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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사람 주의]사랑이 뭐예요? 7편
게시물ID : love_40156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소리조각
추천 : 14
조회수 : 1203회
댓글수 : 3개
등록시간 : 2017/12/30 21:35:32

오랫만에 돌아온 학교앞 거리는 그대로였다. 

특별히 연락할 친구도 뜸했던 나는 특별히 누구에게 연락을 하지도 않고 그냥 학교앞으로 갔다. 

당구장 사장님께 안부이사를 전했고, 호프집 사장님은 가게가 망해서 인사를 드리지 못했다.

당구를 한게임치고, 오락실에서 펌프와 킹오파를 몇판 하고나서, 천천히 학교의 언덕을 올랐다.

시계를 보니 오후 1시반이었다. 아마 대부분은 수업에 들어가 있을 시기였다.


학교에는 벗꽃이 지고 있었고, 대자보가 붙었고, 신입생들이 걸어다니고 있었다. 

그리고 오랫만의 사회의 향기를 맡으며 찾아간 과방에는 H가 있었다.



"어?"

"어머! 조각오빠! 왠일이예요? 제대했어요?"

"너 진짜 나한테 관심 안기울일래? 내가 벌써 제대할 타임이냐?"

"그렇지 어쩐지 간지 얼마 안된 것 같은데."



오랫만에 만난 H는 여전히 숏커트였고, 여전히 밝았지만, 어느새 신입생의 풋풋함은 사라져있었다. 

능글능글해진 H와 나는 오랫만의 재회에 반가워했다.



"오빠 살빠졌네요? 팔에 힘줄도 생기고 와... 역시 남자는 군대에 가야 멋있어지는구나."

"너 진짜 그런소리 잘못하면 남자애들한테 다굴맞는다."



시시한 농담을 주고 받던 사이에 어느새 오후 수업이 끝나고 찾아온 후배들과 동기들은 

너 또 나왔냐. 저번에 나온지 얼마 되지도 않은 것 같다. 왠만하면 앞으로 나오지 말고 제대해라. 등등의 악몽같은 진담을 꺼내었으며, 

나는 길길이 날뛰었다.

그러나 내 동기들과 후배들은 바쁜 스케줄에도 불구하고, 오랫만에 휴가를 나온 내 지갑을 터는일에 모두 찬성했으며, 

나는 극구 사양하려 했으나, 결국 그놈들에게 끌려가 지갑과 멘탈을 모두 털려야 했다.



폭탄주를 마시고, 군대 얘기를 하고, 입을 틀어막히고, 다시 술을 마시고, 게임을 하고, 바쁜 시간이 지나고, 

휴가 첫날이라 집에 가려 했던 나는 중간에 인사를 하고 술자리를 빠져나왔다. 물론 아무도 신경쓰느 사람은 없었다.

나는 터덜터덜 지하철역 쪽으로 향했다. 그때 뒤에서 H의 목소리가 들렸다.



"오빠. 같이가요."

"어? 왜 일찍 나왔어?"

 

나는 의아한 표정으로 H를 돌아보았다.



"요즘 계속 늦게 들어가서 어제 한소리 들었어요. 오늘은 일찍 가야되요."

"11시가 일찍들어가는 거면... 도대체 어떻게 살았던 거냐...."

"11시면 초저녁이죠. 모범생인 척 하기는. 쳇."



나와 H는 인적이 드문 골목길을 따라서 걷기 시작했다.



"오빠, 왜 이길로 왔어요?"

"왜라니? 그냥 왔는데? 사람많은 것도 싫고..."

"군바리들은 사람많은데 좋아하잖아요? 아닌가?"

"맞는데... 오늘은 그냥..."



뭔가 더 딱히 할말이 없었다. 왜냐하면 굳이 지하철역까지 돌아가는 골목길을선택한 특별한 이유가 있는게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이어지는 H의 말은 뜻밖이었다.


"음. 우리 추억 때문에요?"


나는 아주 쓰게 웃을수밖에 없었다.


"추억? 난 그런거 안뜯어먹고 산다. 사람이 앞을 보고 살아야지."

