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것의 심장이 맥동했다. 스테돌프는 그것의 심장에서 눈을 땔 수도 눈을 때지 않을 수도 없었기에 흐릿한 시선으로 그것의 심장을 봐야만 했다. 의료인 조합에서 쓰는 다이아몬드로 날을 간 메스보다도 더 날카로운 것에 의해 조각된 게 분명한 심장은 서투른 조각 솜씨로 난 상처에 피를 흘리면서도 무엇보다도 생생하게 뛰고 있었다.
심장이 흘리는 저주 받은 하모니강(Harmony River)물의 색깔과 같은 핏빛과 검은색이 뒤섞인 액체는 스테돌프의 영혼을 집어삼키고, 폐허로 만들고 잿더미가 되게 하는 것만 같았다. 특히 지름이 20cm도 넘어 보이는 동맥의 움직임은 혐오 그 자체였기에 그것을 인지한다는 것 만으로도 스테돌프는 죽어가는 것 같았다. 숨이 멎고 수의가 덮인 채 지하의 납골당에 묻혀 역겨운 썩은 공기의 일부로 환원되는 그 느낌은-
“깨어나셨군요. 아, 아니, 저를 해치지 말고 정신을 차리시라는 뜻이에요.” 멀리 이성 아니, 무엇이라고 말해야 할지 모르는 지평선에서 차분한 그러나 조금은 따듯한 목소리가 들렸다. 스테돌프는 눈을 떴다. 아니, 눈을 뜨고 있다가 정신을 차렸다는 말이 더 어울릴 것 같았다. 지금 스테돌프는 아무 옷가지도 걸치지 않은 채 어느 건물의 3층에서 서빙용 무쇠 접시를 들고 있던 암컷 사슴의 양쪽 팔목을 발톱으로 찍어 누르고 있었으니까.
사슴의 색이 바래 누래진 하얀 옷에서 피가 묻어 나왔다. 스테돌프는 육식동물이란 체면이 부끄럽게 피가 흐른다는 사실에 약간 놀라 뒷걸음질 치다가 그만 70cm 되는 침대 턱에 뒷발이 걸려 넘어졌다. 그는 낡았으나 여전히 부드러움을 전달하는 침대의 푹신함을 느꼈고 동시에 이미 지쳐 근육마저 탈진한 다리가 제풀에 항복하는 고통을 느꼈다. 공포는 사라졌고 그 자리를 익숙하리만큼 진부한 혼돈이 채웠다.
“이럴 줄 알았으면 깨어나실 때까지 기다리는 게 나을 뻔 했네요. 우유와 후추를 친 고기는 엎질러졌고 제 소매는 발톱에 찢어져 버렸네요. 고객님께서 혼란스럽다는 건 알고 있지만 땅에 엎질러져 버린 고기와 우유 그리고 망가진 재 옷까지 합쳐서 560입(Bite)의 추가 요금을 내셔야겠습니다. 그럼 완전히 정신을 차리실 때까지 물러나 있을까요?” 빛 바랜 분홍 치마를 입은 암사슴이 문 앞에서 허리를 굽히며 말했다.”
“지금 무슨 상황이지?” 스테돌프는 동물 세계의 평균보다 조금 나았다. 적어도 모두가 이런 상황에서 할만한/여기는 어디지?/라는 단어는 사용하지 않았으니까. 지금 무슨 상황인지를 묻는 것은 공간판단력은 물론 상황판단력까지 요구하는 질문이었으니까.
“브로큰 엔 이레이즈 게이트 여관에 와 계시죠. 집이 프라이드 랜드에 있는 방직 조합원 맞으시죠? 집이 있는 도시에 잘 도착하셨습니다.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타르 같은 오물에 피와 스컹크 냄새를 뒤집어 쓰시고 저희 여관 문을 박차고 들어오셨으니 확실히 도시에 들어오는 신고식 한번 제대로 하셨네요.” 치마와 비슷한 색상인 붉은 두건을 머리에 두른 사슴이 말을 이었다.
사슴은 웃는 건지, 슬퍼하는 건지 아니면 스테돌프가 낸 상처에 아파하는 건지 모르는 미소를 지었는데 그 미소가 왠지 반쯤 정신이 나간 스테돌프를 비웃는 것 같았다. 초식동물이 감히 육식동물에게 내보여서는 안 되는 그 표정 말이다.
