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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인 듯 밤인 듯 지나가는 어떠한 시간에 서있던 밀레시안은 천천히 발걸음을 들어 던바튼 광장을 지나 외곽으로 나온다, 온기를 느끼기 위해 주머니에 손을 넣고 걸어가도 손끝은 차갑다. 분명 어둡고도 밝은 하늘아래 미지근한 공기를 만지고 있음에도 밀레시안은 발끝과 손끝이 차디차다는걸 느끼고 있었다.
-언제나 주머니에 장갑을 챙겨 다니셔야 할 거 같습니다-
“시끄러워.”
아무도 없는 갈대밭 한가운데를 지나며 말을 뱉어낸다. 누군가보고 들으라는 양, 혼자만 듣겠다는 양 나직하고 교양 없이.
불현 듯 밀레시안은 주머니에 손을 빼내며 걸음을 멈춘다.
기사단 상부에서 내려온 전달사항이 아니어도 최근 어투나 언행이 바르지 못하다는 건 자기 자신이 가장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이게 어떻게 안 된단 말이지.”
손을 한 두어번 쥐었다 펴기를 멈추고 다시 밀레시안은 걸음을 옮겼다, 주머니에 도로 들어온 손은 여전히 차갑게 굳어있었다.
‘그’와의 전투 이후 밀레시안은 아발론게이트를 방문하지 않았다, 정확히는 하지‘못’했다.
그것이 분노나 슬픔으로 인한 의식적인 회피가 아닌 잠을 자고 깨어나는 것처럼 무의식중에 자연스레 회피하는 것이기에 밀레시안 본인 자체도 의아해하면서 동시에 또 다시 회피하는 것이다. 주변의 지인들과 길드원들에게 그는 언제나처럼 이야기도 잘 했고 덜렁댔으며 잘 자고 잘 먹는 지극히 평범한 상태였다.
그런 밀레시안이 평범한 일상에 녹아들어가던 어느 날,
환청이 들렸다.
-밀레시안님-
지극히 평범하고 간결하며 짧은 그 문장도 아닌 단어, 아니 고유명사에 일상속에서 살짝 공중에 붕 떠버린 기분이었다.
밀레시안은 슬프지도 기쁘지도 화가 나지도 않았다.
단지 아무생각을 할 수가 없었다.
그 뒤로 밀레시안은 일상 중에 예전에 들었던 ‘그’의 말들이 종종 들리기 시작했다. 그 말들은 꼭 현제의 자신에게 말을 거는 듯 보였지만 잘 생각해보면 예전에 들었던 말들이기에 자신이 PTSD(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로 인한 정신질환이 있는건가 싶었다.
하지만 그러기에 밀레시안은 너무 많은 과거를 지나오며 에린의 역사에 섞여있었고, 이런 증상이 나타난다면 진즉에 나타났어야 하는 것 아닌가 의아해하며 생각하기를 그만두곤했다.
그리고 의외로 일상에서 신경만 쓰지않으면 별로 문제될것이 없었기에 그대로 무시하기로 했다, ‘그’가 밀레시안에게 치근덕대면 언제나 그랬듯이 말이다.
하지만 나름 최근부터 들리는 말들은 이제 옆사람이 말을 거는 것으로 착각할 수준으로 심각해졌다. 지인들과의 대화중에는 여기있었냐며 나를 찾아오듯 환청이 들리고, 교양없이 우적우적 사과를 먹으면서 길거리를 지나가면 그런 나도 맘에 들지만 길거리를 다닐때는 삼가주셨으면 한다는 둥 거의 옆에서 말하는 착각을 불러일으켜 간혹 놀라서 대답을 해버리는 것이다.
그런 모습에 주변사람들이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어줄때마다 밀레시안은 웃으면서 잠시 자리를 뜨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증상이 잦아진 시점부터 밀레시안은 다른 사람과의 교류관계를 중단할 수밖에 없었다.
비록 중얼중얼 작은 목소리지만 본인이 그 환청에 답을 해주기 시작해버렸기 때문이다.
아브네아의 음유시인 캠프장을 크게 돌 듯이 멀찍이 떨어져 지나간다. 저곳에 잠시 들렸다가도 본인을 반겨주는 사람들만 있다는 것을 밀레시안은 잘 알고있었지만 되도록 본인의 존재를 신경 쓰지않을 정도의 거리로 떨어져서 걸어간다.
