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번 글에서 탁본에 따른 오류 가능성을 살펴보았으니 이를 바탕으로 드디에 광개토대왕릉비의 해석에 대한 다양한 학설들을 알아보고자 합니다. (신묘년조 중심)
본 글을 다음과 같이 3 편에 걸쳐 작성 되었습니다.
1. 김병기 교수의 비문변조설 (차이나는 클라스 43화 주장)의 문제점
2. 광개토대왕릉비의 탁본 검토
3. 신묘년조에 대한 지금까지의 여러 학설들과 반론들 그리고 결론 (본 게시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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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글에서 검토하였다시피, 기존 탁본들은 쌍구가묵본의 한계, 또는 (일제에 의한 강제 석회도말작전이 아닌) 초씨부자에 의한 석회칠에 따른 후기 석회도말본들의 한계를 살펴보았습니다. 따라서 비문의 원문을 확인하기 위해서는 하나의 탁본을 가지고 판단할 것이 아니라 여러 판본을 가지고 판단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이번 글에서는 특별히 그 중에서도 한국에서 논쟁이 되는 신묘년조에 대해서 논의하고자 합니다.
먼저 지난번 1편에서 작성한 내용에서 잠시 첨부한 내용과 같이 탁본들을 비교해 보겠습니다.
그리고 탁본이 아닌, 석문 (비문을 보고 이를 손으로 기록한 (+추단하여 기록한) 글) 도 함께 비교해보겠습니다.
출처: http://blog.naver.com/kalsanja/221092987778
보시다시피 신묘년조의 가장 문제점은 1면 9행 17, 18 째 한자가 판독불가인 것이 문제입니다만, 그 외의 부분에 대해서는 논쟁의 여지가 많지 않습니다.
석문의 붉은 글자는 기록자가 보이지 않는 글자를 추단하여 기록한 것이에 없는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합니다.
그렇게 볼 때 신묘년조(엄밀히 따지면 병신년조의 앞부분, 편의를 위해 본 게시물에서는 계속 신묘년조로 지칭)의 문장은 다음과 같다고 볼 수 있습니다.
百殘新羅舊是屬民由來朝貢. 而倭以辛卯年來渡海破百殘□□新羅以爲臣民.
1. 기존 일제의 번역
일제시대의 기존 번역은 다음과 같습니다.
百殘新羅舊是屬民 由來朝貢. 而倭以辛卯年 來渡海 破百殘□□新羅 以爲臣民.
백제, 신라는 과거 속민으로 조공을 해왔었다. 그런데 왜가 신묘년(391년)에 바다를 건너와 백잔, □□, 신라를 격파하고 신민으로 삼았다.
초기 일본의 비문 연구자들은 소위 말하는 임나일본부(任那日本府)설에 상기 신묘년조를 끼워맞추기 위해 사력을 다했습니다. 즉, 일본서기(日本書紀), 고사기(古事記) 등의 신공황후(神功皇后)의 삼한 정벌 등의 전설에서 말하는 대로 일본이 백제, 신라, 임나 (가야 지역)을 통치하였다는 것이 확실하다는 근거자료로 활용하였습니다. (물론 임나일본부설을 역설한 이유는 조선반도 식민지화의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함이지요.)
또한 이런 끼워맞추기를 위해 삼국사기가 비문과 일치하지 않는 것을 보면 오류가 많으며, 따라서 삼국사기에 기록되어있지 않다고 임나일본부설을 부정할 수 없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왕건군의 책에서 반박하듯이 고사기, 일본서기의 기년 역시 서로간에도 불일치하며 오류투성이임에도 이를 무시한 채 임나일본부설을 부르짖는 것은 아전인수적인 해석일 수 밖에 없습니다.
