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그 이야기의 존재를 알아차린 것은 지금으로부터 두어 달 전 쯤 일이었다.
나는 내가 사는 연립주택으로부터 자전거를 타고 15분 정도 걸리는(적확히는 13분이었지만) 시립도서관 기록실에서 나와 잠시 산책을 하고 있었다. 3년 전에 장편 소설을 끝낸 직후 자의적인 긴 휴가라 해야 하나 나는 펜대 굴리는 일을 잠시 멈추고 있었다. 슬슬 작품을 하나 다음 년도에 출판할 계획이 있었지만 일종의 매너리즘 탓인지 아이디어는 어항속의 내성적인 금붕어처럼 먹이가 떨어지면 수면위로 떠올랐다가 자갈투성이 바닥으로 가라앉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남은 것은 돈 몇 푼을 위한 직업적인 의식뿐, 흥미 따위는 솟아나지 않는다. 작가로서는 완전 꽝인 셈이다.
나는 돌고래 동상으로 장식된 연못 앞에 멈춰 서서 잔잔한 수면을 바라보았다. 대리석 바닥에 가라앉은 100원 짜리 동전들이 4월의 햇살과 맑은 물에 잠겨 반짝거리며 먼 옛날 잊혀진 왕국의 유물마냥 찬란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 아래 감춰진 소원들이 분수처럼 튀어오를 것 같았다. 새 운동화를 원한다던가, 집 앞 카페에서 아르바이트 하는 소녀와 데이트를 하고 싶다는 사소하고 사랑스러운 바람들 말이다. 가로등에 달린 작은 스피커에서는 90년대 팝송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아마도 가사가 연인을 위해 기다려 준다거나 기다리는 연인을 위한 노래였던 것 같다. 무언가 가슴 속에서 요동을 치고 있었다. 지느러미를 펄럭거리고 당장이라도 수면 밖으로 튀어 오를 것만 같았다.
그 순간 별안간 전화벨이 울렸다. 어째서 하필이면 그 순간에 전화가 걸려왔는지 지금의 나로서는 이해가 가지 않는다. 따지고 들자면 머피의 법칙이랄까 그 전화가 오지 않았다면 그 자리서 썩 괜찮은 도입부를 써낼 수도 있었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전화는 울리고 상황은 반전되었다. 그리고 내가 원치 않았던 나도 모르는 그 이야기는 내 일상 속으로 예고도 없이 들어왔다.
“안녕하세요. 작가님. 문학 잡지 에어리인데요. 인터뷰 요청 차 전화 드렸습니다.”
모르는 번호의 목소리는 그렇게 말했다. 젊은 여자였다. 고저 없이 딱딱한 사무적인 말투였다.
“아 네 반갑습니다.”
나는 별일도 아니라는 듯 말꼬리를 줄였다. 사실은 짐짓 놀란 상태였다. 갑자기? 뜬금없이 인터뷰를 요청하다니? 신작 소설의 비평이나 추천사라도 써달라는 건가? 여러 생각이 머리를 뒤흔들어 놓았다.
“그나저나 축하드립니다. 저도 글 참 재밌게 봤습니다. 이번 연말에 문학상을 노릴 수도 있겠는데요.”
“연말에 문학상을 수상한다니요?”
나는 놀란 기색을 못 감추고 말을 했다.
“이번에 작품 내신 거 있지 않아요?” 여직원은 의아한 말투였다. “이번에 낸 장편 소설 말이에요”
“연락을 잘못 하신 것 같습니다. 저는 이번에 소설을 낸 적이 없거든요”
“김수재 작가님 아니신가요?”
“네, 맞긴 맞는데 아마 동명이인일 겁니다.”
“그럴 리가요.” 여직원은 내 대답에 넌더리를 쳤다
“작가님이랑 동명이인인 기성문인도, 근래에 등단한 신인 작가도 없는 걸요. 게다가 책 표지 이력이 작가님 공식 이력이랑 동일해요.”
“제 생각엔 출판사의 인쇄 실수일 것 같네요.”
나는 어처구니없는 말에 머리가 지끈거려 관자놀이를 검지와 중지로 문지르면서 대답했다.
“그런가요.......? 이야기 구성방식이나 뉘앙스나 문체가 꼭 작가님과 같았는데, 출판사 쪽과 연락해보시고 혹시 나중에 인터뷰 하실 생각이 있으시면 이 번호로 연락 좀 부탁드려도 괜찮을까요?”
“네 물론입니다. 나중에 연락드릴께요.”
나는 대답하고 전화를 끊었다. 몹시 피곤했다. 나는 수면에 비친 얼굴 보았다. 진흙탕에 굴러 떨어진 호박 같은 몰골이었다. 느닷없이 내 이름으로 책이 출판되었다니 기분이 얼떨떨했다. 마치 아침에 지역신문을 펼쳤는데 부고장에 내 이름이 기재 된 것을 본 것 같은 느낌이었다. 한낱 실수라고 웃어넘기기엔 정도가 과한 감이 없잖아 있었다. 나는 마음을 진정시키려 도서관 공원에서 나와 공원 테라스 포장에 쓰이는 큰 바위 위에 걸터앉아 담배 한 대를 물었다. 이 사태를 어떻게 진정시켜야 하나 한 모금씩 필 때마다 제각각의 색깔을 가진 생각들이 프리즘의 형태를 완성시키려 머릿속을 정신없이 교차했다. 확실하게 잡아 뗄 수 있는 것이 두 가지가 있었다. 하나는 나는 명백하게 이 변고의 피해자라는 것, 두 번째는 그러나 내가 직접적으로 발을 떼고 해명하기 전까지는 이 기묘한 상황이 지속되리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어디서부터 실마리를 풀어야 타당할지는 의문이었다. 어디서 시작을 하던 간에 나의 반대편의 시야로 보자면 어딘가 맥이 빠지는 구석이 한두 가지가 있었다.
일말의 가능성들이 나를 이곳을 떠나지 못하도록 묶어두고 있었다. 잘못된 길로 들어서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고 싶진 않았다. 모호함이 직선에서 기지개를 펴고 일어나 가지를 만들고 그 것에 매달린 수천가지의 가능성들이 거미줄을 치고 있었다. 그곳에 걸린 나방처럼, 그리고 나에게 그것을 일일이 풀어내야한다는 것이 거의 불가능한 일처럼 느껴졌다.
먼저 나는 버스를 타고 시내로 나가 대형 서점으로 걸음을 옮겼다. 직원의 말이 헛소리가 아닌지 소설의 실체를 확인해야만 했다. 서점을 들어서자 안은 온갖 종류의 사람들로 북적거리고 있었다. 자기들끼리 술래잡기라도 하는 듯 뛰어다니는 아이들과 여성잡지 코너에서 전화통화를 하는 젊은 주부, 똑같은 남색 교복을 입고 몰려다니는 네다섯 명의, 똑같은 뿔테안경을 쓴 남학생 무리, 가판대에 우악스럽게 진열되어있는 자기 개발서를 홍보하는 형형색색의 간판과 둥둥 울리는 최신가요 노래에 두통이 심해져 토악질이 나올 것만 같았다.