실용적으로 말해 스테돌프는 그 비웃음에 화낼 처지는 아니었다. 그는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나체였으며 침대에서 어정쩡하게 일어나 주둥이를 벌리고 있었고 침을 흘리고 있었으니까. 사슴의 미소가 의미하는 것만큼이나 스테돌프는 나머지 반쯤 나간 정신을 되찾을 필요가 있었다.
”그 괴물이 쫓아왔나? 그 아무튼 아무튼 끔찍한데 젠장 설명을 못하겠어- 그러니까 무장한 육식동물까지 살육하는 괴물이 말이야?” 지금 스테돌프는 자신에게 가장 필요한 질문은 사슴에게 던졌다. 진짜 뭔 돌이나 20kg짜리 납 추를 던지는 것처럼 말이다.
“정확하게 설명해 드리는 게 좋을 것 같군요. 일행하고 같이 다니시다가 노상강도들에게 당하신 것 같더군요. 물론 군부에 신고는 이미 해놓았습니다. 그리고 괴물은 상상 속에만 존재하지요.” 사슴이 여관방의 문을 열어놓고 나갈 준비를 하며 차분히 말했다. 스테돌프가 있는 여관방은 이미 이런 손님을 여러 번 겪어왔는지 발톱과 아이언 클로 자국에 나무문에는 총알자국을 대충 때워놓은 흔적까지 보였다.
“아니야. 진짜 있었다고 내가 목격했어. 진짜로 목격했다고.” 스테돌프가 으르렁거리며 항의했다.
“전 지금 나가서 물주전자와 컵을 가지고 오겠습니다. 원하신다면 은 빨대(strew)도요. 분노나 화가 풀리시지 않으셨다면 이 방의 집기들을 부수셔도 됩니다. 추가 요금을 내신다면 저희는 이 방에서 무엇을 하시든 상관하지 않지요.” 문을 거의 닫아버리고 사슴의 굽이진 앞발만 보이게 된 암사슴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직 문 밖으로 사라져버리지 않은 암사슴의 손에는 무쇠 쟁반이 세로로 들려 있었고 우유가 뚝뚝 흘러나왔다.
“그래 괴물은 없어. 이리 들어와서 내가 올 때의 상황을 좀 더 자세히 설명해봐. 그렇게 해준다면 추가 요금이라도 기꺼이 주지.” 사슴이 한 말 /분노와 화가 풀리지 않으셨다면/은 아이러니 하게도 공포와 두려움을 돌려 말할 때 사용하는 어휘였다. 낡고 거의 사라진 터부였지만 육식동물에겐 공포나 두려움을 느끼는 게 금지되어 있었다.
“종업원과의 개인적인 대화는 원래 1000입의 요금을 받지만 지금은 100입만 받도록 하지요. 하지만 요금엔 제 몸값 그리니까 제 몸을 구성하는 살, 고기는 포함하지 않습니다. 절 산채로 잡아먹으신다면 감옥에서 오랫동안 머무실 각오는 하셔야겠죠.” 약간의 미소를 띤 사슴이 다시 방으로 들어오며 말했다. 사슴은 근처 서랍 위에 쟁반을 내려놓고 문을 살짝 열어두었다.
“내가 이 여관에 올 때의 상황과 지금 내가 왜 이 방에 있는지 말해봐.” 스테돌프가 재빨리 침대를 싸고 있던 침대 보를 태양을 섬기는 교회의 제사장들이 입는 토가나 로브처럼 걸치며 말했다. 나체로 있는 건 부끄러운 일이 맞았다. 태양의 교단이 지겹도록 설교하는 것처럼 스테돌프는 문명을 살아가고 있었으니까.
“말씀 드렸듯이 1층 여관 홀의 문을 박차고 들어오셔서 다른 손님들을 방해하시더니 테이블 몇 개와 술병 수십 개를 부수시고 /맥동하는 존재다. 맥동하는 존재다/소리치시다가 쓰러지셨죠. 더러워진 옷가지는 빨기 위해 뒤뜰 빨래 통에 넣어두었고 소지품은 석회와 세제를 뿌려서 닦은 뒤 배게 근처 장롱에 놓아두었습니다. 그리고 편히 쉬실 수 있게 3층 두 번째 방으로 옮겨다 드렸고요.” 사슴이 침대에 앉으면서 말했다. 스테돌프는 반사적으로 일어났다.
