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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개토대왕릉비에 대한 고찰 (2) - 광개토대왕릉비의 탁본 검토
게시물ID : history_29317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세실마리아
추천 : 6
조회수 : 1767회
댓글수 : 6개
등록시간 : 2018/02/05 23:04:25

지난번 글에 이어 오늘은 광개토대왕릉비의 탁본에 대해 알아보고자 합니다.

본 글을 다음과 같이 3 ~ 4 편에 걸쳐 작성하고자 합니다.

1. 김병기 교수의 비문변조설 (차이나는 클라스 43화 주장)의 문제점

2. 광개토대왕릉비의 탁본 검토 (본 게시물)

3. 지금까지의 여러 학설들과 반론들 그리고 최종결론 (2/12 작성 예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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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글에서는 광개토대왕릉비의 해석을 하기에 앞서 그 재료가 되는 탁본에 대해 검토를 진행해 보겠습니다.


1876년에 광개토대왕릉비가 재발견된 이래로 많은 학자들이 탁본을 바탕으로 비문 연구를 하였습니다만, 재일 한국 역사교수인 이진희 교수의 석회도말론을 필두로 탁본에 대한 의구심이 생겨나기 시작했습니다. 특히 한국, 일본에서 주로 연구된 사코본 (일본의 밀정인 사코 카게노부 (酒匂景信) 1883년 얻은 탁본)에 대한 의심을 많이 받았습니다.

 

따라서 광개토대왕릉비의 비문연구를 하기 위해서는 먼저 그 탁본을 만든 경위와 방법을 확인하여 자료의 신뢰성을 확보할 필요성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다행히 이러한 광개토대왕릉비의 발견부터 탁본 진행과정까지 전반적인 경위를 중국학자 왕건군의 조사로 많은 부분이 밝혀졌습니다.

 왕건군의 연구에 따르면  광개토대왕릉비가 확인된 이래로, 대부분의 탁본은 초씨 부자 (초천부 (初天富), 초균덕(初均德))가 진행한 것을 확인하였습니다.

이들 부자는 광개토대왕릉비 발견 당시부터 근처에 살고 있었고, 탁본이 돈이 됨을 알고 수많은 탁본을 하였던 것이죠.

 

하지만 초기에 비석을 발견하였을 때 이끼 등으로 비문해독이 불가하여 이를 제거하기 위해 말똥을 바르고 불태워 이끼를 제거하는 과정에서 비석이 훼손되었다고 합니다. 여기서 이미 사람들이 조작의 의심의 단초가 생겼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그리고 여기서 더 나아가 탁본 과정 중에도 문제가 생겼지요

 

<쌍구가묵본(雙鉤加墨本)의 탄생>

기존의 매끈한 비석들과는 달리 광개토대왕릉비는 다듬어지지 않은 원석에 글을 새겨 넣었기 때문에, 기존의 중국식 탁본법대로 선지(우리가 흔히 서예할 때 쓰는 화선지)를 이용해서 탁본을 하기고 하면 비면의 요철이 심하여 곧 종이가 찢어져 온전히 탁본을 얻을 수 없었습니다. 따라서 종이를 비면에 가볍게 두드린 후 그 자형의 윤곽을 묘사하여 먹칠을 하는 방식으로 탁본을 얻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말도 많고 탈도 많은 쌍구가묵본 (雙鉤加墨本)입니다.

 

비석도 불로 인해 훼손된 데다가 쌍구가묵본 자체가 이렇게 자국을 따라 그리듯이 본을 뜬 유사탁본이다보니 잘못 오기된 글자가 생기면서 문맥에 맞지 않는 글이 생기고 다른 탁본과 불일치하는 부분이 생기니 학자들 사이에서는 억지해석을 진행하던가 아니면 탁본 자체를 부정하게 되는 사태에 이르게 된 것이지요.

 

1.jpg
흔히 사코본의 조작을 대표하는 것으로 제시되는 왜구대궤(倭寇大潰, 왜구가 크게 무너지니, 오른쪽 원석탁본) ->왜만왜궤(倭滿潰, 왼쪽 사코본)

그러나 쌍구가묵본 자체의 결함을 생각하면 의도한 조작이라기 보다는 탁본상의 오류의 가능성이 높습니다.


<석회도말본의 등장>

쌍구가묵본 이후 많은 사람들이 탁본을 찾으면서 초씨부자의 탁본기술이 축적되자 화선지 대신 고려지 (조선 전통 한지)와 같이 튼튼하고 질긴 종이를 이용하는 등 원석탁본을 하는 방법을 찾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능비가 불로 인해 훼손되고, 약화되어 풍화가 가속되자 원석탁본으로는 깨끗한 탁본을 얻기 어려워 졌습니다. 그러자 석회를 발라 틈을 메워 일손을 줄이고 문자를 명확히 하여 가격도 높게 받기 시작하였습니다. 학자라면 경악할 행동이겠지만, 그저 탁본을 팔아 돈을 벌 생각뿐인 초씨부자에게는 당연한 행동이었던 것이죠.

 

그리고 이렇게 석회도말본이 생기면서 또다시 오류가 생기고 맙니다. 그리고 이러한 수정이 가해진 탁본들이 서로 맞지 않고 문맥이 어그러지자 이를 본 이진희 교수가 석회도말론을 펴게된 까닭입니다.

 

하지만 일제가 고의로 문자를 조작하기 위해 석회를 발랐다는 증거는 나오지 않았습니다. 왕건군의 조사에 따르면 초천부 스스로 석회를 발랐다고 밝히고 있으며, 비석 주위에 살던 많은 사람들도 일제의 석회도말작전을 본 적은 없다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사코 카게노부 역시 비문을 조작하여 탁본한 것이 아니라 다른 곳에서 구한 (또는 강제로 빼았은) 것이라는 점을 여러 군데에서 확인할 수 있으며, 일본의 대표적인 극우 역사학자로 한국사 왜곡에 적극적이였던 이마니시 류(今西龍)는 오히려 사코본을 비롯한 여러 탁본들을 보며 비면에 보수된 글자가 있으니 주의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하였습니다. 이를 볼 때 일제가 고의적으로 비문을 조작했다고 보기엔 어려운 점들이 많습니다.


따라서 김병기 교수와 같이 일제에 의한 조작론을 고려하기 보다는 초기 탁본의 오류를 고려하여 탁본간의 비교를 통해 원문을 찾아가는 것이 학문하는 사람의 도리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럼 원석 탁본을 바탕으로 하되, 쌍구가묵본 등을 보조적으로 비교하여 신묘년조의 해석을 어떻게 할지에 대해 다음 글에서 말씀 드려보겠습니다.


[본 내용은 왕건군의 '광개토왕비 연구' (임동석 번역, 2004년도 초판본)을 바탕으로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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