거기다 사실 광개토대왕릉비의 내용을 그대로 받아들인다 하더라도 임나일본부설에 유리하지만은 않습니다. 저대로 해석하면 백제, 신라를 신민으로 삼은 시기가 신묘년(391년)이고 광개토대왕의 원군으로 신라에 있던 왜군을 격퇴된 시기가 경자년 (400년)이니, 왜군이 점령했던 기간은 굉장히 긍정적으로 봐줘도 9년입니다. 임나일본부설이 4~6세기에 걸쳐 한반도 남부를 점령했다는 주장을 하고 있으니 말이 안되지요.
문제는 몇몇 양심적인 일본 학자의 이런 반박이 있기는 하였지만 대체로는 대동소이한 논지로 임나일본부설을 뒷받침하고자 하였습니다.
2. 정인보의 해석
이런 일본의 해석에 처음으로 반박을 하기 시작한 것은 정인보 선생의 1955년 글인 광개토경평안호태왕릉비문 석략(釋略)입니다. 이에 따르면 渡海破의 주어를 왜가 아닌 고구려로 해석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끊어읽기를 다르게 하였습니다.
百殘新羅舊是屬民 由來朝貢. 而倭以辛卯年來 渡海破 百殘□□新羅 以爲臣民 以六年丙申 王躬率水軍 討利 (殘國)
백제, 신라는 과거 속민으로 조공을 해왔었다. 왜가 신묘년에 와서, (이에 고구려가) 바다를 건너 (왜를) 깨부쉈다. 백잔는 신라를 □□ 신민으로 삼았다. (신라는 고구려의) 신민이었기에 몸소 수군을 이끌고 (백잔을) 토벌하여 (신라를) 보호했다.
하지만 처음 차이나는 클라스에서도 말했듯이 이 해석은 약간 억지가 있습니다. 역시 왕건군의 논평을 빌려보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而倭以辛卯年來 渡海破 百殘□□新羅 以爲臣民 以六年丙申 王躬率水軍 討利 (殘國) 왜가 신묘년에 와서 (고구려를 침략한 적이 있다). (이에 고구려가) 바다를 건너 (왜를) 깨부쉈다. 백제는 (왜인과 통교하여) 신라를 □□ 신민으로 삼았다. (신라는 고구려의) 신민이었기에 몸소 수군을 이끌고 (백제를) 토벌하여 (신라를) 보호했다. 여기서 만약 () 안의 덧붙인 말을 빼면 이 장은 그 누구도 읽어 낼 수 없다. 게다가 뒷편의 떨어져 나간 殘國 두 글자는 어떻게 처리하겠는가? 만약 아래로 이어서 읽어 보면 백제가 백제를 쳤다는 말이 되지 않는가? 광개토왕비 연구, 왕건군 저, 임동석 역, 276p 에서 인용 |
왕건군이 괄호를 고의적으로 많이 넣기는 했지만 그걸 감안하여도 상기와 같이 정인보식 해석은 생략이 너무 많이 들어가 있습니다.
또한, 討利殘國에서 利(이)자는 伐(벌)자의 오기였기에 더 해석이 궁색해집니다.
그렇기에 한국에서는 고구려를 주어로 한다는 개념, 끊어읽기를 而倭以辛卯年 來渡海 破百殘~이 아닌, 而倭以辛卯年來 渡海破 百殘~으로 한다는 개념을 받아들여, 많은 분들이 다음과 같이 해석을 하고 있습니다.
而倭以辛卯年來 渡海破 百殘□□新羅 以爲臣民
왜가 신묘년에 와서, (이에 고구려가) 바다를 건너 백잔, □[왜]를 격파하고, 신라를 □[구원하여] 신민으로 삼았다.
또는
왜가 신묘년에 와서, (이에 고구려가) 바다를 건너 깨부수고, 백잔, 신라를 □□[다시] 신민으로 삼았다.
하지만 이렇게 해석하더라도 여전히 하기와 같은 문제점이 남습니다.
-주어 변동이 아무 단서없이 되어 혼란스럽다.