-신경 쓰이십니까?-
“별로...”
나직하게 씹어뱉는 말은 찾아온 밤하늘의 별가루마냥 이리저리 깜빡대기만 할 뿐이었다. 얼마나 걸었길레 밤이 찾아온 걸까 생각하며 무겁게 질질 끌려오는 다리를 바라보았다.
-오늘은 이만 쉬시는편이 좋겠습니다.-
“아직 아니야, 하지만....”
네아 호수 끝자락에 털썩 주저앉아 가방에 넣어둔 먹을거리를 찾아 꺼내다 아직 차가운 손끝이 아려 주변에서 불을 피울만한 나뭇가지를 주워온다. 타닥타닥 나뭇가지 타는 소리가 환청을 잠재우듯이 고요하게 앉는다. 치즈조각과 살라미조각 그리고 좀 단단해진 바게트빵을 뚝 부러뜨려 입에 밀어넣는다, 배가 고픈건지 공허함에 그러는지 우겨넣듯이 밀어넣는 것이다.
따끈따끈한 햇살이 느껴짐에 부스스 눈을 뜨니 주변에 이름모를 고양이들이 밀레시안의 몸위와 옆에 오밀조밀 모여있음을 보게된다. 볼을 핥짝거리는 까끌한 혓바닥이 눈가에 고인 잠기운을 가져간다. 천천히 몸을 일으키니 몸위에 있던 고양이들이 하나 둘 몸에서 내려온다.
“덕분에 따뜻하게 잤네, 고마워.”
고롱거리는 턱을 가볍게 구슬리자 전날 밤 불을 피웠던 나뭇가지가 머리만치에 까맣게 숮이되어있었다, 음식을 먹고 그대로 잠이 들었었나보다 하며 중얼거린다.
***
“...해서 위급시에는 이렇게.”
앉아있는 밀레시안 앞에서 카즈윈이 눈앞의 사슴과 디바인 링크를 하고선 이리저리 무언가를 보여준다. 카즈윈은 말로 설명하기보다는 몸동작으로 보여주는 경우가 종종 있어서 밀레시안은 카즈윈이 뭔가 보여줄때마다 열심히 봐두었다.
“디바인링크는 역시 카즈윈이 요리조리 보여주는게 가장 멋있는거 같아”
반쯤 뜬 눈이 흥미없다는 듯 한 표정으로 밀레시안에게 다가와 머리를 쓰다듬어 준다, 그러면 언제나처럼 베시시 미소짓는다.
“좋은 분위기라서 열심히 훼방놓고 싶군요.”
다정하면서 왠지 공포스러운 목소리가 다가온다, 밀레시안은 뭔가 당연하게 왔다는 듯이 어께를 으쓱대며 한숨을 쉰다.
“왠지 어딘가에서 있을거 같았어, 오늘은 게다가 비번인걸로 아니까.”
“그걸 잘 아시는 분이 제가 아닌 카즈윈이랑 좋은 분위기를 만드시는거죠?”
그 말에 카즈윈은 살풋 인상을 쓰고는 다시 귀찮다는 표정으로 밀레시안의 머리를 마저 쓰다듬고는 아발론게이트 안으로 걸어간다.
“그러니까 그 미소 말입니다.”
살짝 엄격한 목소리에 밀레시안은 고개도 안돌리고 카즈윈의 뒷모습을 바라보면서 말한다.
“내가 웃었어?”
“지금도 웃고 계십니다.”
“잘못 보는 거겠지~”
그 말에 잠시 등 뒤에 냉기가 서리듯이 오싹한 공기를 느껴져 뒤로 돌아보니 톨비쉬가 공중에 손과 시선을 뻗고 있다.
“뭐 하는거야?”
“제가 종종 사용하는 디바인링크 방식입니다.”
순간적으로 신성력이 팟! 하고 터지듯 발현하여 가볍게 바람이 인다, 나부끼는 머리카락 뒤편에서 무언가 하나 둘 날아온다.
“파랑새잖아.”