"그래요? 그럼 이제 저 안좋아해요?"



H의 말에 나는 고개를 살짝 돌렸다. H가 씨익하고 웃으면서 날 바라보았다.



"요거 아주 그냥 여우가 다됐네. 남자 홀리는 기술이 장난 아니네?"

"오빠도 제법 상남자가 됐네요? 안넘어오는거 보니깐?"

우리는 피식하고 웃으면서 지하철역으로 걸어갔다. 



H에겐 6개월째 사귀고 있는 남자친구가 있었고, 다른학교의 대학원생이라고 했다. 

스무살이 넘어서 처음으로 하는 연애라 H는 남자친구를 상당히 좋아하는 것 같았다. 


어쨌든 거기에 내가 낄 자리는 없었다. 


내가 그녀에게 아무런 감정이 남아있지 않다고 한다면 거짓말이었겠지만, 

내 감정에 충실하기 위해서 그녀에게 무리수를 강요할 이유는 없었다.



나는 그저, 어쩌다 이렇게 그녀와 함께 걸었던 기억을 소중히 여기기만 하면 되는 것이었다.



그리고 나도 언젠가 서툴지 않은 진짜 연애를 하게 된다면, 

예전에 H라는 후배를 좋아했던 적이 있었다고 담담하게 얘기할 날도 올거라고 믿었다.





우리는 역에서 지하철을 기다리고 있었고, H의 집으로 가는 열차가 먼저 도착했다. 

열차가 들어오길 기다리면서 H가 끈금없이 나에게 물었다.

"오빠. 사랑이란게 도대체 뭘까요?"

갑작스런 질문에 딱히 대답할 말이 없던 나는 어디선가 들었던 말로 대답해줬다.



"글쎄? 나도 한번 해보고 싶은거?"



H는 깔깔거리면서 웃더니 지하철에 타서 나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그리고 열차는 어느새 사라졌다.

집으로 가는 열차를 기다리면서 나는 H의 질문에 대해서 곰곰히 생각했다. 

내가 H를 좋아했던 감정이 과연 사랑일까?




나는 확신할 수 없었다.






제대를 하고나자, 우리엄마는 내가 대한민국의 미래를 이끌어나갈 국가의 인재가 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고, 

나는 그 기대에 보답하기 위해서, 복학하기 전까지 열심히 피시방에서 메피스토와 디아블로와 바알 삼형제를 때려잡았다.

제대하고 몇주동안 열심히 어둠의 군주들을 때려잡는 날 보고선 엄마는 그리도 기특한지 하루에 두번씩 등싸다구를 시전하셨고, 

나는 아직도 우리엄마가 이렇게 건강하시구나, 감사의 눈물을 흘리면서 집에서 도망쳤다.



복학이 다가오고 있었고 그 즈음해서 신입생 오리엔테이션도 예정되어 있었다. 

후배들은 오리엔테이션에 참석하고자 했던 나에게 굳이 선배님같은 군바리 물 덜빠진 예비군이 낄자리는 없다고 엄포를 놨고, 

나는 후배들의 간곡한 만류에 감동받아 그날 반드시 참석하겠노라고 다짐했다.



게다가 단과대 OT장소가 우리 시골집의 바로 근처에 있던 수련원이었다.

집에서 너무 가까운 곳에서 진행된 OT라 나는 슬리퍼를 끌고 OT 장소를 방문하였고, 

후배들은 내손에 들린 수박과 소주가 담긴 비닐봉투가 굉장히 무거워보였던지 그것만을 강탈해서 뿔뿔이 흩어졌다.



물론 나는 예비군의 예리한 감각으로 흩어진 후배놈들을 모조리 찾아 나와 같이 숨박꼭질을 해준 녀석들에게 감사의 로우킥을 날려주었다.



OT는 여전히 뻔한 레파토리로 진행되고 있었다. 재수한 후배와 빠른년생 선배가 친구를 먹었다가 멱살잡이를 하고 있고, 

과대표는 여자후배들의 이름을 모두 외우고, 남자후배들은 모두 별명을 지어주고, 

졸업한 학생회장 누나를 대신해 새로 학생회장이 된 동기가 숙소 앞 공터에서 말뚝박기를 하고 있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이번에는 나에게 흑기사를 요청한 후배는 없었다. 