다행이 책을 찾는 건 오래 걸리지 않았다.(그 전에 정말 그 책이 존재한다는 사실에 놀랐지만) 책은 입구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신간 섹션에 있었다. 기면증. 표지에 세로쓰기 된 그 활자 옆으로는 가로등 아래에 서있는 남자의 검고 희끄무레한 형체가 있었다. 여백과 단순한 구성이 인영사 출판물 인 것 같았다. 그리고 책을 들어 자세히 보았을 때 나의 짐작이 들어맞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저자 소개에는 여자 직원의 말마따나 나의 사진과 이력이 정확하게 기재되어 있었다. 어쩌면 그제 서야 나는 누군가가 뒤틀어 놓은 현실을 제대로 직시하기 시작한 것이지도 모른다. 거실 소파에 누워 티비를 보고 있는데 한 가운데 카펫 위로 완전한 원형의 큰 운석이 천장을 뚫고 쿵하고 내려앉은 듯 한 심정이었다. 한겨울 밤에 택시를 놓친 사람같이 오싹해져서 온 몸이 꼿꼿이 굳어져 미간부터 눈꺼풀까지 일그러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 때 누군가가 내 뒤에서 어깨를 두드렸다. 모르는 남자였다. 그는 나름 후텁지근한 여름 날씨임에도 불구하고 기세 좋게 투 버튼 식으로 된 네이비 정장 자켓에 흰 와이셔츠 체크무늬의 넥타이를 매고 있었다. 정장은 몸에 착착 맞아보였지만 맞춤 정장이나 폴 스튜어트, 헤리슨 테일러같은 유명브랜드 같아 보이진 않았다. 그는 내 이름을 말했다. 약간 능글맞으면서도 상대의 기분은 상하지 않게 하는, 도리어 퍽 좋게 만들어주는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면서 말이다.
“맞지요? 이런 곳에서 뵐 줄은 몰랐네요. 혹시나 했습니다. 작가님”
“저를 아십니까?”
나는 놀라 눈이 동그래져서 물었다.
“한 달 전에 보지 않았습니까? 저를 기억 못하시는지요?”
“미안합니다.” 나는 재깍 사과를 했다. “늘 사람을 기억하는데 시간이 오래 걸리는 경향이 있어서, 무례해보여도 늘 이런 식이니 이해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충분히 그럴 수도 있지요. 게다가 제가 보통 특징 없는 얼굴이라 다른 사람들이 기억하기 어려워하더라고요.” 그리고 다시 그는 사람 좋은 미소를 지어보였다.
나는 그의 얼굴을 자세히 쳐다보았다. 뭐랄까 꼭 집어 표현해 줄 만한 말이 떠오르지 않는다. 못생기지는 않았지만 그다지 미남은 아니었다. 얼굴에 미소를 거두면 그냥 눈 코 입이 멀쩡한 장소에 붙어 있다는 정도.
“그렇게 특징 없는 얼굴은 아니신데....... 특징 없다는 게 그다지 단점이 될 만한 것이 아니기도 하고.” 나는 예의상 그렇게 말을 이었다.
“그래도 고등학교 동창회 같은 곳에 가면 저를 단번에 기억해내는 사람이 없을 때는 좀 씁쓸하더라고요. 나름대로 서클 활동에서 부반장도 하고 이곳저곳에 많이 들이대고 많이 활발한 편이었는데도 말이죠.”
“저도 동창회가면 저를 기억 못하는 사람들로 수두룩해요. 서클에 들거나 서클 임원은 한 적이 없지만.”
“원래 2인자는 기억되지 않는 법이니까요. 1인자는 아무리 퇴색 되도 2인자가 기억을 하겠지만요.”
“여하튼 기억 못해 미안합니다.”
나는 재차 그에게 사과했다.
“괜찮습니다. 기억 못하셔도 제가 멋대로 아는 척한 입장이니 감당해야죠.”
그는 손목시계를 보았다. 그것은 아주 오랫동안 굳어져 정형화된 행동 같았다.
“아직 사무실로 돌아갈 때까지 시간이 많이 남았는데 혹시 시간 있으시면 같이 커피라도 한잔 하시겠습니까?”
우리는 서점 맞은편의 카페로 들어갔다. 그는 아메리카노에 샷을 두 개 추가했다. 진하게 마시지 않으면 사무실에서 계속 졸아서요하고 자신의 커피 취향이 이상하다 듯 너스레를 떨면서 말이다.
“작가님은 기억 안 나신다지만 저는 작가님을 아주 잘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는 빨대로 컵 안의 얼음을 달그락 달그락 섞으며 말했다.
“그래요? 저는 아무래도 기억이 나질 않습니다. 여기까지 오면서 기억해보려 애를 썼는데 오늘 너무 피곤한 탓인지 전혀 종잡을 수가 없군요.”
“네, 아까부터 기분이 안 좋아보시는 것 같았습니다. 마치 유령이라도 보신 것 마냥.”
“이름이라도 말해주시지 않겠습니까? 그래도 아마 기억해내지 못할 것 같지만 이름이라도 들으면 마음이 편해질 것 같아서요.”
“그것으로 작가님의 마음이 편해지시면 좋겠지만, 이름은 그냥 이름 자체로서 남을 뿐 아무것도 바꾸지 못한다고 생각합니다. 천문학자들이 밤하늘에 떠 있는 별들에게 이름을 붙여도 그것들은 감동하거나 움틀 거리지도 순간 초신성으로 폭발하지도 않죠. 그러니까 이름은 구분하기 위한 자의적인 수단일 뿐인 겁니다. 이름 따위가 대체 무엇을 할 수 있겠습니까? 정 작가님의 마음에 들지 않으시면 저를 그냥 처음 만난 사람으로 생각하시면 그 뿐입니다. 그렇게 하시더라도 제 존재가 사라지지도 않고 우리가 대화를 하는 데에 큰 지장이 있지 않을 테니까요.”
“그렇습니까.......” 나는 그렇게 대답했지만 그가 말하는 의도를 적확하게 알 수 없었다.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는 나라는 인간을 지독하게 싫어해 비아냥거리는 것인지도 모른다.
“어쨌거나 이렇게 만나서 정말 반갑습니다. 이번에 내신 작품에 대해 팬으로서 얘기 좀 나누고 싶었는데 그럴 틈이 나지 않아 섭섭했었거든요.”
“이번에 낸 작품을 읽어보셨습니까?”
“아무렴요. 저희 출판사에서 출간 전에 미팅도 하셨지 않습니까?”
“미팅이라니요?” 나는 잘못 들은 것 마냥 반사적으로 되물었다. 그는 조용히 고개를 까딱거렸다. “혹시 인영사에 다니세요?”
“네 맞습니다. 이제 좀 기억이 나시는 지요?”
“그건 전혀 아닙니다.” 나는 고개를 가로 저었다. “오히려 더 꼬여버린 것 같군요” 그리고 관자놀이가 다시 욱신거리기 시작했다. 어머니 말대로 두통약이라도 챙겨 다닐 걸 그랬군. 하고 멍청하게 생각을 했다.
“꼬여버렸다니 그건 무슨 말이십니까?”
“솔직히 말하자면 오늘 서점에서 제 책이 출간된 것을 보고 몹시 당황스러웠습니다.”
그는 고대 이집트 상형문자 비문에 앞에 서있는 관광객처럼 팔짱을 끼고 애매하다는 얼굴로 나를 쳐다보았다.
“이미 저희 쪽과 이야기가 된 일이지 않습니까? 혹시 초판 인쇄물에 무슨 문제라도 있었나요?”
“아뇨 아직 책을 읽어보지도 못했습니다. 바보 같은 소리로 들릴지도 모르지만, 그건 제가 쓴 글이 아니거든요.”
“그러면........” 그는 말꼬리를 길게 늘이면서 골몰했다. “대필 작가나 표절 같은 것을 말씀하시는 건가요?”
“글쎄요. 그런 건 아닌데 뭐라고 말해야하나 저도 곤란합니다. 제 입장에서는 그것이 갑자기 나타났다고 해야 하나, 그동안 글을 퇴고 한 적도, 더군다나 그런 제목의 이야기를 쓴 적도 없으니까.”
“당최 무슨 소리신지 통 이해가 가질 않는군요. 분명 작가님은 저희 출판사에 원고를 투고하셨었습니다.” 그는 눈을 가느다랗게 뜨고 나를 보이지 않는 긴 줄자로 재듯이 잠시 쳐다보고선 내게 물어보았다. “혹시 드시고 계신 약이나 욕실에서 미끄러져 머리를 부딪치신 적이 있다거나 사고는 없으셨습니까?”