“그게 다인가?”
“그게 다에요. 다만, 강도사건 조사차 나왔던 군부에서 손님이 부순 테이블과 바닥에 흘린 음식값을 대신 지불하고 갔더군요. 으레 이런 강도사건의 피해 금액은 불공평하게도 피해 당사자가 내는 것인데 말이죠.” 사슴은 여전히 미소 짓고 있었지만 퉁명스럽게 말했다.
“강도 사건이 정말 일어 났던 거야?” 스테돌프는 괴물이 진짜로 있었냐고 묻고 싶었다. 하지만 진짜로 그렇게 말했다간 여관 종업원 사슴이 아까처럼 정신차리라면서 정말 바깥으로 나가 한동안 돌아오지 않을 것 같았다. 그래서 화제를 약간 돌려서 말한 것이다. 괴물의 기억이 생생한데 괴물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소리를 듣다니 약간 믿기지 않았다.
“군부의 소대가 현장을 확인하고 시체들을 수습하고 초식동물들의 고기를 도축해 갔답니다. 현장에선 사슴 사냥용 블런더버스의 납 탄환이 발견되었다 하더군요. 도로 바로 곁 나무에 바짝 붙어있다가 양쪽에서 산탄을 쏴 기습을 한 것이죠. 노상강도들이 대담해졌어요. 감히 사자가 호위하는 여행자 무리를 공격하다니 말이에요. 암사슴이 한숨을 쉬었다. 블런더버스 산탄총은 원래 사악한 폭도들을 처리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었지만 요즘은 무고한 사슴을 사냥하는데 자주 쓰였다.
“지금 나는 메케한 냄새가 뭐지?” 스테돌프가 묻자 사슴이 스테돌프를 뻔히 바라보았다. 스컹크의 독소탄. 노상강도 무리의 습격이라면 바로 그 냄새가 스테돌프에게 묻었다는 뜻이었다. 군용설탕과 뒤섞여 끔찍하게 지워지지 않는 그 냄새가 말이다.
스컹크의 냄새는 절대 쉽게 지워지는 게 아니었고 그게 군용설탕과 섞인 독소탄이라면 이야기는 더 심했다. 으깬 토마토라든지 표백용 산성 세제를 쓰면 냄새가 좀 덜해졌지만 한 달은 넘게 가는 악취였다. 기나긴 흉년의 작황 사정이 조금 나아졌어도. 여전히 황폐한 토지에서 토마토를 키우긴 어려운 일이었고 그래서 값은 매우 비쌌다. 표백용 산성 세제는 피부가 따갑고 그 부분의 털이 변색되어 버리는 위험한 물질이었고.
“입을만한 옷이 있나?” 방직조합원이어서 잘 알았지만 한 동물이 제대로 차려 입을만한 맞춤복은 구하기 어려웠다. 만드는데도 시간이 걸렸고 그래서 아무 옷이나 냄새 없고 깨끗한 걸 물은 것이다.
“보통은 술을 마시고 인사불성이 되어 발톱과 주둥이로 할퀴고 물어 뜯는 분들을 위해 여분의 옷을 마련해 두는데 오늘은 떨어졌네요. 아까 고객님이 낸 사건의 여파 때문에 다른 손님들이 서로 망가진 테이블에 있던 바닥에 흘러 넘친 술값을 안 내겠다고 싸워서 옷들을 구입해 가셨거든요. 너덜너덜한 넝마 차림으로 한 밤중을 돌아다니는 건 좋은 생각이 아니었죠.” 암사슴이 대답했다. 사슴은 찢어진 소매를 걷어 올려 스테돌프가 낸 상처를 확인하고 치마에서 라벤더 연고 병을 꺼내 상처에 발랐다.
“그럼 구할 수 있나? 다른 건 하얀 거면 됐고 롱코트는 파란색이면 돼. 알잖아 방직조합이 쓰는 질 좋고 가격 적당한 코발트 염색 코트 말이야. 난 지금 옷도 없는데다 잠시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다고.” 정확히는 잠시 숨돌릴 시간이 맞겠지만 스테돌프는 어쨌든 그렇게 말했다.
