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시판 즐겨찾기
편집
드래그 앤 드롭으로
즐겨찾기 아이콘 위치 수정이 가능합니다.
친일파 잡아 족치기, 그 일곱번째 이야기
게시물ID : history_14125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이미봤다
추천 : 24
조회수 : 1227회
댓글수 : 11개
등록시간 : 2014/02/17 14:25:44
음... 일전에 이런 부탁을 받았습니다..

등록교인 13만명으로 세계 최대 감리교로 인정받고 있는 금란교회가 친일파 김활란에 의해 만들어졌단 소릴 들으셨다고..

김활란에 대해 좀 알려달라는 내용이었습니다.


해서, 이번편은 김활란편으로 쓸까 고민하던 중....

우리 카츠란이(활란이의 쪽바리 이름)를 지금 소개해버리면, 윤숙이나 정자같은 SSANG년들이 서러워 할거 같아... 

우선 잔챙이들을 먼저 훑고 지나가는게 어떨까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시리즈물 연재라는게 다소나마 부담스럽지만...

아직 소개할 개SSANG놈과 개SSANG년들이 무수히 많다는 이유때문에 크게 부담스럽지 않은 것도 사실입니다.


하지만 이번 편은 조금 재미가 없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돈과 혀로 친일을 한 작자들의 얘기가 아니라

펜과 몸(?)으로 친일을 한 SSANG년의 이야기이기때문입니다.




음... 어떤 분은 그러시더라구요...

단지 몇 편의 글로만 친일을 했다고 하는 것은 좀 심한것 아니냐....

글 한 편이 무슨 큰 영향을 주었겠냐...라구요......



그분께 이런 말씀을 드리고 싶네요...

읽을거리가 흔치 않았던 시절, 그 읽을거리마저 쪽바리에게 검수를 당하던 시절...

글 한편을 대중에게 내보일 수 있는 지식인은 많지 않았으며

글 한편으로 먹고 살 수 있는 이도 많지 않았다고....

글 한편으로 이 땅의 사내와 여인들을 전장으로 내 몬 작가라면......

그 사람의 펜은.. 과연.... 칼이나 총보다 무서운게 아닌거냐고....

지금도 그렇지만...

글은 그 사람의 인격 그자체라고..... 

.

.

.



친일 SSANG년 잡아족치기 그 일곱번째 이야기를 시작하겠습니다.

============================================================================

2012년 인천시가 한국전쟁 62주년을 맞아 기념식을 열게 됩니다.

그 기념식에서 한 공무원은 늘 그래왔듯이 "모윤숙"의 시 <국군은 죽어서 말한다>를 추도시로 집어 넣어 낭송하게 됩니다.

그 시를 듣던 인천시장 송영길은 노발대발하며 다시는 그 SSANG년의 시를 공식회장에서 낭독하지 말지어다! 라고 지시합니다.

그 후 송영길은 인천시 누리집 "시정일기"에 다음과 같은 글을 올립니다.

- 이런 창녀같은 혀로 대화합을 부르짖으며 
내선일체, 천황폐화 만세를 부르며
우리 민족의 젊은이를 제국주의 전쟁의 희생양으로 끌려가는 것을 찬양했던 년이 
해방이후에 참회도 하지 않고 심판도 받지 않고 살아있었다는 것도 조냉 황당한 일이다. - 


자... 윤숙이는 왜 창녀같은 년이라는 욕을 듣게 되었을까.. 살펴보겠습니다.


z.jpg





1910년 함경남도 원산에서 개SSANG년이 태어남 (1908년생인 윤봉길의사와 2살 차이)
1910년은 안중근의사가 돌아가신 해

태어나자마자 조국을 일본이라고 배웠으니

11살때 이화학당 선배 유관순 언니가 죽은 거랑
21살 한창 이쁠 때 윤봉길오빠, 이봉창오빠, 이회영선생  죽은거에 대해서 왜 저러고들 사나 싶었을거임

1928년 19살 이화여대(당시 이화여자전문대) 영문과에 입학
1931년 22살 만주에 있는 명신여학교 선생으로 취직
1931년 23살 만주가 추웠던지 다시 서울로 내려옴

1937년 29살 쪽바리가 중국을 상대로 전쟁을 하기 시작하자 이뇬이 미쳤는지 각종 친일단체란 단체는 다 가입함

가입해서 한 짓거리가 주로 시를 쓴거였는데...