“뭐라고요? 아니요 아뇨. 절대 아닙니다.” 난 그의 말에 손사래를 쳤다. “저는 건강한 편이라고 생각합니다. 사고도 없었고 먹고 있는 약도 없고요.”
“그러니까 단기기억상실 같은 건 아니겠네요.”
“네 백퍼센트 확신할 수는 없겠지만 그럴 겁니다.”
“하지만 저는 한 달 전 저는 회의실에서 작가님을 봤는걸요. 아니라고 단호하게 말을 하시니까 확신은 할 수 없지만, 그 사람은 모 난 구석 없이 적확하게 작가님이었습니다. 목소리도 지금 옷을 입으신 스타일도 무척이나 들어맞았습니다. 그래서 서점에서 작가님을 아는 체 한 거였고요.”
“본인이라 착각할 수밖에 없을 만큼 완벽한 동일인이었다?”
“그런데 난데없이 자신이 아니라고 말하시니 저로서는 달리 할 말이 없군요.”
그 말을 끝으로 우리는 아무 말 없이 얌전히 있었다. 더 이야기를 해봤자 의미 없이 길어질 테고 평행선을 달릴 것이 분명했다. 나를 모르는 나와 나를 아는 남자. 그리고 이 기묘한 상황을 일일이 설명하기에는 나는 너무 지쳐있었다.
“일단 문제가 뭔지 정확하게 파악되기 전까지는 저희 둘만 알기로 하는 건 어떻겠습니까? 세간에 밝히기에는 시기상조이기도 한 것 같으니”
“하지만 나는 당신의 이름도 모르지 않습니까?”
“말했다시피 이름이야 아나 마나겠죠. 대신 사무실 전화번호를 하나 적어드리겠습니다. 추후에 문제가 생기시면 언제든지 연락주세요.”
그리고 능숙하게 티슈 한 장을 꺼내 앞주머니에 꽂힌 만년필로 자신의 번호를 적어 내려갔다. 이런 일을 많이 해 본 것 마냥 망설임도 없이. 퇴근 후에 재즈바 같은 술집에 자주 다니는 사람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아마 마음에 드는 여자에게 그 특유의 사람 좋은 미소로 대화를 섞다 이런 식으로 번호를 넘겨주었을 것이다.
우리는 다시 밖으로 나왔다. 햇살은 아까 전보다 강렬하게 내리쬐고 있었다. 나는 그가 걸치고 있는 정장 재킷이 슬슬 거슬리기 시작했다. 이 날씨에 정말 덥지 않은가? 설마 옆구리에 외투를 낀 채로 와이셔츠 바람에 헐렁거리는 모습을 직장 상사와 들킬까봐 인가하고.
“소설에 대해 이것저것 묻고 싶었는데 참 아쉽게 됐군요. 대놓고 말하기 부끄럽지만 작가님의 첫 작품부터 제 책장에 바지런히 꽂혀있습니다. 나름 작가님의 광팬이거든요.”
“참 부끄럽습니다. 제가 그럴만한 인물이 아닌데....... 그냥 그럭저럭 글로 벌어먹는 사람일 뿐입니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닙니다.”
나는 민망해져 겸손을 떨었다.
“혹시 이번에 나온 책은 읽어보셨습니까?”
“아니요. 다시 서점에 들려 읽어봐야죠.”
“마침 저한테 그 책이 있는데 드려도 괜찮을까요?”
그는 갈색 서류 가방에서 새 책을 꺼내 내게 건네주었다.
“괜찮습니다. 서점이 바로 앞에 있기도 하고.”
“받으세요. 팬으로서 조그만 배려입니다. 더군다나 작가님이 쓰신 글이 아니라고 하시니 책장에 놓기에 맥이 빠지기도 하고요. 나중에 정말 작가님의 작품이라 생각이 드신다면 저희 사무실로 오셔서 돌려주세요.”
“제가 한 말들을 믿으시는 겁니까?”
“글쎄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제 머릿속에는 아직도 두 사람이 싸우고 있거든요. 그 글을 쓴 사람과 제 앞에 바로 서 있는 사람. 어떤 것이 허상이라고 칼같이 결정을 내릴 수가 없습니다. 어쩌면 정답이란 건 없을지도 모릅니다. 두 사람 모두 실재하는 것인지도 모르죠.”
“그러나 저는 오직 나밖에 없다는 것을 알고 있어요.”
“그렇게 믿을 수밖에 달리 할 게 없어서가 아닐까요?”
남자는 시니컬하게 대답을 하고 죄송하지만 담배 한 대를 펴도 괜찮겠습니까하고 내게 양해를 구했다. 나는 그래도 좋다고 대답했다. 그리고 그가 안주머니에서 라이터를 꺼내 천천히 담뱃불을 붙이는 것을 기다렸다.
“그런데 일생동안 자신과 비슷하게 생긴 사람을 만난 적이 정말 없다고 장담하십니까?”
나는 그의 물음에 고개를 저었고 그 대답이 나오기를 기다렸다는 듯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남자는 말을 이었다.
“저는 그런 적이 많았거든요. 얼굴이 특징 없이 생겨서 유독 그런 건지도 모르겠지만. 그런 일이 주위에서도 들리고 제 생활 주변에서도 잦으니 그러려니 대강 넘겨버릴 때가 많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기억하고 싶지 않지만 침대에 누워 잠이 오지 않으면 문득 기억나는 일이 하나 있어요.”
“그건 뭐죠?”
“말했다시피 저는 고등학교 서클 부회장이었습니다. 그게 표면상으로는 배드민턴 서클이었지만 사실 어디 대회를 나간다느니 어느 동네로 훈련을 간다느니 핑계로 여자애들과 수업을 빠지고 데이트를 했었죠. 고등학교 2학년 때인가 했었는데, 어디 자랑할 만한 이야기는 아니지만 당시에는 꽤 즐거웠어요. 학교 수업이야 입시준비로 똑같은 수업만 나가거나 자습이나 하니 배울 것도 없고 지루하기 짝이 없었으니까요.”
남자는 잠시 말을 멈추고 담배 한 모금을 했고 다시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첫 여자 친구를 사귄 것도 그쯤이었어요. 저보다 1년 후배였는데 신입생 대면식이 끝나고 여기저기 서클 홍보를 하다 마음에 들어서 집요하게 우리 쪽에 가입해 달라고 늘어졌었죠. 그다지 미인은 아니었어요. 껴안으면 푹 들어오는 작은 체구에 얼굴은 웃을 때 보조개가 예쁘고 강아지 같이 귀여운 상이라는 정도.”
나는 그의 이야기를 더 듣고 싶어 잠자코 고개를 끄덕였다.
“사귄지 4개월 쯤 됐을 때였을 겁니다. 그때는 지금처럼 8월 중순이었고 뉴스에서는 언제나 그렇듯이, 뭐 그런 거 있지 않습니까? 괜히 사람들을 불안하게 하려고 쓰는 말. 24년 만에 최악의 폭염이 라던가? 줄 곧 지구가 빙하기였던 것 마냥 말이에요. 어쨌거나 날은 무덥고 때마침 방학이고 하니 우리는 친구네 커플과 해변으로 피서를 갔었어요. 바다에서 물장구치는 건 핑계고 집에서 아버지 몰래 훔쳐 나온 술이나 마시는 게 목적이었지만 낮에는 수영을 하다가 저녁 즈음엔 근처 편의점에서 싸구려 폭죽을 사서 폭죽놀이를 하고 숙소에서 술을 마시려고 했죠. 물론 지금처럼 술에 약하다는 걸 알았다면 그런 계획은 세우지 않았을 겁니다.”