“새벽이 되어 날이 밝아오고 있다 해도 아직은 밤 시간이에요. 포식자 분들께서 사냥의 권리를 행사 할 수 있는 시간이지요. 저희 여관의 종업원이 거리에 나간다면 잡아 먹혀 고기가 되고 말 거랍니다.” 암사슴이 단호하게 말했다. 이제껏 멀쩡하던 사슴의 눈에서 일말의 공포가 보였다. 밤이란 피식자들에게 두려움의 시간이었다.
사냥의 권리란 시장에서 고기를 살 수 없는 가난한 포식자들이 어떠한 처벌 없이 저녁 11시부터 아침 9시까지 길거리를 돌아다니는 피식자들을 잡아먹어도 아무 죄값을 묻지 않는 제도이자 법이었다. 이 규칙은 오랫동안 철저히 지켜졌고 피식자들은 포식자들에 맞서 저항하면 엄중한 처벌을 받았다. 만약 피식자가 근처 집이나 건물로 도망간다면 문을 열어주는 당사자와 그곳에 거주하는 피식자들도 사냥의 권리에 포함되어 사냥 당하는 동물이 될 수 있었다.
프라이드 랜드시(City of Pride Land)를 가로지르는 폐수와 도살장의 피로 오염된 하모니강 블로터스 다리 위에 집을 가지고 있는 스테돌프도 예전에 몇 번 포식자에게 쫓기며 목숨을 구걸하기 위해 집과 가게의 문을 두드리며 열어달라던 피식자의 비명소리를 들은 적이 있었다. 스테돌프는 시간이 새벽이라는 것을 깨달으면서 노상강도의 습격으로부터 지금까지 벌써 꽤 시간이 지났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렇다고 9시가 되기까지 기다린다? 그건 스테돌프에게 알맞은 선택이 아니었다. 당장 입을 것이 필요하다는 건 지금 중요한 일이 되었으니까.
“다른 방법이 없나. 웃돈을 주고서라도 다른 동물의 옷을 빌려 입는다든지?” 스테돌프가 말했다.
“그것보다는 저희 여관을 지키는 여우 중 하나에게 심부름을 보내시는 건 어떠신가요? 새벽에 의류 가게의 주인들을 깨우는 건 귀찮은 일이지만 수고비만 주신다면 문지기 여우에게 귀띔해드리지요.
“수고비는 3000입 되겠습니다.” 사슴이 말했다. 암사슴은 연고를 바른 앞발의 소매를 내렸다.
“이 고기는 내가 먹지.” 사슴이 바닥에 떨어진 후추에 절인 고기와 우유 컵을 주우려던 순간 스테돌프가 먼저 앞발을 뻗었다. 배가 꼬르륵거리며 고기와 피에 대한 욕망이 살아났다.
“무슨 고기지?” 그가 물었다. 프라이드 랜드의 피식자들은 불만 많고 유순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의 고기에선 노린내가 났다. 누군가는 그게 초식동물들이 도축 당할 때 저항하고 두려움을 느끼기에 스트레스를 받아서 그런 거라고도 했지만 스테돌프는 진실을 몰랐고 진실을 알 생각도 없었다.
“사슴 고기입니다. 프라이드 랜드에서 피식자의 운명은 누군가는 고기가 되고 누군가는 또 하루의 삶을 살아가는 것으로 나눠지지요.” 암사슴 종업원이 이상하게도 기이한 어조로, 그러면서도 부드럽게 말했다.
스테돌프는 방을 둘러봤다. 회칠로 마감된 방에는 여기저기 할퀸 자국 이외에 여행자의 짐 더미를 넣어놓을 수 있는 큰 상자와, 기다린 선반, 세 게의 서랍장 그리고 장롱 하나와 침대가 있었다. 스테돌프는 먼저 상자를 열어보았다. 아무것도 없었다. 당연한 일이었지만, 진실이 뭐가 되었든 스테돌프는 어제 저녁에 습격현장에서 도망쳐 여관에 도착했다. 짐이 있을 리가 없었다. 방 반대편 쪽 선반은 비어 있었고, 서랍장 두 개도 마찬가지였다.
스테돌프는 장롱을 열어보았다. 그곳에는 물건이 조금 있었다. 아직도 고무가 타는듯한 역한 독소탄 냄새를 풍기는 황동 탄피 권총과, 기름먹인 두꺼운 양피지에 인쇄된 방직조합 조합원 자격증, 지폐가 들어있는 지갑과 금화가 든 돈주머니였다. 어머니가 주었던 방직조합 휴직 사유서는 없었다.
