왠만하면 하는일도 많고 바빠서 글을 안쓰려고 했는데 차이나는 클라스에서 다시 김병기 교수가 또다시 비문변조설을 들고나와서 글을 쓰게 되었습니다. 본 글을 다음과 같이 3 ~ 4 편에 걸쳐 작성하고자 합니다. 1. 김병기 교수의 비문변조설 (차이나는 클라스 43화 (1/3 방송)주장)의 문제점 (본 게시물) 2. 광개토대왕릉비의 탁본과 사코본의 문제점 (2/5 작성 예정) 3. 지금까지의 여러 학설들과 반론들 그리고 최종결론 (2/12 작성 예정) 본론으로 들어가서, 차이나는 클라스 43화 이후 또다시 광개토대왕릉비에 대한 조작설이 대두되고 있는걸 보고 이렇게 글을 작성하게 되었습니다. 김병기 교수가 도해파(渡海破)는 입공우(入貢于)의 변조라는 주장을 한지 벌써 10년이 넘었고 이에 대한 많은 반론이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아직도 이에 대한 주장을 하시는 걸 보고 한편으로는 답답하기도 하고 하고 또 한편으로는 슬프기도 하였습니다. 김병기 교수의 주장을 정리하면 다음 3 가지 근거에 따라 변조를 확신한다고 하였습니다.
1. 비문을 보면 처음에는 '속민(屬民)이었다'이라고 표기하였다가, 다음에는 '신민(臣民)으로 삼았다'라고 표기하였다. 속민이 예속정도가 더 적은 신민으로 다시 삼을 수는 없으니 이는 왜를 지칭하는 것이다. 따라서 왜가 입조하는 내용이 들어와야 한다. 2. 비문의 다른 글자들은 모두 1) 수평, 수직으로 획이 그여져 있고, 2) 정방형에 맞춰 작성되어있으나, '渡海破' 부분은 획이 수평이 맞지 않고 오른쪽이 들려있는 명조체의 흔적이 있다. 명조체는 명나라 때의 서체를 참조하여 일제시대 때 만든 서체이므로 조작한 것이 분명하다. 3. 다른 비문들은 모두 오와 열이 딱 들어맞는 반면, 渡자는 오른쪽에 몰려있고, 海자는 왼쪽에 몰려있다. 이는 入자와 貢자를 조작한 증거다. 하지만 상기 주장은 여러번 반론이 제기되어 사실상 논파완료된 주장입니다.
먼저 처음엔 속민이였다가 나중에는 신민으로 삼았다고 하는 것을 보니 신민은 왜를 지칭하는 것이라고 하였지만, 이 내용은 사실 (실제 해석이 저게 맞느냐는 별론으로 하고) 기존 번역으로도 자연스럽습니다. 김병기 교수의 속민, 신민의 뜻풀이를 그대로 인용한다고 하더라도 왜가 백제, 신라를 신민으로 삼았다고 풀이해도 번역에 문제는 없습니다. 따라서 1번 근거는 큰 의미가 없습니다. 즉, 신민으로 삼은 목적어가 왜로 볼 수도 있고, 백제신라로도 볼 수도 있다는 수준이지 백제신라를 신민으로 삼았다는 주장을 반박할 근거로 쓸 수는 없다는 뜻입니다. 굳이 의의를 두자면 (변조한 것이 맞다면) 다르게 번역할 수 있는 가능성을 제시했다 정도겠죠.