-신묘년인 영락 1년에 고구려가 백제를 격파했다면 이를 신묘년조로 기록하지 않고 5년 후의 병신년조에 신묘년의 치적을 끼워넣는 방식으로 기록할 이유가 없다.
-391년에 백제를 이미 격파했다는 것은396년에 새삼스럽게 백제를 공격할 이유가 되지 않으므로 병신년조에 신묘년의 일을 언급할 이유도 없다.
-비문의 다른 부분에서는 '왕'이라고 주어를 명시하고 있지 당연하다며 생략하지 않았다.
-고구려는 육로로 백제, 신라와 연결되어 있기에 왜에 비해 바다를 건너와 공격할 가능성이 적다.
-속민이였던 신라 (+백제)를 오히려 예속성이 낮은 신민으로 다시 삼는 것은 말이 안된다.
등의 여러 비판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여러 비판에도 불구하고 정인보 선생의 '고구려를 주어로' 해석한다는 개념은 최초로 임나일본부설에 대한 반박이라는 점에서 높게 살 수 있을 것입니다. 문제는 이러한 개념이 한국 사학계에 깊게 뿌리 박혀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여기서 얽매여 있다는 것이지요.
그 이후로 일본의 이진희 교수의 석회도말론과 비문변조설을 주장했지만 이는 2번 글에서 봤듯이 쌍구가묵본의 한계와 초씨부자의 석회칠에 따른 오기로 보는 것이 타당하므로 크게 논의할 점은 아니라고 봅니다.
3. 왕건군의 분석
이런 와중에 비문을 분석한 왕건군은 비문변조설을 부정하며 자신의 연구결과를 보였습니다. 이에 따르면 계속 말씀 드린대로 비문의 변조는 없으며,
百殘新羅舊是屬民由來朝貢. 而倭以辛卯年來渡海破百殘□□新羅以爲臣民
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봅니다. 그리고 그 내용을 그대로 옮겨보겠습니다.
1) 국제적으로 많은 학자들이 (본 게시물을 포함해) 이 단락을 신묘년조라고 부르고 있다. 엄격히 말하면 맞지 않다. 마땅히 영락6년 병신조라고 불러야 한다. 이 단락은 영락6년 병신년에 백제를 토벌한 이유가 내재되어있는 조목이지 결코 독립된 편년기사가 아니기 때문이다. 광개토대왕릉비는 편년체식으로 기록되어있다. 따라서 연대는 순서에 맞추어 연도 단위로 적혀있으며 순서가 엇갈린 경우는 없다. 따라서 영락 5년 을미년조와 영락 6년 병신년조 사이에 원년 신묘년조의 일이 끼어 들어갈 수 없다.
매번 전쟁마다 대상, 시기, 장소, 결과,를 기술하는 외에도 전쟁의 원인 즉, 소위 출병의 명분 등도 적게 되어있다. (중략) 이렇게 보면 신묘년조는 영락6년 병신년에 출사하여 백제를 친 이유에 해당하는 것이지 결코 독립된 조목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게다가 倭以辛卯年來는 다만 백제와 신라만 깨뜨린 것이지 결코 고구려와는 전쟁이 발생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만약 전쟁이 발발했었다면 비면에 반드시 5년 을미조 앞에 순서를 맞추어 기록했을 것이다. 2) 광개토대왕비의 문장은 더 얻어볼 수 없는 자명한 문장이다. 비문 문장은 사건 서술의 조리가 분명하고 어법이 규범에 맞으며 문자가 순탄하고 뜻이 분명하다. (후략) 3)주어가 생락된 귀절에 대해 어떤이는 무주어구라고 하며 옛날이나 지금의 문장 가운데 얼마든지 있다고 했다. 