예전에 교회는 나무가 태양의 빛을 받아서 자라듯 초식동물들이 태양 빛 즉 고기가 되어서, 나무 즉 육식동물들을 살찌우고, 육식동물들이 문명을 새우고 나라를 다스리며, 그것이 즉 숲 프라이드 랜드를 건강하게 하는 방법이라고 했다. 그것만이 방법이라고, 모두가 만수무강할 수 있는 방법이라고 말이다.
수 십 세기도 넘는 과거에 돼지라는 동물이 영원히 태양의 빛이 될 자격을 얻게 되었다. 지금에 와선 어쩜 떠넘겨진 것일 볼 수도 있었지만. 돼지들은 태양의 교회를 따랐고 기꺼이 밭을 갈고 기꺼이 재분소의 날카로운 원형 톱날 아래서 고기가 되었다. 모두가 만찬을 즐겼고 걱정은 없었다.
땅에서 떨어진 조그만 조약돌이 물가에 작은 파문을 일으켜 부채꼴 퍼지듯 그 사건이 일어나기 전 까진.
6세기 전 엔으리븐 왕의 해에 내전이 있었다. 프라이드 랜드를 휩쓴 긴 기근이 그때 시작되었고 왕의 동생인 듀원 왕자가 형의 왕위를 찬탈하려 일으킨 전쟁은 곧 이제는 잊혀져 버린 4 세력의 혈투로 바뀌었다.
그 내전 막바지에 소문이 있었다. 가장 힘없고 약해진 자의 군대가 프라이드 랜드 동쪽 트레이얼 평원으로 향한다는 소식이었고 4세력은 거기서 전투를 치렀다. 그리고 네 세력이 사이 좋게 몰락했을 때 마침내 평원에 도착한 것은 돼지들이었다. 재분소의 지하, 도축용 칼날로 끌려가던 돼지들이 트레이얼 평원과 군대의 소문을 퍼트렸던 것이었고 그들은 반란 세력을 모두 쫓아내고 다시는 고기가 되지 않겠다 선언한 것이었다.
돼지들의 반란은 성공하지 못했으나 그 대가는 컸다. 교회는 신앙을 버린 돼지들의 반란에 놀랐으며 저항도 못해보고 무너졌다. 다만 여기저기 흩어져 있던 귀족 사자들의 민병대가 오랜 수성전과 공성 전 끝에 간신히 싸움에서 이겼을 뿐이었다.
전쟁에서 살아남은 동물들은 황폐해진 농토를 버리고 도시로 향했고 새로운 규칙이 정해졌다. 돼지들의 수는 엄격하게 통제되고 제한되었으며, 출산세(Birth Tax) 성년세(Mature Age Tax)등이 제정되었다. 그리고 돼지가 아닌 다른 초식동물들이 농사를 짓고 세금을 낼 시기마다 자신들의 새끼와 이제 갓 성년이 된 앳된 자식들을 고기로서, 또 세금으로 바치게 되었다. 다시 세워진 교회는 군부를 동원해 엄격한 통제를 시작했다. 그리고 그게 현재로 이어진 것이다.
6세기 전부터 지속된 흉년에 돼지의 수까지 줄어든 일은 좋지 않은 결과였다. 초식동물이 먹을 작물은 물론 고기까지 귀해졌다. 스테돌프가 태어나던 때에 심각한 한파가 있었고 봄은 물론 여름에서 작물이 자라지 못했다. 많은 초식동물들이 굶어 죽었고, 그로 인해 고기는 생겼지만 누구도 그걸 반기지는 않았다. 끊임없이 고기로 바쳐질 초식동물이 한꺼번에 죽는 건 나쁜 일이었다.
다행히 한파는 지나갔다. 새로 즉위한 프라이드 랜드의 엠렛왕은 육식동물들에도 농업에 신경 쓰라는 지시를 내렸고 재정을 튼실하게 하고 심각한 기근에 대비한다는 이유로 금화로 내는 세금을 올렸다. 스테돌프 가족의 문제는 거기부터 시작되었다.
