고 지워진다는 사실을 체험한 일본군은 말 그대로 지연전을 벌입니다, 이기든 지든 어떻게 해서든지 조금이라도 진격을 저지하고 시간을 벌려고 한다 할까요? 문제는 이렇게 진척이 없는 상황속에서 엎친데 덮친격으로 동로군 내에 전염병이 돌아 3천여명이 병사하는 일까지 벌어졌다는 것입니다.
이때문에 6월 13 혹은 18일 사이쯤 이 들은 병자들을 실고 이키 섬으로 돌아갑니다, 일단 강남군과 합류하여 다시 진격을 해보자는 것인데, 아무리 기다려도 이 들은 오지를 않습니다.
왜냐하면 강남군이 출발한게 6월 18일이고 한두척도 아니고 물경 10만의 대 선단이다 보니 이동이 느릴수 밖에 없었으니 말이지요, 덕분에 연락이 닿은 것은 6월말, 실제 만난것은 7월 말쯤입니다.
그나마도 수정된 전략대로 히라도에 제대로 도착한 것은 6백여 척이 전부이고 나머지 3천여척은 큐슈 서북쪽 여기 저기를 표류하고 있었습니다, 그래도 만났으니 어찌보면 다행이 아닌가 싶겠지만 이런 대규모 해상 작전은 고려나 송나라나 몽골이나 유래 없는 일이기에 혼란이 발생할수 밖에 없었고 지휘권을 누가 쥐느냐 역시 문제가 아닐수 없었습니다, 당장 얼마전까지 서로 멱살잡이 하고 싸닥션을 올리던 사이였는데 갑자기 하하호호 하며 손을 맞잡을수 있을리가 만무한 일이니 말입니다.
이 문제가 해결된것은 1주일 정도 이후의 일로 7월말 이 들은 막판 극적 타결을 끌어내어 마침내 다카시마 근처에 모여 30일 하카타 만으로 진격 하려 하였으나...
'마침 큰 바람을 만나 만군이 모두 물에 빠져 죽었다. 시체가 밀물과 썰물에 밀려 항구로 들어가니, 이 때문에 항구가 막혀 밟고 다니게 되었다'- 고려사절요
'다카시마에 도착한 이적 수천인, 이 가운데 깨어진 7, 8척의 배를 수리하여 몽고, 고려인 약간이 타고 도주했다. 이를 본 소네 가케스케의 지휘로 수백 척이 다카시마로 몰려갔다, 배가 없어 도주하지 못 한 이국인 1000여 명이 항복을 구걸했지만 모두 붙들어 나카가와 하구에서 목을 쳤다.' - 팔번우동기
'도원수 범문호는 히라도 근해에서 그의 배가 침몰했는데 표류한 지 하루 밤낮에 이르렀다. 다행히 파선의 선반에 매달려 목숨을 건져 잔존했던 배를 골라 거기에 옮겨 탔고, 휘하의 사졸 10여 만인을 밑에 버리고 귀국했다'. - 원사 범문호전
'범문호가 도주한 후 잔존 사졸들은 장백호를 주수로 장총관이라 부르고, 벌목하여 배를 건조, 그것을 타고 귀환하려고 했지만 7일 일본군의 공격을 받고 모두 패사하고 잔존 2 ~ 3만명은 포로로 연행되었다. 9일에 몽골인, 고려인, 한인은 모두 살해되고 당인은 노예가 되었다.' - 원사 일본전
연합군 14만여명 중 살아남아 귀국한 이는 3만여명, 고려인은 7천여명에 불과한 전사를 통틀어 찾아볼수 없을 정도로 끔찍한 대 참사였습니다,
떡밥을 물면 안되는데 낚이네요. 아무튼 네, 천운도 전술이라니 참 대단합니다, 이게 판타지 마냥 마법사가 요술을 부리도 아니고 말입니다, 물론 동로군의 크고작은 접전에서 적잖이 피해가 누적되고 때로는 몽골군의 패퇴로 인하여 고려군이 화급히 진격하는등의 일도 있었지만 14만여명의 병력을 규슈의 군세로 전면전을 치룬다 혹은 막는다는건 그 절반도 안되는 병력도 막지 못한 상황을 볼때 꿈같은 이야기이지요.
임진왜란과 비교를 하고 싶다면 대승을 거둔 기록이라도 좀 있어야 뭐 이야기가 될텐데 큰 타격을 입힌건 하나 같이 전염병이니 태풍이니 하는 친구들이니 무슨 말을 할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