두 번째 근거는 서예적 측면에서 보았을 때 서체가 다르다는 주장입니다. 하지만 이 역시 탁본상의 글자체를 가지고 논하는 것은 큰 의미가 없습니다. 중국학자 왕건군의 연구에서도 밝혔듯이 초씨 부자가 탁본 시, 석회를 발라 탁본하기 편하게 만들었다고 하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원석탁본과는 달리 글자체에 차이가 날 수 밖에 없습니다. 2편에서 더 자세히 말씀 드리겠지만, 광개토대왕릉비의 탁본이 여러 종류가 있는데 각 탁본들을 비교해 보면 동일 글자의 글자 모양이 미묘하게 다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출처: 사라진 비문을 찾아서 (김병기 교수 著)
김병기 교수는 상기 3 개 탁본을 비롯한 여러가지 탁본을 비교관찰한 결과라고 주장하였지만, 역설적으로 김병기 교수의 책의 상기 그림만 비교해 봐도 동일 글자에 대한 형태가 탁본마다 다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김병기 교수의 주장은 渡자는 위조된 부분의 오른쪽이 올라가 있는데, 다른 글자는 수평이다라고 하였으나 탁본에 따라 그 정도가 굉장히 주관적이라 논하기 어렵습니다. 海자 역시 기울여 쓴 것이 위조의 흔적이다라고 하였으나, 渡자와 동일하게 주관이 다분하고 큰 차이를 발견할 수 없습니다. 마지막으로 破자는 石과 皮의 단차가 없는데, 수정된 부분만 단차가 있다고 하였으나, 3면 7행 6자, 32자 역시 단차가 있는 것이 확인됩니다.
따라서 이런 주관적인 점을 바탕으로 주장을 펴기에는 너무 한계가 많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세번째 근거 역시 논거가 될 수 없는 것이 사코본 자체가 본래 여러 종이를 이어붙인 물건이기 때문에 조금씩 비뚤비뚤합니다.
출처: 사코본 (쌍구가묵본)
그림을 보시면 당장 문제가 되는 渡海破자 오른쪽의 駕平道 (최근 연구에 따르면 양평도 (襄平道))를 보면 駕자 아래 平자는 왼쪽으로 치우쳐져 있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다른 곳은 다 깔끔한데 유독 渡海破 부분만 비뚤다면 또 다르겠지만 이래서는 변조의 증거로 내세울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가장 큰 근거로 문제가 되는 사코본 이전의 원석탁본에서도 渡자와 破자는 확인이 되고 있습니다. 주운태 본은 1981년에 탁본을 하였다고 알려져 있으며, 1983년에 탁본한 사코본 (쌍구가묵본) 보다 이른 원석 탁본 중 하나입니다. 당연히 사코본 보다 훨씬 신뢰도가 높으며 많은 연구를 받고 있는 탁본 중 하나이지만, 역시 여기서도 海자는 每등 다르게 읽을 여지가 있다고 치더라도 渡자와 破자는 확실하게 나타나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사코를 비롯한 일본군부가 변조를 진행하였다고 주장하기에는 무리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래도! 믿지 못하겠다고 하시는 분이 계실까봐 많이 양보해서 변조 가능성이 있다고 치고 변조되었다면 변조 전의 상태가 어떻게 될지를 살펴봅시다. 김병기 교수의 주장에 따르면 하기와 같은 변조과정을 거쳤다고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변조 전은 이렇게 되었을 것입니다. <사코본 원본> <김병기 교수 주장 원본> 상기 <김병기 교수 주장 원본>은 제가 그림판으로 대충 그려본 것입니다. 김병기 교수 스스로 '수평, 수직으로 획이 그여져 있고, 정방형에 맞춰 작성'된 비문이라고 하던 부분이 완전히 깨어지게 됩니다. 비석문을 쪼던 석공이, 또는 그 전에 글을 돌에 쓴 사람이 훗날 변조될 것을 고려하여 일부러 이부분만 한쪽에 몰아 비석을 만들었다고 주장하는게 아닌 이상, 이는 의미 없는 주장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럼 이제 이 부분을 실제로는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지를 따져봐야 하겠습니다만, 이에 대해서 논하기 전에 위에서도 말했듯이 탁본들의 비교와 특히 사코본의 문제점을 분명히 논하고 갈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논의의 근거가 되는 탁본에 대한 정확한 파악이 되어야 그를 바탕으로 논의를 진행할 수 있을 테니까요.
그럼 다음 글에서 뵙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