각 조합의 조합원들은 조합회비를 내기 버거울 정도로 힘겨워졌고 일부는 조합에서 탈퇴 당해 부랑자가 되었다. 스테돌프의 가족은 다행히 작은 영지를 가지고 있었고 작년에 돈 문제 때문에 영지로 내려가 농장을 돌봐야 했다. 태업을 일삼는 반항적이고 못된 초식동물들을 다그쳐 영지의 작물 수확량을 늘려야 했으니까. 그래야 금화로 내는 세금이나 프라이드 랜드의 사자들에게 고기로 내는 세금을 낼 수 있었다.
스테돌프의 어머니가 방직조합의 휴직서를 쓴 건 그 때문이었다. 그게 있어야 방직조합비를 1년동안은 면제 받을 수 있었으니까. 그리고 스테돌프는 16살 성년이 되어 새로 방직조합원의 되었고 그 때문에 프라이드 랜드시로 돌아온 것이었고.
뒤를 돌아보니 종업원 사슴은 사라져있었고 바닥의 우유자국은 깔끔하게 닦였으며 방문은 닫혀있었다. 아마도 사슴이 다른 신선한 우유나 음식을 서빙하기 위해1층 여관 홀로 내려간 것 같았다. 스테돌프는 무쇠 접시 위의 우유가 살짝 묻은 사슴고기를 집어 들어 한입 물었다. 노린내를 감추기 위한 진하고 매운 후추의 냄새에 주둥이 안에 가득 찼다.
스테돌프는 잠시 침대에 앉아 옷이 준비되기를 기다릴까 하다가 아직 열어보지 않은 서랍장으로 향했다. 서랍장의 가장 위쪽은 살짝 젖혀져 열려 있었다. 서랍을 열었다. 스테돌프는 순간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했다가 진홍색 바탕의 마름모 모양인 장식을 발견했다. 정확히 숫사자의 갈기 모양 장식 가운데에 마름모가 새겨져 있었고, 마름모를 사분면 했을 때 왼쪽 위와 오른쪽 아래 두 부분에만 검은색을 칠한 장식이 말이다. 그것은 프라이드 랜드 사자들의 상징이었다.
사자들은 분명 이런 허름한 여관에 머물지 않았으니 이 상징이 우연히 버려졌을 리는 없었다. 그것이 여행자 일행을 호위하던 암사자의 것이 아닐까 생각했지만 그럴 리가 없었다. 괴물이 있든 없든 종업원은 스테돌프가 혼자 여관으로 도망쳐 왔다고 했다. 그렇다고 스테돌프가 가지고 있을만한 상징도 아니었다.
스테돌프의 가족이 작은 영지를 가지고 있었지만. 정말 작은 영지였다. 딱 큰 농장 하나 정도 되는. 그 영지는 대대로 군부에서 군인으로 복무하던 어머니 가문의 선조인 어느 암늑대가 하사 받은 것이었는데, 외할머니는 그 이유를 가문이 트레이얼 전투에서 활약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돼지들이 반란을 일으키고 군대들이 패배 당한 그 전투 말이다. 스테돌프는 그래서 감히 사자들의 상징을 하사 받을 자격이 없었다.
스테돌프는 어찌할지 모르다가 그 백금 상징을 손에 쥐었다. 기이하게도 손에 쥐자 스테돌프의 거친 마음이 가라앉는 것 같았다. 동시에 마음이 편해지고 확실치 못한 또는 알 수 없는 괴물의 기억도 사라지고 말이다.
스테돌프는 사슴고기를 다 먹었고, 소고기 조금과 우유 3잔을 마셨다. 스테돌프는 자신이 마신 우유가 어떤 초식동물의 우유인지 물었지만 종업원 사슴은 답해주지 않았다. 아침이 시작될 쯤에 옷이 도착했고 스테돌프는 제빨리 하얀 속옷과, 셔츠, 바지 그리고 푸른색 롱코트와 하얀 스카프를 맺다.
“나가실 건가요? 빨래는 어떻게 하실 거죠?” 암사슴이 다 먹은 서빙용 쟁반의 뼈를 치우며 말했다.
“우선 집에 들렸다. 내일쯤에 가지러 오지.” 스테돌프가 말했다. 우선1년동안 텅 비었던 가족 집에 들려야 했고 다음엔 노상강도 사건에 대해 알아보기 위해 도시에 있는 군부의 사무실에도 들려야 했다. 어머니까 쓴 휴직서는 없었지만 방직조합 길드 홀에도 들려 사정을 설명해야 했고.