“그랬군요.”
“아마 소주를 반병 정도 마시고 필름이 끊겼을 거예요. 눈을 떠보니 거실이었어요. 새벽이었고 속은 울렁거리고 머리는 시큰거렸죠. 그리고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상황을 파악하려 했는데 바로 눈 앞에 앉아서 흔들거리는 실루엣이 있었어요. 별안간 귀신인가 싶어 뚫어져라 응시를 했는데 역시나 귀신은 아니었죠. 그 형체는....... 여자 친구였어요. 그런데 더 이상한 건 알몸에 심지어 브레지어도 하지 않은 채로 제 친구의 위에 올라타 있었어요.”
남자는 헛기침을 한번 하고 몇 분 동안 말을 하지 않았다. 나는 그가 더 이야기를 해주길 기다리며 그의 얼굴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어느새 사람 좋은 웃음은 사라진 채, 그의 얼굴은 짙은 그늘이 드리워져 있었다. 엉뚱하게도 나는 그 모습을 보면서 이제야 얼굴에 개성이 생겼군 하고 실없는 감상을 했다.
“남이 섹스를 하는 걸 직접적으로 본 건 그게 처음이자 아마 마지막일 겁니다. 여자 친구는 입술을 다물고 터져 나오는 신음을 삼키면서 두 손은 친구의 어깨를 잡은 채 허리를 위 아래로 흔들었죠. 서투르지만 아주 능숙하게 친구의 빳빳하게 굳은 페니스가 음부에서 실수로 빠져나오면 더듬더듬 손으로 잡아 다시 자신의 안으로 넣으면서 말이에요. 지독한 땀 냄새와 숨소리, 봉긋 솟은 새하얀 젖가슴을 보면서 저는 아무 것도 하지 못했습니다. 술기운이 가시지 않아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가 없었거든요.”
“그래서 어떻게 됐습니까?”
“다음 날 일어나보니 여자 친구는 제 옆에서 곤히 자고 있었어요.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목이 타 부엌으로 가 수돗물을 받아 마시며 개꿈을 꿨나 싶었습니다. 시계를 보니 아직 기차 시간까지 마냥 깨어있긴 이르고 다시 누워있던 자리로 돌아가서 자고 있는 여자 친구를 껴안았어요. 그런데 등을 더듬거려보니 브레지어 끈이 없더군요....... 그리고선 깨달았습니다. 간밤에 본 게 환상이 아니었구나. 하지만 그걸 안 뒤에도 여자 친구에게 이 이야기를 꺼내 따지거나 화를 내지 않았습니다.”
“왜 그랬죠?” 나는 당시의 그의 태도가 납득이 가지 않아 물어보았다.
“같이 놀러온 친구와 저와 참 비슷하게 생겼었거든요. 키도 그쪽이 조금 크긴 했지만 별 차이가 나지 않는 정도고. 같이 다니면 둘이 형제라거나 쌍둥이라는 소리를 주위에서 많이 들을 정도였죠. 아무래도 여자 친구가 저로 착각을 한 것 같았습니다. 거기다 날은 어두웠고 누가 누구인지 저였을지라도 잘 분간할 수 없었을 겁니다.”
“하지만 여자 친구 분이 알고서 한 걸 수도 있지 않을까요? 그리고 같이 하다가 당신이 아니라는 것을 눈치 챘을 수도?”
그는 그러나 나의 말에 고개를 저었다.
“그럴 수도 있었겠지만, 저는 차마 물어볼 수가 없었습니다. 왠지 이렇게 대답할까봐 두려웠거든요. 나는 그 밤에 너인 줄 알고 있었어. 둘이 너무 똑 닮았잖아하고. 그 사건이 일어난 후 한 달 뒤에 우리는 보기 좋게 깨졌지만 그녀의 말이 진실이라면 여자 친구는 다른 남자와 관계를 했다는 자책에 시달렸을 테고 굳이 그 일을 추궁한 저도 마음이 편하지 못했을 겁니다. 그리고 나를 사랑하는 사람조차 내가 누구인지 세상 사람들 중에서 분간할 수 없다는 것을 누가 알고 싶어 할까요?”
남자는 그렇게 말하고 자조적인 웃음을 지으며 담배를 마저 피우고 꽁초를 구두 뒤꿈치로 비벼 껐다.
“미안합니다. 이야기가 길어졌군요.” 그는 다시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아닙니다. 지금 딱히 서두른다고 해결될 일도 아니고 얘기 잘 들었습니다.”
하고 나는 말하고 그와 헤어지기 전 뜻밖에 하는 생각에 그를 다시 불러 세웠다.
“혹시 전에 만났던 저는 어땠습니까? 지금의 저와 정말 아예 판박이던가요?”
“네 그랬던 것 같습니다.” 그렇게 그는 말꼬리를 흐리고선 미간을 찌푸려 허공을 응시했다. 셔츠에 묻은 작은 얼룩을 응시하는 것처럼.
“생각해보니 이상한 점이 있었군요.”
“뭡니까?”
“늦봄 날씨인데다가 폴로 티셔츠 하나만 입으셨는데 땀을 지독하게 많이 흘리시더군요.”
“땀이요?”
“네 세상에 그렇게 땀을 흘리는 사람은 처음 봤습니다. 이러다가 아이스크림같이 녹아내리는 거 아닌가 걱정이 들 정도로 말입니다. 악수를 잠깐 했었는데 손바닥에도 땀이 흥건했습니다. 근데 더 기묘한 것은 그 땀의 느낌이었습니다. 땀 특유의 끈적이고 찝찝한 느낌이 없었죠. 악수를 하고 나서 저도 모르게 소름이 끼쳤는데 그 느낌은 뭐랄까......”
그는 말꼬리를 줄이고 골몰했다. 적당한 단어가 떠오르지 않는 모양이었다.
“마치 얼음물 같았습니다.”
“이상하군요. 얼음물 같았다니.”
“그밖에 다른 건 달리 생각이 나질 않는 군요. 이상하다고 콕 집어 말할만한 것은. 미안합니다. 딱히 도움이 되지 못한 것 같아서.”
“아닙니다. 말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나중에 이 일이 무마되고 나면 같이 저녁이라도 드시죠.”
나는 인사치레 으레 그러듯이 작별인사를 했다.
“네, 안녕히. 야근이 잦은 일이라 가능할지는 모르겠지만요.”
“아하”
그리고 남자는 그 말을 마지막으로 2000년대 발라드 뮤직비디오의 마지막 장면같이 횡단보도를 건너 빌딩과 인파 속으로 사라졌다.
일주일 뒤에 나는 레스토랑에서 친한 지인에게 소개 받은 여자아이와 만났다. 실은 이번이 첫 만남은 아니었다. 우리는 그 전에 두 세 번 같이 밥을 먹었고 한번정도 영화를 같이 보았다. 늘 모든 남녀들이 사회의 암묵적인 규칙이라도 있는 마냥 따라 서로를 만나면 그러듯이 로맨틱 코미디 영화였다. 비록 그런 장르의 영화를 좋아하는 타입은 아니지만 유독 그 달에만 손에 꼽을 만한 작품이 없었다. 언젠가 보려고 점 찍어두었던 영화는 스크린에 내려가 있거나 상영하는 타임이 뜸해져 너무 이르거나 너무 늦은 시간대였다. 결국 나는 전혀 볼 생각이 없던 영화들 사이에 서서 긴 시간동안 절망적인 고민을 해야만 했다. 그러니까 바닥에서 그리고 심연으로 점점 가라앉는 일종의 카프카식 연옥에 갇힌 셈이다.