아니 그냥 신입생들에겐 나라는 존재 자체에 대한관심이 없었다...



한밤이 되어 나와 비슷한 시기에 군대에 갔다가 제대한 친구 B가 차를 끌고 OT장소에 도착했다. 



"아니 조각이는 여기 왠일이냐?"

"여기? 우리집 옆인데?"

"아 그래? 너희집이 시골이란건 알았지만 설마 아마존인줄은 몰랐지."

"여기도 꽤 살기 좋아. 원주민들이 독침으로 사냥도 하고 말이지. 맞아볼래?"



그리고 B는 내 독침을 피해 달아났지만, 결국 얼마못가 얼굴에 침을 맞고 쓰러졌다.




새벽1시가 되자, 대부분의 난장판은 소강상태가 되었다. 

나와 B는 숙소의 여기저기에서 울려퍼지는 할리데이비슨 엔진소리를 피해서 밖으로 나왔다. 

숙소 근처의 한 공터에서 대여섯명의 후배들과 동기들이 모여있었다. 학생회장이 된 동기는 B를 보고 말했다.



"야, 너 그거 가져왔어?"

"뭐? 아 기타? 차에있어. 꺼내올까?"



B는 1학년때부터 학과내 밴드를 결성할 정도로 음악을 좋아하고 기타를 잘쳤지만, 

그 밴드는 연습 1시간에 술자리 5시간의 1대5 원칙을 반드시 지키는 원칙주의 동아리라 어느순간 그냥 술 마시는 동아리로 변하고 말았었다.

어쨌든 학생화장 동기는 자신의 로망인 OT에서 기타치면서 캠프파이어 하기를 꽤 기대하고 있어서 

그나마 자신이 아는 인맥중 가장 음악성이 뛰어난 B에게 기타수급을 요청한 것이었다.



낭만 같은건 개나 줘버린 우리학과였지만, 한밤중의 기타소리는 제법 운치가 있었다. 

김광석의 노래 몇소절과, 군대가는 후배를 위한 이등병의 편지를 부르고 나자, B가 내 어깨를 툭툭 쳤다.



"노래 한곡 할래? 오늘같은 분위기엔 너도 하고 싶은 노래가 있을 것 같은데?"



하고 싶은 노래가 있었다. 나는 조용히 B의 반주에 맞춰서 그 노래를 불렀다.









남들도 모르게 서성이다 울었지.

지나온 일들이 가슴에 사무쳐

텅빈 하늘밑 불빛들 켜져가면

옛사랑 그 이름 아껴 불러보네









사실 추억따위 안뜯어먹고 산다는 말은 거짓말이었다. 

그때 내가 하고 싶었던 말은 나는 아직도 널 좋아하고, 이 감정이 쉽게 변하지 않을 것 같다는 말이었다.

그때 내가 하고 싶었던 것은 다시는 놓치지 않을 것처럼 너를 품에 꼭 안는 일이었다.




그러나 옛사랑은 그저 아껴서 그 이름을 한번 불러보는 옛사랑일 뿐이었다.







노래의 어느시점부터 우리는 떼창을 하고 있었고, 광화문 거리가 흰눈에 덮여가는 시점에서는 

이미 이문세의 감성따위는 안드로메다 저멀리 날아간 노래가 되어버렸다. 그래도 그것도 괜찮았다. 그날밤은 꽤 괜찮은 밤이었다.




만나고 헤어지는 과정마다 모두 좋을수는 없지만 그래도 그것도 괜찮았다.




그게 뭔지는 알 수 없어도, 우리는 늘 사랑을 하고 있었으니까.






FIN
출처 1편 - http://todayhumor.com/?love_39450

2편 - http://todayhumor.com/?love_39509

3편 - http://todayhumor.com/?love_39580

4편 - http://todayhumor.com/?love_39743

5편 - http://todayhumor.com/?love_39823

6편 - http://todayhumor.com/?love_39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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