그 시들의 내용은 아래와 같음



- 동방의 여인들(1942년 34살때 작품) -

비단치마 모르고
연지분도 다 버린채
대동아의 새 언덕을 쌓겠습니다

들어보세요
저 날카로운 바람 속에서
미래를 창조하는 우렁찬 고함과 (지랄을 하세요)
쓰러지면서도 다시 일어나는 
산발자욱 소리를

우리는 새 날의 딸
대동아의 여인들입니다.

    : 조선의 딸이 아니라 큰 아시아의 딸. 즉 대동아공영을 외치고 다녔던 쪽바리들의 주장과 일치


- 호산나 소남도(1942년 34살때 작품) - 

2월 15일 밤 
대동아의 큰불 
대화합의 칼을 번득이자 
사슬은 끊기고 
네 몸은 
한 번에 풀려 나왔다 

처녀야! 소남도(싱가폴)의 처녀야! 
거리엔 전승의 축배가 넘치는 이 밤 
환호소리 음악소리 천지를 흔든다 

싱가폴! 
대양의 심장! 
문화의 중심지! 
여기 너는 아시아의 인종을 담은 채 
길이길이 행복되라 
길이길이 잘살아라

(SSANG년아 쫌... 제발 쫌...)

         : 일본의 싱가폴 함락을 축하하는 시





- 지원병에게(1943년 35살때 작품) - 

대화혼 억센 앞날 영각으로 빛내일
그대들 이나라의 앞잡이 길손
피와 살 아낌없이 내여바칠
반도의남아 희망의 화관입니다.
가난한 이 몸이 무엇을 바치리까?
황홀한 창검이나 금은의 장식도
그대 앞에 디림 없이 그저 지냅니다

오로지 끓는 피 한 목음을 축여 보태옵니다.






이렇게 자신의 펜으로 열심히 원숭이들의 똥꼬를 핥던 윤숙이에게 갑자기 청천벽력같은 뉴스가 들려옴.


쪽바리 패 to the 망.... 

윤숙이는 조땜.....

천년만년 갈줄 알았던 원숭이들이 뉴클리어 밤 두 방에 어이 없게 항복을 해버린거임




해방 후 살곳을 모색하던 우리 숙이는 

친일파 잡아 족치기에 단 한 번도 빠지지 않았던 우리의 쁘라더 승만이 오빠를 찾아감



승만이는 "에~ 이렇게 걸출한 문인이 직접 날 찾아오다니 기쁘기 그지 없습니다..."라며 윤숙이를 환영함

당시 승만이의 나이는 71세 윤숙이는 36세...



1948년에 승만이가 대통령에 눈이 멀어 남한 단독정부 수립을 추진할때

당시 남한에는 
"태고적부터 통일된 하나의 국가였던 조선을 둘로 가르는 단독선거는 절대로 있을 수 없다" 라고 공언해 오던 
UN감시단 메논 단장(인도인)이 파견되어 있었음

하지만 1948년 3월 12일 유엔한국위원단 표결에서 메논이 갑자기 찬성표를 던져 
결국 4 대 2의 다수결로 단독선거안이 통과되어버림

이게 우째된 일인지는 후에 윤숙이의 인터뷰로 내용이 밝혀짐

“만일 저와 메논 단장과의 관계가 없었다면 단독선거는 아예 없었을 것이며, 
따라서 승만이 오빠가 대한민국 대통령 자리에 계셨다는 것도 생각할 수 없었을 거에요..호호”(<신동아> 1983년 2월호)

메논은 또 뭐라고 하고 있나 보자

“외교관으로 있던 오랜 기간 동안 나의 이성이 감성에 의해 흔들렸던 적이 딱 한번 있다
내가 유엔조선임시위원단 단장으로 있던 때가 그 때이다.
나의 심정을 흔들었던 여성은 한국의 유명한 여류시인 베이비 윤숙이였다"<메논 자서전> 1974년




당시 떠도는 말 중에는

건국의 아버지는 메논
건국의 어머니는 모윤숙.... 이라는 말이 있었음



이 둘이 합방할 당시
남자는 51세
여자는 40세.......................................였음.
(참 대단함)


이 일을 계기로 당시 연희대학생이 낀 암살단이 윤숙이를 겨누고 파티장에 뛰어듬

하지만 이 암살은 엉뚱하게 언더우드 부인을 죽이고 끝나버리고..