영화를 보면서 계속해서 나는 졸았다. 진자운동같이 주기적으로 고개를 꾸벅꾸벅하며 졸다가 뒷목을 지탱하는 팽팽하고 가느다란 실이 끊어져 땅바닥에 볼 쌍 사나운 몰골로 내팽겨지기 직전에 깨어나 두 눈을 꿈뻑꿈뻑 거렸다. 그리고 스킵된 장면들 사이를 헤매다가 마침내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고 나서야 우리는 해방될 수 있었다. 긴긴 암흑 속에서의 속박을 풀고 투덜투덜 대며 터덜터덜 걸어가 터널 끝의 빛을 본 죄수처럼.
그러나 아이러니컬하게도 영화를 보고난 후 우리는 서로에 대해 이야기할 거리가 정말 많아졌다. 그녀도 이런 영화는 질색이었던 것이다. 어린 여자아이들이 삼삼오오 모여 재수 없는 다른 여자아이를 몰래 욕하듯이 우리는 아이스크림 가게에서 아이스크림 한 컵을 전투적으로 퍼먹으면서 방금 본 영화에 대해 악담을 했고 예전에 감명 깊게 보았던 영화에 대해 열렬히 찬양했다. 그녀는 스릴러 영화를 좋아한다고 말했다. 쿠엔틴 타란티노의 저수지의 개들이나 크리스토퍼 놀란의 메멘토 같은 작품들. 이십대 중반이라는 나이에 입 밖으로 나올만한 작품은 아니었지만 나는 그 점이 매우 기뻤다. 나도 그녀의 취향에 얼추 들어맞았던 것이다.
우리는 식당에 들어와 창가 쪽에 자리를 잡았다. 그녀는 몇 분 동안 유심히 메뉴판을 이곳저곳을 넘기면서 훑어보더니 볼로냐 스파게티를 주문했고 나는 마르게리타 피자에 맥주를 한 병을 시켰다.
“안색이 안 좋아 보여요.”
그녀는 그렇게 첫 운을 떼었다. 맥주와 함께 나온 국수튀김을 토끼처럼 오독오독 씹으면서.
“아 그럴만한 일이 있어서, 아무래도 함정에 빠진 듯한 느낌이거든......”
“함정이요?”
“그러게 내 까짓게 무슨 인물이라고. 어디서부터 이야기하면 좋을지 모르겠군. 혹시 도플갱어 같은 걸 믿어?”
“믿어요.”
뜬금없는 질문에 그녀는 찰나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
“왜지?”
“그런 거라도 없다고 생각하면 세상이 너무 따분해지거든요. 친구들은 나이 먹어서 아직도 그런 걸 믿냐고 놀리겠지만, 전 믿고 싶어요. 도플갱어.”
“그러면 도플갱어와 마주치면 죽는 다는 것도 믿나?”
“디테일한 거는 글쎄요? 그냥 존재 자체만 믿는 거라. 그런데 그 말은 마주친다고 해서 어느 쪽이 죽는다는 거에요? 진짜 아니면 가짜?”
“잘 모르겠는데 거기까지는 생각해 본 적이 없어서. 아마도 죽는 쪽이 진짜가 아닐까? 그런 괴담은 진짜를 겁주기 위해 만든 거니까 말이야”
“당신은 그러면 그 이야기가 겁나나요? 아니면 도플갱어와 마주칠까봐 조심하고 다닌다거나?”
“전혀 그러진 않지. 도플갱어가 있다는 건 어린애들 놀리려는 장난쯤으로 생각하고 있으니까. 오히려 내 입장은 제발 마주쳤으면 하는 심정이야. 어디서 태어나고 살고 있는지 직장은 어딜 다니고 있는지, 대체 왜 이런 일을 꾸며 사람을 곤란하게 만든 건지 궁금하니까.”
“그럼 당신이 가짜겠네요. 도플갱어를 만나는 걸 두려워하지 않으니까”
“그럴 수도.”
“참 로맨틱하네요. 내가 도플갱어와 데이트를 하고 있다니.”
그녀는 장난스럽게 나를 놀리고선 내 맥주잔을 자기편으로 끌어 한 모금 마시고 제자리로 다시 돌려놓았다.
“뜬금없지만 이번에 내가 낸 소설 읽어봤어?”
“아니요. 나왔다는 소식을 엊그제인가 들었는데 언젠가 읽어보려고 하던 참이었어요. 요즘 졸업 논문만 준비해도 밤을 꼴딱 새는 실정이라.”
“아냐 굳이 나 때문에 읽는 거라면 읽지 않아도 돼. 그 책 사실 내가 쓴 게 아니거든.”
“흐음?”
그녀는 탁자에서 떨어진 컵을 쳐다보는 고양이같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때 마침 종업원이 와서 음식을 내왔다. 나는 그가 테이블을 떠나기 전에 맥주잔 하나를 더 달라고 부탁했지만 그녀는 괜찮다며 손사래를 쳤다.
“당신이 쓴 게 아니라면 누가 쓴 건가요?”
그녀가 내게 물었다.
“나야 모르지”
나는 대답했다.
“문필업계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지만 그게 가능한 일이에요?”
“나도 그래서 당황스러워. 가능하지 않은 일이 가능해져서. 난 그저 도서관에서 산책이나 하던 중이었는데 말이야. 그 소설이 뿅 하고 나타났어. 마치 신이 태초에 빛이 있으라 하고 말했듯이. 그리고 나와 똑같이 생긴 그 사람도.”
“도플갱어요?” 그녀는 나의 말을 되물었다. “그 사람을 만났어요?” 그녀의 눈동자는 반짝거리고 있었다.
“아니야. 좀 복잡해. 그 사람과 만났다는 사람을 만났지. 나와 똑 닮았다는 군. 하나도 틀림이 없이. 단지 이상한 점이라면 땀을 많이 흘렸대. 땀은 너무 차가워 얼음장 같았고.”
“기묘하네요.”
“아주 기묘하지.”
나는 그녀의 말을 따라했다.
“그 책은 읽어봤어요?”
“물론”
“내용이 어땠어요?”
“결론은 누구라도 내가 쓴 거라고 착각할 만큼 치밀하게 썼더라고. 기면증에 걸려 문득 잠이 들어서 죽여야 할 여자를 놓쳐 그 여자를 쫒는 살인마의 이야기야 내용을 제외하면 그간 써온 내 방식과 똑같아. 누군가 우리 집 천장에 구멍을 뚫고 내 방을 몰래 엿보고 있었던 건가하고 바보 같은 의심이 들 정도로.”
그렇게 말을 끝내고 나는 목이 타 맥주 한 모금을 마셨다. 그녀는 그런 나를 바라보다가 걸치고 있던 얇은 가디건을 옆 의자에 개어 놓았다. 안에 입은 옷은 반팔 꽃무늬 원피스였다. 그녀의 새하얀 팔이 드러나 조명에 비춰져 반들거렸다.
“그래서?” 그녀가 말했다.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하나요? 그 소설을?”
“그럭저럭 나쁘지 않은 편이야. 잘하면 이번 작품으로 문학상을 수상할지도 모른다고 말이 나오기도 하고”
“그러면 오히려 잘된 일 아닌가요?”
“잘됐다니?”
“이 소설이 나와서 명성에 흠집이 갔다거나 누구를 해친 것도 아니잖아요? 굳이 꼽자면 당신의 마음이 불편하다는 거 그게 다겠죠. 되레 이 작품의 존재로 인해 당신이 얻을 수 있는 것이 많지 않을까요? 당신이 잠자코 입만 잘 다물고 있으면?”
“그럴지도 몰라.”
나는 그녀의 말에 약간 수긍했다.
“하지만 이것은 나한테 이득인가 아닌가로 하나로 가타부타할 문제는 아닌 것 같아.”
“그렇지만 이 일은 온전히 당신 거잖아요.”
그녀는 냉정하게 딱 잡아떼며 말했다.