그러나 이는 반드시 위아래가 서로 이가 맞고 어의가 분명하거나 이미 지시하는 것이 있어 중복이 필요치 않을 때 생기는 문장이다. (중략) 우리들이 비문을 판독한 후의 입장에서 보면 어법이 대단히 엄격하여 주어를 생략하여 뜻이 흐리도록 되어있는 곳은 없다. (중략) 주어가 있는 귀절에 주어가 생략된 귀절을 끼어 넣는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倭以辛卯年來의 주어는 당연히 왜이다 그런데 갑자기 고구려 혹은 광개토대왕이란 주어가 생락된 渡海破의 귀절이 접속된다는 것은 정인보 선생 외에 누가 지적해 내겠는가. (후략) 4) 일본의 몇몇 학자는 來渡海를 붙여 읽어 來를 동사로 처리하나 이는 애당초 틀린 방법이다. 두 개의 동사가 함께 쓰였을 뿐 아니라 (來와 渡) 또한 연동식의 귀절도 아니어서 헛된 해석일 뿐이다. (중략) 이는 來자에 대한 이해의 착오이다. 이 來자는 以來(이래)의 뜻이다. 현대 중국어애서 三年來, 二十年來 등이 상용되고 있다. 고대 한어라고 해서 그 예가 없지 않다. 한유 (韓愈)의 여맹상서서(與孟尙書書)에 未審立秋來 眠食何似?의 귀절이 있으며 이백(李白)의 古來聖賢皆寂寞이나 이욱(李煜)의 四十年來國家, (중략) 등은 모두 以來의 뜻이다. 호태왕비의 (영락8년 무술년조의) '自此以來 朝貢論事'도 곧 "무술년 이래로 朝貢論事 하다"의 뜻이다. 이와 같이 문의에 맞추어 이 단락을 해석하면 이렇다 "백제와 신라는 원래 고구려의 속민으로 죽 우리에게 조공하였다. 그러나 신묘년 이래로 왜인이 바다를 건너 백제와 신라를 깨뜨리고 그들을 굴종시켰다. (그리하여 우리에게 조공하지 못하게 하였으므로) 영락6년 병신년에 왕이 몸소 수군을 인솔하여 가서 백제를 쳤다" 이렇게 되면 본 뜻에 어그러짐도 없으며 사리에도 맞다. (중략) 그 근본을 헤아려보면 광개토대왕의 목적은 영토확장을 위한 토지와 生口의 획득에 있었다. 그래서 당연히 백제를 치려한 것이며 앞에 든 출사의 명분은 하나의 구실에 불과한 것이다. 고대 전적 가운데에 한중일 어느 것들에서도 백제가 과거 고구려의 속민이었다는 기록은 없다. 사서의 기록을 근거하면 백제왕의 시조는 고구려에서 나왔으나 건국 후 고구려에 신복한 일이 없다. 호태왕이 그들은 자기의 속민이었다고 해 놓고 다시 얼마 전 (원년 신묘년)에 왜에게 신민이 되었다고 하였다. 그에 대해서 말한다면 당연히 권리를 되찾아 오는 것처럼 여겼으나 다만 죄를 뒤집어 씌웠을 뿐이다. 광개토대왕이 백제를 치고자 한 것은 토지를 넓히기 위한 것이었다면 어찌 구실을 못찾을까 걱정했겠는가. (중략) 따라서 내가 보기엔 舊是屬民, 以爲臣民을 장기통치로 보는 논쟁은 그만 두어야 한다고 여긴다. 앞서 내가 말한 것과 같이 왜인은 내침하여 살인과 재물을 약탈한 후 즉시 되돌아 간 것이지 결코 진정한 臣屬관계를 맺었다거나 더욱이 통치기구를 설치했다거나 주둔군을 파병했다는 것은 일을 수 없었다. 따라서 광개토대왕이 백제를 치는 동안 근본적으로 왜인을 만나지 않았으며 왜도 역시 백제를 구제하겠다고 출병하지도 않았다. 백제는 독립적으로 고구려와 작전한 것이다. 왜는 멀리 동양의 대해에 처하여 있어 당시의 교통사정으로 볼 때 백제가 고구려에 항복할 때 까지도 그 사실을 알았다고 볼 수도 없다. 따라서 임나일본부라는 존재는 있지도 않았음을 설명해 주고 있는 것이다.
