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이먼드 카버의 소설을 처음 읽게 된 계기는 지인의 추천 때문이었는데,
당시 군인이었던 나는 휴가 후 부대 복귀를 앞두고 역 근처의 서점에서
레이먼드 '챈들러'를 잘못 기억해서 레이먼드 '카버'의 책을 사고 말았다.
그래서 지금도 그 책을 펼치면 군대의 검열 도장이 찍혀있다.
그의 작품을 많이 접해보지는 못하였지만.. 그때 구입한 '숏컷'만큼은 되풀이해서 읽어보곤 한다.
일반적인 카버의 이야기에서는 신비하거나 놀라운 이야기가 벌어지지 않는다.
우리 주변에서 흔히 일어날 수 있는 일상적인 소재(이웃과의 대화, 버림받은 남편 등)를
주로 1인칭 시점으로 그려낸다.
이야기속에는 많은 인물들이 등장하지 않는다.
두 명 혹은 서너명.. 하지만 책을 읽다보면 발 밑이 흔들흔들 하듯이 매우 불안한 느낌이 든다.
그것은 기본적으로 등장 인물간의 소통방식에서 기인한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상대에 대한 이해를 결여하고 있으며 대화의 일관성이 없어 책을 읽는 내내 불안감이 조성된다.
'뒤에 무슨 큰 사건이 생기나?'하고 매번 긴장하기 마련이지만
결국 기대했던 큰 사건은 일어나지 않는다.
에이 뭐야.. 라고 실망한 채 책을 덮으면 꺼림직한 기분에 다시 한 번 책을 펴보게 된다.
일반적으로 책을 읽다보면
이야기의 흐름에 휩쓸려 주인공의 시점에서만 이야기를 따라가게 된다.
아무리 개성이 있는 매력적인 등장인물이라도 어디까지나
작가가 씌워둔 가면을 쓰고 연기하는 조연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카버의 소설은 다르다.
위에서 말한 그 꺼림직함 때문에 다시 반복해서 읽다보면
방금 읽었을 때와는 전혀 다른 느낌을 받을 때가 있다.
곰곰히 생각해보면 그것은 내가 다시 읽었을 때,
주인공이 아닌 다른 등장인물의 시점에서 이야기를 바라보고
역으로 주인공의 내면을 헤아려볼 수 있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싶다.
마치 1번 카메라에서 2번, 3번 카메라로 옮겨가듯이.
그의 이야기 속에서는 주인공이 아닌 인물들도 가면을 벗고 맨 얼굴을 드러낸 채 살아 움직인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소설을 몇 번이고 반복해서 읽을 수 있는 것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