“그럴 수도 있었겠지. 하지만 이 글이 출판이 되고 이미 많은 사람들에게 읽혀졌어. 판매부수가 벌써 얼마나 되는 건지 잘 모르겠지만 지금도 누군가 서점에서 사고 있을지도 몰라. 그러니 이미 진작부터 이 사건은 내가 감당할 수 있는 한계를 넘어선 거야. 내 개인의 문제에서 이 나라 전체의 문제로 나아가 세상을 휩쓸 지도 모르지.”
나는 그렇게 잠시 말을 멈추고 남은 맥주를 마저 마시고선 말했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 이야기의 진의에 대해서는 정작 관심이 없을지도 몰라. 패스트푸드점에서 아르바이트 하는 아이들이 손은 제대로 씻고 버거를 조립하는 건지 소고기의 원산지는 어떤지 누가 직접적으로 일러주기 전까지는 아무 생각 없이 입에 우겨넣어버리는 것처럼. 그래서 난 두려워. 사람들이 삼킨 이 영문도 모르게 생겨난 이 존재가 무슨 진의를 가지고 있는 건지, 또 어떤 방식으로 세계를 분열시킬지 지금의 나로서는 하나도 알 수 없어 미치겠단 말이야.”
말을 끝내자 그녀는 놀란 토끼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만나는 동안 내가 흥분하는 모습을 그녀에게 전혀 비춘 적이 없었다. 모든 것들의 본색은 때가 되면 들통이 나게 되어 있다. 그것을 명백하게 잘 알고는 있었지만 나는 그녀에게 이런 모습까지 보여줄 계획은 없었다. 어쩌면 오늘 만남을 끝으로 거리에서 얼굴도 마주치지 않을 사이가 될 수도 있고, 아직은, 지금은 너무나도 적절한 타이밍이 아니었다.
“그냥 열 내지 말고 마음을 편히 먹는 게 어때요?” 그녀가 말했다. “주사위는 이미 던져졌고 우리는 지켜볼 수밖에 없으니.”
“그래 내가 너무 걱정하는 건지도 모르지.”
나는 힘이 다 빠져서 의자에 축 기대었다. 그냥 사소한 장난일지도 모른다. 도리어 내가 과민 반응하여 완전무결한 형체를 뭉개고 해체시키는 것은 아닌지? 어쨌거나 이 이야기는 내 것이 되었고 그럼으로 존재의 이유는 그저 존재하기 때문으로 충분한 것일지도 모른다. 우리가 이곳에 모여 있는 것도 특별한 이유가 없는 것처럼.
“다음에 볼 때 공원에서 산책 하는 게 어때?”
나는 뜬금없이 그녀에게 이렇게 물어보았다.
“좋아요. 도플갱어와 만나는 건 언제나 환영이거든요.”
그녀는 그렇게 말하고 속없는 미소를 지어보였다.
온 세상이 광대에 놀아나고 있다. 나는 아직도 어떻게 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다. 어쩌면 그녀의 말이 전적으로 맞는지도 모른다. 별다른 변고 없이 차차 시간이 지나게 되면 자연스럽게 해소될지도 모른다. 모든 이름 없는 책들의 말로처럼 도서관에 비치된 책장 잘 보이지 않는 구석에 진열되어 전봇대에 묶여있는 눈에 젖은 강아지같이 처량한 꼴로 먼지만 켜켜이 쌓여간다. 그러다 눈썰미 좋은 사람에게 우연히 발견될지도 모르지. 옆에 있는 동행에게 이렇게 물어보면서. 이 책은 처음 보네, 혹시 읽어본 적 있어? 라고. 몰라, 동행은 시큰둥하게 대답한다. 그런 낡은 책 알게 뭐야 고대 로마 아치에 대한 자료나 찾으러 가자고.
그러나 설사 그런다한들 나는 이 이야기가 사라질 때까지 언제까지나 해명하고 거짓말을 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나는 그들에게 무어라고 말을 해줘야 할지 모르겠다. 생방송으로 진행되는 모닝 토크쇼에 나가 6시부터 커피 3잔을 마시고도 잠이 깨지 않아 두들겨 맞은 얼굴을 한 내게 토크쇼 진행자가 묻는다. 이 이야기를 쓰시게 된 계기가 무엇인가요? 그러면 나는 뭐라고 말해야 될까?
“그냥 세탁소에서 코트를 찾아오는 길에 번뜩 생각이 났습니다.”
이렇게 어이없는 말을 해서는 안 될 것 아닌가? 나름 웅장하게 꾸며낸 담시고 아는 지인의 장례식을 들먹이면서 이 글은 아무개에게 바치는 이야기였습니다. 하고 말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그리고 그의 유족들의 전화라도 오는 날에는 뭐라고 또 거짓말을 해야 할까? 우리 아이와 그토록 가까운 줄은 몰랐습니다하고 울먹거리는 누구의 어머니 앞에서?
그로부터 한 달이 지난 초가을쯤의 일이었다. 나는 그즈음 그 이야기의 진원지를 찾는다는 것에 대해 거의 자포자기한 상태였는데 여전히 나와 똑 닮은 그 사람을 찾을 수 없었고 넌지시 주변인들에게 물어봐도 농담어린 헛소리로 치부해버리기 일쑤였다.
나는 그리하여 결국 에어리 쪽의 인터뷰를 고사하다가 승낙할 수밖에 없었다. 별 생각 없이 뜬소리 몇 개만 하고 곧장 집에 돌아올 생각이었다.
약속된 시간보다 이르게 전철에서 내려서 곧장 올라가기 귀찮기도 하고 혼자 우두커니 기다리는 것이 싫어 나는 역 나무벤치에 앉아있었다. 다시 글을 쓸 수나 있을지. 그런 비관적인 생각을 하면서 전철이 오고 갈 때 마다 사람들이 우르르 내리고 우르르 타는 것을 멍하니 구경했다.
3번째 전철이 도착하기 한참 전 내 건너에는 중년의 여자와 그 여자의 아들로 보이는 샛노란 유치원생복을 입은 남자아이가 있었다. 둥글게 챙이 된 옷과 똑같이 노란 모자를 다시 쓰기 귀찮은지 끈을 목에 걸고 엄마의 관심을 끌려는 듯 병아리가 그려진 이름표를 지하철 선로 쪽에 던졌다 우다다 뛰어가서 주워오고를 정신없이 반복했다. 그러나 여자는 단 한 번도 아이에게 곁눈질조차 주지 않았다. 뚱한 얼굴을 하고서 핸드폰만 들여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이런 일이 늘 상 있었던 일이라는 듯, 그리고 그런 애 엄마와 관심을 갈구하는 아이는 늘 상 보던 보았기 때문에 나는 한번 슥 쳐다보고서 다시 전철이 언제 오는지 천장에 매달린 안내판을 살펴보고 있었다. 그러나 얼마 있지 않아 아이의 칭얼거림이 내 귀를 거슬리기 시작했다.
“엄마, 내 꺼가....... 저어기 떨어졌어.”
아이는 선로 쪽을 가르킨 채, 마치 자신이 절도같이 정말 극악무도한 범죄를 저지른 것처럼 처연하게 말했다. 아무래도 이름표를 가지고 놀다가 떨어트린 모양이었다.
“됐어, 그냥 내버려 둬”
중년 여자는 냉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여전히 아이에게 눈길을 주지 않으면서 말이다.
“이름표가 없음 선생님한테 혼나는데........”
하고 아이는 우물쭈물 거렸다.
“새거 하나 만들어 달라고 하자꾸나. 얼마 하지도 않으니까.”
하고 중년 여자는 적당히 애를 타일렀다. 그러나 아이는 맘에 들지 않는 듯 말을 멈추지 않았다.
“누가 주워가면 어떡해?”
아이가 물었다.