“저희 여관에 지불해주셔야 할 금액은 총4360입 입니다.” 암사슴이 말했다. 소매 아래에 스테돌프가 할퀸 상처가 부풀어 올라있는 것이 보였다.
“여기 지폐 4장 그리고 금화와 은화.” 스테돌프가 값을 치렀다. 원래 화폐 단위 입은 고기 한입과 금화의 비율을 동등하게 계산했기 때문에 닢이 아니라 입이라고 불리는 것이었다. 물론, 스테돌프가 어릴 때 인플레이션과 실패한 화폐개혁이 휩쓸고 지나간 다음 고기와 물건들의 가격이 몇 백입, 몇 천입으로 뛰어버렸지만.
“감사합니다.” 암사슴이 다시 한 번 허리를 굽혀 인사했다. 그녀는 스테돌프가 옷 대용으로 썼던 이불보를 다시 이불 위에 가지런히 개고 있었다.
스컹크 냄새와 노상강도 습격이 아직 기억에 남아있었지만 스테돌프는 할 일을 해야 했다. 날은 충분이 밝았고 집에 들를 시간이었다. 스테돌프가 암사슴과 함께 3층 방을 떠나 아래로 향하자 주점의 소음이 들렸다. 스테돌프는 속담 하나를 떠올렸다. /같은 업계의 사람들끼리는 좀처럼 만나지 않는다. 심지어 흥겹게 떠들며 노는 일도 거의 없다. 하지만, 그들이 대화한다면 그건 대중에 대한 음모로 끝나게 마련이다./ 하긴, 방직 조합원들처럼 이른 아침 여관 주점에 모일 사람들이 할 말이라는 게 그런 거였으니까.
스테돌프가 다시 현실 세계에서 뜻 모를 위화감을 느낀 건2층으로 내려갔을 때였다.
“돈을 내든지 감옥에 가든지 선택해. 아니면 고기가 되는 것도 좋겠군.” 2층 복도에서 짙은 남색의 우비를 쓴 여우가 쥐에게 따지고 있었다. 쥐는 스테돌프가 아까 전에 그랬던 것처럼 쥐 크기의 이불보를 옷 대신 쓰고 있었는데 쥐는 악에 받힌 듯 나무기둥에 로프가 꼬여진 물건을 들고 여우에게 따져 묻고 있었다.
“이걸로 대신하면 되잖아요. 돈은 안내요. 이 막대기 안보여요? 냄새라도 맡아봐요. 샤프란 보다 고급인 향료 막대기잖아요.” 쥐의 말이 맞게도 막대를 둘러싼 기름 먹은 로프는 아름다운 하프시코드와 류트의 선율 같은 냄새를 풍겼다.
“문제는 네가 그걸 훔쳤으니까 그렇지. 쥐야. 네가 든 막대기를 봐라. 거기에 태양을 섬기는 교회의 표식이 새겨져 있으니.” 여우가 화를 내며 이빨을 드러냈다.
“훔치지 않았어요. 교회에서 요즘 안 쓰이는 물건이 요즘 중고로 팔리는 거 몰라요?”
“우리 여관은 쥐새끼들의 회색 시장 물건은 받지 않아. 헤치지 전에 돈을 내놓는 게 좋을 거다.” 여우가 앞발을 들어 할퀴는 시늉을 했다. 그때 갑자기 쥐가 스테돌프를 봤다. 그리고 쥐는 여우를 피해 달려오면서 말했다.
“당신 그 늑대 맞죠? 우리가 괴물에게 습격 당할 때 함께 있었잖아요.” 여행자 일행에 속해있던 불법 총기를 가지고 있던 그 쥐였다. 저 쥐는 스테돌프와 여행자 호위 부사관이 죽어가던 말을 조사하던 그때 스테돌프를 따라왔던 그 녀석이었다.
“당신도 봤죠. 괴물 말이에요. 그 끔찍한 괴물. 그건 정말 존재했어요.” 쥐가 말했다. 어쩌면 일행은 진짜 괴물에게 습격 당했고 형용할 수 없는 그것이 존재하는지도 몰랐다. 계단참에 있던 스테돌프는 갑자기, 다시 소름이 끼쳤다.
P.S 이야기를 구상하고 나서 비슷한 테마를 가진 Tooth and tail을 플레이 해봤는데 생각보다도 그게 많은 영향을 준 것 같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