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상문을 적으려다 타이밍을 잃었습니다. 단편집이 이래서 항상 문제인데, 세 번째 단편쯤 읽다보면 앞에 무슨 이야기를 했었는지 깜박 잊어버린단 말이죠. 그래서, 책 이름이 쇼코의 눈물이었나, 쇼코의 미소였나, 그래서 쇼코가 울긴 울었었나? 이렇게 헷갈려 버립니다. 여기서는 제일 첫 단편 쇼코의 미소에 대해서 적겠습니다.
이 이야기에는 흔한 인간 관계가 몇 가지 레이어로 엇갈려 있습니다. 나와 쇼코. 할아버지와 나. 할아버지와 쇼코. 쇼코의 할아버지와 쇼코. 이 관계가 소녀에서 어른이 되어가며 어떻게 변해가는가. 그런 이야기죠. 각각의 관계는 각각의 언어를 쓰는 것으로 분리되어 있습니다. 나와 쇼코는 영어로 대화하고, 할아버지와 나는 한국말을 쓰고, 할아버지와 쇼코는 일본말을 씁니다. 불과 네 명 밖에 되지 않지만 사용되는 언어는 세 가지입니다.
언어만 다른 것이 아닙니다. 담기는 말도 달라집니다. 나에게는 상쾌한 느낌의 쇼코가 할아버지에게는 정신적으로 무너진 쇼코인 것이죠. 나는 이런 간극을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독자는 알죠. 인간 관계라는게 나이드는 것만으로 공짜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걸. 희생을 치루면서 견뎌내어야 조금씩 이면을 바라볼 수 있는 겁니다.
읽다보면 피천득의 유명한 수필 인연이 떠오르지요. 아사코와 나는 세 번 만났다. 세 번째는 아니 만났어야 좋았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해보면 인연을 재조합해놓은 이야기처럼도 느껴집니다. 인연이 아주 소박한 감정. 지금 풍토라면 여혐스러운 시각이라 불렸을 텐데요. 수 많은 가능성으로 반짝였던 이가 세상의 흐름에 깍이고 깍여, 조금씩 져버린 다음 지친 그 사람을 만나는 순간. 그런 만남을 어느 나이가 되면 일상처럼 겪게 됩니다.
그런 만남 중에서 가장 헛헛한 것은 나이든 나와의 만남이죠. 우리는 세 번이 아니라, 네 번째의 아사코도, 만 네 번째의 아사코도 만나며 나이가 들어 갑니다. 당당했던 주인공은 자신과 직면하고 있습니다. 세상은 꿈 많을 때나, 벽에 부딪혔을 때나 그 모양 그 꼴 똑같겠죠. 한예종 출신의 어느 시나리오 작가가 굶기를 밥 먹듯 하나 세상을 뜬 일이 문득 생각납니다. 주인공의 처지도 다르지 않습니다. 세상 어디에나 있을 흔한 모습인데요. 뭐.
그래서 이 소설이 어떻게 끝났죠? 사실 중요하지 않죠. 쇼코가 요정처럼 서울에 뿅 나타나서 어린 시절을 리와인드해주고 사라진 것도 같습니다. 그래서 예전 일은 이래저래 요래조래 이런 것이야 깔끔하게 정리해주지만, 아무 것도 정리되지 않았죠. 왜냐하면 쇼코에게 관심을 가질만큼 세상이 호락호락한 것이 아니거든요.
쇼코는 빛날 휘를 쓰는 휘자. 아사코는 아침 조를 쓰는 조자입니다. 둘 다 어두운 방안을 온기로 채우면서 서서히 떠오르는 아침 해 같은 느낌이죠. 이름지은 부모들의 바램은 그랬을 겁니다. 소설 속의 나에겐 볕이 들어왔는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저자는 트랜디한 사회 문제에 포커싱해서 어느 서평에서 누군가 빈정거렸듯 머리 긴 뒷모습의 페미니즘 작가로 세상에 우뚝 섰습니다. 그러니 또 다른 쇼코를 만나게 되겠죠.
라고 뒤늦은 감상문을 적었습니다. 그런데 적고 보니 책 내용이 전혀 이런 게 아니었다는 생각도 잠깐 들었습니다. 아무려면 어떻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