“네 걸 주워갈 사람은 없어.”
엄마는 아이의 말을 단박에 끊었다.
“무서운 아저씨가 가져가”
“무서운 아저씨 여기 없어.”
아이가 고집스럽게 투정하는 데도 불구하고 애 엄마는 한 번도 지지 않고 아이의 말을 되받아 치고 있었다. 그래도, 그래도 하고 남자아이는 웅얼거렸다.
“내 이름표 붙이고 나쁜 짓 하면 어떡해”
“그만해. 저기까지 네 이름표 주워 갈 사람 없다니까 또 말하면 혼낼 거야.”
애 엄마는 이미 대화에 지친 듯 입술을 깨물고 아이에게 톡 쏘아붙였다. 아이의 표정은 억울함과 불만으로 가득했다. 하지만 더 이상 엄마의 말에 토를 달지 않았다. 어떻게든 이름표를 줍고 싶어도 엄마한테 혼은 나기 싫은 모양이었다. 풀이 죽어 다시 선로로 가 떨어져 있는 자신의 이름표를 쳐다볼 뿐이었다.
나는 거기까지 둘의 대화가 끝났을 때 중년 여자의 정수리를 한 대 쥐어박고 싶었다. 왜냐하면 그녀는 매일 아이 뒤치다꺼리를 하느라 피곤하고 그런 보통 엄마들과 별반 다르지 않았지만, 오히려 혼이 나야 될 쪽은 남자아이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는 애 엄마 쪽이었으니까. 나는 아이의 등을 쳐다보았다. 왠지 아이의 몸집은 아까보다 조금 줄어들어 보였다.
그러던 순간 아이는 무언가 결심한 듯 타일 끝에 털썩 걸터앉더니 재빠르게 선로 아래로 뛰어내렸다. 아이의 동작은 무척이나 기민했다. 내 앞에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명확하게 파악하고 내가 어떤 반응을 해야 옳을지 정리하기에 전등이 깜빡일 만큼의 찰나였지만 자리에서 일어나 까진 시간이 꽤나 걸렸다.
나는 곧장 선로 쪽으로 달려갔다. 지하철이 도착하기 전까지 약 3분밖에 시간이 남아 있지 않았다. 나는 선로 구석 이름표를 두 손으로 꼭 쥐고 있는 남자아이를 보고 선로 아래로 내려와 양팔로 아이를 껴안아 다시 위쪽으로 들어올렸다. 이미 위에는 사람들이 꽤나 몰려있었다. 머리가 약간 까져있는 40대 아저씨가 아이를 들자 받아주었다. 남자아이의 엄마도 있었지만 어떡해 어떡해하며 발만 동동 구르고 있을 뿐이었다. 물론 플랫폼 위에서 나를 쳐다보고 있는 사람들도 애 엄마와 똑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아이를 올리고 마침내 나도 곧 이어 그 아저씨에게 손을 잡고 끌려 나올 수 있었다.
위로 올라 왔을 때 엄마는 남자아이의 엉덩이를 찰싹 때리며 다그쳤고 아이는 울음을 터트리고 있었다. 이름표를 오른손에 꽉 쥔 채로. 아마도 자신이 무얼 잘못한 건지 전혀 모르는 모양이었다. 단지 누군가 달려와 다급하게 자신을 구했고 사람들이 당황한 얼굴을 하고서 모여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그런 상황에 겁을 먹은 것 같았다. 아이의 엄마는 내게 감사하다고 말은 했지만 아이를 혼내느라 스쳐가듯이 말을 해 내가 말을 제대로 들은 건지 알 수 없었다. 나를 도와준 아저씨만이 내 어깨를 살짝 토닥여주며 고생했다고 은근히 칭찬하였다.
그러나 나는 이 난리 통에 치하해야 될 사람은 남자아이라고 생각했다. 그걸 찾으러 그 높은 곳에 뛰어내린 건 참 용감했다고 그렇게 말하며 다독여주고 싶었다. 하지만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냥 우는 아이를 쳐다보았다. 이 상황에 이런 말을 해줘도 될지 혹은 또 나의 격려를 듣고 또 이런 위험천만한 일을 작당할지 걱정이 되었던 것이다. 거기다가 지하철이 곧 다가오고 있었다. 이 세계는 일일이 말을 한마디 할 틈도 주지 않는다.
소동이 끝나고 모두가 전철로 올라타고 내리자 플랫폼에는 또다시 나 혼자 남아있게 되었다. 모두가 비어버린 공간엔 한기만이 맴돌았다. 나는 내가 이름표를 달고 살았을 때를 회상해보았다. 마지막이 고등학교 무렵이었으니 거의 10년도 되지 않은 일이었지만 그 시기의 나의 모습을 떠올리는 것은 마치 고고학적인 출토품을 발굴해내는 것 마냥 긴긴 시간이 걸렸다.
그리고 이윽고 거기에는 지금의 작가가 아닌 지극히 소박하고, 촌스러운 머리를 한 내가 있었다. 그 때는 굳이 나를 증명하려 완성시키려는 노력도 하지도 않았고 그러고 싶은 의지도, 주위의 재촉도 없었다. 왜냐면 그 시기에는 나라는 존재 단 하나만이 존재하였기 때문이었다. 당시 친구들은 나의 가정사, 취미, 말하기 민망한 구석까지 꿰뚫고 있었고, 그러기에 교복에 붙은 이름표의 명목에 대하여 나는 항상 불만이었다. 뜬금없이 툭하면 이름표를 떼어버리고 싶은 충동이 일곤 했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작가라는 이름표를 떼버리고 나면 아무것도 남는 게 없는 것처럼 느껴졌다. 모순적이게도 나는 이름표가 없어지길 갈망했지만 다시 나의 이름표를 찾아 내 이마에 붙이고 살아가게 되었다. 그러나 이제는 이름은 더럽혀졌고 나에게 잔존해 있을 것은 무엇인가. 나는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거기에는 반짝거리는 동전 한 닢도 외간 남자위에 올라탄 여자도 남자아이가 떨어트린 이름표도 없이 공허했다. 그곳에서 멍하니 자리에 서서 고민을 하고 있는 나만이 덩그러니 있어 빈 공간을 이리저리 구경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 순간 갑자기 전화벨이 울렸다. 나는 전화번호를 확인했다. 에어리였다. 이런 벌써 왔나보군 하고 나는 그제 서야 계단으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네, 도착하셨나요? 저는 막 역에서 내려 올라가고 있습니다.”
“네? 무슨 소리신지?”
여자직원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투로 내게 물었다.
“오늘 인터뷰요.” 나는 어이가 없어 짧게 잘라 말했다. “이번에 나온 소설 인터뷰하고 싶다 그러셨잖아요.”
“소설이요? 작가님이 소설 출간 하셨었나요? 저희 쪽은 그런 얘기를 못 들었는데.......”
그렇게 그 이야기는 내가 짐작할 틈도 없이 없어졌다. 막연하게 내게 처음 나타났을 때처럼.
신간 서적과 인터넷 기사 그리고 사람들의 뇌리에서마저 깔끔하게 소멸되어 있었다.
더군다나 나에게 이 날 연락을 준 여자도 에어리 쪽 사람도 아니었다. 전혀 다른 잡지사 직원이었던 것이다. 나중에 문필업계에 종사하는 사람들에게 수소문하여 물어보았지만 결론은 에어리라는 문학 잡지사는 애초부터 없었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야기가 어디서 생겨났으며 어디로 다시 돌아갔는지는 나는 영영 알 수 없게 되었다. 그리고 그 본래의 장소에서는 명명백백하게 주인이 있는 이야기로서 행복하게 살아갈 지는. 이야기는 사라졌지만 의문과 그 꼬리를 문 의문들은 오롯이 남아 거리를 방향 없이 들개처럼 떠돌고 있었다.