윤숙이는 식겁함.



  - 서현아격하게애낀다-님께서 올려주신 성기조시인의 회고담을 보고 추가합니다.
     서현아....님 감사합니다. ^^  -

성기조시인의 회고담을 옮겨 보겠습니다.

3․1 문화상을 탈 때 
조선일보(으잉? 무슨 일보? ㅇ.ㅇ)의 독자란에 친일파 모윤숙은 3․1 문화상을 타서는 안된다는 투고가 실렸다. 
그 내용은 일제 말엽, 일본의 승리를 위한 강연을 했고 
군국주의에 앞장섰기 때문에 친일 문인이란 것이었다. 

이 기사를 보고는 신문을 북 찢어 핸드 백에 넣고는 얼굴이 창백해졌다. 

그 기사는 1941년 12월 27일, 부민관(태평로 소재 옛 국회의사당) 대강당에서 열린 결전부인대회에서 
여성도 전사다. 란 강연 내용을 싣고 있었다. 

지금은 기억에도 없는 그의 작품 「동방의 여인들」, 「어린 날개」 등 일제 식민정책을 찬양한 작품들이 있었지만

본인은 물론 주변에서도 까맣게 잊고 있었던 것을 들추어 내고 있었다.(조까. 우린 잊지 않았어)

모윤숙은 일제 때 쓴 이러한 작품들을 부끄럽게 생각하고 일체 내비치지도 않았는데, 
3․1 문화상 수상과 더불어 터져 나왔기 때문에 엄청난 수모를 느낀 듯했다.(그래도 부끄러운지는 아나보네요)

그가 말이 없을 때는 분을 참지 못하는 때다. 
분한 일을 당하면 모윤숙은 입을 다문다. 
일체 함구하고 있는 것을 보면 분함을 참지 못하는 것 같았다. 
얼마나 마음이 아팠으랴, 며칠을 끙끙 앓고 난 뒤, 

“그 때 일본에 충성하지 않고 살아남은 사람이 몇이나 돼. 난 대한민국 건국을 위해 온갖 험한 일을 다했단 말야, 
내 나라 건국을 위해 온 몸을 희생한 사람이 3․1 문화상 타는 걸 가지고 헐뜯으면 어떡해” 였다.(지랄을 하세요 ㅋㅋㅋ)





모윤숙은 이후 64세 때 국회의원을 지냈고
3.1절 기념 문화상을 수상함

국민훈장 모란장 등을 받고 천수를 누린 뒤 드디어 1990년 뒈짐

슬하에 딸 안경선씨가 있음







z2.jpg


이화여대에서 개최된 

모윤숙 탄생 100주년 기념....... 영운 모윤숙.. 행사 中







친일파 잡아 족치기, 그 첫번째 이야기 - 노덕술편 http://todayhumor.com/?humorbest_832985
친일파 잡아 족치기, 그 두번째 이야기 - 김창용편 http://todayhumor.com/?humorbest_833374
친일파 잡아 족치기, 그 세번째 이야기 - 민영휘편 http://todayhumor.com/?humorbest_833924
친일파 잡아 족치기, 그 네번째 이야기 - 이해승편 http://todayhumor.com/?humorbest_834466
친일파 잡아 족치기, 그 다섯번째 이야기 - 윤치영편 http://todayhumor.com/?humorbest_835177
친일파 잡아 족치기, 그 여섯번째 이야기 - 수지분편 http://todayhumor.com/?humorbest_835794
꼬릿말 보기
전체 추천리스트 보기
새로운 댓글이 없습니다.
새로운 댓글 확인하기
글쓰기
◀뒤로가기
PC버전
맨위로▲
공지 운영 자료창고 청소년보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