파랑새들은 하나 둘 톨비쉬의 손위로 모이다가 손 위의 자리가 좁은지 어께와 머리위에 하나 둘 앉는다. 그렇게 거의 열댓마리 이상의 파랑새가 톨비쉬에게 앉아있는다.
“제 신성력으로는 그리 오랫동안 유지하지는 못하지만 밀레시안님이라면 하실수 있을거 같아 해본겁니다, 정말 긴박한 순간에는 필요하지 않을까 싶어서요.”
그 모든 동물과 교감했다는 듯 파랑새 하나하나 푸른빛이 일렁인다, 이렇게 단번에 여러동물들과 한번에 링크를 하는 건 처음보았기에 밀레시안은 큰 눈이 동그랗게 더 커진다.
“와!! 신기해!!!!! 어떻게 한거야?!”
톨비쉬는 싱긋 웃으면서 이러저러 이야기를 해준다, 열심히 고개를 끄덕이며 이야기를 듣는 모습에 웃음이 터져버린 톨비쉬는 한번에 본인의 어께에 있던 파랑새들을 자신의 어께로 옮겨오는 밀레시안의 모습에 웃음을 멈추고 놀란 눈으로 바라본다.
“와아!!!! 신기해에!!!!”
본인이 하고 믿을수 없다는 표정으로 새들이 앉아있어 가만히 서있는 모습으로 활짝 웃으면서 놀라워한다. 그리고 놀란 표정으로 보는 톨비쉬를 보며 함박웃음을 짓는다.
“이거 너무 신기하다! 막 새들 날라오는데 간지럽고 귀엽고 막 그러니ㄲ...어?”
따스한 두 손이 자신의 얼굴을 소중하다는 듯이 다정하게 감싸돌며 얽혀오는 모습에 밀레시안은 말을 끝까지 할 수가 없었다. 이루 말할 수 없는 행복한 미소가 햇살처럼 내리쬐며 밀레시안의 입술에 닿는다, 입을 연겨푸 맞추면서 톨비쉬는 미소를 거두지를 못했다. 겨우 두 사람의 입술이 떨어졌고 톨비쉬는 작고 달큰하게 중얼거렸다.
“당신이란 사람은....”
사랑스럽다는 표정으로 바라보는 톨비쉬의 모습에 밀레시안은 활짝 웃어보인다, 그 미소는 예전에 밀레시안이 에린에 내려온지 얼마 안되었을 때 보여준 미소처럼 행복한 미소였다.
***
“아니야.”
그럴 리가 없다, 서늘한 공기에 본인이 직접 잠결에 디바인링크를 켠걸 이런걸로 엮어 실제인양 착각하지 말라고 머릿속을 다지다가 회피하듯이 생각이 지워지는 것인지 머리를 휙휙 저어대며 주변에 남아있는 고양이들을 좀 어루만져 주다가 밀레시안은 기지개를 켜고는 몸을 일으켰다.
문게이트 앞에서 감은 눈을 떠 보니 아발론 성소 중반쯤에 있는 세계수 근처로 도착해 있었다. 터덜터덜 걸음을 옮겨 세계수의 뿌리를 딛고 올라가서 둔치쯤에 털썩 앉으니 신성력 좋은 기운들이 은은하게 들어오는지 밀레시안은 눈을 가볍게 감는다.
-수원지에 몸은 담가보셨습니까-
대꾸하지 않은체로 스르르 눈을 뜨니 세계수의 핑크빛 잎사귀들이 사각대면서 바람에 흩날린다. 밀레시안을 지나쳐 떨어지는 핑크빛의 잎사귀들을 바라본다, 멍하니 그 아름다운 광경을 바라보고 있자니 또 다시 누군가가 말을 걸어줄 것 같다고 생각하게 된다.
-아름답지 않습니까! 아발론, 성소는 이 세계수로 인해 완성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죠-
거봐 그럴 줄 알았어 하고 중얼거리는 밀레시안의 말은 작아서 그 누구도 듣지 못할 정도였지만 갑자기 휙 몰아치는 바람과 나뭇잎의 합주로 인해 그렇게 묻혀버린다.
푹 떨군 고개는 한참을 들리지 않았다. 자신의 주변에 자신의 눈물을 닦아줄 사람이 없다는 절망감과 이제는 또 다시 혼자라는 외로움이 겹쳐 공허함에 잠식당한다.