“그 소설 결국 없어졌네요.”
그녀가 말했다. 우리는 내가 처음 그 이야기를 들었던 그 도서관 앞 동상 아래에 앉아있었다. 같이 산책이나 할 계획이었지만 우리 둘 다 왠지 모르게 기운이 없어 몇 걸음 못 걷지 못하고 주저 앉아버렸다.
“너도 기억하고 있었어? 그 소설이 왔다 사라진 걸?”
나는 놀라서 물었다.
“네, 당신 말 듣고 궁금해서 언젠가 그 책을 사려고 들렸었는데 서점 직원이 그런 책은 없다고 난처해하더라고요. 당신 이름을 말해도 예전에 쓴 책만 보여주고 그때 알았죠. 드디어 없어졌구나하고”
“그래, 갑자기 사라져버렸어”
“후련한가요? 아직도 얼굴이 안 좋아 보이네요.”
“후련한 건지 잘 모르겠어.”
“그럼 아쉬워하는군요.”
“그런 건가....... 아무것도 모르겠군.”
나는 바보처럼 지껄였다. 그녀는 웃으며 낙담해 있는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나는 연못 안을 들여다보았다. 바닥에 있던 동전들은 관리인이 수거해 갔는지 없어져 있었고 맑고 투명한 물만이 한 점의 파동도 없이 잔잔하게 있었다.
“그 이야기 난 결국 못 읽어봤어요.”
그녀가 말했다.
“그렇게 읽을 만한 꺼리는 아냐”
내가 대답했다.
“그렇게 말하니 괜히 더 궁금해지는 걸요.”
“나중에 자세하게 이야기 해주지.”
“그러지 말고 소설로 출판하면 안 될까요?”
“전혀 그러고 싶지 않아.”
“왜요?”
“애시 당초 그건 내가 쓴 게 아니었잖아. 그래도 소설로 읽고 싶으면 너를 위해 하나만 쓰도록 해볼게. 그게 내가 해줄 수 있는 최선이야.”
“그 정도라면 군말 없이 만족해야겠네요. 나를 위해 써준다니까”
그리고 우리는 다시 아무 말도 없이 있다가 그녀가 문득 내게 말했다.
“잔말 말고 나한테 이렇게 물어봐줄래요? 당신은 어떻게 기억하고 있냐고”
“당신은 어떻게 기억하고 있는 거야?”
“글쎄요? 그게 아니라 난 당신밖에 기억하지 못하는 게 아닐까요?”
“지금 그거 고백 비슷한 거야?”
“그럴 수도 있겠네요. 그리고 당신에 대해 알 수 있는 게 많아졌으면 좋겠어요.”
“여자한테 이런 말 들어보긴 처음이군.”
“나도 남자에게 이런 말 해보긴 처음이에요.”
그녀는 능글맞게 내 말을 맞받아쳤다.
“그런데 내 생각은 내가 솔직하게 말해준 사람들만 기억하는 게 아닌가 싶어. 당신한테 그랬으니까 그렇게 된다면 아는 사람이 두 명이 되겠지만.”
“누군데요?”
“출판사 직원. 그 나랑 똑 닮은 사람과 만났다던 사람 있었잖아.”
“아, 그 사람. 그 사람한테는 연락해봤어요?”
“진작에 해봤지. 그런데 전화를 전혀 다른 사람이 받더군. 그 이야기를 한 이후에 무슨 일인지는 몰라도 사표를 쓴 모양이야.”
“한 달 만에요?”
“그러니까 말이야. 그래서 어디로 간 건지 아는 사람이 있냐고 물어보니까 애매한 말들뿐이었어. 아예 다른 직종으로 이직했다는 말도 있고 개인 카페를 차린다고 그러던가, 아버지의 가업을 이어 강원도로 갔다던가, 뜬 구름 잡는 소문뿐이었어.”
“그 사람을 만나긴 어렵겠네요.”
“글러먹은 일이 되어 버렸지.”
나는 남의 얘기를 하는 말투로 말했다. 나는 찰나의 시간 동안 그의 얼굴을 머릿속에 그려 보았다. 그러나 완전한 형태가 완성되자 안경에 김이 서린 것처럼 희끄무레해졌고 오직 뚜렷하게 인식할 수 있는 건 단지 그의 얼굴에 드리워졌던 그늘뿐이었다. 결국 만나기 전도 만난 후도 기억할 수 없게 되었다는 사실에 나는 몹시 우울해졌다.
“왜 그래요?”
그녀는 내 얼굴을 살펴보고서 걱정하여 말했다.
“아무것도 아냐.......”
라고 나는 말했다. 그 순간 무언가 머릿속에 반짝였다. 나는 그녀에게 말했다.
“아무래도 그 사람과 마주친 적이 있는 것 같아”
“그 사람과 만났어요? 어디서요?”
“야구장에서. 일주일 전에 친구가 꼬드겨서 갔었거든. 그 사람은 외야석 쪽 게이트 앞에 서있었어. 우리는 내야석에 앉아있어 콩알만 하게 보였지만 우리가 만났을 때와 똑같이 네이비색 정장을 입고 있었지. 여전히 자켓은 벗지 않은 채로.”
“야구장이요? 그 사람이 거길 왜 갔을까요?”
“나도 잘 모르겠어. 우연히 들린 게 아니었을까? 9회 초에 홈팀이 4대 0으로 지고 있고 관객들도 거의 나간 상황이었고 그 쯤 입장하는 건 무료니까.”
“그래서 그 사람과 직접 만났어요?”
“아니 그냥 그라운드 너머로 서로를 쳐다보기만 했지. 왔다갔다하기엔 거리도 상당하기도 하고 그 때는 그가 확실히 맞는 지조차 긴가민가했으니까. 그런데 마침 홈팀 7번 타자가 내내 삼진만 당하다가 2루타를 쳤고 그 광경에 잠시 눈을 돌린 사이에 그 사람은 사라져있었어. 바람같이, 처음부터 그곳에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처럼.”
“결국은 물어보진 못 한 거네요.......”
그녀는 허탈한 목소리로 내게 핀잔을 주었다.
“그래도 그 사람이 이 세계에 멀쩡하게 발을 붙이고 있다는 사실에 난 만족해. 그 뒤로 영영 보지 못할 것 같다는 불길한 예감이 들지만.”
우리는 거기까지 이야기 하고서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는 그녀를 일으키면서 자연스럽게 손을 잡았고 일어서서도 서로 놓지 않은 채 길을 걸었다. 햇살은 따스하고 바람은 선선하고 투정부릴 수 없을 만큼 완벽한 날씨였다. 그 상태로 계속해서 걷고 싶었지만 그녀는 갑자기 배가 고프다며 내게 칭얼거렸다. 시계는 벌써 1시를 넘기고 있었다. 근처에 괜찮은 닭튀김집이 있는데 거기로 가자고. 나는 그녀를 달랬다.
“근데 당신을 똑 닮은 사람은 어떻게 된 걸까요?”
그녀가 내게 다른 질문을 했다.
“그 이야기랑 같이 나타났으니 그냥 같이 없어진 거 아닐까. 둘은 쌍둥이 같은 거니까.”
“내 생각은 달라요. 그 사람도 당신과 마주친 게 분명해요.”
“나와? 언제?”
“당신은 당연히 모르겠죠. 그 사람이 당신을 본 순간 녹아 사라졌을 테니까.”
“나를 아직도 도플갱어로 생각하고 있군.”
그녀는 내 투덜거림에 배시시 웃었다. 나는 그녀를 보며 아무도 몰래 손에 흐르는 식은땀을 바지에 훔쳤다.
※붙여넣기를 했더니 가독성이 엉망입니다. 성관계묘사부분이 있어 문제가 될 시에 자삭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