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조
흔히 조조를 전대의 폐습을 혁파하고 새로운 체제를 구축한 진취적인 혁명가로 평가하기도 하는데요. 조조의 행적들 가운데 이러한 개혁적인 면을 부각시켜주는 부분이 바로 인재선발기준입니다.
조조의 인재관은 '불인불효 유재시거' 라 하여 능력만 있으면 그 사람이 인격이 개판이고 불효를 저지르는 놈이라도 능력만 있으면 만사 오케이로 관리로 등용하여 쓴다는 내용의 포고령으로 대표됩니다. 이 때문에 인재의 평판만을 토대로 판단하고 등용하던 탓에 폐단이 난무하던 당시의 인사제도를 혁파하여 서두에 밝혔듯 구제도의 폐단을 청산했다는 혁명가라는 칭송을 받고 있는 것이고요.
하지만 이 조조도 제아무리 뛰어난 능력을 가진 인물이라해도 밑도 끝도없이 성격이 개차반인 인물들을 무작정 기용하지는 않았습니다. 이건 상식적으로 생각해봐도 좀 문제가 있지요. 또한 조조가 아무리 진취적인 인물이고 새로운 개혁들을 시도했다 한들 기존의 인사제도인 향거리선제(인재를 추천이나 주위의 평판을 통해 뽑는 제도입니다. 물론 해당인물의 성품도 봤고요)는 전한(前漢)시절부터 쭉 내려온 뿌리깊은 전통이었기에 이를 아예 배제하기엔 무리였고 또한 당시 사회는 여전히 유학적 소양을 어느정도 기본으로 요구하는 시대였던지라 '불인불효한 인물이라도 좋다' 라는 말은 뭐 유학자들을 단체로 게거품 물게 할 생각이 아닌 이상 시행하기엔 현실적으로 여러 문제가 뒤따랐습니다.
그래서 순전히 능력위주로 인사를 기용하기보다는 여전히 기존의 인사제도인 향거리선제를 통해 인재를 선발하며 평가관들을 통해 뽑게 했었습니다. 참고로 이 평가관들을 <삼국지> 인물들 중 뽑아보자라면 순욱이나 최염, 모개 등이 대표적이라 하겠습니다. 삼국지11 게임에서 괜히 이들 셋의 특기가 모두 안력(眼力)인게 아닙니다. (농담입니다)
즉, 조조가 처음부터 능력위주로만 인사를 뽑지는 않았다라는 겁니다. 주로 인물의 덕망을 보면서 거기다 +α로 능력을 보았다고 보는게 합당할 듯 합니다. 그럼 오로지 능력만 본다는 이 포고령은 대체 언제 내렸느냐 하니..
조조는 한(漢)의 승상으로서 집권하는 동안 인재를 구한다는 내용의 포고령을 두차례 내립니다. 첫번째가 서기 210년이었고 두번째가 217년이었죠. 여기서 주의해야 할 점은 이 두차례의 구인 포고령이 앞서 위에서 말한 향거리선제 위주의 인재선발기준과는 달랐다는 점입니다. 무엇이 다른가 하니, 여기서 바로 그 '불인불효 유재시거' 의 인사선발 기준을 도입했다라는 거죠.
이는 당시 역사적 배경과 연관지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조조가 첫번째 포고령을 내린 해인 서기 210년은 거의 3년전인 서기 208년에 벌어진 적벽대전 직후였지요. 아시다시피 조조는 전쟁에서 패합니다. 패배 이후 행여나 세력의 약화를 우려한 조조는 세력의 기반을 다지고 공고히 하고자 이런 포고령을 내렸던 겁니다. 쉽게 말하자면 패배의 피해도 복구하고 기분도 전환할 겸한 새로운 피 수혈이랄까요. 만약 조조가 예전부터 이런 선발기준을 도입하려 했다라면 한나라의 대권을 틀어쥔 시점부터 무수히 많은 기회가 있었는데 왜 이제와서 전쟁직후에 이런 포고령을 내렸는가를 생각해보면 답은 나옵니다.
서기 217년의 포고령도 이와 동일한 맥락입니다. 이때 역시 그 당시 익주를 먹어치워 세력을 불린 유비와는 한중(漢中)을 두고 격돌하기 직전의 상황이었고 한편으로는 손권과도 전쟁을 벌이며 대치하던 때였습니다. 양적을 동시에 상대하는 만큼 이에 비례하여 그만큼의 유능한 인재가 요구되었고 조조 또한 필요를 느꼈던 거죠.
한편으로는 조조의 이와같은 인사선발제도를 당대에 유교를 사상적 기반으로 하는 명문호족들에 대한 견제책으로 보기도 합니다. 조조는 환관의 손자로서 유서깊은 명문호족 집안은 커녕 소위 말하는 한문(寒門)집안 출신입니다. 한문집안이었지만 조조의 할아버지 조등의 대부터 폭풍출세를 거듭하여 그 손자인 조조는 심지어 일국의 재상이 되었으니 이 명문가 나으리들에 비해 명예와 부에서는 꿀릴 것은 없었겠지만 아무래도 뭔가 2% 부족했을 조조 본인에게는 은근한 열등감이 없잖아 있었겠죠.
야 가진거라곤 쥐뿔도 없고 믿는 것이라고는 오직 자신의 머리뿐인 것들 내 밑으로 모여!
그래서 효(孝)나 인(仁)과 같은 가치를 숭상하던 유교를 사상적 기반으로 삼던 명문호족 가문을 견제하고 대립할 목적으로 상대적으로 '불인불효' 라는 조건을 내세워가며 인재를 등용하여 자신만의 파벌을 꾸리려했다는 해석이 존재합니다.
그런데 재밌는 건 정작 이러한 선발제도로 어느 누구도 등용되었다는 얘기는 안보입니다. 아무래도 여전히 유학이 사회저변에 깔려있던 한나라 시대에 이런 파격적이다 못해 당대의 기준으로 쇼킹한 인사선발제는 좀처럼 받아들여지기 힘들었을겁니다. 더구나 이후로 한나라 이후 들어선 위나라 때에 향거리선제의 완결판이자 최종 업그레이드 버전판이라 할 수있는 구품중정제라는 신제도가 등장했고 이 제도는 위진남북조 시대 이후로도 널리 오랫동안 쓰여 처음으로 능력을 보기 시작한 인사선발제라 할 수있는 과거제를 실시한 수나라 이전까지 쓰여 기본 인사선발제도로서 군림합니다. 아마 조조의 인사선발제도는 쥐도새도 모르게 묻혀버렸지 싶네요.