광개토왕비 연구, 왕건군 저, 임동석 역, 277~284p 중 (굵은 표시는 본 게시물 작성자의 임의 강조) |
많은 분들이 신묘년조 문장만 매달리느라 문맥을 놓치시는데 문맥상으로 봤을 때 백제를 쳐야 하는 이유가 기술되어야 하지, 고구려의 업적이 기술될 부분이 아닙니다. 따라서 소위 신묘년조은 단지 병신년조의 전쟁구실을 적당히 둘러댄 것일 뿐 이후의 서술을 살펴보면 실제로 일본이 백제, 신라를 정복하였다는 근거로 볼 수는 없다고 결론 내릴 수 있습니다.
문제는 일본은 왕건군의 연구를 인용하여 비문조작이 없었다는 것은 강조하면서도 이런 내용은 쏙 빼놓고 이야기 한다는 것이지요.
4. 개인적 의견
저 역시 대부분은 상기 왕건군의 해석에 동의합니다. 기본적으로 신묘년조는 병신년조에 붙어 전쟁원인을 기술하기 위하여 과장과 윤색이 가미된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합니다.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아무 일도 없던 것에 무작정 뒤집어 씌웠다고 보는 것 역시 무리가 있다고 개인적으로는 판단합니다. 흔히 단군신화, 추모왕 (고주몽) 건국신화 등의 신화는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이야기로 보는 것과 같이 역사라는 것이 과장, 윤색을 한다던가, 시간순서를 늘리거나 줄이는 등으로 자신에게 유리하게 변조하는 일은 있어도 없던 것을 만들어내기는 쉽지 않습니다.
따라서 신묘년 (391년)에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은 맞다고 개인적으로 판단합니다. 이것이 무엇인가를 확인하기 위해 그 때 백제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를 검토하면 삼국사기에 392년에 진사왕이 죽고 아신왕이 즉위하는 일이 기록되어있습니다. 1년 차이는 외국일에 대한 기록 오차, 또는 삼국사기와 광개토대왕릉비 간의1년 오차에 따른 차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런데 여기서 또 일본서기를 보면 묘한 내용이 나옵니다.
'진사왕이 본래 아신왕에게 돌아가야 할 왕위를 빼앗았다'라는 내용, 그리고 '272년에 백제의 진사왕이 무례해서 사신을 보내고 백제에서 진사왕을 죽여 사죄했다.' 라는 내용이 오진 덴노 (応神天皇) 기사에 기록되어있습니다. 물론 기년이 맞지 않는 것은 일본 서기 특유의 기년 늘림 현상 때문에 무시하시면 될 것이고, 진사왕이 무례하여 라는 개드립은 일본 서기 특유의 천황을 높이기 위한 윤색으로 보는 것이 타당합니다. 하지만 그런 윤색을 걷어내고 사실기록만을 보면 아신왕이 (또는 그 추대세력이) 진사왕을 시해하고 아신왕을 추대한 것으로 판단됩니다. 그리고 여기에는 왜국에 오래 있으면서 친왜적(親倭的)이 된 아신왕을 위해 왜국의 무언가의 도움이 있었던 것으로 볼 수도 있다고 판단됩니다.
그리고 이러한 상황을 고구려에서는 而倭以辛卯年來渡海破百殘 이라고 과장한 것이 아닐까 개인적으로 생각합니다. 물론 이 경우에도 임나일본부설에 대해서는 논의할 가능성은 전혀 없는 것이지요.
따라서 결론적으로 신묘년조는 변조되지 않았다. 문맥상으로 볼 때 백제 침공 원인으로써 작성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과장의 가능성이 높으므로 문장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 적절하다. 정도로 정리하는 것이 적절하지 않을까 합니다.
출처 | 광개토왕비 연구, 왕건군 저, 임동석 역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