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정도 사실과 다른 부분도 있겠지만 이 모습이야 말로 사무라이들의 초창기 모습입니다. 당대 사무라이를 상징하는 것은 활과 말이었습니다. 칼로 대표되는 사무라이 문화는 빨라야 아즈치-모모야마 시대 그리고 보편적으로 인식된 것은 에도시대에 이르러서였습니다. 사무라이들을 유미토리(弓取り)라고도 일컬었는데 이는 원래 궁수를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각설하고 본문을 시작하기 전에 잠깐 정리하는 시간을 가져보겠습니다. 사무라이(侍. さむらい)는 한자에서 알 수 있듯이 윗사람을 모시는 즉 지금으로 말하자면 경호원의 의미였습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쓰와모노(强者/兵. つわもの)라고도 하였습니다. 쓰와모노는 힘이 센 자라는 의미였고 여기에는 무장한 사람이라는 의미도 내포되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모노노후(武士. もののふ)라고도 일컬었는데 이는 용맹한 자로 전투에 임하는 자를 일컫는 말이었습니다. 일본 고대에는 군사적 기능을 지닌 자들도 재주를 가진 자, 말하자면 예능인의 한 부류로 취급하였고, 이러한 무장한 자들은 특별한 직업군으로써 점차 그 두각을 나타냅니다.
원래 사무라이들은 난폭하기 짝이 없는 말하자면 폭력배에 가까운 존재들이었습니다. 초창기에 사무라이들은 죄책감 따윈 일절 갖지 않은 채 살인을 저지르고, 무리를 난동을 부리고 법을 어기는 존재로 묘사되었습니다. 당대의 백성들이 보았을 때 이러한 사무라이들은 두려움의 대상일 망정 존경의 대상은 아니었습니다. 백성들 사이에선 그들은 야만인이나 짐승과 다름없고 당시 사회 공동체의 구성원으로 인정할 수 없는 별종이었습니다.
이런 난폭한 사무라이들이 시대가 점점 지나면서 전투원이라는 자신들의 정체성을 확립하고 그리고 훗날 미나모토가나 다이라가처럼 가문의식 또한 분명해졌습니다. 그리고 같은 혈족끼리 같은 성을 표방하며 무사가문이 형성되고 이러한 무사가문은 대대로 세습되었습니다. 여기서의 세습은 가산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닌 전투라는 자신의 직업 또한 세습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를 통해 사무라이라는 새로운 계층이 형성되기 시작했습니다.
사무라이들은 도료(棟梁)라 일컫는 무가사회의 리더를 중심으로 단결하였고 이 도료의 통솔을 바탕으로 주종계급을 형성하였습니다. 그리고 도료에 의해 통솔되기 시작하면서 기존의 가지고 있던 모습조차 변화하기 시작했습니다. 난폭함은 용맹함으로 승화되었고, 기존 질서의 파괴자로 여겨지던 그들은 백성들에게서는 좀 오버하자면 새로운 시대의 창조자로 인식하기에 이르렀습니다. 물론 백성들은 여전히 사무라이들을 두려워하였지만 예전처럼 야만인 혹은 짐승이라고 할 정도는 아니었습니다. 이러면서 백성들의 공경과 두려움을 바탕으로 사무라이들은 점차 지방 촌란의 리더로 부각되기 시작합니다.
일본 고대 설화집인 <곤자쿠모노가타리(今昔物語集)>의 '사루가미타이지(猿神退治)'에서는 이러한 사무라이들의 변화를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 이야기는 다음과 같습니다.
「우연히 이상한 마을로 접어들게 된 한 승려가 그 마을의 한 처녀와 결혼을 하고 환속하였다. 그러나 불운하게도 그는 제사의 제물로 바쳐지는 신세가 되었다. 하지만 그는 두려워하지 않고 숨기고 간 예리한 칼로 제물을 받아먹던 원숭이들을 굴복시켰다. 마을로 돌아온 그는 무사의 복장을 갖추고 활을 손에 들었다. 그러자 마을 사람들이 모두 그에게 경의를 표현하면서 "지금부터는 당신을 신으로 받들고, 당신에게 모든 것을 맡기고, 당신의 명령에 따르겠습니다."라고 말하였다. 마을의 지도자도 무릎을 꿀고 복종을 서약하였다. 그는 곧 마을 사람들을 모아서 신사를 불태우고 마을을 다스렸다.」
여기서 주인공은 기존의 권위를 상징하는 원숭이들과 싸워 승리하고 새로운 시대의 지도자가 됩니다. 이는 사무라이와 함께 등장할 예정인 무가정권 도래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었습니다. 이 밖에도 곤자쿠모노가타리에는 원숭이신으로부터 여자를 구하는 사냥꾼의 이야기라든지, 인간을 산 채로 잡아먹는 귀신에게 칼로 맞써는 젊은 사무라이의 이야기가 소개되어 있습니다. 공통점은 이들 싸우는 자들은 모두가 용감하고 합리적이고 지혜로운 자로 묘사되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 출처 : 일본 무사도(구태훈), 엔하위키 미러, 네이버 지식백과, 구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