“어디갔어.....어디간거야...”
인적 가득한 던바튼에서도, 저 멀리 외진 구석의 길을 지나다가도, 전투에 모든 것이 너덜거리며 돌아가는 길에도, 혼자 즐기려던 장소에 있을때에도 그 모든 장소에 자연스럽게 나타나곤했다. 누군가와 웃을때도, 혼자 눈물흘릴때도, 화가나서 도망쳐버릴때도 분명 질타당할걸 알면서도 쫒아와주곤 했다.
-저는 언제나 진심입니다-
그 낮간지러운 고백들에 제대로 답을 해준 것이 없었다. 헤아릴수도없는 많은 입맞춤을 했지만 나야말로 진심을 이야기한적이 있었던가 파도처럼 밀려오는 생각에 밀레시안은 주먹을 꽉 쥐었다.
“함께하겠다는 말을...나도 함께가고 싶다는 그 말을 못해줬어.....”
투둑투둑 발 아래로 물방울이 가라앉는다.
“나는 너에게...언제쯤 이야기를 해줄 수 있을까.”
이미 그 모든것도 전할수 없는 상태임을 뼈저리게 느끼던 밀레시안은 그제서야 오열할수 있었다.
에필로그
이곳은 어딜까, 이리아의 론가 사막 쪽인가? 그러기에는 하얗고 고운 모래가 밟힌다.
앞에는 인적도 생물도 그 무엇도 없는 황량한 사막같지않은 어떠한 공간, 끝이 어딘지는 모르지만 우선 걷는다. 시간은 며칠이 지났는지, 해는 뜨고 밤도 오는데 오늘이 무슨날인지 아무것도 알 수 없다. 걷다가 지쳐 기절하면 누웠다가, 또다시 정신차리면 그 뜻모를 길을 걷는다.
하지만 이 곳 한가운데에서 함정인 양 자꾸만 환청이 들리는 것이다.
-톨비쉬!-
-톨비쉬, 이번 임무는 어땠어?-
-나야...언제나 그런 존재니까-
-난...그저......-
-잘 알지 못해서 미안해-
“당신이 사과할....”
그는 말 도중에 도로 입을 닫는다, 이 황랑한 곳에 사람이....아니 ‘그 사람’이 있을 리가 없다. 이곳은 나의 죄와 굴레들을 다시 맞추기위해 걸어야하는 곳이라며, 이곳에 자신 외에 누군가가 존재할리 없다고 머리를 휙휙 내젓고는 길을 걷는다.
“수원지에 몸은 담가보셨을려나.”
별뜻없는 중얼거림과 동시에 순간적으로 달큰한 체향이 콧주변을 맴돌다 사라진 기분이 든다, 이제 환청도 모자라서 향기까지 나는 것이 미쳐도 단단히 미친 것이 틀림없다고 중얼대면서 주먹을 꽉 쥐고 다시 걷는다.
-나와 함께해줘서...고마워-
“그만!!!!!!”
없는 힘을 짜내 외마디 비명을 지른다. 왜 자꾸 따뜻했던 목소리가 들리는걸까, 이 길을 걸으면서 밀레시안의 목소리는 끊임없이 들려왔다. 그 목소리는 톨비쉬에게 위안과 위로를 건네기도 하고 걱정도 하면서 너무 다정하게 다가오는 것이다.
“저는 후회합니다, 당신과의 이 기억들이 추억이 되어 이렇게 다정하고 아름답게 남아있을걸 알았다면 당신과 처음 인사했던 그 날에서 도망쳤을 겁니다.”
머리를 부여잡고 그대로 털썩 무릎을 꿇는다, 모래위로 물방울이 툭툭 떨어진다.
“...거짓말입니다, 저는 이럴 운명이었단걸 알았어도 당신에게 인사를 건냈을겁니다. 후회할걸 알았더라도 당신을 좋아하게 되었을겁니다.”
부여잡은 머리는 땅으로 그대로 떨어진다. 소리도 내지못하고 우는 톨비쉬는 잔뜩 숨을 모아 내쉬고는 중얼거렸다.
“당신은 언제쯤...제게 ‘진짜’이야기를 해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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